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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참된 예배이다(상)
<상>
1. 서론
1. 예배에 대한 정의
2. 참된 예배의 모습
3. 구별된 예배
2. 예배의 중요성
예배는 성경 전체의 강조점이다
1. 구약의 성구(聖句)들
2. 신약의 성구(聖句)들
예배가 운명을 결정한다
1.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당신은 올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가?
메이슨 조합(Masonry)은 형제단인가 사교(邪敎)단체인가?
2.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예배는 주일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드리는 것이다
영원 세계와 구속사가 예배로 설명된다
1. 창조 이전의 역사
2. 타락 이전의 역사
3. 타락 이후의 역사
4. 현재의 역사
5. 미래의 역사
예수께서 예배드릴 것을 명하셨다
<중>
3. 예배의 근거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응답 / 시편 22편 22-27절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는 이유 / 출애굽기 20장 22-26절
이사야의 예언으로 말미암은 계시 / 이사야서 66장 22-23절
회심한 죄인들의 반응 /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
기독교의 예배는 단순히 기독교화된 유대교 의식인가?
4. 예배의 대상
영으로서의 하나님(하나님의 본성)
1. 하나님의 영성(靈性)
”새롭고 산 길”(히 10:20)이란 무엇인가?
이방 종교들은 하나님이 한정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외적인 상징과 내적인 실체
2. 하나님의 거룩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접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하나님의 본질적 관계)
1. 하나님에 대한 삼위일체적인 표현
당신의 교회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가, 아니면 사람에게 맞추는가?
2.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예배
예배에 대한 예언적 묘사
5. 예배의 처소
옛 언약의 상징
새 언약의 실체
1. 성전인 성도 개개인의 몸
2. 성전인 성도들의 회집(會集)
당신의 불은 꺼져가고 있지 않은가?
<하>
6. 예배의 특성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의 편중
1. 사마리아인의 예배(진리없이 신령으로만 드림)
2. 유대인들의 예배(신령없이 진리만으로 드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1. 신령(영혼,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당신은 교회생활이 지루한가?
2.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왜 강해 설교가 중요한가?
7. 예배의 결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심
그리스도인들이 정결케 됨
교회가 유익을 얻게 됨
잃은 자들이 복음을 받게 됨
8.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에로의 부름
점검해야 될 사항
1. 진심
2. 확신
3. 겸손
4. 정결
9. 예배의 장애물
회개치 않은 죄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함
헌신, 곧 희생을 꺼려함
우리는 ”오 !”를 잃어가고 있지 않은가?
.....................................................
* 이 책의 원서인 「True Worship」은 녹음 테이프를 풀어 만든 책이어서 반복된 곳과 주제가 겹치는 부분이 많았으므로, 독자의 편의를 위해 설교 내용은 손상됨이 없이 제목별로 재편집, 번역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1. 서론
요한복음 4장 20-24절이 예배에 대한 연구의 중심 본문이 될 것이다. 예배에 관련하여 연구해 나감에 있어서 가끔 우리는 이 구절로 다시 돌아와 이 구절을 더 깊게 고찰할 것이다. 나는 요한복음 4장 20-24절이 신약성경에서 예배라는 주제를 다룬 가장 중요한 성구(聖句)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의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
주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간의 대화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니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0-24).
본문에서 ”예배”란 단어가 아홉 번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요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신문의 교회 집회 광고난(미국에서는 주말 신문의 교회 난에 집회 광고가 나감 - 역자 주)을 통해 그 주일에 어느 교회에서 누가 특송(찬양)을 하는가만을 훑어 보며,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해주는 교회를 찾아 나선다. 자, 만일 당신이 음악으로부터 얻을 수있는 무엇을 찾아 교회에 나간다면, 또는 설교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간다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음악이나 설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만 당신이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는 자극일 뿐이다. 당신이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교회에 가는데,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뤄지는 것이지 받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나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찬양을 드리면 그분의 은혜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셨으므로 드리는 것에 축복이 있다. 이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 갈 때에 당신은 예배를 드리는가? 예배를 드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예배를 드릴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당신이 옷을 입을 때나 교회로 가는 차 안에서 당신의 마음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는가? 지금까지 당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가? 만일 없다면, 나는 이 예배 연구에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당신이 앞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목적하는 것은 우선 당신이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숙고하고, 둘째로는 당신이 정당하게 정의된 개념에 따라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며, 세째로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제 그렇게 하겠느냐고 당신에게 촉구를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부인하는 처신을 하는 것이 된다. 나는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든지 그렇지 않든지의 대안 밖에는 없는 구석으로 당신을 몰고 가서, 당신이 이제까지 영위해 온 종교생활의 실상을 파악하게 할 것이다.
1. 예배에 대한 정의
예배란 과연 무엇인가? 잘 알려질 정의(定義)는 ”예배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돌리는 존경심”이다. 그것은 ”더 높은 존재에게 경의(敬意), 존경, 숭배, 존중, 찬양, 찬사, 또는 영광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예배”란 단어는 우상이나 물질적인 것들이나 참 하나님께 돌려진 존경심을 언급하는 데에 다같이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 단어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단어는 자기보다 높은 존재에게 드려진 경의(敬意)를 나타낼 뿐이다.
신약성경(헬라어)에서 ”예배”란 말을 표기할 때 ”...을 향하여 입맞추다, 손에 입맞추다, 절하여 숙이다, 엎드리다” 등을 의미하는 「프로스큐네오」(proskuneo)를 자주 사용한다. 예배의 개념은 상전 앞에서 존경과 경의, 경배, 숭앙의 뜻으로 엎드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맥락에서 이 단어를 하나님께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하며 존경과 숭앙의 뜻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그분의 절대적 속성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
그렇다면 예배는 본질적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일에 함께 모이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우리는 설교자나 성가대에 앉은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모인 것이다. 설교와 성가는 다만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열망을 일으켜 주는 자극일 뿐이다.
따라서, 당신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예컨대 ”축복”을 받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면 그것은 동기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다면 우리의 초점은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에 맞추어져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려는 타는 듯한 열망이며, 그것은 우리 자신과 마음의 태도와 우리의 소유를 드리는 것까지 포함한다.
2. 참된 예배의 모습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서의 예배의 개념에 대한 실례를 들어 보겠다.
성막에서의 향의 향기
출애굽기 30장 34-38절은 예배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어떻게 예배가 드려져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지시를 하신다. 그 지시된 것들 중의 많은 것은 상징적인 것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교육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30장 34-38절에 묘사된 그런 교육 수단으로 사용된 것들 중의 한 가지가 예배에 있어서 놀라운 통찰력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즉, 독특하게 구별되어 다른 어떤 요소로도 영향받지 않게)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34-36).
