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수원] 나만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 때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이사 49, 8 - 15
† 복음 : 요한 5, 17 - 30
★ 주님께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당신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기억하시며 그들에게
은혜의 때를 선포하신다. 제 젖먹이를 잊지 않는 여인처럼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돌보시는 것이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여기셨다. 이에 유다인들은 분노에 차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를 더욱 상세히 설명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이러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고 계시는지를 알게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당신의 일로 삼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난 주일의 복음에 나오는 큰아들과 비교됩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루카 15,29-30).
큰아들은 아버지의 일을 하면서 그 일을 자신의 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일하는 것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큰아들이 자신을
아버지의 종으로 생각한 반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루카 15,31).
아버지의 것은 아들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일이나 자신이 하는 일이나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기꺼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느님과 일치하셨고,
하느님의 일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하느님의 일을 우리 자신의 일로 여기고 있습니까?
-매일 미사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만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 때
2013년 다해 3월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복음 : 요한 5,17-30
< 나만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 때 >
어제는 어떤 분이 추천해 주셔서 짧은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론 와이어트라고 하는 고고학자가
성지순례 중에 성령님의 감도에 따라 계약의 궤가 골고타의
예레미야 동굴에 감추어져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론 와이어트는 이스라엘 정부의 허가를 받고 발굴작업을
위한 오랜 노고와 고생 끝에 2500년이나 감추어져 있었던
계약의 궤를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사람의 피로
보이는 것이 굳어져 있었는데 지진으로 생긴 바위틈을
따라 피가 흐른 것이었습니다. 그 바위틈을 따라 올라가보니
그 자리는 정확하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자리라고 합니다.
와이어트는 계약의 궤 위에 뿌려진 피를 가져다가 성분을
조사해 보았는데 놀랍게도 방금 흘린 피처럼 염색체 조사를
할 수 있었고 염색체는 모계로부터 온 23개만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피에 염색체가 23개만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부모로부터 각각 23개를 받아 46개를
가져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와이어트는 그 피는
동정녀에게 태어나신 그리스도의 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현재는 이스라엘 정부에서 이 사실을 철저한
비밀로 감추고 있다고 합니다. 저로서는 대사제가 속죄판에
동물의 피를 뿌려 백성의 속죄를 빌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비디오가 사실이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또 한 가지는 론 와이어트라는 사람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남들이 포기했던 그 일을 끝까지 수행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또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당신 뜻을 이 땅에 펼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마치 요셉의 꿈에 나타나시어 성모님과 혼인하거나 이집트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돌아오도록 시키신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단지 그 말을 듣고 따른 것뿐이었습니다. 물론 매우 힘든 것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뜻을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도 천사를 보내어 길을
인도하시는 일을 하고 계셨음을 알아야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의 이끄심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까지도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다고 하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께서 심판하시는 권한을 그리스도께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듣는
대로만 심판한다고 하십니다. 즉 당신 의지를 모든 것에서
완전히 버리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아버지와 한
몸이 되는 방법이셨습니다.
워낭소리에서 최 노인은 매일 늙은 소를 데리고 일을
하러 나갑니다. 최 노인도 이 늙은 소가 사람이었으면
너무 일을 부려먹는 자기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신도 당신 때문에 이미 죽을 나이를 훨씬 넘긴
소가 많은 고생을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최 노인도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최
노인이 일을 하기 때문에 늙은 소도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아버지도 일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최 노인이 소와 함께 일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아버지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일을
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우리 안에 사시며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성모님께 잉태되고 나셔서
성모님을 통해 엘리사벳에게 성령님을 채워주시고 또
그것을 통해 미래의 예언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기를
원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을 하시니
성모님께서도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일이 되고 올바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올바르시니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그 올바름에 참여하게 됩니다.
마차가 열심히 달리고 있다면 가장 고생하는 것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을 부리는 마부가 없다면 말이 땀이
나게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자신이 걸어온 발자국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모래 위에 찍힌 발자국은 항상 그리스도와 나 두 사람의
것이었지만, 내가 가장 힘들 때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에 자신이 가장 힘들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셔주지 않으셨다고 투정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힘들 때 내가 너를 업고 걸었단다.”
그분은 단 한 순간도 우리만 고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항상 함께 일을 하십니다. 갑자기 강론의 좋은
영감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빨리 옮겨
적을 수 있는 것을 찾아 적어놓습니다. 내가 일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분께서 내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명품이신 주님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제가 아는 신부님 중에 옷을 잘 입으시는 분이 계십니다.
