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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주일 |
□ 고린도전서 1:1-9 □
김창락 (한신대학교・신약학)
1. 착상: 무엇이 문제인가?
신약성서에 기술된 교회들 가운데서 고린도 교회만큼 그 내부 사정을 우리가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교회는 없다. 고린도 교회는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기독교회가 휘말릴 수 있는 문제들을 한 자리에 수집해 놓은 전시장처럼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로 얽혀 있는 교회이다. 바울은 이러한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하여 올바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고린도전서를 쓰는 것이다. 1장 1-9절은 구조상으로 볼 때에 편지의 이른바 서두에 해당한다. 이 서두는 형식상으로 바울의 다른 편지의 형식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유행하던 일반 편지의 형식에도 부합된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서두 부분에서 고린도 교회의 실제 문제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다만 편지의 형식 요건을 갖추기 위하여 발신자와 수신자 표시, 인사말, 감사말 등등의 일반적 사항만을 진술했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이 서두만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를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의 금전 영수증에는 “위의 금액을 정히 영수함”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달리 독일의 영수증에는 “...마르크 DM 를 감사하게 받았습니다”라로 적혀 있다. 이것은 두 나라에서 영수증이라고 하는 문서에 각각 사용하는 고정된 어투이다. 만일 어떤 한국인이 독일 상인으로부터 위와 같은 영수증을 받고서 거기에 적혀 있는 어구를 근거로 하여 그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린다면 그것은 과오이다. 왜냐하면 그 영수증에 적힌 문구는 그 영수증을 발급할 당시의 그 발급자의 사적인 심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영수증이라는 고정된 형식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수중에 기입된 금액은 어떠한 규모의 거래가 성립되었으며 거기에 명기된 물품 내역은 거래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준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처결하려는 목적으로 붓을 들었다. 그는 서두 부분에서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관련이 없는 형식적인 말만 나열했을 리 없다. 우리는 이 서두 부분에서 이미 고린도 교회의 문제 해결에 대한 바울의 기본 원칙을 반영하는 글귀를 찾아내야 한다.
교회 내적 분쟁은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교회가 무엇인지, 기독자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고린도 교회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다. 고린도전서의 서두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1-3절(발신자와 수신자 표시, 인사말)이며 둘째 부분은 4-9절(감사말)이다. 바울은 수신자를 지칭하는 자리에서 교회는 무엇이며 기독자는 어떤 존재인지를 명시하고 있으며 감사말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총체적 시간 구도 속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신앙 상태를 총괄적으로 논평한다. 이 논평은 허사(虛辭)도 아니오 과찬(過讚)도 아니다. 적진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각개 전투를 벌이는 방법과 포위 공격을 벌이는 방법이 있다. 이 서두 부분에 담긴 바울의 전술은 포위 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서두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잡다한 문제들을 녹일 거대한 용광로를 제시한다. 바울은 모든 문제 해결의 큰 열쇠를 미리 보여 주고 있다.
2. 본문비평 및 번역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아48)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49) 바울과 (우리의)50) 형제 소스데네가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51) (여러분은)5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요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입니다.53)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주님이시며 또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54) 3.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나의55)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은 그리스도56) 안에서 모든 면에서 곧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6.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한 것이 이렇게도 여러분 가운데 튼튼하게 자리잡았습니다. 7.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혜의 선물에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57) 여러분을 끝까지 굳게 세워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58)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9.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3. 본문 주석
< 1절 >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과 (우리의) 형제 소스테네
편지문의 서두는 발신자를 명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1절은 발신자를 밝힌다. 발신자는 1격으로 표현된다. 여기서는 바울과 소스데네가 공동 발신자로 등장한다. 바울의 신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동격 어구를 붙여서, 소스데네의 신분은 ‘(우리의) 형제’라는 동격 어구를 붙여서 서술되어 있다. 바울이 여기서 자기를 사도로 내세우는 것은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연관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와 빌레몬서의 서두에는 바울이 자기의 직책을 표시하는 말을 하나도 붙이지 아니하였으며 빌립보서의 서두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는 신분으로 자기를 소개한다. 그것은 바울과 이들 수신자들 사이에는 아무 갈등이 없이 우호적 관계가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바울과 수신자들 사이에 갈등이 가장 첨예화되어 있는 갈라디아서의 서두에는 그의 사도적 신분을 단순히 내세울 뿐만 아니라 그것의 근원에 대한 진술까지 곁들여 놓았다. 바울이 고린도서의 서두에서 사도의 칭호를 붙여서 자기를 소개하는 것은 바로 이 사도의 권위를 사용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에 만연되어 있음을 반영한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스스로의 결단이나 사람들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아서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사도적 권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위가 부여되어 있음을 뜻한다.
