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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 11장 저속한 물질주의
홍콩을 떠나 미국으로
by온기철 James Ohn16분전
Bowdoin College in Maine, U.S.A.
내가 내 앞에 닥쳐올 것들을 걱정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중국으로 돌아 갔었는 데, 중국을 떠날 때는 앞으로 살아갈 아무런 대책 없는 실패한 사람이 되어 나왔다.
1958년7월16일, 경계를 넘어 홍콩으로 들어 갈 때, 나는 인생에 대한 목표도, 사명도, 계획도 없는 18세 청년이였다. 나는 돈도, 전망도, 가족도 없었다. 나는 홍콩에 찾아갈 집도 없었다.
아버지의 사무실은 물론 안 되었다. 그는 냉혈한 처럼 나를 이용했다. 나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생각만 해도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어머니의 신학원으로 향 했다.
어머니가 응접실에서 나를 보자,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내 몰골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입학시험에 실패해서 홍콩으로 돌아 간다는 편지를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보내지 않았었다. 그러나그런일로 어머니가 이렇게 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쳐다 보더니,
그녀는 “너는 유령 같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고 말했다.
“나는 거부 당 했어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 했다. 그말만 하고 끝낼려고 했으나 갑자기 말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가 나를 찔러보는 막대기로 썼어요. 공산주의자들이 나에게 설명해 주었어요. 그는 거기서 용납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도 거부 했어요!”
내 말처럼 내 눈물도 마구 흘러 내렸다. 내손으로 눈물을 닦아 내려 해도 계속해서 흘러 내렸다. 흐느껴 울기 시작하자 목이 막혔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을 가라앉히기를 포기하고 마음 껏 울게 나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내가 울음을 그치자, 어머니는, “먹을 것 좀 가져다 줄 께. 뭘좀 먹지 않으면 곧 쓸어 질 것 같아.”라고 말 했다. 어머니는 잠간 나를 다시 쳐다보며 약간 미간을 찌푸리 더니 앉아 있는 나를 두고 갔다.
15분 후, 그녀는 엽게 자른 돼지고기, 버섯, 채소가 들은 큰 국수 한 그릇을 가지고 왔다. 거의 일년동안 거칠은 겨 같은 쌀과 마오주석의 잘게 자른 나뭇가지 같은 채소 만 먹었더니, 진짜 음식 맛이 어떤지 잊어 먹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국수는 내 감각을 압도 했다.
눈물이 다시 내 볼에 흘러 내렸다. 내가 국수를 꿀꺽 꿀꺽 삼키는 동안 눈물이 국수 국물에 뚝 뚝 떨어 졌다.
나를 쳐다보며 어머니는 불편 한듯 의자에 앉아서 몸을 이리 저리 움직였다. 그녀는 마른 여자였지만 살찐 사람을 본지가 오래인 내눈에는 잘먹고 건강하게 보였다. 나는 그녀를 쳐다 보기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내가 다 먹자, 어머니는 “너는 왜 그렇게 마르고 창백 하냐?”고 물었다.
“그래요?” 나는 조금 놀라서 물었다. “나는 중국에 간 이래 나를 거울에서 본적이 없어요.”
“음 그래, 우리는 네 건강부터 회복 시켜야 겠다. 그동안에 넌 뭘 하려느 냐?”
“저는 그것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무엇 보다 머물 곳이 필요 해요. 아버지 사무실엔 가지 않겠 서요.”
내 말 투가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면, 어머니는 놀라운 표정을 감추었을 것이다. 그녀는 잠깐 숙고 했다. 그녀는 돈이 나올 곳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 생각하더니, “통 씨네 에게 연락 해 보자. 그들는 우리가 살던 신홍콩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이 곤란 할 때 도와 주었다. 그들이 너에게 묵을 곳을 제공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가서 그들에게 부탁해 보자.”
한, 두시간 후, 우리가 살던 옛날 집 넓은 정원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나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 무엇이 떠 올 났는 지 상상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4년여 전에 그녀가 아버지를 뒤로 하고 걸어 나간 집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감정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정원을 지나 우리 옛날 아파트 쪽으로 데리고 가면서 그녀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지금은 통씨 네가 살고 있다.
정원의 얼룩덜룩한 나무와 꽃나무는 그대로 였다; 자스민, 마그놀리아, 구아나, 플루메리아, 대나무, 그리고 여러가지 열대식물들. 그것들을 보자 그동안에 먼 옛날일로 한쪽에 재쳐 놓았던 기억이 홍수 처럼 주체 할 수 없게 쏟아져 나왔다. 내가 처음 본 자연에 대한 맛, 나의 동물 사랑, 귀신에 대한 공포, 아버지와의 갈등, 퇴학에서 얻은 교훈, 영국사람들에 의한 인종차별의 맛, 어머니의 별난 아버지와의 이혼이 기억 속에서 살아 나자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그것에 사로 잡히지 않으려 했지만, 이 곳과 끝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내 마음 속을 영화의 한장면처럼 지나갔다.
통씨와 통씨의 아내가 나를 보자, 조금전에 어머니와 똑 같은 말 을 했다.
“아이얍! 너 왜 이렇게 마르고 창백 해?”
그들의 질문은 나로 하여금 거울 속의 나를 몹시 보고 싶게 했다. 거울을 보고 나는 깜짝 놀 랐다. 내 머리카락은 윤기가 없었다. 그것은 옛날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머리카락은 마른 진한 갈색 잡초의 다발을 만들어서 내 머리에 반항 하는 것처럼 뻣뻣이 서 있었다. 내 눈은 축 처져 있었고, 입술은 부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색깔이 없었다. 내볼은 쏙들어가 있었고 내 피부는 얇았다. 나는 마치 거식증 방랑자 처럼 너무 무섭게 보였다.
나는 내가 그렇게 많이 몸무게를 잃었는지를 몰랐다. 나는 항상 호리 호리 했다. 중국에서 나는 더 말라 보였다. 그러나 개혁학교에서 누구나 말라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 했기 때문에 이것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아무데도 아프지 않는데 왜 자기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누가 걱정 할 까? 더구나 몸은 항상 가려져 있었다.
이틀 후 쌀집에서 나는 저울에 설 기회가 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통씨네가 나를 보고 왜 그런 경고와 탄식으로 반응 했는 지를 그제 서야 알 수 있었다. 키가 6피트인 나의 몸무게는 96 파운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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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씨네는 나를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그들은 행복한 가족이었다. 늙은 부부가 젊은 딸을 애지중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의 성장한 아들은 이미 집을 나갔다. 내가 가족이 서로 이야기 하며 지내는 집에 사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서로 말하지 않고 살던 내 부모와는 정 반대였다. 통씨네와 살기 전에는 가족들이 말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정상 이라고 생각 했다.
