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졸기(왕조실록 1570.12.1)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황(李滉)이 졸(卒)하였다.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도록 명하고 부의(賻儀)와 장제(葬祭)를 예(禮)대로 내렸다.
이황이 향리에 돌아가 누차 상소하여 연로하므로 치사(致仕)할 것을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병이 들었는데 아들 준(寯)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해조(該曹)가 틀림없이 관례에 따라 예장(禮葬)을 하도록 청할 것인데, 너는 모름지기 나의 유령(遺令)이라 칭하고 상소를 올려 끝까지 사양하라. 그리고 묘도(墓道)에도 비갈(碑碣)을 세우지 말고 작은 돌의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그 후면에 내가 지어둔 명문(銘文)을 새기라.”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죽었는데 준이 두 번이나 상소하여 예장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황의 자(字)는 경호(景浩)이고, 선대는 진성인(眞城人)이며, 숙부 우(堣)와 형 해(瀣)도 다 명망이 높았다. 이황은 타고 난 바탕이 수미(粹美)하고 재주와 식견이 영오(穎悟)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력으로 학문을 하였는데, 문장(文章)이 일찍 성취되었고, 약관에 국상(國庠)에 들어갔다. 당시는 기묘사화를 겪은 후라서 사습(士習)이 부박(浮薄)하였으나, 이황은 예법(禮法)으로 자신을 지키면서 남의 조롱이나 비웃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상한 뜻과 차분한 마음을 가졌다. 비록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과거를 통해 벼슬을 하기는 하였으나 통현(通顯)되기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을사년 난리에 거의 불측한 화에 빠질 뻔하고 권간들이 조정을 어지럽히는 꼴을 보고는 되도록 외직에 보임되어 나가고자 하였고, 얼마 후 형 해가 권간을 거슬러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그때부터는 물러가 숨을 뜻을 굳히고 벼슬에 임명되어도 대부분 나가지 않았었다.
오로지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서는 그것을 좋아하여 한결같이 그 교훈대로 따랐다. 진지(眞知)와 실천(實踐)을 위주로 하여 제가(諸家) 학설의 동이득실(同異得失)에 대해 널리 통달하고 주자의 학설에 의거하여 절충하였으므로, 의리(義理)에 있어서는 소견이 정미(精微)하고 도(道)의 대원(大源)에 대하여 환히 통찰하고 있었다. 도가 이루어지고 덕이 확립되자 더욱 더 겸허하였으므로 그에게 배우려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 들었고 달관(達官),귀인(貴人)들도 마음을 다해 향모(向慕)하였는데, 학문 강론과 몸 단속을 위주하여 사풍(士風)이 크게 변화되었다.
명종(明宗)은 그의 염퇴(恬退)한 태도를 가상히 여겨 누차 관작을 높여 징소(徵召)하였으나, 모두 나오지 않고 예안(禮安)의 퇴계(退溪)에 살면서 이 지명에 따라 호(號)를 삼았었다. 늘그막에는 산수(山水)가 좋은 도산(陶山)에 집을 짓고 호를 도수(陶叟)로 고치기도 하였다. 빈약(貧約)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淡泊)을 좋아했으며 이끗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그러나 보통 때는 별다르게 내세우는 바가 없어 일반 사람과 크게 다른 점이 없어 보였지만 진퇴(進退),사수(辭受) 문제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잘못이 없었다. 그가 서울에서 세들어 있을 때 이웃집의 밤나무 가지가 담장을 넘어 뻗쳐 있었으므로 밤이 익으면 알밤이 뜰에 떨어졌는데, 가동(家僮)이 그걸 주워 먹을까봐 언제나 손수 주워 담 너머로 던졌을 정도로 개결한 성품이었다. 주상의 초정(初政)에 조야(朝野)가 모두 부푼 기대에 이황이 아니면 성덕(聖德)을 성취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고 상 역시 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는데, 이황은 이미 늙었고 재지(才智)가 큰 일을 담당하기에는 부족하며, 또 세상이 쇠퇴하고 풍속도 야박하여 위아래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 유자(儒者)가 무엇을 하기에는 어렵겠다고 여겨 총록(寵祿)을 굳이 사양하고 기어이 물러가고야 말았었다. 상은 그의 죽음을 듣고 슬퍼하여 증직(贈職)과 제례(祭禮)를 더욱 후하게 내렸으며, 장례에 모인 태학생(太學生)과 제자들이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황은 겸양하는 뜻에서 감히 작자(作者)로 자처하지 않아 특별한 저서(著書)는 없었으나, 학문을 강론하고 수응(酬應)한 것을 붓으로 쓰기 시작하여 성훈(聖訓)을 밝히고 이단(異端)을 분별했는데, 논리가 정연하고 명백하여 학자들이 믿고 따랐다. 매양 중국에 도학(道學)이 전통을 잃어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 등의 치우친 학설들이 성행하고 있는 것을 슬프게 여겨 그 그름을 배격하기에 극언(極言)과 갈론(渴論)을 아끼지 않았고, 우리 나라도 근대에 화담(花潭) 서경덕(徐慶德)의 학설이 기(氣)를 이(理)로 오인한 병통이 있었는데도 그를 전술(傳述)하는 학자들이 많아 이황은 그 점을 밝히는 저술도 썼다. 그가 편집한 책으로는 《이학통록(理學通錄)》,《주서절요(朱書節要)》가 있고, 그의 문집(文集)이 세상에 전해지는데, 세상에서는 그를 퇴계 선생(退溪先生)이라 한다.