신부들은 대체적으로 외모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께서는 다른 신부와는 달리 항상 깔끔한
옷차림과 위아래가 잘 어울리는 옷들을 맞춰 입으십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분들이 비싼 명품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더군요. 저 역시 이렇게 멋지고 잘 어울리는 옷이
무척 비쌀 것이라는 생각에 한 번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평범한 옷이었고, 또 가격도 보통의 옷들보다도 오히려
훨씬 저렴한 옷들이었습니다. 누가 입으면 싸구려 옷도
명품처럼 보인다고 하더니만 바로 이 신부님이 그런
분이더군요.
그에 반해서 저는 이 신부님과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습니다.
누군가가 값비싼 명품 옷을 사주셨지요. 그러나 제가 입으면
알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비싼 옷이라 한 동안 입고
다녔더니 어떤 신부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좀 좋은 옷 좀 입고 다녀. 왜 그런 옷만 입고 다니는 거야?”
누가 입으면 싸구려 옷도 명품처럼 보이는데, 제가 입으면
명품도 싸구려로 보이는가 봅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이
과연 사람의 외모만일까요? 아름답고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어야지만 옷이 더욱 더 부각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그 신부님은 키도 그렇게 크지 않고, 약간
통통한 느낌을 주는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너무 잘 어울리게 옷을 입습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도 있듯이, 옷을 잘 입지
못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 명품 옷이 전혀 필요 없지요.
그러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이라는 명품. 그 명품과 함께 하면서 우리는
과연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분으로 모시고 있을까요?
혹시 옷을 잘 입지 못해서 명품도 명품 같지 않게 만드는
저처럼, 명품이신 주님을 형편없는 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뒤, 당신 편한 대로 사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끔찍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십자가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춰서 생활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하신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일치되는 삶을 사셨기에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환하게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들 역시 그렇게
해야 함을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명품이신 주님을 세상에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바꾸도록 합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특히 사랑의 삶을 실천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덤으로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내 자신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히 한다고 누구나 성공하는 건 아니다. 운과 재능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시카고 한인 성당 내부
12시 30분.
어제 잠을 자다가 시계를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12시30분.
헉!! 너무나도 꿀잠을 잤다 싶었는데, 12시 30분이랍니다.
왜냐하면 10시에 본당 미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그런데
12시 30분이니 어떻게 합니까? 본당 신부님께서 아마도
제가 시차 적응 때문에 늦잠을 자는 것으로 알고 깨우지
않았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날 밤에 이번 주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걱정 마세요. 제가 이번 주 미사 다
하고, 강론도 다할게요.”라고 호기를 부린 것이 부끄럽기만
하더군요.
그런데 참 이상했습니다. 전날 밤 11시쯤 잠들었는데, 어떻게
12시간 넘게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을까요? 평상시에
3~4시간 자는 저로써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아무튼 부끄러운 마음에 밖의 동태를 살피려고 방문을 살짝
열어 보았습니다. 너무 어둡습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을
보면서 비로소 저는 혼자 실컷 웃을 수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12시간 넘게 잠을 잔 것이 아니라, 딱 1시간
30분을 잤던 것입니다. 그리고 안심을 하고 다시 잘 수 있었지요.
이 세상은 오해하고 착각할 것들로 가득한 곳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면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혼자만의 생각으로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주의를 기울여 이 세상을 똑바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길, 그 길만이 가장
편하고 쉬운 길임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느뇨?
사람이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느뇨?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느니라. 이렇게 교리를 배웠고 그렇게 살았기에
많은 이들이 순교했던 겁니다.
오늘이라고 성경구절의 내용이나 뜻이 조금도 달라진 것
없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을 숭상하며 목숨 바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 아니고요. 세속 쾌락 애정에 매력 느껴
빠져 살기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요한 5,2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피정처럼 인생을
2013년 다해 3월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 요한 5,17-3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피정처럼 인생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다음과 같은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미사 때 오늘 복음을 봉독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예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으면, 얼마나 절박했으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세 번씩이나 저런 표현을
사용하셨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저는 예수님의 인류를 향한 강력한 구원의지를
엿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이 죽음을 향해가는 낭떠러지 길인 줄도
모르고 비척비척 걸어가는 아들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외치는
아버지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교만과 아집, 편견과 오류로 가득 찬 유다인들 이었습니다.