실제로 향긋한 냄새가 나는 이 향은 성막 안에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해야 했기 때문이다. 계속하여 37-38절은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말한다. 당신은 성경에 향의 제조법이 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아마도 그 향은 가장 좋은 향기를 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서 그 향을 만들면 목숨을 잃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향이 하나님의 코로 올라갔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로만 올라가는 독특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예배란 개인의 마음에서부터 바로 하나님의 코로 올라가는 독특하고도 성별(聖別)된 거룩한 행위임을 보여 주는 훌륭한 예배의 모습이다.
마리아의 향유의 향기
성막에서 향의 향기가 하나님의 코로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를 의미했다. 요한복음 12장에 또하나의 향기로운 예물이 예배로서 드려진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간의 형태로 살아계신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 그것이 드려졌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1-3).
마리아는 더럽고 먼지가 묻어 있는 예수의 발을 씻기 위해 그녀의 영광인 머리털(고전 11:15 참조)을 사용했다. 또 마리아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약 1년간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의 값비싼 향유를 사용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이다. 예배는 곧 자기를 낮추는 것이며, 드림에 있어서 아낌이 없는 것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달랐다. 마르다는 늘 봉사했었고, 마리아는 항상 예수의 발 밑에 앉아 있었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전에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마르다의 섬기는 것보다 좋다고 말씀하셨다(눅 10:38-42 참조). 그러나, 유다는 마리아가 향유를 갖고서 한 일을 보고는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했다. 6절은 유다가 정말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고, 그 돈은 다만 자기를 위해서 필요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 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를 가만두어 ...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7-8절)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구제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형제에게 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실용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마르다의 계열에 속해 있다. 즉, 항상 바쁘다. 우리의 교회들은 모든 프로그램과 활동들로 조화롭게 체계가 잡혀 있다. 또 우리는 아주 신중을 기하여 돈을 낭비하지 않는다. 심지어 너무 신중하여 하나님께 드리는데에도, 1년 치의 수입을 다 쏟아 붓고 겸손하게 엎드려 주님의 발을 머리털로 씻기기는커녕 아주 신중하게 주팔 알을 튕기려고 한다.
마리아의 행동은 참된 예배의 행위였다. 그녀가 드린 향유에서 향기가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의 실체를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예배이다. 참된 예배는 구제나 종교적행사보다 낫다. 물론 구제나 종교적 행사도 좋은 것이고 필요하지만 예배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배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3. 구별된 예배
나는 봉사와 예배를 서로 비교하는 것이 참된 예배가 정말로 무엇인지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봉사는 성부(聖父)께로부터 나와서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령(聖靈)의 능력으로써 영적인 은사의 형태로 각 개인에게 내려온 것이다. 반면에 예배는 우리에게서 성령(聖靈)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자(聖子)를 통하여 성부(聖父)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따라서 봉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로 내려온 것인 반면에, 예배는 우리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봉사와 예배는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르다처럼 너무 봉사 지향적이지만, 충분한 만큼의 예배 지향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예수의 발 밑에 앉아 예수께 예배드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라.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나의 신앙 생활에서 예배가 으뜸이 되고 있는가? 나는 성실하게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 나의 전심(全心)을 담은 예배를 드리는가? 나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갈급한 열망으로 불붙어 있어서, 예배를 드리려고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 속으로서둘러서 들어가는가?”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찾으신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다음에 언급되는 내용들을 살펴봄으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예배의 실체를 규명해 나가도록 하자.
2. 예배의 중요성
요한복음 4장 23절은 아버지(성부)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 때문에 예배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 예배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며, 또한 이것을 하나님의 구속(救贖) 계획의 목표로 삼으신다.
예배는 성경 전체의 강조점이다
예배가 중요한 첫번째 이유는 성경이 아주 빈번하게 예배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에 관한 주제를 수백 번 강조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개의 성구(聖句)들을 선택하였다.
1. 구약의 성구(聖句)들
제 1계명의 강조점(출 20장)
하나님께서 계명과 성문법과 규례와 율법과 율례 등의 형태로 어떤 기준들과 원칙과 방법 등을 세우기 시작하셨을 때, 그분께 가장 중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분이 주신 제 1계명을 주의해서 보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2-6).
제 1계명의 강조점은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으뜸가는 책무이다(출 34:14/마 22:37 참조).
성막의 건립(출 25장)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셔서 그들이 광야 생활을 시작했을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이 당신께 예배드리는 것에 그들의 삶의 목적을 두기를 원하셔서 예배 처소를 세우셨으니, 그것이 곧 성막이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 처소를 얼마나 중시하셨는지를 알려면, 하나님께서 전체 우주의 창조를 설명하시는 데에는 성경의 총 31절만을 할애하셨지만, 성막의 일부분이 될 기구들의 중수와 칫수들을 설명하시는데에는 성경의 일곱 장(총 243절)을 할애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성막 그 자체는 별로 아름답지는 않지만 성소의 제일 안쪽인 지성소(至聖所)에는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 위는 시은좌(施恩座)로서,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서 피를 뿌리는 곳이었다. 이 시은좌가 바로 하나님의 「쉐키나」(Shekinah)의 영광이 거하시는(장막을 치는 : tabernacled) 곳이다. 출애굽기 25장 22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하나님께서는 예배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예배의 중심지로 성막을 그들에게 주셨다.
성막 주위에 진을 침(민 1:52-2: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 동안에 그들이 어떻게진을 쳐야 하는지를 정해 주신 것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을 멈추고 진을 칠 때마다 제사장들이 성막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그 다음에는 레위 지파이고, 그 밖으로 열 두 지파들이 주위에 진을 쳤다. 제사장들은 예배를 담당했고, 레위인들은 성막에서 수종드는 일을 맡았다. 여기서도 예배에 최우선권이 주어진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사장이 되기 위한 연령 제한에서도 이것이 나타난다. 남자의 나이 20세가 되어서야 군에 복무할 수 있었다(민 1:3). 레위인 남자는 2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었다(민 8:24). 그러나, 그가 제사장이 될 수 있으려면 30세가 되어야 했다(민 4:3). 왜 제사장은 30세가 되어야 그 직을 맡을 수 있었는가'? 왜냐하면 예배가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예배에 가장 큰 책임이 따르기에 가장 높은 정도의 영적인 성숙도가 요구되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병사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이 있었고, 성막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또다른 정도의 기준이 있었지만,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최고의 수준이 요구되었다.
