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동촌 지교헌 교수님이 저에게 메일로 보내오신 글입니다. 카페에 글을 올리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저에게 부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글에 언급된 사효당기는 '창작한 글 227번에 올려져 있음을 부기합니다.
코로나로 금년은 한식차례도 가을 시제로 연기했고, 10월 상달의 시제도 열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사효당를 바라보면서'라는 선생님의 옥고를 보니 시의적절한 수필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페지기 올림)
사효당(思孝堂)을 바라보면서
지 교 헌
내가 이따금 찾아가는 블로그를 열어보니 ‘사효당’(思孝堂)이라는 현판이 보이는 건물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효당’은 충남 청양군 장평면 분향리에 있는 영일정씨 통덕랑공파의 재실(齋室)이고 조상들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경건한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 모인 여러 후손들 가운데는 내가 존경하는 J교수가 어엿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모시고, 선조님들의 제사를 정성으로 지내며, 선조의 고귀한 뜻을 이어가야 한다. 선조님들은 후손들이 건강하고 바르게 살기를 원하신다. 효도의 실천은 백 가지 행실의 근본이다. 부부와 형제자매와 친족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친지와도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로 된 ‘사효당기’(思孝堂記)가 시선을 끌었다.
나는 나의 유소년 시절이 떠올랐다. 어른들을 따라 증평읍 두타산(頭陀山) 대아봉(大雅峰) 밑에 자리 잡은 옛 고향을 찾아가서 제사에 참여하였던 일과 한 마을에 있는 백부님댁에 가서 해마다 제사에 참여하던 일이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명절에는 원근각지의 많은 친족들이 대아봉 밑에 모여서 제례를 행하기는 하지만 일부는 기독교의 분위기에 젖어 전통적인 제례는 많이 희석되고 간략한 기도로 그치는 경향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농업사회에서 근대적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조상숭배사상이나 그 형식이 크게 변모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제사형식 뿐만 아니라 장례형식도 종래의 매장(埋葬)형식이 아니라 화장(火葬)을 거친 납골(納骨)이나 수목장(樹木葬)으로 변천하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최근에는 ‘효도’라는 언어도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은 전근대사회에서 강조되고 회자되던 용어일 뿐만 아니라 선조나 부모에 대한 공경이나 봉양(奉養)의 개념이 매우 다르게 변형하고 또한 쇠퇴한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효’(孝)라는 개념은 본디 자식이 부모를 계승하고[承老], 잘 섬긴다[善事父母]는 뜻인데 이러한 본래의 뜻이 여러 가지 사회의 변천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종래의 농업사회에서는 부모님을 멀리 떠나지 않고도 봉양할 수가 있었지만 상공업이 중심이 되고 활동무대가 국제화하는 산업사회에서는 부모를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조건과 형편과 가치관이 유연성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식이 부모를 계승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계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적으로도 계승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은 육체적 존재인 동시에 정신적 존재로 역사와 문화를 창조하며, 형이상학적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효당’을 소개한 J교수는 유년시절에 부친을 사별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면서 갖은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극복하고 초·중등교육과 대학교육을 거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생활로 일생을 보냈으며 정년으로 퇴직한 후에도 계속하여 학문에 열중하여 매우 중요하고 알찬 논문을 발표하고 때에 따라 강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전통윤리의 핵심을 이루는 <효경>(孝經)에서는 “신체발부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함부로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실마리이다. 입신양명하여 부모님을 드높이 나타내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 하고, 또한 효도란 “부모를 섬기는 것으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 나아가서 입신으로 마친다”(夫孝 始於事親 中於事君 終於立身)고 하였다.
‘사효당기’(思孝堂記)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첫째로 몸이 건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재능이 있고 고귀하고 위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어도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인류를 위하여 그것을 실현하고 발휘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곧 효도의 수단이고 형식이면서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부모님을 봉양하고 국가사회와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효도의 요체(要諦)라는 것이다.
따라서 효도라는 윤리나 가치관이 자녀들의 발전과 사회적 성공을 저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동력이 되고 그것을 선양하고 조장하는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우리는 급격한 사회의 변천을 빙자하여 지극히 단편적이고 근시안적이고 편협한 시각에서 효의 개념을 인식하거나 정의하거나 비판해서는 실수와 오류를 범하기 쉽다. 다시 말하면 효도의 적극적이고 순기능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J교수는 본인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모두 출세한 것을 보면 효의 윤리를 충분히 실천하고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효도의 3가지 단계이면서 전형적인 유형이기도 한 사친(事親)·사군(事君)·행도(行道)의 단계를 모두 실천하고 실현하기는 결코 용이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완벽한 단계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바람직한 윤리관이 될 수 있고 가치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고전(古典)을 통하여 새롭게 깨우치고 체득하는 모든 가치관이나 철학은 시대적·역사적 배경에 따라서 차이를 나타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J교수가 참여하여 새로 건립한 ‘사효당’은 하나의 문중(門中)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국가사회의 발전에도 공헌되는 훌륭한 기능을 발휘할 것이며, 그로 말미암은 경로효친사상은 인류의 영원한 정신적 가치로 이어지고 빛날 것이다.
(2019.4.23.)
첫댓글 정구복 박사님의 <思孝堂 記>를 감명 깊게 읽고 댓글 소감 한 줄 달았던 기억이 나는데, 오늘 동촌 지교헌 수필가님의 사효당기 관련 자상한 해설이 곁들인 옥고를 찬찬히 읽어보니, 이 시대 孝를 어떻게 후손에게 가르치고 행동으로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 그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두 분 학자님의 넓고 깊은 학문과 인품에 존경심을 표합니다. 처음 보게 될 독자를 위하여 정구복 박사님이 올리셨던 <사효당기> 사진을 올립니다.
장천 선생 사진 까지 찾아서 첨부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동촌선생의 옥고에 과분한 찬사를 하신 점에 대하여 실상을 지나친 것으로 생각하여
못내 부끄럽습니다. 두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나가지 않고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것 같아 겸연쩍 스럽습니다.
여기서 잠깐 효도의 개념에 대하여 사족을 붙여보고자 한다.
"孝"라는 개념에느 "부모를 잘 계승한다"는 뜻과 "부모를 잘 섬긴다"는 뜻이 있으며, '孝'라는 글자는 '효도 효'라고 읽는 동시에 '이을 효'라고도 읽는다. 따라서 '嗣子'라는 말이나 '孝子'라는 말은 똑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부모를 위한 제사의 축문에서 같은 말로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자녀가 부모를 잘 계승한다는 것은 부모를 위하여 자식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위하여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만일 자녀가 부모를 섬기기 위하여 희생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小孝에 속하는 것이며 立身 行道하는 것은 大孝에 속한다.
따라서 자녀들의 성공은 곧 孝道를 성취하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立身이요, 揚名이요, 行道이다. 입신하고 양명하면 자연히 그 부모도 드높이 드러나게 된다.
서양에서는" filial piety"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동양에서 말하는 효도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언어이다. 자녀의 성공이나 출세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다고 할 수 있으며 그 부모의 뜻을 저바리지 않는 것이 효도요 효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