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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음마궁(玄陰魔宮)의 최후
완산의 새벽은 아직 어슴푸레 했다.
그림보다 아름다운 절경이 차가운 가을 안개에 뒤덮여 있을 때
소리 없이 날아내리는 거대한 금시단정학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위에는 당금 천하에서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약관의 흑삼청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네 덕에 편하게 왔다. 이 은공은 잊지 못할 것이다."
웃으며 땅으로 내려서는 젊은이는
바로 중원불사신(中原不死神) 낙헌지이자 천룡제이기도 한 무천룡이었다.
'그리 오랜만도 아닌데… 마치 처음 온 것처럼 서먹서먹하게만 느껴지는군.'
완산은 무천룡에게 아주 많은 감회를 안겨준 곳이다.
그가 하인으로 사 년을 보냈고 무림인이 된 추억 어린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무천룡이 날아내린 곳은 북쪽이었다.
남천관에서는 삼십 리 먼 곳이었지만
지금의 무천룡에게 그 정도 거리는 잠깐 시간에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현음마궁(玄陰魔宮)이 세워져 있다고 했지
? 흐음, 필경 현음마(玄陰魔)의 궁전일 것이다.
현음마지(玄陰魔指)가 천하에서 무서운 일곱 가지 마공 중 하나라 하니 기대가 되는군."
무천룡은 웃으며 단정학의 깃털을 쓰다듬었다.
그것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 하는 다정한 신호였다.
금시단정학이 알았다는 가볍게 부리를 놀렸다.
무천룡은 기억을 더듬어 남천관 쪽으로 걸어갔다.
기억을 되찾게 되자 그는 낙헌지라 불려졌던 시절의 기억에 대해서는 선명치가 않았다.
무천룡이라는 본래의 신분을 찾는 동시에
낙헌지 시절의 추억들은 기억 저편으로 묻힌 것이다.
그래도 완산의 경치를 바라볼 때마다 낙헌지였을 때의 모든 것이 새롭게 떠올랐다.
소를 몰고 야생화(野生花)를 따라 다니던 기억,
커다란 나뭇짐을 지고 콧노래를 부르며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던 시절의
우스꽝스러운 기억들이 그를 미소 짓게 했다.
만일 그에게 주어진 책무만 없었다면,
그리고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바보처럼 살던 그때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한 사람 낙노인의 다정한 모습이 선명히 기억되었다.
"아…그 분은 나의 은인이시다.
강호가 평화로워지면 그 분의 시신을 찾아 정성껏 안장해야지
. 그리고 그 분을 위해 평생 제사를 지내리라."
무천룡은 참혹하게 죽어 간 낙노인의 혼령을 애도했다.
'낙노인을 위해서라도 꼭 잃어버린 딸을 찾아주어야 하는데…'
그는 생각에 잠기며 남천관 쪽으로 가다가 사람들이 두런두런 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서장에서 큰 변이 있었네."
"자칫했다면 우리들도 당할 뻔하지 않았나?
현음존인(玄陰尊人)을 쫓아 강호로 나오지 않았다면 아주 죽었을지도 모르네."
매복해 있는 자들이 조그맣게 떠드는 소리였다.
얼핏 보아서는 알 수 없는 나무숲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천룡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헤헤… 한데 말이야."
간사한 웃음소리와 함께 나직한 말이 이어졌다.
"그 놈이 중원불사신이라니 놀랍지 않는가?"
"거참, 아직도 죽지 않았단 말인가? 아마 목숨이 다섯 개는 되는 놈일 것이네."
"암중에 우리들을 쓰러뜨리려고 하는 무림맹의 잔당들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고 있다니 정말 가관이 아닌가?"
탁한 음성의 사람이 말을 받았다.
"놈들은 곧 잡힐 것이네. 그리고 중원불사신 낙헌지도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네
. 대전주(大殿主)님이 눈을 한번 크게 뜨는 날이면 말일세."
"하하…그건 그렇지."
매복한 자들은 서장 칠마전 총단에서 날아든 비보를 그저 먼 세상의 일로만 여겼다.
거리로 따려도 일만팔천 리나 되니 그들이 방심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여파가 중원에까지 미치려면 수십일은 걸리리라 예상한 것이다.
"쳇, 그나저나 소전주님이 부러운데!"
"그러게나 말이야. 우리들은 추운 데도 불구하고 생고생을 하고 있는데
무슨 호강으로 신혼의 꿈속을 헤매시는지."
"헤헤…정말 행운아가 아닌가?
일곱 분 전주님들이 소전주께 돌아가며 마공을 전수하니
다음 세상은 소전주님의 것이 될 것이네."
소전주라는 말이 무천룡의 눈에 살기를 일으켰다.
'석진영! 내 손으로 죽여야 할 놈!'
무천룡은 참을 수 없다 여기며 대화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일갈을 터뜨렸다.