첫달에, 나는 잠자고 국수, 그리고 통부인이 만들어주는 다른 음식 모두 다 맛있게 먹고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자다가 다른 사람이 깨면, 나도 일어났고, 물어 보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나자신에게도,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열지 않았다. 내 몸이 고쳐지는 동안, 내 마음은 무기력과 우울증으로 가라 앉아 있었다. 나는 실패하고, 목적 없고, 낙심하고, 가치없는 것 처럼 느껴 졌다.
이것을 바꾼 몇가지 일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통씨 부인은 내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도와 주었다. 친절하고 조용한 아줌마인 통씨 부인은 고등학교 물리 선생님이었다. 그러나 다른 고등학교 물리와 수학 선생님들과 달리, 학생들의 요구가 많았는데도 불구 하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집에서 과외 수업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일은 비윤리적이라고 생각 했다. 나의 존재는 그녀가 수학과 물리 공부에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의 요구에 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 8월에 학교가 시작 할 때, 그녀는 나를 그들의 가정교사로 추천 해 주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나는 각 학생들의 집에 가서 하루 한 두시간 씩 물리와 수학을 가르쳤다. 이일은 나에게 ,개혁학교에서 매일 대학 입시준비 하던 시절 때문에, 거의 나의 제2의 천성 처럼 된 고등학교에서 얻은 지식 전체를 내 보일 기회를 주었다.
나는 학생들과 라포어(rapport)를 만드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나이가 그들 보다 겨우 한, 두살 많을 정도로 젊어서, 현대 사람들이 보기에 나이차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감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들보다 여러해 앞서 있었다. 나의 인생경험은 그들의 고생없고 부유한 성장에 비힐바가 아니었다. 이것은 내가 그들을 이해 하는 데 필요한 거리감을 주었고, 그들의 불평과 문제를 참을 수 있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나의 지식과 지혜에 대해서 존경 했고, 나의 에너지, 위트, 그리고 문제해결능력을 좋아 했다. 그들은 즉각 나와 통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머리가 좋았다. 일부는 부모의 지나친 기대감 때문에 압박을 받아 능력 보다 못한 성적을 내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부모가 사치스럽게 아이를 키우기만 했지 그 아이에게 관심이 없어서 공부를 열심히 할 동기가 없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못 하는 것은 수동적이지만 효과적으로 부모에게 항의하는 방법 이었다. 또 다른 학생들은 너무나 풍부해서, 단단한 마음으로 무엇인가 이룰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또 어떤 학생들은 학교에서 너무나 무시 당해서, 실제는 꽤 잘할 수 있는 데도, 수학과 물리에 소질이 없다고 믿고 있었다. 융통성 없고 엄격한 교육제도에 얽매인 이 위태 위태한 소년들은, 그들의 두려움과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하기 위해서, 격려와 긍정적인 보강이 필요 했다.
그들 모두가 이런 저런 이유로 학교에서 빈둥빈둥 놀고 뒤 떨어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과 물리 수업을 따라 갈 수 없게 되어 되어 버린다. 몇몇 학생은 까딱 하면 졸업을 못할 처지가 되기도 했다.
판단하고 처벌하지도 않고 혼내지도 않는 학생들의 철친으로서 나는 그들의 믿음과 자신감을 얻었다. 그들이 나에게 고충을 털어놓게 하면, 나는 이미 그들을 수준높은 학생으로 만드는 길의 2/3는 와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물론 여기 저기에 기술적인 도움이 필요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해 주고, 정을 가지고 그들에게 조언 하는 일이었다.
가정교사로서 가르치는 일 의 댓가는 양쪽으로 오고 갔다. 내가 학생들을 도와서 그들이 혼자 공부할 수 있게 만드는 데 성공 한 것은 많은 새로운 우정과 친절한 감정들에 대한 만족감으로 발전 했다. 학생들과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감사와 흠모는 나로 하여금 다시 인생을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게 했다. 천천히 나는, 중국을 떠난 이래 우울증의 지속적인 원인 이었던, 비참한 망신이라는 인식을 극복하기 시작 했다.
나는 학생들을 좋아 했고 그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겠으며 그들의 성적 향상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낙제 점수를 받을 위험이 있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여 B 등급으로 올라갈 때 마다, 나는 그 학생을 좋은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축하해 주었다. 나는 그 학생의 성취가 자랑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나도 무엇인가 보람있는 일을 이룩 했다고 느꼈다.
6개월도 안되어, 입소문으로 나의 가정교사로서의 평판은 어마어마하게 퍼졌고, 내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크게 증가 했다. 모든 가족은 그들의 자식들이 공부 잘하기를 원했다. 나에게 배워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다면, 내가 제시하는 가격이 얼마든 상관하지 않고 지불 했다. 어떤 부모는 공부 못하는 아이로 소문 난 자기 아들을 단 한 학기에 우수한 학생으로 만들어 놓은 기적적인 일꾼이라고 생각 했다. 그들은 내가 그들 아이의 머리를 더 좋게 만든 것이 아니고, 그저 그아이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도와 주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수 많은 학생들을 가르쳤고 과목을 수학과 물리에서 모든 과학 과목과 영어 까지 늘였다. 튜터링 은 나에게 좋은 수입을 보장 했다. 나는 전에 돈을 벌어본 적이 없고 돈을 받아 본적도 없다. 어머니는 우리가 반만촌에 살때 돈을 전혀 주지 않았다. 헬렌 이모도 상하이에서 돈을 주지 않았다. 물론 아버지는 학용품이나 옷을 사줄 때 마다, 내가 범죄자가 아니면 거지처럼 느끼게 했다. 나는 그에게 돈을 요구 할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상하이에서 사귄 다-게는 때때로 롤리팝을 사주었다. 물론 그가 아이스크림 선데이로 나를 대접하던 때를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네 제자들의 부모는 나에게 25 홍콩 달러를 수업이 끝날 때마다 돈으로 주었다. 그것은 그 시절에 나에게는 큰 돈 이었다. 노점에서 금방 조리한 좋은 음식을 3 홍콩 달라면 사 먹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거두어 들인 돈을 손에 쥔 나는 자립감과 힘을 얻은 것 같은 느낌외에 마음이 무척 들떠 있었다.
몇주 동안 나는 내 주머니에 가득 찬 돈의 느낌을 즐겼다. 그것은 나에게 살아 남으려고 사는 데서 벗어나 인생의 다음 단계에게로 발을 옮기는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다음 단계가 무엇이 될지 전혀 몰랐다. 수입이 있어서 자립할 수 있게 된것은 나에게 다시 태어 난 것 같이 느끼게 했다. 예수교 적인 의미가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사람으로 서 - 그래 나는 정말 새로 시작 했다!
곧 나는 콜론시에 있는 아파트 뒷쪽 방을 빌릴수가 있었다. 그리고 독립한 젊은 미혼자의 생활을 시작 했다. 나는 대부분의 식사를 식당에서 사 먹고 열렬한 소비자가 되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식당에서 후하게 대접했다. 거의 대부분이 내 제자들이었다.