스랍들의 경우(사 6:1-2)
이사야는 이사야서 6장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네 날개는 예배와 관계되었고, 두 날개만이 봉사에 관계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쳐다볼 수 없어서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로 인하여 자기들의 발을 가리었으며, 나머지 두 날개로는 봉사하고 있다. 천사들에게 있어서도 예배가 가장 중요하다.
시편 기자의 권고(시 95:6-7)
시편 95편 6-7절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권하는 많은 시편들 중의 하나이다(시 5:7/29:2/45:11/66:4/86:9/96:9/99:5, 9/132:7/138:2 참조)
2. 신약의 성구(聖句)들
로마서 12장 1-2절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 열 한 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과 그분의 구속(救贖) 목적, 세상에 대한 계획, 죄인을 향하신 자비 등에 대하여 말하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앞의 열 한 장의 모든 진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 acceptable)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리스도인에 대해,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모든 유익에 관해 진술하는 1-11장의 내용을 기술한 다음에 바울은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너희에게서 무엇인가 원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가? 그것은 그분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이다. ”기뻐하시는”(받으시는)이란 단어는 제사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드려야 한다. 이 단어는 2절 끝 부분에서도 언급된다.
”...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원하신다. 그것은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런데 그 몸이란 단지 물질적인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육체만을 가리킬 경우에는 그것이 영적인 예배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절에서 말하는 ”몸”이란 전인격(全人格), 참 자아(自我)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에 대하여 그분은 우리 사신을 영적인 예배의 행위로 당신께 드리기를 요구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분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베드로전서 2장 5절
베드로전서 1장은 구속(救贖)의 은혜의 놀라움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절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에 관해서, 18절은 우리의 신생(新生)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2장의 2-3절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갓난 아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2장 5절은 구원받은 자들로서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벽돌과 시멘트 반죽을 가지고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산 돌인 자신의 백성들로 이뤄진 집에 거하신다. 또한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되고 영적인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역의 기초 위에서 드려진다.
우리는 왜 예배가 중요한지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성경전체가 예배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로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배가 운명을 결정한다
예배는 삶에서 부가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삶의 핵심이다. 당신도 아는바와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영생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간다. 그럴진대 예배는 바로 삶의 핵심인 것이다. 영원한 세계는 그 사람의 예배의 성격에 따라서 결정된다.
예배는 두 가지로만 드려질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은 이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종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두 가지 종류의 예배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곧,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이다.
1.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거짓 신(神)들에 대한 예배
사람들은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나름의 신(神)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나무랄 수없지 않은가?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예배에 성실하다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들의 예배를 받아 주실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게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그분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신(神)에게의 예배를 묵과하지 않으신다(출 34:14/사 48:11 참조).
세상은 거짓 신들에게 예배한다. 로마서 1장을 보라. 21절 상반절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며”라고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거나 그분께 영광과 찬양과 감사와 존귀와 찬사를 드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거절하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도 없으므로 저희를 ”더러움”(롬 1:24)과 ”부끄러운 욕심”(롬 1:26)에 내어버려 두셨고, 궁극적으로는 심판을 당하도록 버려 두셨다(롬 1:32). 사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거절했을 때, 그들은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형상”(롬 1:23)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우상에게로 돌아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을 거절할 때,그들은 자신들이 지어낸 거짓 신(神)들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 이 거짓 신(神)들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세상의 물질적 신들
세상(世上)의 물질적 신(神)의 한 가지 예(例)는 부(富)의 신이다. 이것은 욥기 31장 24-28절에 잘 나타나 있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 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달리 말하면, 내가 내 소유(재물)를 예배하거나 내가 몸담은 작은 세상을 예배하거나 내 손에 입맞추고 돌아다닌다면 하나님을 부인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세상의 신(神)들에게 예배하고 있다.
- 천상(天上)의 초자연적인 신들
신명기 4장 14-19절이 이런 예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모세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내린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사 너희에게 규례와 법도를 교훈하게 하셨나니 이는 너희로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형태나 모습이나 형상을)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격하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의자에 앉아 있는 수염이 난 노인으로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우상이란 우상을 만드는 망치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잘못된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잘못된 형태로 만들어 버린다.
망치와 끌을 잡고 나무에서 신(神)을 만들어 내는 우상 숭배자는 그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신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어떤 형상으로 격하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지 않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첫번째 종류의 예배는 거짓 신(神)에 대한 예배이며, 이것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정죄되고 있다 나는 이사야서 2장 6-10절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 여기서는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 중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 족속을 버리셨음은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같이 술객이 되며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즉, 그들이 이방인들과 이방 신(神)들이 그들의 사고와 예배에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허용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을 공경하여 천한 자(문자적으로는, 일반 백성들)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그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너희는 바위 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했는데, 그들은 심지어 태양까지도예배하였다(겔 8:16). 이방인들은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어느 것에게나 예배를 드렸는데,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모든 종교는 거짓 신(神)들에게 예배한다. 모든 유물론자들과 비종교적인 무신론자들과, 종교에의 눈을 닫지 않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 역시 비록 대상이 자신일지라도 자기가 고안해 낸 어떤 물질적인 신(神)들을 예배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 간다.
참 하나님께 그릇된 형태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는 거짓 신(神)들에게 드려진 예배도 받지 않으시지만, 참 하나님께 드려진 예배라 해도 잘못된 방법으로 드려지면 받지 않으신다. 그것은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관하여 아주 자세하게 그 방법과 양식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 하나님에 대해 그릇된 형태로 드려진 예배의 실례는 출애굽기 32장에서 발견된다.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 있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에 백성들은 아론의 지도하에 그들의 모든 금붙이들을 모아 녹여서 금송아지를 만들고는 그것을 예배하기로 했다. 그들이 다른 신(神)에게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었다. 금송아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던 바의 표현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와서 그들의 소행을 보았을 때, 그는 분노하여 계명이 기록되어 있던 두 개의 돌판을 던져서 깨뜨려 버렸다(19절).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진노를 발하셔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10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므로(14절) 삼천 명만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28절).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드려진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이나 물질적인 표현으로나 우상 등, 어느 것으로든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종종 사람들이 ”나는 나의 소견에 좋을 대로 하나님을 섬깁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 내린 정의(定義)가 성경과 맞지 않는다면, 당신의 그 정의를 참 하나님과 동일시 여긴다 해도 당신의 예배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세번째 경우의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자.