사악함과 이기심으로 눈이 멀었기에 자신들 바로 눈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동족들이
너무도 안타까우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진실로, 진실로’를
거듭 되풀이하시는 것입니다.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예수님의 외침 ‘진실로, 진실로’는 어찌
보면 오늘 바로 ‘나’를 위한 외침입니다.
세상에 눈이 멀어 그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나’, 크나큰
수치스러움에 의도적으로 그분을 눈길을 비껴가는 ‘나’를 향한
주님의 외침이 ‘진실로, 진실로’이군요.
은혜롭게도 다시 한 번 그분의 절박한 외침에 귀 기울이라고
‘피정’이라는 은총의 시간을 무상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피정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이런 것 인듯 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는 죽음의 삶에서 깨침의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은총을 체험하는 순간.
더 이상 어두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속박 받지 말고, 그저 지금 이 순간 충만한 하느님 자비에 푹
잠기는 것.
바로 지금 이순간이 천국이고, 지금이 구원의 때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그러기 위해서 은혜로운 하느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말씀에 머물러 지내는 은총의 순간.
결국 우리 매일의 삶, 인생 전체가 피정인 것을, 그래서
피정처럼 인생을 살고, 인생처럼 피정을 하는…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벳자타 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두고 사람들이 박해하기 시작하자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라고 해명하신다.
안식일은 원래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쉬신 것처럼 우리도 주일을 쉼으로써 우리의 하느님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신다고 하면 안식일의 의미에도 변화가 온다.
「영신수련」 236항을 보면 하느님은 나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신다. 하느님께서 농부처럼 땀 흘려 일하시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세상사를 섭리하시기
위해 쉴 틈이 없으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다움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규정을 만든 원래의 정신을 살아야 한다. 이제 안식일은
‘일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사랑하는’ 날이다. 오늘 하루
사랑을 실천하는 그만큼 내 하느님다움을 회복한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모두 올바르다. 아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아버지 뜻에 온전히 일치하신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 권한을 주셨다.
아들은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 모든 권능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며, 아들은 이를
받아서 행사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러한 긴밀한
일치는 내 기도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하느님과 함께 살고 싶다. 나는 자존자自存者가 아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은 자이기 때문에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처럼
예수님께 꼭 붙어 있어야 한다. 오늘 하루 어느 한순간도
그분에게서 분리되지 않기를 빈다. 순간마다 나를 찾지 않고
하느님을 찾고 사랑을 향해서 발돋움한다면 나도 그만큼
하느님다워진다. 모든 것 안에서 오직 하느님의 뜻을 찾는
하루가 되기를 빈다.
- 정제천 신부(예수회) -
◈ [기타] 허윤석 신부의 오늘의 강론!- 놀라서
`제목: 놀라서!
사순시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왜 사형선고를
받으셨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난의 처절함 그리고 내죄를 대신하여 짊어지고 가신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어떤 이들이
그분을 죽이려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분의 죄명은 아마도 신성모독이었을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칭하고 자신을 아들로 칭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듯이 하느님과 자신이 하나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심지어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고 그분은 스스로를 증언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개신교와 달리 성호경이라고 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하고 십자가를 머리에 가슴에
좌우 어깨에 걸쳐 긋는다.
이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다인을 자극시키는 말을 하게
되신다. 하지만 예수님도 이 말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충분히
하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놀라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그
놀라움을 두자기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놀라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정체성과 그 신원의식에서 드러나는 부활과 구원의
의미이다. 그것은 삼위일체와 강생구속이다.
우리는 미사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라고
말한다. 오늘 복음에 비취어 보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성자가 하나인 것처럼 인간인 우리가
인간 하느님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너무나 놀라 그분을 죽이려는 생각까지 들게하는 것이고
동시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구원방식과 그분의
정체성을 당신 스스로 알려주시는 놀랍고도 장엄한 서사지와
같다. 한쪽은 너무나 황당하고 신성모독이라 놀라서 죽이려
하고 한쪽에서는 너무나 은혜롭고 신비롭고 거룩한 말씀이므로
놀라울 따름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의 핵심이며 복음의 해설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 친히 당신이 누구신지 밝히시는
자서전이며 복음안에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그
대목을 묵상해 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 지난 강론은 저의 까페 회복의 시간의 강론란에 있습니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회복의 시간 Hora Recreationis
http://cafe.daum.net/credohur1004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축구!모든것을즐기십시오?
- 이해욱신부
<斷想> 17. 축구! 모든 것을 즐기십시오?
