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사림파(士林派)의 종장(宗匠) 김종직(金宗直ㆍ1431~92)은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숙자의 고향은 선산(경북 구미). 그런데 김종직은 왜 밀양에서 태어났을까. 어머니가 밀양 박씨였기 때문이다. 아버지 김숙자는 혼인 후 고향이 아니라 밀양의 부인 집에서 주로 살았다. 서울에서 벼슬살이할 때를 빼고는 이들 부부에게 집이란 곧 밀양의 집을 뜻했다.
조선시대, 특히 16세기까지 혼인은 남자 쪽이 움직이는 시스템이었다. 혼인을 하면 여자는 그냥 자기 집에 그대로 살았다. 남자가 정기적으로 자신의 집과 여자 집을 오갔다. 남자가 아예 여자 집에서 눌러 사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가 ‘장가(장인 집) 든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혼인형태에서 비롯됐다. 아이들이 외가에서 태어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종직 자신도 혼인 후 밀양을 떠나 금산에서 살았다. 그의 부인 조씨가 금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종직 역시 관직 때문에 서울에서 살 때가 많았지만, 관직을 그만둔 사이사이나 여묘살이 후에는 금산으로 돌아갔다.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도 외할머니 무덤 곁에 묻어주었다.
그런데 김종직은 금산에 계속 살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가 52세에 부인 조씨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이 죽은 지 3년 만인 55세에 재혼했다. 두 번째 부인 문씨의 나이는 낭랑 18세였다. 요즘 말로 하면 ‘도씨’다. 여기에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여러 측면이 숨어 있다.
도학자(道學者)를 지향한 김종직. 그는 왜 자신의 나이에 걸맞은 과부와 재혼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는 처녀장가를 가는 게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과거시험이 그것이다. 조선은 일찍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재혼녀의 자식은 과거를 볼 수 없게 했다. 과거를 볼 수 없는 조선의 양반 남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아들로 이어지는 양반 집안이 별 볼일 없어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다. 이를 조선의 양반 남자들이 무릅쓸 까닭이 없다.
사실 죽은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면, 나이 50세에 처녀장가를 고집하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정식으로 재혼하기보다는 첩을 들여 집안 관리를 시키는 게 쉽다. 그런데 김종직은 첫 부인이 낳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는 바람에 처녀장가를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집안과 다음 세대를 위해서였다.
재혼 후 김종직은 문씨를 바로 자신의 집으로 오게 했다. 이미 서울에서 고위 관직자로서 틀을 갖추고 사는 자신의 집안 관리를 시켰다. 초혼 때와 달리 재혼에서는 남자들이 처가에 가서 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김종직과 관련해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상례(喪禮) 문제다. 김종직이 62세로 죽었을 때, 문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7살이었다. 부인이 상례 주관자가 되었다. 실질적인 진행은 김종직의 처남과 생질이 담당했다. 김종직에게 번듯한 조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처가 쪽 사람들이 상례를 주관하고 진행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중국과 달리 혼인에서 남자가 처가로 가고, 또 그곳에서 생활하는 방식을 좋아했을까. 거기에 어떤 편리한 점이 있었을까. 아직은 정답이 없다.
다만 김종직의 경우는 다소 이율배반적이었다. 그는 처가와 매우 긴밀한 관계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앞서가는 지식인으로서는 중국적인 부계(父系) 가족제도를 선진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부계 가족제도를 보급하고자 애썼다. 17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김종직의 생각대로 변했다. ‘처가살이’는 퇴조하고 ‘시집살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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