참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어떤 우상이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것도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예배의 행위에 있어서도 어떤 개인의 생각으로 격하시켜 드리는 것 또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이제 자기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들의 몇몇 사례(事例)를 성경에서 찾아봄으로써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겠다.
- 나답과 아비후(레 10:1-2)
대제사장 아론에게 제사장의 직무를 맡은 나답과 아비후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레위기 10장 1절은 그들이 제사장직에 임직되던 중요한 그 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 날은 그들이 백성들을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게 된, 사실상의 직무 첫날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향으로 채워져서 그 향기가 하나님의 코로 올라갈 때 그것은 예배를 상징한다)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아마도 레위기 10장 9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하시는 엄중한 경고는 나답과 아비후가 분명히 술에 취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같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따라서, 나답과 아비후는 취한 채 성막 안에 들어가서 어리석은 짓을 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또한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의 조항과 맞지 않는 일들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로 삼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나름의 사고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대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되고, 성경에 규정된 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 사울(삼상 13:8-14)
사무엘상 13장에 보면 사울 왕은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다. 8-9절에 ”사울이 사무엘의 정한 기한대로 이레를 기다리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사울이 가로되 번제와 화목 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신은 ”그게 뭐가 그리 나쁜 일인가?”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나쁜 일이다. 제사장 이외에는 아무라도 제단에서 섬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사울은 자신의 권세와 신임성을 백성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제사장의 직무를 범한 것이다. 10-14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번제 드리기를 필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 사울이 가로되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의 예배만을 받으신다. 사울이 자기 방식대로 드린예배 때문에 다시는 사울의 계통에서 왕위(王位)에 오른 자가 없었다.
- 웃사(삼하 6:1-9)
웃사는 언약궤의 운반을 맡은 고핫 자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고핫 자손들은 어릴 때부터 언약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가만을 배우면서 자라났다. 민수기 4장 15절에 보면 언약궤는 손으로 만져져서는 결코 안 된다고 되어 있다. 언약궤의 옆면에는 큰 고리들이 달려 있어서 고핫 자손들이 거기에다 막대기를 꿰어 어깨에 메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언약궤가 항상 운반되어야 하는 방법이었고, 웃사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웃사는 어렸을 때부터 그러한 방법으로 언약궤를 운반하도록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웃사는 무례하게도 언약궤를 수레에 실었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실수였다. 하나님은 그 의도가 아무리 좋더라도 인간의 자기 나름대로의 즉흥적인 방법으로 섬겨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언약궤가 수레로 운반되고 있을 때(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일어난 일을 6-7절이 설명해 준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언약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 한 것같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당신도 알 수 있듯이 웃사는 할 바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가 살아오는 동안에 결코 언약궤를 만지지 말도록 교육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참 하나님을 인간 자신의 방법대로 섬겨서는 안 된다.
- 바리새인들
바리새인들은 참 하나님을 하나님의 계명과 기준대로가 아니라, 자기들 나름의 체계대로, 사기들이 고안해 낸 대로 섬겼다.
a. 마태복음 15장 1-9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즉 전통적인 씻는 규례대로)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1-3절).
당신도 알다시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그들의 유전(tradition)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이고, 예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대로 예배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체계를 고안해 냈다.
4-6절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유전(전통)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있는지에 대한 실례를 보여 주신다 그 다음으로 7-9절에서는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명들이 사람들의 유전(전통)으로 대치된 많은 교회들에서 자행되어지고 있는 모든 거룩한 속임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 하나님께는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드려야지 상상(想像)이나 관습이나 종교 의식(儀式)으로 드려서는 안된다.
b. 마태복음 23장 23-28절
주님께서는 더 나아가 바리새인들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고발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거짓 신(神)들에게 예배해서도 안 되고, 참 하나님을 잘못된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섬기거나, 참 하나님을 자신의 방법대로 섬겨서도 안 된다. 예배는 성경의 규정대로 드려야 한다. 이제 네번째로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는 다음과 같다.
참 하나님께 잘못된 태도로 드리는 예배
우리가 모든 거짓 신(神)들과 참 하나님에 대한 모든 형상(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들과, 자기 방식대로의 모든 예배의 형식들을 치워 버린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의 태도가 옳지 않다면 그 예배는 열납되지(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열납될 수 없는 예배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 중에서는 거의 아무도 거짓 신(神)들에게나, 또는 참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에게 예배드리지는 않는다. 또 우리들 대부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있어서 우리 자신들의 방식을 고안해 내지도 않는다. 우리는 성경대로 예배를 드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올바른 태도로 예배에 임하고 있는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다.
이러한 진리를 제시해 주는 몇몇 성구(聖句)들을 제시하겠다.
- 말라기 1장 6-14절, 3장 13-15절, 4장 1-6절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을 고발한다. 이 충격적인 예언에서 말라기는 그들이 범한 악한 죄 일곱 가지를 지적한다. 그러한 죄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은 그들이 예배를 드리는 데 있어서 잘못된 태도로 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예배활동에 참석할 뿐이지,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말라기의 고발(1:6-7)을 들어보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또는 제단)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그들이 무슨 일을 자행하고 있었는지 아는가? 그들은 예배를 경멸히 여겼다. 예배는 그들에게 있어서 의식(儀式)이었고, 판에 박힌 일이었으며, 습관일 뿐이었다. 이 예배에는 그들의 마음이 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하의 것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을 정죄하기에 앞서, 나는 당신에게 어떤 잘못된 태도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예배를 경멸하는 것임을 상기시키고 싶다.
그러면 그들의 소행은 무엇이었던가? 8절은 그들이 눈이 먼 것을 희생 제물로 드렸다고 말해 준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눈먼 것이 쓸모가 없어서 그것을 제물로 드리려고 가져온 것이다. 눈이 먼 짐승은 먹을 것을 찾는 데 많은 장애가 있기 때문에, 여하튼 결국에는 죽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 백성들은 그것들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치워버리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눈이 멀게 된 것은 어떤 질병 때문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또한 병든 짐승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렸던 예배는 단지 자신들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 뿐이다.