소스데네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은 어렵다. 사도행전 18장 17절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으나 확실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고린도전서 이외의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 소스데네가 바울의 선교 동역자로 언급된 곳이 없다. 소스데네는 영향력 있는 인물은 아니라 하더라도 고린도 교회에 널리 알려진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소스데네를 공동 발신자로 내세웠을 것이다. ‘형제’라는 칭호는 초대 기독교회에서 기독자들 사이에 부르는 일반적 호칭이다.
< 2절 >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편지의 수신자는 3격으로 표시된다. 고린도전서의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명시되었다. 여기서 ‘교회’라는 낱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ε?κκλησσ?α 이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을 ‘하나님의 백성’ 또는 ‘하나님의 선민’으로 지칭하는 데 대항하여 초대 기독자들은 스스로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교회’라 하였다. 이 표현 속에 초대 기독자들의 자기들의 존재에 대한 정체의식(正體意識)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에클레시아’는 ‘불러내다’ ε?κκαλε?ω 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불러내 모은 사람들’을 뜻한다. ‘하나님의 에클레시아’는 ‘하나님께서 불러내어 모으신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 속에는 종말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종말에 세상에서 불러내어 모으신 자기 백성을 뜻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종말적 구원의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을 뜻한다. ‘하나님의’라는 수식어가 없이 단순히 ‘교회’라고 표현하는 경우에도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주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그 본래적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바울은 교회의 개념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하여 고린도전후서의 수신자를 지칭하는 자리에서 ‘교회’에 ‘하나님의’라는 한정어를 붙여서 교회를 세우신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명백히 하였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의 수신자를 표시할 때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교회’라고 하였으나 고린도전후서에서는 ‘고린도 사람들의 교회’라 하지 아니하고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한 것은 고린도의 기독자들에게 교회의 주인이 그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려는 바울의 깊은 신학적 고려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초대 기독교회에서는 아직도 전체 교회와 개체 교회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서 각 지역에 있는 개체 교회는 전체 교회의 구성 요소나 종속적인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전한 하나의 교회를 이루었다. 개체 교회는 그 소재지(所在地)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함은 고린도라는 도시에 있는 하나님의 종말적 구원의 공둥체의 구성원 전체를 가리킨다. 이 기독자 공동체가 어느 가정을 중심으로 하여 모일 경우에는 ‘그들의(=아굴라와 브리스길라의) 집에 있는 교회’(고전 16:19), ‘네(=아킵보의) 집에 있는 교회’(몬 2), ‘그 여자의(=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골 4:15)라 부르기도 한다. 유대, 시리아, 길리기아,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니아 등등과 같이 넓은 지방에 이러한 공동체가 여럿 존재할 경우에는 ‘유대에 있는 교회들’(갈 1:22), ‘갈라디아의 교회들’(고전 16:1; 갈 1: 2), ‘마게도니아의 교회들’(고후 8:1) 등등과 같이 복수형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교회’라는 낱말이 단 한 번도 ‘교회당’ 즉 ‘교회 건물’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역사적 견지에서 말하더라도 기독자들이 3세기 초 이후부터 비로소 교회당이라는 독자적인 건물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
‘거룩하게 된 사람들에게’ η?γιασμε?νοις 는 복수 3격으로서 앞에 나온 ‘하나님의 교회’와 동격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다른 말로 풀어서 서술한 것이다. 바울에게는 아직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가 없었다. ‘하나님의 교회’니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니 하는 표현은 그리스도인들을 집단적으로 지칭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거룩하게 하다’라는 동사의 완료형 수동태 분사에서 유래한 명사이다. 거룩하게 하신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 사건에 근거하여 거룩하게 하신 사람들이다. ‘거룩하게 하다’라는 행위의 결과로 생긴 거룩함 또는 거룩하게 됨은 인간 편에 일어난 어떤 윤리적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행위를 가리키는 개념이다.59)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윤리적 난맥상을 잘 알고 있었다. 바울이 여기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가리켜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일컬은 것은 그들 개개인의 윤리적 면모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이 일으키신 구원 사건의 영역 안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말한다.60) 고린도 교인들이 이러한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은 그들 자신의 행위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성별해 주신 행위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은 것이다.6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어구는 신비주의적-장소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62) 여기에 사용된 ‘안에서’ in, ε?ν 라는 전치사는 오히려 수단적-도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어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통하여 이루신 객관적 구원 사업을 지시한다.63)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사도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성도가 되었다. 이 두 사실에 있어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다. 