내가 1959년에 쇼핑과 눈에 띄는 소비를 알게 되었을 때, 홍콩은 겨우 급속한 경제발전의 트랙에 들어가기 시작 했을 무렵이었다. 섬과 쿨론 반도는 아직도 제3세계 도시 같았다. 거리는 행상인과 칙칙한 건물로 꽉차 있었다. 쿨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구 반도호텔 이었고, 홍콩 쪽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구 중국은행이었지, 1990년대에 아이 엠 페이(*세계적인 중국계 건축가)가 설계한 번쩍이는 철과 유리로 된 건물이 아니었다.
홍콩섬과 쿨론을 갈라 놓는 박토라아 해엽은 그때는 지금보다 훨신 넓었다; 1960년 대에 홍콩이 극적인 경제 확장을 시작 하자, 정부는 매년 바다를 매워 개발 할 수 있는 땅을 넓혔다. 자연히 항구는 점점 좁아졌다.
쇼핑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전에는 내가 옷, 신발, 학용품이 필요하면 아버지가 나를 가장 싸게 파는 노점으로 데리고 가서 가장 값이 싼 물건을 사주었다. 지금은 백화점, 부티크, 양복점에 갈 수 있는 돈을 가지고 마음 껏 샀다.
나는 셔츠, 바지, 양복을 내 날씬한 체격에 맞게 맞추어 입었다. 나는 우아한 넥타이를 구했고, 금맥기한 카프스 딘추와 그와 잘 어울리는 타이 클립을 샀다. 나는 멋쟁이 양말과 수입 구두에 돈을 낭비 했다.
그러나 곧 나는 쇼핑에 흥미를 잃었다. 두달이 채 안되어 새로운 맛이 없어지고 흥미로운 모험 대신에 지루한 허드렛일이 되었다. 나중에는, 쇼핑을 하려면 꼭 내가 필요한 물건을 먼저 정하고 가장 빠른 시간내에 그것을 샀다.
내가 튜터링을 하지 않을 때, 나는 품위있는 호텔에 가서 크림과 설탕을 넣은 영국 차를 마시고 오이, 잘게 자른 달걀이나 삶은 햄으로 만든 맛잇는 샌드위치를 먹으며 편안하게 쉬었다. 우아한 옷을 차려 입고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가 서브하는 차와 샌드위치 앞에서 리클라이닝 체어에 앉아, 중국어 뿐만아니라 영어로 된 신문과 잡지를 읽었다.
저녁 때, 나는 영화를 보거나 나이트클럽에 갔다. 어떤 때는 혼자, 때로는 제자들과 같이 갔다. 전통적인 나이트클럽은 재즈와 글렌 밀러, 아티 셔, 베니 굿맨, 타미 도시, 카운트 베시, 듀크 엘링턴 같은 아티스트들이 원래 연주한 인기곡을 들려 주었다. 1950년 후반에는 록 앤 롤이 홍콩에 처음 소개 되었다.
아반트-가르데 나이트 클럽은 최신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를 가지고 있었다. 빌 할리의 “록 어라운드 클락”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 유 레이터 엘리게이터” 가 그 지역에서 좋아 하는 음악이었다.
나는 록 앤 롤이 아주 유쾌 하다고 생각 했다. 빠른 템포, 때리는 리듬, 팽팽한 고음 보컬로 사람들을 폭동을 일으키게 자극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모든 억압과 방해를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 처럼 보였다.
구앙주 개혁 학교에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오버쳐 대신에 록 앤 롤을 방송 했으면 어떤일이 벌어졌을 까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아마 조잡한 잡음이라고 피했겠지만, 만약 그들이 음악과 동조 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나는 리우 동무가 엘비스의 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불가능 하지만, 신나게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 하며 폭소를 터트렸다.
뒤돌아 보면, 개혁학교의 비참한 결핍에서 과도한 소비로의 전환이 너무나 신속하고 극적으로 일어 났지만,
이것이 나의 정신상태에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않은 데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내가 부잣집에서 자란 것처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받아 드렸다.
나는 왜 그렇게 할 수 있었는 지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습관적이고 그 이후 일생동안의 과도한 소비에 대한 경멸은 개혁학교에서 공산주의 세뇌 작업으로 추진되고 장려 되었기 때문에 생긴 방어 기전 이었지 않았나 의심해 본다. 적어도, 리우 동무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것과 반대인 “저속한 물질주의”는 장점이 없지 않아 있으며 재고가 필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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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같은 쿨론에 있는 어머니의 신학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나는 매주 어머니에게 신선한 꽃을 가져다 주었고 주말에는 찻집에서 딤 삼을 같이 먹거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 아직도 서로 이야기할 것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가 말을 시작하면 어머니는 내 장래에 초점을 맞추려 했다. 나는 그것을 지금 생각하기 싫었다. 당장 장래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고, 항상 장래를 계획하면서 사는 삶에서 좀 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래”는 아버지 사무실에서 살때와 개혁학교에 살 때였다. 그리고 모두 헛일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지금 물질주의에 푹 빠져 있다고 남의 이야기 하는 것처럼 말 했다. “저는 좀 즐기고 싶어요,”라고 약간 부끄러운 듯이 고백 했다.
어머니는 큰 소리로 웃었다. 나의 솔직한 고백이 재미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네가 실컷 즐길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그녀는 한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는 나에게 충고 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대학진학을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지적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훈계 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말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 그녀의 충고는 나를 일 깨웠다.
우리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나 내가 중국에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언젠가 한번 그녀는 지나가는 말로 아버지의 이름을 내 비친일이 있었다. 나는 화가 나서 배에 경련이 일어 났다. 나는 아직도 그가 중국에서의 그의 입장을 나를 이용하여 체크해 보려는 계략만 생각하면 토할 것 같았다.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나는 새로생긴 초급대학에 들어거서 수학, 물리학, 철학, 그리고 영문학 수업을 들었다. 그 대학은 청 치(예수 예배)라고 했는 데, “배움의 기관”이라는 뜻을 가진 전통적인 “슈 유안”을
대신 했다. 이것은 어머니의 신학원과 같은 명칭이었다. 영국 대학이었던 홍콩 대학만이 “대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정부는 홍콩대학 외에는 학사학위를 주는 것을 금지 했다.
청 치를 뒤에서 밀고 나가는 힘은 앤드루 로이 였다. 프린스톤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 중국에서 장로교 선교사로 수십년동안 보낸 괄목할만한 인물이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로이는 항상 따뜻함과 활기찬 의욕이 몸에서 발 했다. 그의 친절함은 성인 같았고, 그의 낙천주의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만들었다. 모든 선교사와 개종자가 그의 정신과 괸용의 반만 나누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전 세계가 크리스찬이 되었을 것이다.
로이 박사는 프로토와 소크라테스를 가르쳤다. 나는 어떤 가 한번 들어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일깨워주는 많은 토론에 참여 했다. 정의, 인간 성, 정부의 형태, 지식의 요소,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인간성의 생물학적인 기초의 시대적인 이해에 관해서 그와 다시한번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나는 만사를 제쳐 놓고 기꺼이 응할 것이다. 나는 다른 철학 강의도 들었다. 메이(“이론가”), 개혁학교 이전 방동무, 는 그 철학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개혁학교에서 메이는 데스카르테스, 홉스, 장 자크 루소, 칸트, 헤겔, 아담 스미스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나는 그들이 누구이며 그들 철학의 요점은 무엇인가를 알고 싶었다.