계속해서 8-9절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너희가 ...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다시 말하면, ”너희가 이같이 하나님을 대우했으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떻게 대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을 대우한 것보다 더 낫게 너희를 대우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그런 다음 10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다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있으니, 물질적인 방법으로 드리는 것,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드리는 것,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11절은 계속하여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 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깨끗한 제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어린 양한 마리를 희생 제물로 드리려면 그 양은 떼 중에서 가장 좋은 양으로서 흠과 점이 없는 것이라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12-14절을 살펴보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산은 더러웠고 그 위의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가 제사장들을 먼저 고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제사장들이 그 죄를 짓는 데 앞장을 섰었다. 그러나, 그 죄는 백성들에게로 침투해 내려갔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든 계층이 부패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상(제단)을 더러운 것으로 여겼다. 중요한 것은 13절에 ”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에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배드리는 모든 것이 그들 목의 큰 통증과 같았다. 아마 그들은 예배를 드릴 때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 또 거기 가서 예배드려야 한다니 ... 좋다. 어차피 쓸모없는 것들이니까 저 눈먼 양이나 절름발이 양을 이번 기회에 치워버리자.” 그들은 형식과 형태는 갖추었지만, 마음이 거기에 담겨 있지 않았다. 거기에 실체가 없었다.
3장에서 그들의 정도는 더 심해진다. 13-14절에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악한 말을 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예배드리는 것이 유익이 없으므로 여호와를 섬기는 데 돈을 충분히 들이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는 예배를 드린 결과가 4장 1절과 3절에 기록되어 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 불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당신은 올바른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가?
앞의 말라기의 예(例)는 하나님의 백성이 참 하나님께 종교적 격식을 갖추어서는 드리나, 잘못된 태도로 예배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예배에는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
이제 당신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 당신을 ”글쎄요, 나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격하시키지도 않았고, 예배에 대해서 내 자신의 방법을 만들어 낸 일도 없고, 거짓 신(神)들을 섬기는 어리석은 일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그분의 표준대로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해 보겠다. 당신이 예배를 드릴 때 당신의 전심(全心)을 기울이는가? 헌금할 순서가 되었을 때 당신은 당신에게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하여 드리는가? 당신이 하나님께 서원을 드릴 때 당신은 하나님의 아낌없는 풍성하심에 따라 서원을 드리는가? 당신의 마음은 존경심과 경외심으로 충만해 있는가? 당신의 마음 자세가 옳지 못하다면 당신의 예배는 무의미한, 열납될 수 없는 예배인 것이다.
- 아모스 5장 21-27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즉, 내가 너희 예배를 견디지 못하겠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찐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1-22절)고 말씀하셨다. 이제 여기서는 좋을 짐승들도 드려졌다.
그들이 겉으로는 올바르게 예배하고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23-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잘 아노니, 한편으로는 내게 나아와 희생 제사를 드리나 곧바로 돌이켜서 거짓 신(神)들을 섬겼다. 너희는 너무나 세상의 체계에 익숙해지고, 거기에 빠져 있고, 연루되어 있어서 너희 예배는 의식적(儀式的)인 것이므로 받을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호세아 6장 4-7절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같도다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 이사야 1장 11-20절
또 다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서에 나타난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유다를 고발하시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라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1절).
다시 말하면, ”나는 이제 그런 제물들을 받는 것이 지긋지긋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12-20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은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들은 거역하여 구원에로의 초대를 거절했다.
이 본문의 중심 내용은, 이러한 예배에 대한 기사(記事)가 말라기서나 아모스서나 호세아서나 이사야서에 있든지 간에, 모두 참 하나님께 올바른 일을 올바른 방법(종교적 격식을 갖춤)으로 해드렸지만 그릇된 태도로 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 마가복음 7장 6절
이 성구(聖句)는 우리가 앞의 마태복음 15장에서 살펴본 것과 비슷하지만, 이 성구(聖句)가 예배자의 태도에 대해서 잘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이 성구(聖句)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것이 열납되지 않는 예배인 것이다.
메이슨 조합(Masonry)은 형제단인가 사교(邪敎)단체인가?
요즈음 「Masonic Lodge」또는 「the Masons」라고 알려진 모임이 1717년에 시작되었다(우리 나라에서는 소개되지 않았으나 미국에서는 왕성함-역자 주). 그들은 자신들이 종교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분명히 하나의 종교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의 전형적인 예(例)이다.
이 단체의 정기 간행물인 「The Iowa Quarterly Bulletin」의 1917년 4월호 54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매이슨 조합(Masonry)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게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고유한 관계와 또한 사람들 상호 간의 형제로서의 관계,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관이다.”
그들이 인정하기를 꺼린다고 해도 그들은 분명히 종교 단체이다. 그들 간에 ”서구 세계가 낳은 가장 유명한 지도자”로 불리우는 알버트 파이크(Albcrt Pike)는 「윤리와 교리」(Morals and Dogmas) 23페이지(이 단체가 만든 「허텔 성경」 9페이지에도 나온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이슨 조합은 모든 훌륭한 개혁자들을 존중한다. 우리는 유대인에게 율법을 준 모세나, 공자, 조로아스터, 나사렛 예수, 마호멧, 그 외 여러 성현(聖賢)들을 우리의 도덕적 스승과 개혁자들로 생각한다. 또 우리는 우리 단체 내의 모든 형제들에게 그들 개개인의 신조(信條)로 이들 성현(聖賢)들을 신(神)으로 모시는 것까지 허용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진리들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종교를 달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우리는 모슬렘 교도들에게 하나님은 한 분뿐이며, 마호멧이 하나님의 선지자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또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이미 2,0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는데, 이것을 믿지 않으므로 그들은 이단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또 우리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사렛 예수란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며, 예수의 역사란 옛날의 전설이 비현실적으로 다시 재현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권한이 아니다.
메이슨 조합은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에 속해 있으며, 어떤 한 종교에서가 아니라 모든 종교들에게서 우리의 위대한 진리들을 발견한다. 모든 메이슨 형제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며, 선(善)과 지혜와 예지와 공의와 인애에 있어서 무한하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섭리하시는 분이시며,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이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매개로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며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가에 대해서는 그런 것들에 대하여 탐구하고 연구하는 종교나 교회들이 언급하도록 맡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며, 어떻게 그분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인 개인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이 단체에는 비밀스런 단어가 있는데, 누가 이 단체의 일원이 되었다면 그는 이 단어를 결코 입 밖에 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아주 신성시되는 이 말은 이 단체의 입교자가 소정의 훈련(Master Manson Degree)을 마치고 5개 조항(발 끝에서 발 끝, 무릎과 무릎, 가슴과 가슴, 볼과 볼, 입에서 귀)의 교제의 위치에 이르게 되면 그에게 전수되어진다. 그의 귀에 속삭여 전수되는 단어는 「마하보네」(MAH-HA-BONE)라는 것이다. 이 사람이 듣게 되는 이 신성한 단어는 결코 타인에게 말해지거나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되며, 항상 비밀을 지켜야 한다.
