|
제 7 과 휴식과 회복
5월 15일
일몰: 오후 7시 34분
도입)
두 나무꾼이 함께 장작을 패러 산으로 갔다. 두 나무꾼 모두 성실하게 일했다. 첫 번째 나무꾼은 가끔 쉬는 것조차 하지 않고 열심히 했으며 어느덧 저녁때가 되자 장작이 크게 한 짐이나 되었다. 옆에서 같이 하던 두 번째 나무꾼은 50분을 일하면 반드시 10분을 쉬었다. 하지만 쉬지 않고 일을 한 첫 번째 나무꾼이 보기엔 자신의 장작이 훨씬 적었다. 자신이 더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기에 이해할 수 없었던 첫 번째 나무꾼은 물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난 쉬지도 않고 일했는데…. 그래, 비결이 뭔가?” 두 번째 나무꾼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건 간단하네, 나는 10분 쉬는 동안에 도끼날을 갈았거든.” 때때로 너무 일에 집중한 나머지 우린 휴식의 중요성을 잊고 만다. 휴식은 그냥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더 잘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일 할 때가 있듯이 쉴 때가 있어야 한다. 쉬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쉬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잠깐 한적한 곳에 가서 쉬어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인들에게 휴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휴가를 영어로 laisure(레저)라고 한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스콜레(schole)에서 유래한 말이다. 스콜레에서 파생된 말이 school(학교, 수업)이라는 단어이다. 진정한 휴가는 배움의 시간, 수업의 시간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라이켄이라는 교수는 휴가를 3R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Reflection(리플렉션), 즉 뒤를 돌아 봄, 반성의 의미의다. 휴가는 뒤를 돌아보아 감사할 것을 찾는 시간이다. 과거를 돌아보아 회개할 것을 찾는 시간이다. 둘째, Refreshment(리프레쉬먼트) 새롭게 함, 원기 회복, 기분을 상쾌하게 하기 위함이다. 휴가는 새로운 힘을 공급받는 시간이다. 조용한 장소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 새로운 힘을 회복하는 기회이다. 셋째, Recreation(레크리에이션), 재창조의 시간이다. 휴가를 보내고 나면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또한 휴가는 투자이다. 휴가는 영어로 vacation이라고 부른다. vacation의 동사형은 vacate로 이 말의 의미는 ‘비우다, 떠나가다, 자유롭게 하다.’란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휴가를 즐기는 일을 Recreation이라고 말한다. Recreation은 Re와 creation의 합성어로 ‘재창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휴가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휴가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마음을 정돈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는 것인 것이다.
일요일
5월 9일
시간이 없다
도입)
우리는 때로 어떤 목표지점을 향하여 좀체 쉬지 않고 무작정 달려만 가는 이들을 종종 만난다. 등산을 할 때에도 단 한번 쉬지 않고 단박에 산 정상을 정복해 버리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런 경우에는 이미 걸음이나 쉼의 의미가 담길 틈이 없게 마련이다. 오로지 특정한 목표에 대한 집착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이 기나긴 항해와도 같은 인생 역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내 목표지점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우리네 삶이라는 행로에는 그렇듯 쉬지 않고 단박에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실상 그리 많지 않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분명 나아감과 쉼의 상생작용은 반드시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일정한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마라토너들도 달리면서 쉬고 쉬면서 달리는 일을 수없이 반복한다. 최악의 지형에다 산소마저 희박한 극한의 고산을 등반하는 산악인들 역시 그 어려운 극한 조건 속에서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잠자리를 확보하고 휴식을 취한다. 그러지 않으면 결코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마라토너들은 최고의 속도로 달릴 때보다도 오히려 호흡을 고르며 달리는 휴식의 순간을 더욱 중요한 부분으로 전략을 짜고, 산악인들 역시 험난한 이동의 시간보다도 오히려 휴식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로 등반의 성패여부를 가늠하곤 한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과 잠시 멈추어 쉰다는 것은 그렇게 둘이 아니다. 하나씩의 낮과 밤이 하루를 이루듯, 나아감과 멈춤은 그 모든 행로의 절대적 동반자이다.