청 치에서 나의 문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준 또 다른 선생님이 있다. 한스만 박사는 영국 선교사 였는 데, 르네상스 시대 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는 영문학 개요를 가르쳤다. 허튼 짓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생님인 그녀는 각 학생에게 매주 주어진 위대한 문학가의 작품에 대한 10 페이지 페이퍼를 제출하게 했다. 에드먼드 스펜서, 세익스피어, 밀턴과 존 단, 드라이든, 조나단 스위프트, 사무엘 존슨 등등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지도하에 나는 처음으로 영작을 해보았고, 이로 인해서 영어로 글을 쓰는 도전 그리고 이에 대한 보상과 일생동안의 밀접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청 치에 다니기 전에는 공부하고 학교에 가는 것은 항상 실용주의적인 목적으로 끝나는 도구에 불과 했다. 7년전에 홍콩에서 교육이 시작 됐을 때, 목적은 아버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였다. 그의 체벌을 피하고 먹을 것과 살곳을 얻기 위한 수단 이었다. 나중에 중국에서의 고등학교 시절에는 세속적인 성공으로 바뀌었다. 경력을 쌓아 가능 하면, 기술자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소원 대로 내가 명예와 권력의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은 항상 내 마음 뒤쪽에 어른 거렸다. 내가 없애려 하면 할 수록, 나는 일생동안의 뇌에 박힌 생각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소원은 지워 버릴 수 없는 명령이었다!
청 치에서 나는 현실적인 계획이 없었다. 나는 더 나은 수입을 올린다거나 졸업 후 오전 8시 부터 오후 5시 까지 일하는 직장에 취직 하기 위해서 수업을 듣지 않았다. 1959년에 크리스찬 초급 대학은 졸업생의 취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인식이나 학위를 주는 식민지 정부의 인증 없이 뷔페 같은 여러가지 코스를 제공 했다. 이 학교는 어느 누구의 전통적인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이 학교는 고등학교 졸업 후 더이상 배울 곳이 없는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 순수하게 존재 했다. 나는 처음으로 어떤 실용적인 걱정 없이 내 관심과 호기심에 따라서 배우려고 했다.
참신한 경험이었다. 물론 내가 청 치에서 배운 것은 서양 철학과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의 표면을 겨우 긁는 수준 이었다. 그러나 나의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첫 발걸음은, 마치 힘든 사막 여행 후 첫 목음의 물과 같이, 항상 가장 만족 스러운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청 치는 나에게 그 첫 발걸음을 내 디딜 기회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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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홍콩에 안주 한지 여러 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구앙주 개혁학교 동급생 챙 이밍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키가 크고 잘 생겼고 그의 아버지는 홍콩의 방직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리우 동무가 지도하는 정치교육 시간에 같이 있었다. 점잔하고 주의깊은 그는 나를 성미급하고 건방지다고 생각 했고 나는 그를 멍청하고 겁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 했다.
우리는 쿨론을 관통하는 주 도로인 네이탄 로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서로 마주쳤다. 그는 옷가게 사무직에 취직하려고 한가게 인터뷰가 끝나고 다른 가게로 가던 중이었다. 나는 아침겸 점심을 먹으려고 찻집으로 가고 있었다. 뜻밖에 만났다는 기쁨에 우리의 차이는 뒷전이었다. 우리는 반갑게 따뜻한
악수를 나누었다.
“야, 이밍, 여기서 만나다니 정말 반갑다!” 내가 말했다.
“지, 리 나” - 그는 나를 위 아래로 쳐다 보았다 - “너 복권에 당첨 된 것 아니야!”
그의 집이 가난 한지를 아는 나는 “나는 부자와는 멀어. 난 부잣집 아이들 가정교사 노릇을 하기 때문에 옷을 잘 입어야 해.”라고 대답 했다. 그리고 나는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언제 홍콩으로 돌아 왔니?”
“약 한달전에. 다 참을 수가 없었어. 마오 주석의 대약진운동은 사람들 삶을 지옥으로 만들었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어.”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홍콩에 온지 한달이 되었는 데도, 그의 생기없는 얼굴과 쑥들어간 눈은 그가 겪은 시련의 흔적을 아직도 말해주고 있었다.
“우리 개혁 학교는 어떻게 됐니?” 나는 알고 싶었다.
“그들은 쌀배급을 시작 했지.” 챙이 말 했다. “네가 떠날 때는 아직도 점심과 저녁에 밥을 먹고 싶은 만 큼 먹을 수 있었지. 너도 알다시피, 그것은 좋은 쌀이 아니었어. 그러나 배를 채울 수는 있었지. 대 약진 운동이 시작된 지 약 4개월이 지난 후, 한 학생 당 식사 때 마다 6 온스의 쌀이 배급 되었는 데 우리가 먹을 양의 반도 안 되었지. 그러더니, 우리가 놀리는 말로 마오 주석의 나무라고 하던 채소 조차도 나오지 않았어. 대신에 배급된 밥과 함께 소금에 절인 무를 주었어. 구 후 2개월 지나자, 점심을 주지 않았지. 내 배는 그치지 않고 꼬록 꼬록 했서. 그래서 홍콩에 온 것이야.”
챙의 설명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대약진 운동은 신문 전면의 뉴스 였지만, 홍콩 미디어에서 중국의 굶주림에 대한 기사는 본적이 없었다. 마오 주석은 국가의 철 생산량을 높이고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전국민을 동원 했다. 농부는 농사짓키를 그만두었고 학생은 공부를 중단 했으며 노동자들은 일하기를 그만두었다. 사람들은 냄비와 칼에서 창틀과 문손잡이에 이르기 까지 무엇이든 철로된것은 뒷마당에 설치한 “용광로(?)”에 넣어 녹였다. 홍콩의 미디어는 국가경제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 할 것이라고 예측 했다. 챙의 개인적인 채험담은 그 재난의 정도를 짐작 할 수 있게 했다. 후에 대약진운동이 전국적으로 넓게 퍼진 기근을 초래하여 지방에서 수백명의 생명을 앗아 갔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 졌다.
한명의 미친 황제의 실정이 수억명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챙에게 찻집으로 같이 가자고 하여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는 리우 동무와 당서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학생들을 더 통제 했으며, 많은 신입생들이 외국에서 왔는 데 그들은 모두 근처 마을에 있는 용광로에서 일했고, 우리들 생활은 내가 그곳에 있을 때 보다 더 집단적으로 되었다고 말했다.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으면 서도 아무도 대약진운동 에 반대하는 의견을 감히 말할 수 없었다. 대 집단의 인구가 말없이, 마치 아프리카 대초원에서 동물들의 무리가 비바람이 내려 치는 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처럼, 그들에게 가해진 박탈과 고통을 견뎌 내고 있었다.