입교자가 정식 회원이 되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Ryl Arch Degree)에 이르면 그 입회식에서 그에게만 전수되는 비밀스런 이름이 하나 더 있다. 그들에 의해 새로 발견되었다는 참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것은 「야불온」(Jah-Bul-On)이다. 이것이 그들이 신봉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야”(Jh)는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의 성호(聖號)인 「야웨」(Jahweh) 또는 「여호와」(Jehoh)를 나타내며, ”불”(Bull)은 앗수르의 신(神)으로서 구약성경 전체에서 「바알」로 나오는 신(神)이며, ”온”(On)은 애굽의 태양신(太陽神)에 대한 명칭이다.
알버트 파이크는 「윤리와 교리」 854페이지 이하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이성(理性) 위에 선 확신을 가져야 하며, 개인의 내면에 영성(靈性)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육체가 썩어 없어지더라도 계속 존재하여 모든 영원의 시대를 거치면서 완전을 지향해 나가 하나님, 즉신(神)의 임재의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더 분명해지는 영혼이다”라고 말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메이슨 조합은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속임수일 뿐이다. 메이슨 성경 34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되어 있다.
”모임을 가질 때 위대한 우주의 건축자되시는 분께 마땅히 예배를 드려야 하며, 또한 우리들이 만들어야 할 작품에 그분의 축복을 빌어야 한다. 또한 모임을 마칠 때는 평화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 설명되고 있지 않은 건축자에게 반드시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누구든지 간에 당신 나름대로 생각하는 절대자이다.
알버트 파이크는 또 메이슨 조합의 제단에서 ”모든 히브리인들과 모슬렘 교도들과 브라만, 공자, 조로아스터를 따르는 사람들이 형제로 모여서 유일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Short Talk Bulletin」(36권, 8장, 7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임의 대표로서 기도하는 자는 나사렛 목수의 이름이나 여호와의 이름이나 알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고, 위대한 설계자 또는 우주의 위대한 건축자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이러한 명칭 아래서 모든 종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神)을 발견할 수있다. 특정 신(神)을 지목하지 않는 것이 신(神)을 부인하는 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포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기도를 드릴 때 각 개인은 모든 신(神)들을 포함하고 있는 「위대한 건축자」라는 이름 속에서 자신의 신의 이름을 들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이제 당신도 이 종교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메이슨 조합은 사단의 거짓 종교이다. 그들은 ”아니다. 우리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잘못된 형태로 만들었으며, 잘못된 방법과 태도로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다. 불행히도 이들과 유사한 예배는 수만 가지가 있다. 그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당신이 거짓 신들에게 예배한다든지, 참 하나님께 당신 자신이 생각해 낸 방법으로 예배한다든지, 참 하나님께 옳은 방법으로, 그러나 그릇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예배한다면, 그것은 열납되지 않으며 또한 당신의 운명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을 받으실 수 없다.
이러한 그릇된 예배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첫번째 종류의 예배이고, 이제 두번째 종류의 예배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2.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참된 예배자들의 모습
시편 24편 3-6절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자에 대하여 의미 깊은 정의(定義)를 내리고 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즉,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은 ”손이 깨끗한 자”(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 정결하게, 깨끗하게 된 자)와 ”마음이 청결한 자”(즉, 마음의 동기와 소원이 올바른 자), 또한 진실하게 하나님을 구하는 자이다.
참된 예배자들의 산출
- 구원의 목적은 참된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야말로 구원에 대한 모든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실제적인 열쇠이다. 그것은 구원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참된 예배자들을 산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말로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참되고,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당신의 예배를 검토하는 것은 당신의 구원을 검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성구(聖句) 몇 개를 제시하겠다.
a. 요한복음 4장 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여기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라는 부분을 주의해서 보라. 그 부분은 그리스도인, 즉 성도와 신자(信者)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 성도, 신자(信者), 하나님의 자녀, 또한 무슨 말이든지 우리의 신분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묘사하는 말로 불리울수 있으면 또한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참된 예배자들)로도 불리울 수 있다.
또한 아버지께서 그분께 참된 예배를 드릴 자를 찾는다고 하시는 23절을 주의해서 보라. 당신은 아버지(성부)께서 아들(성자)을 세상에, 보내신 이유를 아는가?,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려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요한복음 4장 23하반절에서 볼 수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가 구속함을 받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다만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을 원하셨다면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구속하기 시작하셨는데, 그것은 예배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실존(實存)과도 동일한 것이며 신자(信者)가 된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이다.
b. 사도행전 18장 7절, 13절
”거기서(아덴)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worshiped)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7절).
”하나님을 공경(예배 / 저자인 죤 맥아더는 이 번역을 취한다-역자 주)하는”이라는 부분은 신자(信者)에 대한 다른 식의 표현일 뿐이다. 신자(信者)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다. 13절에서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예배)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그의 선교 활동 중에 행한 일은 사람들에게 예배하라고 권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곧 구원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는 근본 의도는 사람들을 지옥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축복의 영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전도의 근본 의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대한 모욕이며, 그분이 주인이신 세상에서의 반역적인 행위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전도의 핵심 정신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에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자기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가 마땅히 드려야 하는 만큼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불행한 그리스도인이다.
c. 사도행전 24장 14절
바울이 벨릭스에게 자기의 인생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道-기독교 신앙에 대한 다른 표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예배하고) ....”
바울은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전도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벨릭스 앞에서 증언의 일부로서 밝히고 있다.
- 복음서의 증거
복음서의 기록들은 우리가 구원받은 목적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는, 즉시 예배(경배)로써 응답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한다. 즉,존귀와 경의와 영광과 경외와 찬미와 찬양을 하나님되신 분께 돌리게 되는 것이다.
a. . 마태복음 2장 11절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worshiped).”
동방 박사들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첫번째로 한 일은 엎드려 경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모습에 대한 최초의 응답이 되기 때문이다.
b. 마태복음 8장 1-2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worshiped)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당신도 알 수 있듯이 이 문둥병자는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알았기 때문에 절하면서 예수께 나아간 것이다.
c. 마태복음 9장 1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worsbiped)”
d. 마태복음 14장 33절
제자들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셔서 바다를 잔잔케하신 것을 눈으로 본 후에, 33절은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worsdiped)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신이 보는 바와 같이 누가 언제 어디서든지 간에 그리스도의 참 모습을 깨닫고 난 후의 즉각적이고도 자발적인 응답은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e. 마태복음 15장 25절
”여자(가나안 여인)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worshiped)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f. 마태복음 28장 8-9절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worshiped).”
g. 마태복음 28장 16-17절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worshiped)”
h. 요한복음 9장 31절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어떤 사람을 고치셨다. 바리새인들이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 예수에 대하여 묻자, 그는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하나님을 예배하며 : a worshiper of God-흠정역)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하였다.
