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석(壽石)이야기
임병식 rbs1144@hanmail.net
흔히 하는 말로 ‘되로 배워서 말로 풀어 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나의 한문 실력과 수석(壽石)견문을 생각하면 실로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한문 공부라야 서당을 고작 1년 정도 다닌 것이 전부요, 수석채취는 전라도 밖 진주의 경호강과 남해정도를 다녀온 것이 전부인데 애석가로 자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애석인들이 두고 쓰는 말이 있다. 가장 빼어난 수석을 일러 악급(愕級)이라는 것이다. 우선 한자에 놀라며 내지르는 의성어인 "愕'자가 있다는 게 놀랍다. 아무튼 최상급의 수석을 악소리가 나는 돌이라고 하는데. 이런 돌은 아무리 애석인을 자처해도 일평생 하나 만날까 말까 하다.
그런데 나는 모름지기 애석 인이라면 남한강이나 임진강, 낙월도를 한 두 차례 다녀오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그런 곳은 언감생심, 엄두를 내지 못한 사람이다. 비용도 적잖이 들뿐 아니라 시간도 1박2일쯤은 내야하기에 다녀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깜냥이면서 애석 인을 자처하니 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 일이다. 무엇보다 발목이 잡힌 것은 우선 다니는 직장이 토요일이나 일요일, 공휴일등이 따로 없이 언제나 꼭 한 번씩은 나가봐야 하는 곳이어서 쉽사리 결행을 못한 것이다. 그런지라 아낙군수를 면치 못하면서 인근의 가까운 곳만 맴 돈 것이 석력(石歷)의 전부이다. 어쩌다 운 좋게 외지로 나가는 때도 하루 코스를 잡아서 마음 졸이며 돌아보고 오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한문은 어쭙잖게 주어들은 것으로 문장구조와 어조사의 쓰임을 간파하여 깨우치게 되었다. 그런 만큼 어디다 내놓을 정도는 못되고 향당에서 겨우 청맹과니를 면할 정도이다. 수석도 다행히 지방에 몇 군데 수석가게가 문을 열어서 부지런히 드나들며 각 산지의 특성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정도 어섯눈이 트여서 돌의 강도와 색채만 보고도 '이것은 어느 지방 돌이다' 하고 알 수 있게 되었다. 특징이 뚜렷한 보성 제석산돌과 순창 호피석, 고성용석과 봉계 혹돌, 고성 옹기석과 청송 꽃 돌은 물론이고 남한강석 중에서도 도화리 초코석과 청풍의 묵석, 미사리 미석도 훤히 꿴다.
그런 돌들은 상인들이 사와서 선을 보이기도 하지만, 도내 각 산지에서도 엇비슷한 돌이 출토되어 비교가 되는 까닭이다. 그간 어쭙잖게 40여년의 석력을 쌓다보니 애석인은 물론, 유래석이나 수석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글을 쓰면서 옛 분들의 시문을 찾아보고 음미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분으로는 조선 후기 애석인 조면호선생의 애석 시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시문 등이 있다. 한데 이들의 시는 조선 중기 이전을 거슬러 오르지 못한다. 세조때 생육신인 김시습이 돌을 주어 만지며 마음을 달래며 애완한 것 중에 짧은 단문이 있고, 역시 동시대 사람인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에 물 가운데 작은 바위 경을 즐기는 그림을 남기고 있는 정도이다. 고려 말 문익점 선생도 애석생활을 했다고는 하나 남겨진 시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근간에 우연히 의미 있고 재미있는 시 한편 찾아냈다. 조선 중종반정과 기묘사화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다가 애석시(愛石詩)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한편의 완벽한 애석시일 뿐 아니라 수석의 감상법까지도 담고 있었다.
拾盡凶琓石 (습진흉완석)
平鋪淸淨流 (평포청정류)
浦風四海若 (포풍사해약)
然後吾放舟 (연후오방주)
부족하고 흉물스러운 돌 주어와
깨끗한 물 흐르는 곳에 담아볼까
바람도 잡고 바다도 가둔 후에
나는 쪽배를 띄워 볼까.