슬프게도, 대약진운동이 챙이 가지고 온 유일한 충격적인 뉴스가 아니었다. “메이, 우리와 같이 살던 철학자 친구, 는 내가 떠나기 2달 전에 죽었어.” 챙은 우리가 점심을 다먹을 무렵에 나에게 알려 주었다.
“정치 간부 사무실에서 나온 비공식 소식통에 의하면, 메이가 하이난 섬의 집단농장에서 목 매달아 자살했다고 해.”
나는 여차하면 메이가 자살할 수도 있다고 생각 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인생은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야 사는 가치가 있다는 원칙을 이야기 했다. 그는 맑시즘이 예속적인 신분제도로 억눌린 자들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마르크스 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가난이 사람들 신분을 낮추는 것이 아니고 예속적인 신분제도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메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용기의 상징이었다. 챙이 갑자기 찻집 벽시계를 보더니, “나 가야돼,” 그는 황급한 목소리로, “인터뷰 시간에 늦었어, 듬삼 고마워!” 하고 일어섰다.
나는 꿈 꾸는 사람처럼 그와 악수를 했다. 나는 그의 주소를 물을 정신도 없었다. 한참 지나서 나는 음식 값을 치루고, 멍한 기분으로 맥이 쭉 빠져서 열대 햇볕 속으로 걸어 나갔다.
홍콩으로 돌아온 이후로 나는 의식적으로 중국에서의 경험을 내 기억 저쪽 한 구석에 감추어 놓았섰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거나 그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드러난 사실에 관한 것은 더욱 그랬다. 지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챙과의 만남은 기억이 홍수처럼 내 기억의 전면에 쏟아져 나오게 했다. 슬픔, 노여움, 후회 그리고 절망이 내몸안에서 요동을 쳤다. 나는 우울증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했다. 나의 중국 체류 실패는 내가 내인생에서 지워 버리려 했던 아버지와 얽혀 있었다. 나는 리우동무가 나 한테 한말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고 그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메이의 죽음과 중국에 살던 때의 경험에 대한 내 기억이 되살아 나면서, 아버지를 찾아 갈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아마 나는 더이상 아버지에 대해서 노여움을 느끼지 않았고, 그와 다시 연락을 하면 아마도 중국에 갔던 모험에 대해서 더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리라고 믿었는 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나는 미리 연락하지 않고 아버지 사무실에 나타 났다. 그는 침실에 앉아서 볶은 땅콩을 안주 삼아 듀보네이(프랑스 술)를 조금씩 마시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 갔는 데도 자리에 앉아서 거의 이년만에 갑자기 나타난 나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화가 난듯 엄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는 결국 책을 내려 놓고 나를 쳐다 보았다. “너 여기 왜 왔니?”
“인사 하려고요,” 나는 조용히 말 했다.
“너는 홍콩에 거의 일년 있었 잖아,”그는 비꼬는 투로 소리 질렀다. “이제와서 인사 하러 왔다고?”그는 고개를 쳐들고 나를 노려 보았다.
나는 그가 그의 친구들 모임을 통해서 내가 홍콩에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홍콩으로 망명한 정치인들은 사교클럽 을 만들었다. 그들은 서로 그렇게 친하지 않았지만 모임을 통해서 서로 연락하고 있었다. 나를 고맙게도 나에게 묵을 곳을 제공해 준 통 씨도 그 클럽에 속해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에게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내가 홍콩으로 돌아 왔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카즘과 증오는 나를 짜증나게 했다.
“아버지를 멀리 할 만한 이유가 있었 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말 했다. “설명해 드릴까요?”
“그래 말해봐.” 그는 두보네이를 한모금 마시면서 아무생각 없이 대답 했다.
나는 리우동무가 말한 것을 그에게 이야기하고 중국이 나의 대학 입학을 거절 한 후의 내마음의 상태를 간단히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를 중국정세를 알아보려는 시험도구로 쓴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입니다. 적어도 나에게 알려주고 당신의 전략에 나를 이용했서야 했습니다. 당신은 내가 중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나를 조정하여 귀국하게 했습니다. 나는 그 비참한 모험에 대단히 큰 값을 치루었습니다.”라고 덧부쳤다.
아버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로 눈 높이가 될 때 까지 그의 큰 몸이 쭉 펴졌다. 그는 내눈을 똑 바로 쳐다 보며 큰소리로 받아 쳤다.
“나는 네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그가 하는 일과 계획하는 것을 일일이 물어 볼 필요가 없다.”그는 화가 나서 거의 악을 쓰고 있었다. “내가 잘 되면 너도 이득을 볼것이고 내가 망하면 너도 괴로울 것이다.
이것은 삶의 법칙이다!”
이것은 대단한 권력 행사 였다. 나는 그가 나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개인 소유물 처럼 취급하는 것을 계속 하도록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당장, 그의 소유권 주장에 대항하는 대답을 하고 버텨야 했다.
“아니요, 그것은 삶의 법칙이 아닙니다. 아버지. 그것은 당신의 삶의 법칙 입니다. 나는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그는 눈을 불알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또한 내가 당신의 성공과 번영으로 부터 내가 이득을 본 기억 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내가 당신의 도구로 쓰이거나 당신의 실패로 인한 짐을 내가 질머질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가 화를 못 참고 폭발 하는 순간을 보았다. 내가 홍콩에서 들어간 첫 학교에서 퇴학통지서를 가지고 집에 돌아 왔을 때와 똑 같이 그는 그의 오른손 등으로 나를 힘차게 후려 치려고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러나 나는 이미 10살 먹은 허약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그 보다 더 큰 몸집을 가지고 있었고, 키도 더 컸고, 더 빨랐다. 이번에는 나를 습격하지 못 했다. 나는 몸을 숙으렸고 그의 손은 내 머리위를 지나갔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가라테 자세로 무릎을 구부리고 주먹으로 내 가슴을 치기 시작 했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오른쪽; 마치 가라테 연습 처럼 그의 주먹은 쉴새 없이 들어 왔다.
나는 놀라서 거기 멍청히 서서 그의 펀치를 받았다. 내 마음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감각은 정지 되었다. 그가 그쳤을 때, 분노가 내심장의 얼음을 깨고 내 가슴에 차 올랐다. 그의 펀치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튼튼 했지만 늙은이 였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화나게 한 것은 그의 폭력적인 폭발이었다.
그는 그의 팔을 양 옆으로 내리고 나의 시선을 피하면서 나에게서 물러 났다.
“왜 그만 두었어요?” 나는 항의 하는 쪼로 물었다.
“내 팔이 지쳤다.” 그는 나 있는 쪽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의 얼음장 같이 찬 대답은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세상의 모든 유교적 윤리에 대한 교육, 효도, 조상숭배, 부모에게 복종도 나를 붙들 수 없었다. 나는 격분 했다.
나는 그의 팔을 붙들고 이를 악물고 그의 놀란 얼굴에 대고 이빨사이로 말을 내 뱉었다.