논자들에 의하면, 이황은 이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광조(趙光祖) 이후 그와 겨룰 자가 없으니, 이황이 재주나 기국(器局)에 있어서는 조광조에 미치지 못하지만 의리(義理)를 깊이 파고들어 정미(精微)한 경지까지 이른 것은 조광조가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남명 조식의 졸기 (왕조실록 1572.2.8)
처사(處士) 조식(曺植)이 죽었다. 조식의 자(字)는 건중(楗仲)이니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조언형(曺彦亨)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어른처럼 정중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통달하지 않은 책이 없었고 특히 《좌전(左傳)》과 유종원(柳宗元)의 글을 더욱 좋아하였으며, 저술(著述)에 있어서는 기발하고 고상한 것을 좋아하고 형식에 구애되지 않았다. 국학(國學)에서 책문(策問)할 때에 유사(有司)에게 올린 글이 여러번 높은 성적으로 뽑혀 명성이 사림(士林)들 간에 크게 알려졌다. 하루는 글을 읽다가 허노재(許魯齋.원나라 학자 허형) 의 ‘이윤(伊尹)이 뜻했던 바를 뜻하며 안연(顔淵)이 배웠던 바를 배운다.’라는 말을 보고 비로소 자기가 전에 배운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감하게 실천하여 다시는 세속의 학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경의(敬義)’ 두 자를 벽 위에 크게 써 붙여놓고 말하기를 ‘우리 집에 이 두 자가 있으니, 하늘의 해와 달이 만고(萬古)를 밝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성현의 천만가지 말이 그 귀취(歸趣)를 요약하면 이 두 자 밖에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학문을 함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는 예(禮)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만일 여기에 힘쓰지 않고 갑자기 성리(性理)의 오묘함을 궁리하려 한다면 이는 인사(人事)에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 아니어서 결국 마음에는 아무런 실지 소득이 없을 것이니 깊이 경계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천성이 효우(孝友)에 돈독하여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상복을 벗지 않고 여막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우 조환(曺桓)과 숙식을 같이하며 따로 거처하지 않았다. 지식이 고명하고 진퇴(進退)의 도리에 밝아 세도(世道)가 쇠퇴하여 현자(賢者)의 행로(行路)가 기구해지자 도를 만회해 보려는 뜻을 두었으나 끝내 때를 못 만났음을 알고 산야(山野)로 돌아갈 생각을 품었다. 만년에는 두류산(頭流山.지리산) 아래에 터전을 닦고 별도로 정사(精舍)를 지어 산천재(山天齋)라 편액(扁額)하고 여생을 보냈다.
중종조(中宗朝)에 천거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번 6품관에 올랐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으로 불러들여 대전(大殿)에서 상을 대하였는데, 상이 치란의 도와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니, 응대하기를 ‘군신간은 정의(情義)가 서로 믿게 된 연후에야 선치(善治)를 할수 있고, 인주(人主)의 학문은 반드시 자득(自得)을 해야 하는 것으로 남의 말만 들으면 무익합니다.’ 하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금상(今上.선조)이 보위를 이음에 교서(敎書)로 불렀으나 노병(老病)으로 사양하였고, 계속하여 부르는 명이 내리자 상소를 올려 사양하면서 ‘구급(救急)’이라는 두 글자를 올려 자기의 몸을 대신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시폐(時弊) 10가지를 낱낱이 열거하였다. 그 뒤 또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고 봉사(封事)를 올렸으며, 다시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신미년(1571)에 흉년이 크게 들어 상이 곡식을 하사하자 사례하고 상소를 올렸는데 언사가 매우 간절하였다. 임신년(1572) 에 병이 심하자 상이 전의를 보내어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상은 크게 슬퍼하여 신하를 보내 사제(賜祭)하고 곡식을 내려 부의하였으며, 사간원 대사간을 증직(贈職)하였다. 친구들과 제자 수백 명이 사방에서 찾아와 조상하고 사문(斯文)을 위하여 애통해 하였다.
조식은 도량이 청고(淸高)하고 두 눈에서는 빛이 나 바라보면 세속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언론(言論)은 재기(才氣)가 번뜩여 뇌풍(雷風)이 일어나듯 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욕(利慾)의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였다. 평상시에는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용모를 하지 않았는데 나이가 칠십이 넘도록 언제나 한결같았다. 배우는 자들이 남명(南溟)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문집 3권을 세상에 남겼다.
註: 1566.7.19 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정에서 왕손을 가르칠만한 사부(師傅)로서 경학에 밝고 행실이 착한 5인을 추천했는데 남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방정(方正)하고 염결(廉潔)하였으며, 세속을 벗어나 은둔하였으며 추상(秋霜) 같은 지기(志氣)가 있었다. 늙어 갈수록 더욱 엄격하여 남의 과오를 용서하지 않았다. 세상을 너무 깔보고 항시 하는 말은 거의가 풍자였으니, 대개 은거하여 방담하는 자였다. 자신이 말하기를 ‘나는 항상 객기(客氣)에 사역을 당한 적이 많다.’ 하였다. 중종조에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사은하지 않았고, 이때 6품 관직을 누차 제수하였으나 상소만 올리고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 매우 준격(峻激)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편지를 하여 나오기를 권하였지만 역시 응하지 않았다. 자호를 남명처사(南溟處士)라 하였고, 만년에는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깊은 골짜기 속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자주 먹을것이 떨어졌지만 태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