이것은 유운(柳雲.1485-1528)의 시. 애석인의 마음으로 해석해 본다. 그런데 이 시를 보면 놀라운 점이 있다. 흉한 돌을 완상한다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는 바로 골이 파이고 변화 많은 괴석이나 기석을 말함이 아닌가. 거기에다 '바람을 잡고 바다를 가둔다' 함은 또한 수반에 물을 채우고 그것을 감상한다는 뜻이 아닌가.
이거야 말로 지금 수석 인들이 취하고 있는 감상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그렇다면 이미 5백 년 전에도 돌을 그렇게 감상 했다는 말일 것이다.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유운은 조선 성종과 중종시대를 살다간 분이다. 충청도 관찰사와 대사헌을 지냈으며 기묘사화 때 신진사류로 몰려 화를 입었다고 한다. 당시 조광조의 신원을 청원하다 파직을 당하고 관원명부에서 조차 이름이 삭제되었다. 얼마나 그 처지가 통한에 사무쳤을까.
그런 울분을 수석과 벗하며 잊고자 했음인가. 시문에서처럼 수반석에 괴석을 배치하고 물을 채워놓고서 마음속으로 배를 띄워 시름을 달랬던 건 아닐까. 그 심정이 짐작이 간다. 그렇게라도 하면서 괴로움을 잊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쌓인 울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술로 풀면서 살다가 40도 초반에 생을 마감했다.
그렇지만 불우한 시절을 보내며 남긴 시가 한국 수석사(壽石史)에서 가장 빨리 쓰인 최초의 시가 되었으니 의의는 자못 크지 않는가 한다. 나는 이 시를 발견하고 눈이 번쩍 띄었다. 대상을 감상하는 시로서는 온전히 격식을 갖추고 있어서였다.
아마도 이 시는 앞으로도 우리의 수석 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 시문을 찾아내어 서투르나마 풀어본 것은 사료 발굴의 의미에서도, 그리고 수석을 사랑하는 후대인에게 전하는 의미에서도 뜻이 있지 않는가 한다. 실로 보람된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2020)
첫댓글 수석은 안빈낙도와 깊은 연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므로 수석은 고독한 선비의 취향인지도 모르겠어요
수석에 대한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과 경륜이 배어있는 애장석들을 떠올려봅니다 완상가의 심미안이 다양한 만큼 한 점의 수석은 한 편의 명시지요 하나 제가 내린 수석에 대한 정의는, 수석은 대자연의 압축파일이라는 것입니다 애석인이 아니고서는 그려 낼 수 없는 격조 높은 글 마음에 담습니다
우연히 중종반정과 기묘사화에 대한 기록을 보다가 유윤이란 분이 수석시를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 시를 보고서 반대파에서는 자기들과 뜻을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말도 들리는데, 아무튼 수석을 오늘날의 시각에 비추어도 감상하는 태도가 뛰어난 자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기록의 보존을 위해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선생님에게 있어 수석은 경전과 같은 거군요. 관찰하고 음미하고 깨달음을 얻고 마음에 새기고..한가지에 심취하여 경지에 이르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짬을 내어 그리 하셨으니 선생님의 노고에 찬사를 보냅니다. 나중에 수집한 수석을 봤으면 좋겠네요. ^^
그리 좋은 돌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소장한 것을 돌려가면서 감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료를 찾아보다가 우연히 수석에 관한 시를 발견하고 글을 한편 쓰게 되었습니다. 읽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삶이 늘 진지하시고 탐구하시고 선생님의 모든 견문을 후배문인들과 나누려 한결같은
마음을 내어주시지요..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작품익어주시고 댓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주 들르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수석에 대가입니다.
보성 제석산돌과 순창 호피석, 고성용석과 봉계 혹돌, 고성 옹기석과 청송 꽃돌은 물론이고 남한강석 중 도화리초코석과 청풍의 묵석, 미사리 미석을 훤히 꿴다. 저도 배웁니다. 고장마다 돌 특성을 알 수 있네요..
수석을 좋아하면 글을 쓰는데도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사색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길러주거든요. 수석을 가까이 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