부가적용)
오늘 우리는 급격하고 신속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의학적으로, 변화가 있는 곳에는 스트레스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위험"과 "위기"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체 내부의 기능은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주어진 변화(스트레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대처하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미묘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 정신적인 변화가 더욱 지나치면 '변태'나 '변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암세포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외적 내적 요인에 의해 내 몸의 정상 세포가 스스로 규제할 수 없는 암세포로 변화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는 쉼을 원하게 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쉼이 필요한 존재로 보고 계시다(마 11:29). 하나님도 창조라는 엄청난 변화에서 쉼을 필요로 하셨다. 그래서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3). 그 쉼이 인간에게도 필요하다고 보아 그 날을 안식일로 하여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현대인에게 쉰다는 사실처럼 반가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바쁘고 피곤하게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창조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현대인이 쉬지 못하는 이유에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이기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현대인은 계속 바쁘다. 그는 자기가 자는 동안에도, 더욱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세상일은 여전히 잘 진행되고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그래서 이 쉼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게 된다(창 2:2-3).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잘 쉴 줄 아셨던 안식일의 주인인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쉬신 시간에 온 만물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쉼은 일(창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이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쉼을 배워야 한다. 이 날의 하나님의 쉼은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담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과 함께 사귀기 위해 안식을 필요로 하신다. 골프선수 박세리의 부진 이유를 공병호씨는 휴식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렌스탐은 여가를 즐기며 운동할 땐 한다고 한다. 사람은 이렇게 쉴 때 쉴 줄 알아야 한다.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부지런한 걸 미덕으로 여기지만 쉴 불 모르는 것이 문제다. 일 잘하는 것이 빛이 나려면 잘 놀고 잘 쉬어야 한다.
월요일
5월 10일
휴식의 필요
도입)
많은 사람들이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3일간만 철야하면, 그 후에 자기 싫어도 푹 잠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사람은 자지 않고 살 수 없는 생물이다. 사람의 몸에서 수면이 부족하면 약해지는 것은 몸이 아니고 대뇌. 조금만 수면이 부족해도, 근육은 약해지지 않지만, 대뇌 세포들의 일부가 망가지거나 정확한 지령을 몸에 내릴 수 없게 되는 등의 악 영향이 즉시 일어난다. 그 결과 뇌는 스스로 부활하려고 잠을 재운다. 그것이 바로「잠」이다. 만약 잠을 자지 않으면, 대뇌 세포의 파괴가 계속 진행된다, 즉 뇌가 죽어 간다고 하는 것은 바로 생명이 끝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살기 위해서 「잔다」 것이다. 잠은 몸의 휴식은 물론 낮 동안의 많은 활동으로 과열된 뇌가 휴식하기 위한 중요한 시간이다. 몸이 지치면 누워서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지만, 의식이나 지능, 기억 등 지적 활동하는 대뇌는 잠을 자지 않는 한 뇌의 휴식은 불가능하다. 잠은 뇌를 깊게 재워서 정신적인 피로를 회복하는 중요한 것으로 예부터 「잘 자는 아이는 잘 자란다」고 한다. 약 70년대 말 일본의 학자에 의해서 뇌가 깊은 잠에 들어가면 성장 호르몬이 다량으로 분비되는 것이 밝혀졌고. . 이 성장 호르몬은 세포의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피부나 근육 그리고 뼈 등을 키우거나 하루의 활동으로 다친 근육이나 내장 등을 효율적으로 수복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즉, 잠은 몸과 뇌의 재생 공장과 같은 것이며. 우리는 마음과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잠을 꼭 자야만 한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일로부터 잠시 숨을 돌리게 하시려고 안식일법을 제정하셨다. “너는 육일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제 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23:12).