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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이유로 영어 조기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영어 조기 교육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게다가 나는 극단적인 조기 교육이 좋다고 생각한다. 즉 갓난아기 때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아니 내 자식을 갓난아기 때부터 고생시키란 말인가?”라고 되물을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영어 공부는 고역이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한국어 공부는 전혀 고역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한국 사람은 한국어 공부를 아예 안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 사람은 자라면서 한국어를 그냥 알게 된다.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고 아버지가 미국 사람인 경우 그 자식은 자라면서 그냥 한국어와 영어를 알게 된다. 물론 평소에 어머니가 자식 앞에서 한국어를 하고 아버지가 자식 앞에서 영어를 한다면 말이다. 이것이 한쪽 극단이다. 다른 쪽 극단은 한국 사람이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고역의 과정이다. 한쪽 극단에서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전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된다. 다른 쪽 극단에서는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엄청난 의식적 노력을 했음에도 원어민에 비하면 한심한 수준이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일까?
영어 조기 교육이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어차피 고등학생 나이가 되면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본 적이 없다.
만약 엉터리로 영어 조기 교육을 한다면 거의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영어 조기 교육”이 효과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엉터리 영어 조기 교육”이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또한 3~4세 때쯤에 제대로 영어 조기 교육을 했어도 그 후 5년 동안 영어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모두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역시 영어 조기 교육 자체가 효과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영어 조기 교육이 효과가 없을 수는 없다. 만약 제대로 영어 조기 교육을 해서 만 5세일 때 영어를 한국어에 버금갈 정도로 할 수 있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그 이후에도 영어로 책을 읽거나 동영상(어린이용 TV 프로그램이나 영화)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조기 교육을 하지 않은 아이들과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다.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이것이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글을 조리 있게 쓰는 못하는 이유는 한국어 글쓰기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지 영어를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 문제라면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는 아이에게 피아노나 바둑이나 수학을 가르치는 것도 문제란 말인가? 태어나서 10년 또는 20년 동안은 한국어만 가르치고 다른 것들은 전혀 가르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중국에 사는 조선족 같이 어렸을 적 환경 때문에 두 나라 말을 자연스럽게 배우는 사람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평범한 사람도 환경만 좋으면 두 나라 말 정도는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수학, 바둑, 피아노 등을 배운다고 한국어를 배울 뇌가 부족해지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배운다고 한국어를 배울 뇌가 부족해지는 것은 아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배우면 처음에는 두 언어가 약간을 헷갈리겠지만 그것은 처음에만 그럴 뿐이다. 어느 정도 배우게 되면 헷갈리지 않는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두 나라 말을 배울 잠재력이 있다.
영어를 언제 가르쳐도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언어 학습에는 때가 있다. 만약 20세가 될 때까지 어떤 언어도 접하지 못하고 살면 이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언어를 배울 수 없다. 청각 장애인의 경우 이런 일이 상당히 많았다. 청각 장애인이 20세가 될 때까지 수화를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이전에는 흔했다. 그리고 여러 문화권에서는 그런 일이 여전히 흔하다. 어떤 경우에는 부모가 아주 특이해서 자식을 지하실에 가두어 놓고 언어 환경을 완전히 박탈한다. 이럴 때에도 그 자식이 그런 상태로 20년 동안 살게 되면 이후에는 언어를 배울 수 없다.
모국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외국어의 경우에도 몇 살 때부터 배웠는지가 상당히 중요하다. 미국에 이민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따르면 몇 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는지가 그 사람의 영어 구사력과 상당한 상관 관계가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이에 미국에 온 사람들은 다른 미국 사람들과 영어 구사력이 사실상 같았다. 그리고 미국에 올 당시의 나이가 많을수록 영어 구사력이 떨어졌다. 모국어를 배우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시기가 중요하다는 점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진화 심리학은 선천론적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언어를 배우는 시기가 따로 있다”는 선천론적 주장 중 하나다.
인간은 갓난아기일 때부터 언어를 배우는 환경에서 진화했다. 그리고 어쨌든 인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언어 학습 능력이 떨어지게 생겨먹도록 진화했다. 이것은 진화한 인간 본성이다.