사도이건 성도들이건 구별 없이 더 이상 스스로를 위하여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들을 부르신 분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64)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복수 3격 명사로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과 동격 관계에 놓여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란 다름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을 뜻한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라는 어구에서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형용사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명사로 바꾸고 ‘성도들’이라는 명사를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로 바꾸어 풀이할 수도 있겠으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사람들’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1절의 ‘부르심을 받은 사도’ κλητο?ς α?πο?στλος 와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 κλητοι?ς α?γι?οις 은 구조적으로 대응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1-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표현이 번갈아 나타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수의 기독론적 칭호가 아니라 예수의 이중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든가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든가 아무런 의미상의 차이가 생기지 않는다. ‘주’(主)(κυ?ριος)는 LXX(70인역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를 지칭하는 칭호로 전용(轉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신 καλε?ω 분이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응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ε?πικαλε?ω 사람들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 형태이다. 시편 98장 6절(LXX) 에 나오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란 표현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들을 뜻한다(히브리어 성서로는 99장 6절). 로마서 10장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절)는 말씀이 “누구든지 그분(=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1절)는 말씀에 이어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다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라는 문장론적으로 어디에 귀속되는지를 확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J. 바이스 J. Weiß 는 본문비평사적으로 이 어구가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 판단하고 그의 고린도전서 주석서에서 이것을 제거하였다. 파피루스 사본 46, 시내 사본, 바티칸 사본 등등 중요한 사본들이 증거하는 대로 원본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어구의 문장론적 귀속 가능성은 다음 네 가지이다.
1) 1절의 바울과 소스데네에 연결된다고 판단하여 바울과 소스데네와 함께 고린도전서의 공동 발신자를 가리킨다.65)
2)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에 연결되어 고린도전서의 공동 수신자들을 가리킨다.66)
3) ‘부르심을 받은’에 연결되어 고린도의 성도들이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67)
4)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들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라는 인사말에 연결된다.68)
위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서 3번이 문법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가장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고린도의 성도들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아 그들과 결속 관계에 놓여 있는 존재이다.
< 3절 >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히브리인들은 인사말에 ‘평화’ (⌈샬롬⌋ מלשׁ)라는 개념을 사용하였으며 헬라인들은 ‘즐거워하다’(⌈카이레인⌋ χαι?ρειν)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말은 이 둘을 종합하여 새로이 만든 것이다. 그들은 헬라인의 인사말에 사용되는 ‘카이레인’이라는 동사를 명사로 바꾸어서 만든 ‘은혜’(⌈카리스⌋ χα?ρις)와 히브리인의 ‘평화’를 병렬하였다. 은혜와 평화는 둘 다 종말론적-구원론적 개념이다.69) 평화는 하나님이 이룩하시는 궁극적 구원을 뜻하며 은혜는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종말적 행위를 가리킨다. ‘샬롬’을 평안 또는 평강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하는 경우에는 ‘샬롬’의 함의(含意)가 개인적, 내면적, 신체적인 것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은혜와 평화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구원의 선물이다. 은혜와 평화를 기원하는 것은 최대의 축복 인사말이다.
4-9절의 감사말은 고대의 편지 형식에 있어서 이른바 도입부(導入部)의 성격을 지닌다. 도입부는 인사말과 본론 사이에 놓여 있다. 도입부는 편지의 주제에 들어가기 직전에 상대편을 토의의 광장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정지(整地) 작업을 하는 자리이다.70) 감사말에서는 상대편의 처지 가운데서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켜서 치사(致謝)한다. 고린도전서의 감사말에서 감사의 대상이 하나님이시지 고린도인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4절). 감사의 근거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고린도인들이 이미 받은 은혜의 풍성함이며(4-6절), 둘째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고대하고 있음이며(7절), 셋째는 하나님이 고린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으로 불러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마지막 날까지 지켜 주심이다(8-9절).
< 4절 >
나는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자질구레한 불미한 현상에 시선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큰 은혜의 사건에로 관심의 초점을 옮기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은혜를 행사하시는 분이시고 고린도인들은 이 은혜의 수령인들이다. 고린도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고린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이다.