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 인류에게는 여러 가지 나쁜 습성이 나타났는데, 그 습성들 가운데 하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적절한 선에서 절제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에 한번 몰두하면 일중독증에 빠지고, 공부에 몰두하면 공부벌레가 되어 버린다. 만일 사람이 일이나 공부가 재미있고 좋다고 해서 쉬지 않고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이나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기는커녕 병들어서 마침내는 죽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를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번은 반드시 일을 중단하고 쉴 것을 명령하셨다. 출애굽기 20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친히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신 것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쉬어야 한다는 강력한 명령을 주셨다. 그런데 진정한 쉼은 단지 노동을 중단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육체적인 노동을 중단한다 하더라도 영혼이 편안하지 않으면 쉼을 누릴 수 없다. 따라서 진정한 안식이 이루어지려면 영혼도 쉬어야 한다. 영혼이 쉰다는 것은 영혼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은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고 병을 얻게 된다. 영혼이 병들면 육체도 병이 드는 것은 시간문제다. 낮의 일은 낮의 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그 사람이 농부이건 화가이건 낮의 양식과 밤의 휴식 그리고 여가를 필요로 한다. -조지 버나드 쇼
화요일
5월 11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쉼
도입)
메누하는 히브리 말로 안식, 쉼이라는 뜻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쉴만한...이라는 뜻이다. 시편 23편의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고...에서 "쉴만한" 이 바로 메누하이다. 쉴만한 물가는 곧 메누하의 물가, 쉼의 물가인 것이다. 메누하는 하나님께서 제7일에 창조하신 것이다. 6일 동안 열심히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그 안에 없었던 것이 있다. 그것이 안식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제7일에 만드시고 쉬셨다. 제7일에 하나님은 메누하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쉬셨다. 그러나 제7일이 끝났다는 말이 없다. 그 전에는 날들이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며 끝나버렸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이 안식은 영원과 연결된 안식, 결코 끝나지 않는 안식을 말한다. 쉼과 안식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영적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쉬셨다. 쉼은 창조와 연결되고 거룩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욕망의 자전거 위에서 페달을 놓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영적 자유를 되찾을 때 거룩함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부가적용)
우리 기독교는 일하기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쉬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과 다르다. 열심히 일하고 주님 품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분과 거룩한 교제를 나눈다. 이러한 교제가운데 우리가 얻는 것, 그것이 메누하이다. 곧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얻는 것...그것이 메누하이다. 우리의 진정한 메누하, 쉼터는 그리스도이시다. 그 안에 들어가 쉼을 누리는 자는 일하면서도 쉬고, 쉬면서도 쉰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하면서도 스트레스 받고 쉬면서도 스트레스 받는다. 이러한 메누하...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 메누하의 주인은 곧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곧 메누하이시다.
수요일
5월 12일
매일의 쉼
도입)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이 안식을, 쉼을 잃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쉼과 안식을 잃은 것과 관련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노래방이나, 디스코테크를 찾아 시간을 소리로 채우고, 취하도록 마시거나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지만 그것으로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 고요가 없는 곳에 쉼이 있을 수 없고 쉼이 없는 곳에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시내산 아래서는 요란스런 반동이 일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기도하며 쉬고 있던 모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여유로웠던 것처럼 각자의 고된 일터에서 쉼의 얼굴로 사람들에게 여유를 보이며 쉼을 나누어주는 얼굴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 여유와 쉼에서 우리는 온유와 안식을 얻게 된다. 여유를 잃은 현대인은 성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쉼을 찾아야 한다.