이런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아마 과거 우리 조상들이 진화했던 시기에는 외국어(사냥-채집 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그냥 이 용어를 쓰자)를 접할 일이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 되었을 때 외국어를 습득하는 능력이 매우 떨어져도 생존과 번식에 별 지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릴 때 언어를 배우는 데 쓴 언어 학습 기제를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다음에는 없애 버리고 그 뇌세포를 다른 곳에 쓰는 것이 더 적응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구적으로 작동하는 언어 학습 기제가 아니라 일회용(?) 언어 학습 기제가 진화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어 조기 교육의 빈부 격차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이다. 원어민이 열 명 이하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학원은 엄청나게 비싸다. 그리고 꽤 오래 전부터 부자들은 그런 곳에서 자식을 가르치고 있다.
영어 조기 교육이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런 학원에서 몇 년 동안 꾸준히 영어를 배운 학생들과 영어 조기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학생들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연구를 본 적이 없다.
어쨌든 그런 학원은 부자들만 큰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아도 영어 조기 교육이 가능해졌다. 이제 DVD 플레이어만 있으면 된다. <뽀로로>를 비롯하여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의 영어 버전이 많이 있다. 100만 원만 있으면 DVD 플레이어와 그런 프로그램 영어판 DVD 수십 개를 살 수 있다.
소리만 들을 수 있는 CD에 비해 영상까지 볼 수 있는 DVD는 영어 조기 교육에 훨씬 더 쓸모가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영상을 보면서 맥락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국어를 배울 때 아이들은 말을 듣고 그 말이 나온 맥락을 보면서 배운다.
나는 그런 영어 동영상을 매일 한 시간 이상 2년 정도 보여줄 때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를 조사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어쨌든 나는 그런 식으로 영어 조기 교육을 하면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다.
아이가 한 시간 내내 집중해서 볼 필요도 없는 것 같다. 아이가 모국어를 어떤 식으로 배우는지 생각해 보라. 어른들의 말에 항상 의식적으로 집중해서 듣는 것이 아니다. 그냥 흘려 듣는 것 같은데도 아이는 무서운 속도로 모국어를 배운다.
의식적 집중과 무의식적 집중은 다르다. 우리가 멍한 상태에서 눈을 뜨고 있어도 뇌 속의 시각 처리 기제는 놀랍고도 빠른 속도로 시각 정보를 자동적으로 처리한다. 의식이 멍한 상태로 있다고 무의식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중고등학교에서 하는 영어 공부는 의식적 집중이 필요하다. 반면 갓난아기 때부터 시작하는 모국어 학습은 학습이라고 부르기도 이상할 정도로 그냥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아이가 언어 환경에 충분히 노출되기만 하면 놀랍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언어 학습 기제가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나는 동영상을 통해 영어를 아이에게 충분히 노출시키기만 하면 아이가 한국어를 배우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영어를 배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지 않아야 할 이유를 못 찾겠다.
영어를 배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잘 설계된 언어 학습 기제가 해체되기 전에 영어를 아이에게 충분히 노출시켜서 자동적으로 영어를 학습하게 하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중고등학생 나이가 되어서 힘겹게 의식적으로 영어를 배우는 방법이다. 전자는 효과도 좋고 아이가 고생하지도 않는다. 후자는 효과도 나쁘고 아이가 고생한다.
영어 조기 교육은 단지 아이가 영어를 잘 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만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갓난아기 때부터 아이에게 영어를 충분히 노출시키면 아이는 거의 고생하지 않고 영어를 배울 수 있다. “아니 내 자식을 갓난아기 때부터 고생시키란 말인가?”라는 질문에는 “갓난아기 때부터 영어를 가르쳐야 자식이 고생하지 않을 수 있다”라는 말로 답하고 싶다.
<뽀로로>를 비롯한 온갖 어린이 프로그램의 인기를 볼 때 영어판을 매일 보게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 만약 아이가 영어판이 아니라 한국어판을 보겠다고 떼를 쓴다면 아예 한국어판을 전혀 보여주지 않으면 며칠만 지나면 영어판을 재미있게 볼 것 같다.