< 5절 >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풍족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장은 접속사 ⌈호티⌋ ο?τι 로 시작한다. 5절은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근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4절에서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근거를 두 가지 제시하였다. 하나는 하나님이 고린도인들에게 주신 은혜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고린도인들 때문이다. 이 두 개는 별개가 아니고 한 사건의 다른 두 측면을 나타낸다. “나는 너의 합격 때문에 너를 두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는 말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한편으로는 일(=합격)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난 인물을 자랑의 근거로 부각시킨 것이다. 고린도인들이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풍족하게 되었다는 말은 고린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예시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고린도인들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에 있어서 고린도인들이 현재 처해 있는 지적, 정신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71) 여기서 ‘언변’과 ‘지식’이 무슨 뜻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규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고린도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종말론적-구원론적 사건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언변이나 지식은 구원론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린도인들은 헬레니즘 문화권의 중심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수사학적 능력이나 인간사의 지식을 흠모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받은 온갖 은혜의 선물들 (⌈카리스마⌋ χαρι?σμα 고전 12:14ff.)을 염두에 두면서 이 말을 했을 것이다. ‘언변’(⌈로고스⌋ λο?γος)은 고린도인들이 자랑하는 바 방언으로 말하는 능력, 방언을 통역하는 능력, 예언하는 능력, 가르치는 능력 등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72) ‘지식’(⌈그노시스⌋ γνω?σις)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부활, 종말 등등에 대한 정보 입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깨닫는 통찰력을 뜻할 것이다.73)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언변과 지식을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고린도전서 전체에서는 더 큰 은사(恩賜)인 사랑에 비하여 평가 절하한다.
< 6절 >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이렇게도 여러분 가운데 튼튼히 자리 잡았습니다
바울은 6-7절에서 고린도인들의 신앙 상태를 두 가지 관점에서 서술한다. 6절은 과거적 측면이고 7절은 미래적 측면이다. 6절과 7절은 구조적으로, 또한 내용적으로 비교 대칭을 이룬다. 6절은 ‘…같이’(카토스, καθω?ς)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며 7절은 ‘그러한 결과로’(호스테, ω?στε)로 시작한다.
고린도에 하나님의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한 것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고 튼튼하게 자리 잡았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원문에서 2격 구조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증언’은 주격 2격 gen. subj. 이 아니라 목적격 2격 gen. obj. 로서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뜻한다.74)
< 7절 >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혜의 선물에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린도인들은 현재의 구원의 상태에만 도취되어 있는 열광주의자들이거나 또는 현실의 삶에서 도피한 신비주의자들이 아니라 현재적 구원의 선물을 향유하면서도 미래적, 종말적 구원의 도래를 대망하고 있다.
‘은혜의 선물’(카리스마, χα?ρισμα)은 은혜로 받은 선물을 가리킨다. 개역성경에는 ‘은사’(恩賜)로 번역했는데 그것은 방언으로 말하는 것, 병을 고치는 능력, 가르치는 것, 이적을 행하는 것, 예언을 하는 것, 봉사하는 것 등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뜻한다. 여기에 사용된 ⌈아포칼륍시스⌋ α?ποκαλυ?ψις 는 로마서 8장 19절에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사물이 시야에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 8절 >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끝까지 굳게 세워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8-절에서 구원의 대상인 고린도인들로부터 구원의 주체이신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께로 시선을 되돌린다. 8절의 주어는 관계대명사 ⌈호스⌋ ο?ς 인데 그것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75) 하나님을 가리키는지76) 확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하나님은 고린도인들을 과거에도 믿음에 굳게 세워 주신 것같이 그들을 미래에도 끝까지 세워 주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날, 곧 종말적 구원과 심판이 일어나는 날을 가리킨다. 구약성서에 사용된 ‘여호와의 날’(사 13:6; 38:8; 겔 30:3; 욜 1:15; 2:1‘31; 3:14; 암 5:18,20 등등) 또는 ‘그 날’(사 27:12,13; 52:6; 욜 1:5; 3:18; 암 5:18 8:3,911 등등)이라는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입시킨 것이다.
< 9절 >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실성이다.77) 하나님의 신실성은 하나님이 구원의 언약을 지키시는 데서 입증된다. 구원의 근거는 인간의 의식 속에 형성되는 신념이라는 사고 작용에 있는 아니라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신실성에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응답으로서 인간 쪽에서 신뢰를 보내는 태도를 인간의 믿음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의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비하여 부차적인 의미를 지닐 따름이다.
⌈코이노니아⌋ κοινωνι?α 는 구원의 내용을 나타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코이노니아’의 사전적 의미는 1) 친교 fellowship , 2) 참여 participation , 3) 몫을 차지함 sharing 이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코이노니아’는 무엇을 뜻하는가? 1)의 뜻과 연결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를 뜻하며 2)와 연결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며 3)과 연결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여된 하나님 아들의 신분을 부여받는 것을 뜻할 것이다. 여기서는 ‘친교’가 가장 잘 어울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친교’는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친교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를 뜻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친교 관계 안으로 고린도인들을 불러 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며 구원의 실현이다.