“이게 마지막 입니다! 절대로 마지막 입니다! 당신은 나를 다시는 때릴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 또 그러면 저는 당신의 이 빌어먹을 놈의 팔을 부러트릴 것입니다!”
씩씩거리며, 나는 그의 팔을 놓고 방을 나왔다. 입구에서 나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맛있는 음식을 해주었던 메이드를 만났다. 그녀는 순진하게 물었다. “리 씨 방에서 누가 북을 쳤나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나는 당황 하는 목소리로 말 했다. “아버지와 게임을 했어요.”
길에 나오자, 소리지르고 싶은 충동이 나를 지치게 했다. 나는 감당하기 힘든 수치감에 싸였다. 아버지 때문에 생긴 수치! 나 자신에 대한 수치, 그리고 짧은 아버지와의 대립에 대한 수치!
그의 사무실에서 몇 블럭 가지도 못해서, 나는 무너 졌다. 보도에 주저 앉아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나는 무릎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울었다. 다행이 이 부자 동네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나를 원을 만들어 에워싸고 내가 미쳤나 보려고 했을 것이다. 공공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광경이 벌어 졌을 때 전형적으로 일어 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몸을 추스리고 정신을 차리자, 나는 무척 지쳐 있었고 외로움과 공포스러운 공허감이 나를 엄습 했다. 나는 겨우 일어서서 천천히 집을 향해서 걸어 갔다. 내눈은 쓰라렸고 나는 마치 부상당한 사람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걸었다.
우울증이 맹렬하게 다시 나를 덮쳤다. 삶이 견디기 힘든 것 같았다. 가난과 배고픔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풍부함과 배부름이 나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지도 않았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 가?
중국인이 성장 할 때 몸에 배인 명백하고 절대적인 이상적인 인생은, 학교에서 분명히 강조 한바 있고 집에서 가르쳤고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 온 것과 같이,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었다. 세속적인 성공의 기둥은 중요한 순서로 나열 하자 면, 명예, 권력, 그리고 부 였다.
나는 그때 재정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었지만, 일생동안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재산을 하나도 모으지 못했고 내 돈을 내 가족이나 내 친구들을 위해서 너그럽게 써 본적이 없다. 나는 아직 명예롭다고 할 만한 어떤일도 성취하지 못했다 - 특히 전형적인 경로인 나의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나는 확실히, 내가 가장 싫어 하는 기둥인, 아무런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나는 일부러 세속적인 목표, 아니 인생의 다른 어떤 목표도 생각하는 것을 회피 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살아 남으려고 버둥거리 느라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 같은 심각한 문제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나는 우울증 속에서, 미래-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래의 부재가 나를 다시 괴롭히고 있다. 나는 무엇을 할 까? 나는 무엇이 될까? 인생에서 내 사명은 무엇일까?
나는 한가닥의 실마리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항상 누가 정해준 인생의 목표에 대한 가치를 의심했다. 그것에 따라서 산 아버지는 그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자신있게 나를 고무시키지 못했다. 그는 중년에 명예, 부, 그리고 권력을 얻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더군다나, 그의 세속적인 성공에 대한 집착은 그를 비뚤어지게 했을 뿐만아니라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아직도 나는 전통적인 인생의 목적을 대신할 다른 목적이 없었다. 대답과 자신감은 나와 멀어지는 데, 질문과 의심은 나를 속박 했다.
프라토에 관한 닥터 로이의 강의에서, 나의 인생에대한 통찰력의 부족 뿐만아니라 내생각이 피상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문학과 철학에 관한 책을 읽어서 나자신을 튼튼히 하려고 노력 했다. 지금, 인간됨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절실 한 순간에 나는 아무런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읽은 것들 모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나의 얄팍함과 부적절함은 나를 무척 괴롭게 했다.
나는 방향타 없이 망망 대해에 서버린 난파선이 된것 같았다. 그날 저녁, 멍한 기분으로. 러시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24개의 빵 덩어리(loaf)를 사서 빈민가의 집없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눈을 크게 뜨고 내가 미쳤다는 듯이 쳐다 보았다. “미친놈이 그들에게 빵을 주려고 왔구나”! 라고.
나는 그들을 이해 했다. 잘사는 사람은 병, 폭력,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참상의 모습과 냄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빈민가에 나타나지 않았다. 누가 왔다면, 공식적인 업무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는 더럽고 깔끔하지 못한 거리의 말썽꾸러기 아이들을 쫓아 버리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그들이 모르게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는 지를 몰랐다. 내가 난징의 빈민촌에서 보낸 시절이 나에게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 친구와 나는 거리의 장난꾸러기들 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확고한 충성과 절대적인 헌신으로 뭉쳐 있었다. 그 이래로, 나는, 이상적이고 아마 낭만적인 인간관계를 그리워 했다. 그것이 존재 한 다면, 아마 커다란 신체적인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로 뭉치는 순진한 아이들 간에만 일어 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저녁, 내가 빵덩어리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때, 그들은, 내가 옷을 잘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내가 나자신을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나는 민민촌에 사는 친구들에게 나를 보내주는 기적이 일어 나기를 소원 했다. 나의 예전 삶으로 돌아가서 그들과 합류할 수 있다면 나는 모든 물질적인 득을 기꺼이 포기 할 것이었다. 빈민가의 장난꾸러기 들에게 음식을 주고 나니 나의 불안감이 좀 갈아 앉았다. 마치 내가 옛 내 절친한 친구들과 똘똘 뭉치는 기분을 조금 다시 찾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후에, 저녁내 우울한 기분이 맴돌았고, 다음날에도, 그다음날에도 끝이지 않고 계속 되었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조급해 졌다.
나자신에게 말을 해 보았다. 귀신을 생각 하던 어린시절 이래 해본적이 없던일이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우울증은 내 몸의 피를 빨아 먹는 거머리 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나의 정신상태는 심각한 우울증으로 퇴행 했다. 나의 개혁학교 시절이 끝나갈 무렵 리우 동무에 의해서 야기 된 정신적인 파멸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더 심했다!
나는 모든것을 잊어버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육체적으로 편안 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이미 잘먹고, 좋은 옷을 입고, 내 살곳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잘먹고 잘 차려 입는 것은 즐거웠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영혼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 했다.
나는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내마음에서 털어 내려고 서스펜스 소설을 읽으려고 했으나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 그만 두었다. 구성이나 언어에 정신을 쏟을 수가 없었다.
내 우울증이 점점 악화 되면서, 나는 청 치의 강의를 들으려 가지도 않고, 어머니 방문을 걸르는 때도 자주 있었다. 어느날 모든것이 희미해 졌다. 모든것이 어둡고 의미가 없었다. 어느날 아침, 나는 내가 표류하는 난파선이 아니라, 침몰하는, 그것도 빨리 갈아 안는 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을 까?