나는 이 글에서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 연구에 바탕을 두고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촘스키는 일반인이 직접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 스티븐 핑커는 촘스키의 주장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 썼다.
『언어 본능 –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한영·문미선·신효식 옮김, 소소, 2004년 6월(초판 1쇄)
『The Language Instinct – How the Mind Creats Language』, Steven Pinker, Perennial Classics, 2000(초판: 1994)
이 책의 경우에도 한국어 번역판에는 문제가 많다.
『언어 본능(김한영•문미선•신효식 옮김)』 번역 비판 – 3장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26
진화 심리학자들은 촘스키를 매우 중시한다. 하지만 촘스키는 진화 심리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언어의 진화에 대해 촘스키와 핑커 사이에는 상당한 이견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들을 참조하라. 나는 이 논쟁에서 대체로 핑커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The Faculty of Language: What Is It, Who Has It, and How Did It Evolve?
Marc D. Hauser, Noam Chomsky, Tecumseh Fitch
SCIENCE VOL 29822 NOVEMBER 2002
http://www.chomsky.info/articles/20021122.pdf
The faculty of language: what’s special about it?
Steven Pinker, Ray Jackendoff
Cognition 95 (2005) 201–236
http://scholar.harvard.edu/pinker/files/2005_03_pinker_jackendoff.pdf
The evolution of the language faculty: Clarifications and implications
W. Tecumseh Fitch, Marc D. Hauser, Noam Chomsky
Cognition 97 (2005) 179–210
http://www.st-andrews.ac.uk/~wtsf/downloads/FitchHauserChomsky2005.pdf
The nature of the language faculty and its implications for evolution of language (Reply to Fitch, Hauser, and Chomsky)
Ray Jackendoff, Steven Pinker
Cognition 97 (2005) 211–22
http://pinker.wjh.harvard.edu/articles/papers/2005_09_Jackendoff_Pinker.pdf
이덕하
2012-03-12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같은 한국어지만 방언을 예로 들어도 이해가 될것입니다. 어렸을때 듣고 말했던 방언은 나중에 표준말을 하면서 살아도 그지역에 다시 가면 자연스럽게 나오는것만 봐도 외국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드네요.
전 반대의 입장입니다. 국제결혼 가정이어서 아이가 자연스레 부모의 모국어를 각각 습득한다면 몰라도 인위적인 조기 외국어 교육에는 반대합니다. 정체성이 확립되기도 전에 다국어를 배우는 것은 정말 우려스럽습니다. 국어와 외국어의 문법체계가 다르고 사고도 다른데, 혼용해 배우다보면 국어에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어에 외국어가 뒤섞여 국적불명의 한국어가 될 우려도 큽니다. 실제 외국어가 강조되는 요즘 학생들의 국어 문법과 맞춤법 실력은 예전만 못합니다. 외국어 투의 국어도 문제구요.
영여 조기 교육을 피아노나 축구에 비유하셨는데, 그것과는 다르지요.
“외국어를 일찍 배우면 국어를 잘 못한다”는 명제는 “인간은 2개 국어를 배우기에는 뇌 용량이 부족하다”는 명제를 전제로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평범한 사람도 환경만 좋으면 2개 국어 정도는 충분히 배웁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요즘에는 국어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학생들 성적이 떨어졌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국어 문법과 맞춤법 실력이 떨어졌다면 그것은 국어를 잘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국어 투의 국어는 20세기의 한국 번역가들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김밥지옥님의 생각이 참 놀랍고 우려스럽습니다. 한국어가 중국어의 방언이라니. 논리어란 개념은 잘 모르겠으되, 영어는 논리어고 한국어는 논리어가 아니란 말입니까? 언어가 사고를 지배합니다. 맞습니다. 이것이 국어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님은 영어가 공용어인 필리핀이 부러우십니까?
한국이 중국에 맞붙어 있고 문화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한국어는 중국어의 방언일 것이라고 추측하신 것 같은데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어는 문장순서를 보면 교착어같지만 동사나 형용사의 어미가 활용되는등의 굴절어의 특성도 함께 가진 특이한 언어(언어비교학적 고립어)입니다. 반면, 중국어는 문장순서로는 인도유럽어족과 비슷한 특성을 띄고 있지만 어미활용이 없어서 언어유형학적 고립어이자 다른 시노티베트어족의 언어들과 친족 관계어입니다. 기본적인 언어학에 대한 지식만 있어도 한국어가 중국어의 방언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으며 학술적으로도 일말의 고려를 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아실 것 입니다.
