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거울 / 박자연(2024.01.)
약속이 있어 전철을 탔다. 아직 퇴근 시간이 이른 탓인지 전철 안은 한가하다. 경로석이 아닌 일반석 좌석에 서둘지 않고 얌전히 앉았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는데 눈에 확 띄는 옷차림을 한 노신사가 경로석에 앉아있다. 나의 시선은 그곳에 갇혔다. 새빨간 슈트를 입고 연두색 셔츠와 하얀 헹궈 칩을 꼽고 있다. 손목에는 쇠사슬 체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굵은 팔찌와 손가락에는 큰 알사탕을 방불케 하는 호박 박힌 반지를 끼었다. 빤질빤질한 구두는 하얀색에 까만 테두리를 한 오거나이저를 신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는 베레모를 썼는데 그 색깔이 가관이다. 밝은 오렌지색이다. 거기에다 선글라스는 바이올렛 렌즈에 큐빅 박힌 태가 누가 봐도 여성용이다.
나의 눈길이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 혹이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그곳에서 거두고 싶었지만, 누가 잡아당기듯 자꾸만 그 노신사에게 매달려있다.
또 팔찌가 없는 손목에는 우산이 걸려있는데 우산 역시 총천연색 무지개 우산이다. 아직 상표도 떼지 않아서 달랑달랑 흔들리는 모양새가 “여기를 좀 봐주세요.”라며 손짓하는 바람돌이 춤 같다.
키는 170센티 정도 돼 보이고 몸무게는 대충 60킬로 정도이며 관리를 잘하셨는지 왜소해 보이지도 뚱뚱해 보이지도 않은 탄탄하고 반듯한 기본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차마 꺼내지는 못했다. 자세히 살펴봐야 할 바깥 치장이 어찌나 많은지 짧은 시간에 다 눈에 담지 못할 것 같았고, 요즘 내 기억 장치도 성능이 영 신통찮아서 먼저 인증 사진을 남기는 것이 확실하니까. 하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진 찍는 것은 범죄 행위라고 할 수도 있고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물으면 적당한 대답을 찾을 재간이 없어서다. 그때 지하철이 멈췄고 그 노신사가 내렸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따라 내렸다. 순간 벽에 적힌 역 이름이 눈에 들어와 내가 내릴 역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얼른 열차 안으로, 노신사는 출구 쪽으로 멀어져 갔다. 달리는 차의 창밖으로 시선과 궁금증도 따라 달렸다. 호기심과 궁금증은 기차 칸수보다 더 많은 물음표를 달고 달렸다. 저분은 누굴까? 무엇을 하는 분일까? 가수, 배우, 마술사, 댄서, 조폭, 등등 여러 가지 직업을 나열해 보기도 하고, 어디에 살까? 동두천, 의정부 아니면 서울? 지역도 내가 아는 만큼 떠올려 보고, 가족은? 아내는? 자식은? 어디 가는 길, 아니면 오는 길, 무슨 목적으로 저런 차림을 했을까? 몇 살일까? 요즘 노인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다지만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칠십은 훨씬 넘었을 것 같은데 그 나이에 맞지 않은 새빨간 양복을 윗옷만도 아니고 한 벌로 저렇게 입었을까? 또 장신구는 왜 저렇게 주렁주렁 달았을까? 입술 밖으로 커다랗게 빨간 루주만 칠했으면 영락없는 피에로가 아닌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 노신사를 여러 모양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지만, 그럴싸하게 매치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 노신사를 재구성해 보았다. 그분은 기본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어서 살짝만 바꾸어도 멋진 모습으로 탈바꿈할 것 같았다. 좀 어두운 회색 상의에 짙은 남색 하의를 착용하고, 가볍고 가는 줄무늬 셔츠에 깔끔한 나비넥타이를 매고 구두와 허리띠는 같은 가죽과 색상으로 안정감을 주면서 손목에 명품 시계 하나 착용하므로 고급스럽고 중후한 멋을 연출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우산을 들어야 한다면 검은 바탕에 하얀 띠를 두르고 뿔테 손목 고리가 있는 우산이라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한 노신사를 본다면 사람들의 시선은 어떻게 평을 할까? 아마도 “참 멋있고, 고상하다.”라고 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것은 예쁜 것하고는 다르다. 아름다움은 조화다. 어울림이라고 하는 말이 맞을 것이다. 눈으로 볼 때 거슬림이 없고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라 할까?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품위가 어울려졌을 때 진정한 아름다움이리라. 국어사전에는 모양이나 색깔, 소리 따위가 마음에 들어 만족스럽고 좋은 느낌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오늘 내가 본 그 노신사는 신사가 아닌 광대를 본 듯한 느낌만 남았다. 서낭당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형형색색 깃발과 장신구로 꾸며 놓았지만, 그곳에 앉아서 쉬어가지는 않는다. 똑같이 오래된 정자나무는 아무것도 꾸며 놓은 것이 없어도 본토인이든 나그네든 그곳에서 쉬임을 얻는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이든, 노을로 물든 저녁때든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나무 아래에서 안식과 평안을 갖는다.
꾸민 것이, 꾸미지 않은 것보다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많은 것, 넘치는 것, 오용과 남용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옛말에 “모자람이 넘침보다 낫다”라는 말이 있다. 또 “고픈 듯이 먹으라.”라는 말도 있다. 이 모두가 절제라는 단어가 주는 유익이다.
그렇다면 내 모습은 어떤가? 거울에 나를 비춰보고 찬찬히 살펴보자. 목걸이, 팔찌, 가락지를 끼었으며 부스스한 얼굴, 단정치 못한 머리하며 늘어난 셔츠, 헐렁헐렁하고 쭈글쭈글한 바지며, 남자인지 여자인지 묘한 차림새가 확실히 호감이 가지 않는 몰골이다. 내가 봐도 비호감인데 식구인들 다르게 봐주랴? 나는 거울을 다시 본다. 거울 속에다 그 신사를 넣어보고 다시 나를 넣고 찬찬히 살펴본다. 무엇이 다른가? 별반 다를 게 없다. 다른 거라곤 남이 보지 않고 거울 속에 내가 나를 보는 것이다. 아무도 안 본다고 아무렇게나 하고 있어도 된다는 법은 없다. 거울 속에 내가 나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비호감이면 정확한 현재 내 모습이다.
사람은 거울 두 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남을 보면서 나를 보는 거울과 나를 보면서 남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사람은 한결같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남의 이목도 살피면서, 적당하게 뺄 것은 빼고 비울 것은 비우고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리자. 그래도 넘치면 나눠주고 나눔 후에 공간이 생기면 거기에 따뜻한 배려와 정을 채워가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받지 못한다 해도 추운 겨울 따뜻하게 데워진 구들장 아랫목에 모여 두고두고 옛이야기의 주인공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박자연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