4. 설교 구상: 무엇을 설교할 것인가?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그의 제 2차 선교여행 때에 고린도에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직접 세우고 기른 교회이다. 바울이 그의 3차 선교여행 때에 에베소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고린도 교회의 내부 문제가 바울에게 전해졌다. 이 때에 바울의 실망은 컸을 것이다. 만일 바울에게 불타는 사도적 소명감이 없었더라면, 만일 자기가 세운 교회에 대하여 어버이 같은 심정이 없었더라면, 고린 도 교회에 편지를 쓸 의욕이 바울에게 생기지 아니 했을 것이다. 바을은 고린도 교회가 제기한 물음에 대하여 답변을 하고 잘못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는 데 있어서 그 당시에 통용되던 편지 형식을 따랐다. 고린도전서 1장 1-9절은 편지의 서두이다. 서두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3절, 4-9절이다. 이 두 부분에 대한 확정된 명칭이 없다. 1-3절에는 발신자 및 수신자의 이름과 인사말이 씌어 있고 4-9절에는 감사의 말이 씌어 있기 때문에 첫 부분을 인사말, 둘째 부분을 감사말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바울은 형식화된 틀을 따르면서도 아무 내용 없는 형식적 말만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큰 원칙과 세심한 전략을 나타내 보였다. 나무에만 시선을 집중시키면 개개의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한다. 나무를 보되 숲이라는 전체적 구도 안에서 보아야 한다. 바울은 이 원리를 따랐다. 갈피가 복잡할수록 근원으로 돌아가서 원칙에 맞추어 판결해야 한다.
목회자와 당회와 교인들 사이에 누가 교회의 주인으로 행세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분쟁을 일으키는 교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들이 이룬 업적으로 자만에 빠져 있는 교회, 하나님의 신실성을 믿지 못하고 실의와 절망에서 허덕이는 교회,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종말적 희망을 상실한 교회, 그리스도인의 참된 친교를 누리지 못하는 교회, 교회 내부의 갖가지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교회’라는 이름을 내걸 수 없다고 지탄받는 교회, 이러한 잡다한 문제 투성이 교회를 상대로 해서 무엇을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고린도전서 서두에서 사도 바울이 제시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1. 바울은 자기의 사도로서의 소명 의식에 확고히 섰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임을 명백히 하였다.
2. 공동 발신자로 제시된 소스데네는 이름 없는 사람이다.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는 소스데네가 공동 발신자나 선교 동역자로 언급된 곳이 없다. 그가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일지언정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바울은 그를 공동 발신자로 선택하였다.
3. 교회 내부의 모든 싸움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에클레시아’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내 모으신 자기 백성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종말적 구원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인간의 의지로 조직된 어떤 결사(結社)가 아니다. 목회자나 교인들이나 교회를 하나의 주식회사처럼 생각하는 데서 교회의 분란이 싹튼다.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이다.
4. 교인들은 거룩하게 된 존재들이다. 거룩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거룩하게 하다’의 어원은 ‘성별(聖別)하다’이다. 성별한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에 쓰기 위하여 구별해 놓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에클레시아’의 어원인 ‘불러내다’ ε?κκαλε?ω 와 뜻이 상통한다. 교인들은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다.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바울을 불러서 사도로 세우신 것과 같이 고린도인들을 불러서 성도로 세우셨다.
5.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하나의 교회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독적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각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신도들과 연대 관계 속에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한 집단이 독점할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동시에 그들의 주님이시다.
6. 기도에는 거짓이 끼어 들 틈이 있을 수 없다.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상대편에게 내리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면 그 양 편 사이에 얽힌 문제는 풀리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다.
7.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고린도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8. 바울은 나무가 아니라 숲을 바라보는 눈으로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칭찬할 요소를 발견하였다. 첫째는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그들 가운데 튼튼히 자리 잡은 것이요 둘째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자의 올바른 삶은 현재와 미래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아니하고 균형이 잡혀 있어야 한다.
9. 미래에 대한 보장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실성에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고린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자기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현재까지 지켜 주신 것같이 미래에도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이다.
10. 하나님은 기독자들을 ‘친교’라고 하는 하나의 놀라운 삶의 차원으로 불러들였다. 친교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다. 갈등, 분쟁, 소외, 차별, 억압, 증오 등등의 부정적 요소 대신에 평화, 사랑, 협력, 격려 등등 삶의 모든 긍정적 요소가 충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삶의 관계가 친교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친교의 삶 안으로 기독자들을 초대하셨다. 기독자들이 친교의 삶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동시에 엄숙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