흥미롭게도 이 사람은 모든 세상 사람들을 두 가지의 부류로 대별하여 말하고 있다. 한 부류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사람은 죄인들이고, 들으시는 사람은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 사람은, 죄인들과 예배자들을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죄인”과 ”예배자”로 나눌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경우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택하여 불러 내셨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배드리게 하기 위하며 그들을 택하신 것이다. 사실상, 성막과 성전과 제사장 등도 백성들로 하여금 삶의 중심을 예배에 맞추게 하기 위한 제도였다.
신명기 26장 5-11절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이제 막 들어가려 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 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구약에서의 구속(救贖)이라 하면 그것은 출애굽 사건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5-9절은 이스라엘의 구속(救贖)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10-11절에서 그러한 구속(救贖)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 즉 예배를 드리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예배)할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이와 같이 예배(10절)는 구속(救贖)함을 받았다는 사실(5-9절)에서 나오며 그 결과는 기쁨, 즐거움(11절)인 것이다.
- 바울의 진술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라고 말한다. 이것이 예배에 대한 진술이다. 또 바울이 예배에 대하여 진술한 이유가 계속해서 4-7절에 나온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당신이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예배는 구속(救贖)함을 받은 결과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 또는 두세 번의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체 방향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영적 예배를 드리기 의해 부르심을 받았다.
참된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갖추어야 하는 자세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 히브리서 12장 28절을 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즉, 영원한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지니.”
「섬길지니」에서 ”섬기다”(serve)라는 말은 헬라어 동사인 「라트류오」(latreuo)l로서, ”예배하다”(worship)로 번역되어야 한다. 히브리서10장 2절에서 「라트류오」의 명사형은 흠정역에서 ”예배드리는 자”(wor-shiper)로 번역되어 있다(개역 한글성경에는 ”섬기는 자”로 번역됨-역자 주). 그렇다면 28절의 의미는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고 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되었은즉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를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응답하자”가 되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식으로 말하면, 아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마땅한) 예배니라”(롬 12:1)일 것이다.
히브리서 12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28절 하반절에서부터 29절을 주의해서 보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예배할찌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구원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를 드리고 예배의 충만한 삶을 살게되는 것은 영적인 예배의 행위로, 자기의 몸을 기꺼이 드리는, 즉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의 마음의 열매로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경건과 두려움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경건은 적극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존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두려움은 소극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29절의 ”소멸하시는 불”(심판하시고 징계하시고 벌하시는 분)로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만일 우리가 구속하심을 입었다면 우리는 참된 예배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예배자들로서 하나님에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이제 나는 우리가 비록 참된 예배자가 되었지만, 우리 속에 있는 죄 때문에 마땅히 항상 드려야 하는 만큼의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그러나 항상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이 열납하지 않으시는 예배를 드린다면, 그분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드리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만일 당신의 생활에 어떤 곤란한 문제들이 생겨서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먼저 검토해 보라. ”내가 참된 마음과 진실한 정신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경외함과 두려움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감사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징계하고 계신 것이다.
참된 예배자들의 인격적 특성
우리가 일상의 생활에서 참되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다른 신자(信者)들을 합당하게 대함
로마서 14장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하지 말고 또한 우리가 누리는 자유 때문에 연약한 자를 망하게 하지 말라고 한다. 또 18절에서 바울은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란 다른 신자(信者)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
로마서 15장 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을 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의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그가 전도하여 얻은 이방인 개종자들을 하나님께 드려진, 열납하시는 제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인 것이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거룩하고 기뻐하시는 예배로서 하나님께 드려질 수있다.
- 필요를 따라 물질을 바침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바울에게 보내 준 물질(돈)에 대해서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일이 사랑의 행위로써 되어진 것이었기에 바울은 그들이 보낸 것에 대해 매우 기뻐하였다.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바울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 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바울에게 보내 준 헌금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당신이 성도들과 교회의 일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지하기 위하여 재물을 드리는 것이다.
이상의 받으실 만한 예배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우리는 믿는 형제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우리는 불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드리고 있는가? 여러 가지 필요를 따라 우리의 물질을 바치고 있는가? 이런 일들은 모두 나누어 주는 것이다.
예배는 함께 나누는 것이다. 당신의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나누고, 당신의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당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고, 또 당신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고 존귀와 영광을 그분께 돌리는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 곧 성도들과 잃어버린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당신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된다.
-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삶
에베소서 5장 8-10절에서 바울은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말한다.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아가는 삶(즉, 개인적인 경건)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삶이다.
- 의의 열매로 충만한 삶
빌립보서 1장 11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여기서 또 다시 의와 거룩과 착함과 경건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임을 알 수 있다.
- 경건하고 단정하게 삶
디모데전서 2장 3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것”이란 2절 끝 부분의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건함과 단정함은 의로움, 선함, 진실함, 거룩함과 함께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특성이다.
지금까지 예배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임을 보여 주는 성구(聖句) 세 개와, 예배가 개인의 경건 생활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성구(聖句) 세 개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예배란 개인적인 의(義)로 표출되며, 더 나아가 형제를 사랑하고,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가진 재물을 필요에 따라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생활인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그분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림
히브리서 13장 15절은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감사하는-흠정역 / 저자인 죤 맥아더는 이것을 취한다) 입술의 열매니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절정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모일 때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다.