정신과적인 도움을 받는 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중국이나 홍콩에서 정신과 치료는 들어본적이 없었다. 거의 대부분의 중국사람들은 당시에 정신과를 마법이라고 생각 했다.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받으려면 자신과 아무 상괸이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순수한 감정을 들어 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습관과 인간관계의 규약에 반대 되는 태도이었다. 대신에, 가장 친밀하고 서로 의지 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흔히 도움을 청했다. 이 상호 의존은 동아시아 인간관계의
핵심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의지 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전혀 관계가 없거나 둘 중의 하나 였다.
나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에게 충고를 해줄 헬렌 이모도 다-게도 없었다.
한 두주 지난 다음, 뜻밖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어느날 저녁 때, 나는 아이들과 과외 수업을 마치고 청 치 운동장 트랙에 가서 어두워 질 때 까지 뛰고 또 뛰었다. 내 마음속에 맺힌 것을 씻어 내기 위해서 였다. 한 바뀌 돌고 나니, 숨이 넘어 가고 내 심장은 너무 빨리 뛰어서 내 가슴이 벌렁 거렸다. 나는 곧 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죽을 것 같은 생각도 나를 멈추게 하지 않았다. 지쳐서 죽는 것이 그치지 않는 우울증 보다 훨씬 나았다. 나는 계속해서 뛰었다. 숨은 차올랐고, 장단지가 풀리고, 배에 경련이 왔다. 나중에는 내 다리가 휘청거려 뛸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그후 적어도 한시간을 트랙에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침대에 쓰러져 땀에 젖은 옷을 입고 골아 떨어 졌다. 나는 무려 16시간을 잤다. 그것은 땀이 나의 암흑 같은 생각을 씻어 낸 것 같았다.
잠에서 깨니, 다리는 아팠지만, 내 마음은 홀 가분 했다, 몇 주만에 처음으로 나는 다시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달리기를 치료법으로 하기로 결정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뛰고 다리 아프고 하는 일을 저녁 때마다 반복 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 도.
한달 동안 달리기를 계속 하고 나니, 내 정신과 몸이 튼튼 해 졌다. 나는 청 치의 육상부에 들어 갔다. 코치는 나를 단거리 스프린트를 하게 했다.
나는 처음으로 100미터 스프린트를 했는 데 12초를 넘기지 않고 달렸다. 코치가, “와우”하고 놀 랐다. 나는 너무나 좋아서 환하게 웃었다.
그후 나는 스파이크 신발을 샀다. 그것은 스니커 보다 너무나 가볍고 훨씬더 순발력을 주었다. 그것을 신으면, 나는 발에 날개를 단 그리스 신 헤르메스 같이 느껴 졌다. 몇주 지나지 않아 나는 100 미터를 11초 조금 넘게 달릴 수 있었다.
나는 청 치의 매년 열리는 육상경기에서 100 미터와 200미터 달리기를 그리 어렵지 않게 우승 했다. 그런다음, 나는 홍콩있는 대학 육상경기에 청 치 대표로 출전하여 우승 했다. 매년 반복해서 교내 시합과 홍콩 전체 시합에서 우승 했다. 나는 내가 받은 메달과 트로피를 모두 어머니한테 갓다 주었다. 어머니와 나는 자주 우승을 축하하기 위해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우승은 중독적이고 전염적이었다. 그것은 좌절감이 따르지 않는 황홀감(high)을 주었고, 실패를 망각하게 했다. 육상에서 승리의 맛을 본후, 나는 내가 찾을 수 있는 모든 학교 대항 그리고 국제 콘테스트에 참여 했다. 토론 콘테스트, 수필 콘테스트, 웅변 콘테스트에서 우승 했다. 12달이 지나자, 나는 홍콩 대학가에서 유명인사(celebrity)가 되었다. 작은 성공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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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치 육상부에서 나는 400 미터 달리기 선수 데이비드 린을 만났고 나와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의 침착하고 활력있는 성격은 나의 충동적이고 기분에 기복이 심한 나와 잘 균형이 맞았다. 안경을 끼고 잘 생긴 그는 부모로 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행복한 가정 출신이었다. 우리는 성격상으로 서로 보강 하면서 식당에 같이 가고 홍콩 주위의 섬에 가는 짧은 여행도 같이 했다. 나는 그의 충고를 중요하게 받아 드렸고 그도 나의 충고에 감사 했다.
어느날 데이비드는 미국 대학에 갈 수 있는 모든 비용을 대주는 몇개의 장학금을 받기 위한 앞으로 있을 콘테스트에 대해서 나에게 말 했다. 1961년 국제 피난민의 해를 강조하기 위해서 미국무성은 6 펠로우쉽 포지숀을 홍콩 주민들을 위해서 마련 했다. 공산주의 중국으로 부터의 피난민을 구제하기 위한 단 한번의
공여 였다. 홍콩에 사는 중국사람 거의 모두가 공산주의 중국에서 온 피난민 자격이 있었다. 다른 유일한 조건은 고등하교 졸업장이었다.
데이비드는 우리 둘 모두 참가하기를 원했다. 나는 데이비드와 같이 참가 하지 않려고 했다. 왜냐면 나는 1957년에 중국으로 돌아가서 일년을 보냈기 때문에 미국 대사관에 요 주의 인물로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그의 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요주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어도 같이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그는 힘든 경기동안에 나의 응원과 동반자로서의 지지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요주의 인물로 등재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 했다.
서로 내가 참가하냐 마냐에 대해서 티걱 태걱 하다가, 그의 고집에 내가 졌다.
천명이 넘게 이 콘테스트에 참가 했다. 첫 단계로 필기 시험이 있었고, 마지막 6명이 선택 될때까지 3단계의 면접이 있었다. 나는 요주의 인물로 등재 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시험에 임했다. 그래서 나는 완전히 안심하고 시험을 보았다. 그저 친구를 돕기 위해서 라고 생각했다. 나의 침착한 태도는 필기 시험과 인터뷰를 더 잘 치르게 해주었다.
우리는 놀랍게도 둘 다 합격 했다. 데이비드는 오레곤주의 리드 대학, 나는 메인주의 보우든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때 까지 나는 메인주 혹은 보우든 대학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목적지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학교가 유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실망하지도 않았고 용기를 잃지도 않았다. 외국에서 공부 할 수 있는 펠로우십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선물이었다. 고등학교 때 부터 가지고 있던 꿈이었다. 펠로우십으로, 나는 학위를 받기 위해서 공부 할 수 있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으며, 경력을 쌓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식민지 사회라는 고립된 집단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한가지 장애를 극복해야 했다. 이 펠로우십 프로그램은 홍콩에서 미국으로 가는 항공료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비교적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항공료를 지불할 만큼 돈이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찾아 갔다.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돈을 빌릴 수 없느냐고 부탁할 요량이었다. 가슴이 몹시 두근 거렸다.
어머니는 그녀의 평상시의 표정없는 모습으로, “내 아들아, 내가 알아 보마.”라고 말 했다. 그녀의 눈은 꼭 해 주겠다는 결심을 보여 주듯 번뜩 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철 같은 강한 힘이 있었다. 나는 오래 전에 그녀가 나에게 더 좋은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 하겠다고 나에게 약속한 날이 생각 났다.