요즘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저도 잘은 못했지만 운동 중에
가장 좋아하던 운동이 축구였습니다. 소신학교 시절,
운동장이라고는 딸랑 축구장 하나뿐인 아주 작은 공간의
신학교에서 많은 신학생들이 함께 어울려 놀 수 있는
것은 "축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 교장신부배 축구대회는 가히 "전쟁",
그 자체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하다 보니, 축구대회 후에는
시련(?)이 컸던 것입니다. 선배가 지게 되면, 후배에게 시련이
시작됩니다. 신학교가 들썩입니다. 신학교가 폭력의 장(場)이
됩니다.
어린 마음에 그래도 거룩한 마음으로 신부가 되겠다던
신학생들이 조폭이 됩니다. 이를 말리던 서른 초반의
젊은 담임 신부가 신학교에서 폭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더 큰 폭력을 휘두릅니다.
서로 잘못한 선후배 두개 학년 전체 100명이 넘는 학생을
강당에 몰아넣고 소위 "빳따"를 칩니다. 자신의 제자들을
올바른 사제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용감한 30대 초반의
힘이 넘치는 젊은 사제는 "빳따"가 하느님 법(法)이 되어
법(法)을 마구 휘두르면서 땀을 뻘뻘 흘리다 곧 지쳐버립니다.
한참의 세월이 흘러 띠 동갑도 안 되던 그 젊은 스승과
한자리에 함께 앉아 고스톱 전쟁에 뛰어듭니다. 스승께서는
고스톱에 가히 신선의 경지였지만, 범 무서운 것 모르는
하룻강아지이기에 범을 마구 귀여워합니다. 범의 수염,
코털을 잡아 뜯습니다.
범은 그 아픔을 참을 수 없어 포효합니다, 그 작은
하룻강아지에게 말입니다. 이름대로 하룻강아지이기에
더욱 무서울 게 없습니다. 범은 약속을 깹니다. 나의 수염을
한 시간 더 물어뜯을 기회를 주겠다고...
하룻강아지는 정말 그럴 수 없다고, 하룻강아지라 잘 몰라서
그렇게 수염, 코털을 물어뜯었지 이젠 그럴 수 없고 또 졸리고
힘이 들어서도 그럴 수 없다고 해도 범이 그것을 강제로
원하니 어쩔 수 없이 양보합니다.
범의 마음이 진실인지 범이 내뱉은 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더욱 수염과 코털을 들이대줍니다. 수염과 코털이 다
뽑혔습니다. 멋있게 보이던 범의 몰골이 끌려가던 예수님
모습 그대로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 모습을
하룻강아지에게 행동으로 보여 주려 했던 모양입니다.
서라(스톱), 가라(고~) 말할 힘도 사라졌습니다.
전쟁이 끝난 것입니다.
하룻강아지는 범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하룻강아지는 역시 하룻강아지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베푼 자비로 이제 전쟁을 마감할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범은 받은 그 자비로 다시 억지로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전쟁에 패합니다. 이제는
범이 진짜로 하룻강아지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경험합니다.
축구에 너무 몰두하여 전쟁에 나선 신학생들, 그들은
신학교를 전쟁터로 만들었고 그 전쟁을 하느님의
정의(?)로 다스려 보려던 한 젊은 스승은 그 후, 가니
마니 하는 좁은 전쟁터보다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저 푸른 초원을 더욱 사랑하고...
축구를 즐기십시오. 고스톱을 즐기십시오.
골프를 즐기십시오. 인생을 즐기십시오.
그러나 너무 빠지지는 마십시오.
더 나아가 너무 즐기면 휘둘림을 당하게 됩니다.
하룻강아지에게 물리게 됩니다.
하룻강아지에게 물리면 얼마나 물리겠느냐고요?
아무리 하룻강아지라도 광견병을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큰 어른 소도 광우병을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모든 것을 무작정 거부해도 그렇지만, 모든 것에 휘둘려도
그렇습니다. 작은 일에 감정을 휘둘리면 감정의 노예가
됩니다. 감정은 때론 잠자는 강아지 같아도 때론 미처
날뛰는 미친개가 됩니다.
미친개는 때려잡는 방법밖에 도저히 다른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미친개는 불쌍할 뿐입니다. 원래 미친개는
없었는데 감정이 만들어 내어, 없던 미친개를 만화처럼
만들어 내어 때려잡은 것입니다.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쓸데없는 짓이라 해도 생겨난 모든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에 쓸데없는 상처가 남는
것입니다.
월드컵에 술이 넘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지금 저도
맛있게 맥주 한 잔 하렵니다, 포도주가 아니기에...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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