이제 16절을 보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여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며 그분께 감사드리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에서는 예배가 선(善)을 행하며 서로 나눠주는 생활임을 망각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히브리서 13장 15-16절이야말로 예배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예배는 주일에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드리는 것이다
당신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마음대로 살다가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예배란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곳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인위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당신이 다른 곳에서는 예배드릴 마음이 생기지 않아 반드시 교회 건물에 나와야 하고, 또 예배 분위기를 돋구는 성가대의 찬양을 들어야만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당신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출퇴근 시간의 혼잡한 도로 위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당신의 마음이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오는 그것이 예배드리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이것이 왜 히브리서 13장 15-16절이 우리에게 함께 모여서 ”그 이름을 증거하는(감사하는)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를 항상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눠 주기”를 또한 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주일날에 드리는 어떤 것도 예배가 될 수 없다. 예배는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참된 예배자들이 공예배에 모이는 목적
우리의 생활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일 주일에 한 번 드리는 공예배에도 참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일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로 하여금 나머지 여섯 날 동안에 예배를 드리는 생활이 되도록 격려해 주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0장에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22절, 25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24절은, 우리는 모여서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나가 나눠 주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공예배)를 드리려고 모여서 나눠 주는 의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를 받게 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영적으로 먹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의인들의 모임인 성도들의 교제에 참여해야 한다. 거기서 우리가 사랑과 선행을 격려받기 때문이다. 그러한 격려가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러한 영향을 받고서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눠 주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다시 예배(공예배)를 드리러 모이게 되면, 항상 경건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찬양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러한 예배의 궤도(삶으로서의 예배)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 궤도 내로 들어와야 한다. 어떻게 진입할 수 있는가? 죄를 고백하고 지금 당장에 시작하라. 사람들은 흔히 ”나는 신앙 생활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고, 일관성도 없는 사람입니다”라고들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근본적으로 두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 두가지 문제란 그들이 일 주일의 엿새 동안을 예배하는 삶으로 살지 못하든가, 아니면 일 주일에 한 번 드리는 공예배를 드리지 않든가이다.
우리는 둘 다 필요하다. 당신에게 편리할 때만 교회에 나간다면 당신은 결코 일관성있게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공예배를 통해 사랑과 선행에 대하여 진실하고도 꾸준한 격려를 받아서 생활에까지 그 영향이 미칠 때에야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무사안일주의와 무관심하고 경박한 사회에 살고 있어서 꾸준하고도 진실한 격려를 받고 있지 않으면서도, 왜 우리의 행위에 일관성이 없는지를 이상하게 여긴다. 우리는 매일의 생활을 예배드리는 삶으로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모임에도 참석해야 한다.
예배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가 예배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운명이 예배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배의 세번째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영원 세계와 구속사가 예배로 설명된다
예배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예배가 영원 세계와 구속사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1. 창조 이전의 역사
영원 전, 만물과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무엇이 존재했었는가? 그것은 성 삼위(聖三位) 하나님과 천사들이었다. 천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느헤미야 9장 6절은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예배)하나이다”라고 한다. 영원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배, 즉 예배이다(욥 38:4-7 참조).
2. 타락 이전의 역사
그 후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그들은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하와가 사단을 섬기기로(worship), 아담은 하와를 섬기기로(worship) 했을 때, 죄가 그런 아름다운 장소에 침투해 들어왔다. 그들이 하나님 섬기기를(worship) 그만두자 그들은 곧 타락하게 된 것이다(창 3:1-13).
3. 타락 이후의 역사
가인과 아벨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의 때에 이르러 사람들 가운데 예배를 드리는 방법이 나뉘게 되었다. 아벨은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드렸고(4:4), 가인은 하나님께서 열납치 않으시는 예배를 드렸다(4:5).
족장 시대
족장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예배를 드렸을 때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서 열납치 않으시는 예배를 드렸을 때는 징계를 받았다.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 광야 생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인도되어 나왔지만, 시내 광야에서 한 세대가 완전히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 방랑 생활을 했다. 그 세대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던 것이다(민 14:22-23), 모세도 하나님께 합당하게 예배드리지 못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20:7-12).
- 약속의 땅에서의 생활
드디어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예배를 드릴 때 축복을 받게 되었다(느 9:3/ 대상 23:20-25). 그러나, 그들이 바르게 예배드리지 못했을 때(행 7:42-43)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셔서 산지사방으로 흩으셨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그분은 예루살렘의 예배 처소로 올라가사 채찍으로 그 성전을 깨끗케 하셨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께서 그 부패한 예배자들을 그렇게 채찍으로 다루신 후,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참된 예배자들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바로 예배인 것이다. 예배가 바로 구속사의 주제인 것이다.
4. 현재의 역사
오순절 사건 이후 교회가 생겨났는데, 교회란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었던 것이다. 빌립보서 3장 3절이 성경에서 예배에 대하여 가장 잘 언급된 부분인데, 여기서 예배의 정의(定義)는 교회의 정의(定義)와도 통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예배 -흠정역 / 저자의 입장)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독특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지는데, 교회란 육체적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육체에 신뢰를 두지 않고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5. 미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심으로써 역사가 그 절정에 이르게 될 때, 예배도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예배는 천국과 영원 세계의 주제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4장 10-11절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예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요한계시록 5장 14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예배)하더라.”
요한계시록 11장 15-17절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예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요한계시록 14장 6-7절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예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5장 4절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예배)하리이다.”
요한계시록 19장 4절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예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요한계시록 19장 10절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가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예배)하라.”
요한계시록 22장 8-9절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예배)하려고 엎드렸으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예배)하라 하더라.”
참되시고, 살아 계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영원세계와 구속사의 주제인 것이다.
성경도 우리를 불러 예배하게 하며, 우리의 운명때문에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고, 지옥에 떨어진 경우에나 예배가 필요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가 중요한 것이며 네번째로 예배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예배드릴 것을 명하셨다
마태복음 4장 10절에서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예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사단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만물(萬物)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당신은 삶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당신은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이 주일날 교회에 나가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가 지루하고 힘들다면, 성가대가 찬양을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분위기가 나빠서도 아니며 당신의 정신이 흐트러져서도 아니다. 당신이 예배를 드리려고 해도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일 주일의 나머지 엿새 동안에 당신이 예배의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배는 일 주일에 한 번 드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삶 자체가 예배여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일 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러 모일 때에, 교회에서 참된 찬양과 마음의 예배가 터져 나와야 한다. 개인적으로 일 주일간 즐겁게 드려지는 예배의 삶이 있을 때, 그러한 개인의 예배는 기쁨으로 모인 사람들의 회중 속에서 더 풍부해지고 고양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배는 더욱더 영광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존 맥아더
첫댓글 카페지기가 드리는 부탁의 말씀.....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후원이 없습니다 카페지기는 겨울을 힘들게 버텨야 합니다
작은 나눔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카페를 계속해서 운영하려면 회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통신료 공과금 30만원과,치료비,임대료,난방비.먹을것을 마련해야합니다...
카페지기는 생활고를 겪고 있습니다 작은 나눔의 손길이 되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도와주신 분을 위해서 집사람 박경옥 전도사가 매일
기도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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