김밥지옥님의 생각이 그려셔서 그런지는 몰라도 님의 국어 맞춤법이나 띄어 쓰기, 문장부호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군요. 제가 우려하는 점이 님의 글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근데 미국에 어린 나이에 이민 온 사람이 영어를 더 능숙하게 잘 한다는 건, 생각해 보나마나 당연한 얘기 아닌가요? 일찍 왔다는 건 그만큼 영어에 노출된 시간이 훨씬 길다는 뜻이니까 오래 배운 만큼 당연히 더 잘 해야 정상이겠죠. 그런 효과를 배제한 연구가 아니라면 조기교육이 효과적이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그리고 우리가 흔히 영어조기교육의 효과라고 생각하는 것에도 그런 부분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4살부터 꾸준히 배웠으면 중학교 들어갈 때 쯤엔 이미 10년이나 배웠단 얘긴데, 이 아이가 영어를 잘 하는 게 어린 나이에 배운 효과인지 아니면 오랫 동안 배운 효과인지 그걸 검증할 필요성
만약 예컨대 “미국에 이민 온 사람 중 현재 50세인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다면 TheLuca님의 말씀대로겠지요. 하지만 그런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시기가 따로 있는가라는 문제와 외국어를 배울 수 있는 시기가 따로 있는가라는 문제는 분명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도 전자에 관해서는 그렇다는 얘기나 사례를 들어 본 적이 있지만, 후자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반드시 그렇다는 사례나 설득력 있는 설명을 들어 본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물론 제가 언어교육이나 심리학 쪽에는 문외한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죠. 하지만 덕하님의 글에서도 후자에 관한 그럴 듯한 설명 같은 건 딱히 찾아보기 힘든 것 같네요.
특히 진화심리학적 접근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덕하님의 가설은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한 수 많은 시나리오들 중 하나일 뿐이고, 반드시 그래야 할 무슨 필연적 이유가 있는 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원래 진화심리학이라는 게 좀 그런 면이 있죠. 그래서 이런 문제는 역시 경험적 증거에 의해 접근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어떤 의미에선 결과적으로는 조기교육이 효과는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 반드시 어린 나이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그 나이에 수학, 과학을 (일정 수준 이상)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닌 이상 아무 것도 안 배우는 것보다 영어라도 일찍부터 가르치면 (제가 말했듯이) 중학교 들어갈 때 쯤 되면 이미 상당 기간 배운 상태일 테니까 분명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경쟁력이 있는 건 사실이겠죠. 하지만 물론 우리의 논의가 그런 차원의 얘기는 아니죠.
이 문제는 두 가지 측면이 혼재되어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외국어를 언제 가르치는 게 효과적이냐 하는 것이고, 제 입장은 이덕하님과 같습니다. 이왕 외국어를 배워야할 것 같으면 어린 나이에 배우는 게 훨씬 쉽고 들이는 노력도 적게 들어갈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다면 외국어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거냐하는 것이고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배우는 게 품이 덜 들더라도
분명히 자원이 투입되어야겠죠. 그렇다면 과연 사회의 자원을 모든 주민에게 외국어를 가르치는 데에 쓸 것이냐를 선택하는 문제가 될 것입니다.
저는 현재 우리 사회가 외국어 교육에 들이는 노력을 다른 곳으로 분산하자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대다수의 한국 사람은 외국어가 없더라도 사는 데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을 것이고,
결국 외국어는 서열 매기는 데에 쓰이는 용도가 주될 것이니까요. 참고로 DVD로 외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냥 가까운 사례로 제 둘째 아이는 어릴 때
비디오에 너무나 많이 노출되었지만 오히려 말을 늦게 배워서 상당히 애 먹었습니다. 보편화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이 말을 배우는 것은 단순한 문제 같지는 않습니다,.