기적적으로, 어머니는 그녀의 교회가 나에게 빚을 주고 내가 2년 안에 갚는 방법으로 항공료를 마련 했다. 그녀의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있는 지를 아는지 나는 몰랐다.
나는 결국 자유롭게 되었다! 밤에 나는 속으로 나자신에게 크게 말 했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흥분해서 여러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을 잘 수 없는 밤이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러시아 식당에 가서 내가 들고 갈수 있는 한 많은 빵 덩어리를 사가지고 빈민가의 배고픈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는 거의 일년전 나의 우울증이 무척 심할 때, 굶고 있는 아이들에게 빵을 갖다 주면, 내 가슴알이가 나았다. 지금, 나는 아프지 않다. 반대로, 나는 희망과 행복으로 꽉차 있다. 나는 그냥 아무도 모르게 진심으로 거리의 장난꾸러기 들과 나의 행운을 나누고 싶었다. 그들은 나의 기쁨과 의도를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내가 난징 빈민촌에서 허물없이 지내던 친구들과 어울리던, 내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제, 처음으로, 나는 옛날 행복했던 날에 버금가는 미래가
찾아 오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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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6일이 출발 날짜 였다. 케이-데 공항에 가는 길에 나는 떠난 다고 인사하려고 어머니의 신학원에 들렸다. 짧은 방문이 끝날 때, 어머니는 난생 처음으로 나를 포옹 했다. 그리고 그녀는 엄숙하게 말 했다. “아들아, 나는 네가 너 자신을 잘 보살 필 수 있다고 생각 한다. 나의 오직 한가지 소원은 네가 미국 사람과 결혼 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 나는 결혼할 생각 없어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답 했다. 나는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내 대답은 진실이었고 단호 했다.
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어머니도 깜짝 올라게 했다. 그녀는 그녀가 아버지를 떠나겠다고 나에게 말할 때 처럼 서글픈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그녀는
내 인생은 나 자신외에는 아무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 해 주었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떠났다.
공항에서 나는 항공기가 이륙하고 착륙하는 것을 보고 경탄 했다. 내가 타고 갈, 빨간 페인트로 꼬리 부분에 “TWA” 라고 쓴, 흰색의 4개의 엔진이 달린 프로펠러 비행기를 감탄하면서 쳐다 보았다. 그것은 나를 새로운 삶으로 운반할 배였다. 내가 너무나도 많이 읽고 들었던 나라에서 신선한 출발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분 했다. 그러나 기뻐서 흥분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미국은 나에게 친절 할 까? 나는 적응 할 수 있을 까? 아니면 중국 사회에서 살려고 돌아 오게 될 까?
내가 탑승하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를 전송하기 위해서 게이트 주위에 모여서 손을 흔들고 있는 군중을 쳐다 보았다. 데이비드 린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내가 아는 사람은 눈에 띠지 않았다. 그렇다고, 슬퍼지거나 향수에 빠지지는 않았다. 나는 새 출발과 새로운 인생의 시작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저멀리에서 아버지가 보였다.
키크고 쓸쓸해 보이는 그가 군중들 뒤에 서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한 커다란 머리가 그 앞의 키작은 사람들 위에 우뚝 솟아 보였다. 나는 그에게 내가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나는 그가 이곳에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미국에 간다는 소식을 그의 사교 클럽을 통해서 들었을 것이다. 잠시 나는 당황 했다.
내가 군중 사이로 그에게 접근 하면서 내가 아는 그의 인생이 내 마음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자수성가한 그는 인생여정의 끝에 도달 했다. 야망에 찬 외골수의 명예와 권력 추구의 끝이었다. 그는 30대 초반에 크게 성공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후 그의 인생은 좌절과 실망으로 꽉차 있었다.
그의 아내는 그를 떠났다. 그의 자식들은 그를 멀리 했다. 명예와 권력은 그를 피해 갔다. 그의 정치 경력은 죽었고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20여년 동안 영국 식민지에서 살았지만, 캔톤 사람들과 서양사람들의 인해 가운 데의 완전한 이방인으로 남았다.
그는 고독하고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난 3년동안 그를 멀리 했다. 나는 사는 데 얽매여, 그의 관점에서 그의 인생을 보려고 한적이 없었다. 지금 내가 떠나려는 순간, 그의 세상에 대한 견해가 뜻밖에 갑작스런 폭풍처럼 내 머리속에 터져 나왔다.
나는 자책감에 휩싸였다.
나는 그가 과거의 그로 부터 달라지기를 기대 했다. 그는 비참하고 무자비한 삶을 살고 있는 산동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 났다.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그가 될 수 있었던 것과 다른 사람이었기를 바랐다. 그는 한가지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족과 어떻게 지내야 할 지 전혀 몰랐다. 그는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조상을 모시던 예법과 전통에 따라 대부분의 인생을 살았다. 그는 진정으로 외골수 적인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 하는 것이 그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혜택을 준다고 믿었다. 그들은 직계 가족, 그의 친구, 그리고 그를 따르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의 가족을 멀리하고, 가족들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자식을 담보로 쓰는 것은, 그가 배운 것과 똑 같이, 그와 관계있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 주는 길이었다. 실패가 가슴이 아플 정도로 확실해 지고 회복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고치속에 들어 간 누애 처럼 고립되었고 비합리적으로 행동 했으며 가증스럽기 까지 했다.
나는 분노와 비난으로 그에게 보복 했다.
이런 생각이 내 마음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나는 그를 향해서 걸어 갔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도착했을 때, 말이 저절로 나왔다. 나는 그 앞에 섰다. 그는 키가 컸지만 구부정 했고 자존감이 있었지만 쓸쓸 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슬픔으로 주름져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앞에 서서 내눈에 눈믈이 고이자 그의 매서운 모습이 점점 희미해 졌다.
그때, 나에게 뻗치는 그의 팔이 보았고, 곧 그의 포옹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나는 내팔로 그를 감싸 않고 그를 내 쪽으로 잡아 당겼다. 그때서야, 그의 눈물이 내 목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 헤어질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돌아 서서 보딩 게이트로 들어가는 데, 내 볼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가 나에게 준 포옹 보다 더한 기적을 기대 하지도 않았고 기대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의 희미해져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복밭치는 감정으로 인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멀어지는 나에게 외쳤다.
“아들아, 몸 조심해라!”
비행기 안에서, 내 볼에 묻은 소금기를 씻어 내면서, 나는 미국에 도착하는 즉시 그와 연락하고 그와의 관계를 다시 이루기로 결심 했다. 인생에 더많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몇년동안 더 배워야 하고, 성공 하는 해와 실패하는 해도 있을 것이고, 고통스러운 해와 즐거운 해도 있을 것이지만, 내 뒤에서 아버지의 사라져 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내가 비행기와 새인생에 첫 발을 들여 놓던, 아무것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순간에 비교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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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철 James Ohn은퇴 의사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