부가적용)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예를 들어 지구는 매일 자전하고,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매달 공전한다. 또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1년에 1회 공전한다. 그 결과 지구에는 낮과 밤, 4계절, 그리고 밀물과 썰물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어찌 보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학자들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도 독특한 ‘생체리듬’이 존재하지 않을까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져왔다. 즉 계절별로 또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인체의 생리기능이 규칙적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돼 왔다. 최근에는 생체리듬을 이용해 인간을 효과적으로 치료하려는 시도가 의학계의 일각에서 대두되고 있다. 시간 약물학이란 분야다. 생체에는 여러 리듬이 있어 여러 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리듬이 "24시간 순환 리듬" (circadian)이고 이 중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수면 리듬이다. 수면은 안구가 급속히 운동하는 "REM 수면"과 그렇지 않은 "NREM(Non-REM) 수면"이 있다. REM 수면 중 80%에서 꿈을 꾸며, 이 두 가지 수면에서 각각 내분비와 생리 기능이 달라진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 때 자아 붕괴, 환각, 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REM 수면 중에 나타나는 꿈을 못 꾸게 하면 과민성, 피로가 나타난다. 잠은 낮 동안 소모되고 손상된 부분을 회복시키고, 낮 동안의 생존 기능과 본능적 보조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 조절하도록 한다. 더욱이, 인지적 기능으로 낮 동안 학습된 정보를 재정리하여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재학습 및 기억시키게 하는 기능도 한다. 또한 감정 조절 기능으로 불쾌하고 불안한 감정들이 꿈 등을 통해 정화되어 아침이면 상쾌한 기분을 갖게 한다. 잠이 쉼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생체리듬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약물 치료를 넘어 인간의 수명을 결정짓는 뇌의 비밀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한 연구팀이 쥐의 일종인 햄스터의 뇌에 생체 시계를 이식함으로써 수명을 연장시켰다고 밝혀 세계 과학계가 떠들썩했다. 일반적으로 햄스터는 노화로 인해 생체시계의 기능이 떨어지면 3개월 이내에 죽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노화된 햄스터의 뇌에 젊은 햄스터의 생체시계 부위를 이식한 결과 예상보다 평균 4개월 정도 더 살게 된 것이다. 물론 사람에게 이런 이식 실험을 할 수는 없다. 다만 나이가 들어도 인간의 생체리듬을 제대로 유지한다면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은 분명하다. 불행하게도 현대인들은 대부분 직접 햇빛에 접할 기회를 점점 박탈당하고 있다. 고작해야 사무실 안에서 실내에 비치는 햇빛을 받을 뿐이고, 집으로 퇴근하는 시간은 캄캄한 밤이기 일쑤다. 제때 일어나 먹고 자는 일상적인 활동이 하찮아 보이겠지만, 이 일을 평생 규칙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어쩌면 불로장생의 한 비결일지도 모른다.
목요일
5월 13일
주말의 휴식
도입)
우리 사회의 휴식은 쾌락과 음주와 탈선으로 채워져 있다. 성매매나 도박을 위해 해외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고 여행지에서 현지인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런 휴가는 말초신경을 자극해 즐거움이 있을지 몰라도 휴가 후에는 더 피곤하고 능률이 떨어지며 생산적 사고를 방해한다. 휴가 역시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쉴 곳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겐 쉴 곳이 필요하다.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쉴 곳을 찾아 쉬어야 하도록 되어 있다. 음악에도 쉼표가 있다. 쉼표를 따라 반 박자나 한 박자 혹은 두 박자를 쉬게 된다. 마냥 쉬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루는 쉬는 날로 정해 주셨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리듬은 쉼표와 쉼터가 있어야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대인에겐 쉴 곳이 없다. 경제 성장과 향락산업이 발달로 도처에 사치성 레저가 붐을 이루고 대형호텔과 음식점이 우후죽순처럼 일어서고 있지만 그런 곳은 잠깐 쉴 곳은 될지 모르나 내 영혼이 영원히 쉴 곳은 못된다. 현대인의 참 쉼터! 그것은 이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쉴 곳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29)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 37- 38)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는 주님의 초청이다.
부가적용)
출31:17에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 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셨다고 하셨다. 제 칠에 쉬지 않는 사람은 평안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명령하심으로서 그러한 모든 협소한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이 가치 있고 유익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만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부리는 모든 짐승들과 심지어는 야생의 짐승들까지도 배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안식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발을 딛고 있는 땅도 쉼을 얻으며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인간만의 세계가 아니며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생명들이 상호관련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다. 안식일 개념은 이러한 인간 이외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강조하고 그 의의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안식일 개념에는 인간의 권리, 즉 인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휴가 인데 일상의 고된 노동으로부터 자유를 포함하는 말이다. 안식일 개념 속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들어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그런즉 안식일 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9-11)라고 말한다. 여시서 안식은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되었다. 일의 무거움에서 벗어나서 편안함 가운데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근본적인 인생의 쉼을 경험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에 의하여 그가 짊어진 인생의 짐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