한국에서 자라는 아기들은 한국어를 쓰는 주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어로 된 비디오를 보느냐 마느냐는 한국어를 배우는 데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다른 식으로는 영어를 접하기 힘든 한국 아이들의 경우입니다.
아기들이 말을 배울 때 어른들이 대화하는 걸 들으면서 배운다는 걸 책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만, 상호 교류 없이 단순히 TV에서 지나가는 소리 만으로 쉽게 배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전혀 들어보지 못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시간 대비 효율적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어의 계통”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것 같습니다.
한국어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96%B4
한국어의 계통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EC%96%B4%EC%9D%98_%EA%B3%84%ED%86%B5
http://en.wikipedia.org/wiki/Language_isolate
중국어를 배워 보셨나요? 중국어와 한국어는 각각 고립어와 교착어로 문법 구조가 전혀 다른 언어인데, 어떻게 한국어가 중국어의 방언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는지 참으로 신기하네요.
그리고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라 손익계산을 해봐도 언어를 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비용을 초래하는 반면 그 효과는 상대적으로 비교할 경우 거의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게 거의 자명한 일인데, 영어공용화를 하자는 건 그런 면에서 보자면 넌센스에 가깝다고 봅니다. 제가 영어에 적대적일 이유도 없고 영어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아무리 그래도 영어공용화는 4대강 사업 못지 않은 엄청난 낭비임에 틀림없다고 봅니다.
《영어 조기교육의 필요성 찬반 논란》과 《영어 조기교육의 효과 유무 논란》은 분명 차원이 다른 문제죠. 그러나 이덕하 님의 윗글은 서로 번지수가 다른 필요성 논란과 효과 유무 논란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은 부주의가 있습니다. 물론 두 논란점은 서로 긴밀히 연계된 문제죠. 하지만 명료한 논지 전개를 위해서는 둘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영어 조기교육은 효과가 높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와는 이율배반적으로, 영어 조기교육의 필요성은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어 조기교육의 효과는 높겠지만, 다른 (제약) 조건들 때문에 영어 조기교육을 반대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영어 조기교육의 높은 효과는 학술적/경험적 연구로 충분히 검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제약 조건들, 이를 테면 국어 교육의 상대적 약화, 교육 비용의 증가로 인한 서민층 부담 가중, 정체성 혼란 우려 따위 등등을 들어 영어 조기교육을 반대하는 교육학자 · 교육관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어 조기교육의 필요성 찬반 논란》이라는 “정책적, 실천적, 주관적” 문제와 《영어 조기교육의 효과 유무 논란》이라는 “학문적, 이론적, 객관적” 문제는 좀더 명확히 분리해서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판단에 이 두 가지 논제가 이덕하 님의 윗글에선 다분히 “착종”돼 있어 혼란스럽습니다.
윗글에서 이덕하 님께서 주장하신 “DVD 영어 교재를 통한 영어 조기교육의 높은 효과” 가능성에 대해선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 왜냐 하면, 아기(유아)나 어린이들의 경우, 언어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학습자를 둘러싼 적절한 환경과, 그 환경과 되먹임(feedback)과 앞먹임(feedforward)으로 상호작용하는 학습자 자신의 운동/움직임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적절한 환경이라는 것은 학습자에게 언어적 자극/입력을 줄 수 있는 상대방들 혹은 상호교류 · 상호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이 있는 환경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적절한 환경과 상호작용을 활발히 해야 언어(외국어) 학습이 효과적으로 잘 될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점에 비춰볼 때 “DVD 영어 교재를 통한 영어 조기교육”으로 (다른 방식보다) 월등히 높은 효과를 끌어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로 보입니다. 설사 효과가 높게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비용 대비, 시간 투자 대비로 따지면 아마도 매우 비효율적일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덕하 님께서 위에서 말한 방식대로의 “DVD 영어 교재를 통한 영어 조기교육”은 어린 학습자들에게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줄 수 없고, 되먹임과 앞먹임의 상호작용도 지극히 미미하게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아기/유아나 1~6세 앞뒤의 어린이들이 일방적으로 상영되고 있는 DVD 영어 교재를 시청하면서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상호작용하기란 매우 어려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