"두 놈 다 떨어져라!"
취마음보다도 강한 대무신후(大武神吼)였다.
"윽!"
"어이쿠, 고막이!"
청의를 걸치고 나무숲에 몸을 감추고 있던 무사 두 명이 강한 음파에 피를 토하며 떨어져 내렸다.
무천룡은 그들 곁으로 다가가 오른쪽에 있는 자의 완맥을 잡아 채며 허공으로 쳐들었다.
"나를 아느냐? 내가 바로 너희들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중원불사신이다."
"허억…? 설마 벌써 중원으로…?"
무사의 얼굴이 샛노랗게 물들었다.
"겁먹을 것 없다. 바른 대로 말하면 살려줄 것이다."
"용… 용서해 주십시오. 시키는 대로 다… 다 할 것이니 제… 제발 목숨만…"
땀을 뻘뻘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했다.
무천룡은 그의 비굴한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형편없는 놈! 너희 같은 하수를 죽여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묻는 대로 말하고 양민이 되어 살도록 해라.
솔직하게 말하면 황금 천냥에 해당되는 명주(明珠) 한 알을 주기로 약속하겠다."
"예에?"
"하하… 나는 한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무천룡은 웃으며 무사를 내려주었다.
'으음, 신비한 사람이다. 공포감을 주는 동시에 자비스러운 마음을 일게 한다.'
무사가 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에 겨우 안도했다.
무천룡은 품안에 손을 넣어 용안보다 조금 작은 구슬을 꺼내 보였다.
"이것을 주겠다."
"아… 아닙니다. 대가가 없어도 다 말할 것입니다."
"네가 바른 말을 할 관상이기에 나도 정당히 대접해 주는 것이다.
나는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아는 재주를 지녔으니 거짓말을 한다면 살아남지 못하리라."
"아… 압니다. 신인(神人)이시지 않습니까?"
무사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중원불사신을 직접 대한 그로서는 오금이 저려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너희들은 현음마궁 소속이냐?"
무천룡이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물었다.
"그렇습니다."
"현음마궁에는 누구누구가 있느냐?"
"궁주(宮主)가 계시고 호법 칠십이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하위무사 오백이 있고, 지… 지금은 귀빈이 와 계십니다."
"귀빈이라니?"
"진… 진천마군(震天魔君)이 부인과 함께 와 계십니다."
무천룡의 두 눈에 신광이 번득였다.
"석진영! 그 자가 와 있단 말이냐? …그 부인은 누구냐?"
"과거 독낭자(毒娘子)라 불렸던 낙… 낙유향(落流香)이란 여인이십니다."
"낙… 낙유향이라고?"
무천룡의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럴 수가! 독낭자의 이름이 낙유향이었단 말인가?
낙노인의 잃어버린 딸이 유향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설마 그녀가 바로 독낭자란 말인가?'
무천룡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에 동명이인은 많다.
낙유향이라 하여 꼭 낙노인의 잃어버린 딸이라 볼 수 없다.'
그는 혼란스런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채근했다.
"그래!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현음마궁 안 별원(別園)에 계십니다.
원래 남천림(南天林)이라 불리던 곳이지요.
그곳이 소전주님께서 잠시 머무시는 장소입니다."
"알겠다."
무천룡은 미소짓다가 구슬을 무사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무사가 깜짝 놀랄 때 혈도 세 군데를 점해 무공을 금제하고 혼절시켰다.
"으음…!"
무사가 단잠에 빠진 듯 길게 드러눕자 무천룡의 입술 끝이 일그러졌다.
"독낭자라는 계집은 꼭 죽여야 할 악녀다. 그러나 그녀가 낙노인의 딸이라면…
아…차마 죽일 수 없는 일이다."
무천룡은 고개를 내젓다가 품에 손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지옥제일검의 복면을 사용해야겠군.
석진영을 죽이기 전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주어야겠다.'
무천룡의 현 무공수위는
백 명의 석진영이 한꺼번에 온다 해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초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를 죽이기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쉽게 죽인다는 것은 그에게 너무도 자비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악행을 감안한다면 정당한 징계는 아니었다.
무천룡은 이내 지옥제일검으로 변신했다.
수놓아진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바닥에 지옥령(地獄令)이라는 동패를 쥔 모습이 되어 숲속으로 날아들었다.
그의 잠입술은 천하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었다.
어떤 때에는 대무신국의 비전신법이 나타났고 어떤 때에는 오마의 비전신법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뛰어난 신법이었고, 매복이 수천 있다 해도
지리에 익숙한 무천룡을 알지 못하게 할 오묘한 신법이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저곳이다. 기왓장 하나라도 낯익은 곳이다
. 남천신군이 나를 주인(主人)으로 삼아 준 뇌공문(雷公門)의 남천관!'
무천룡은 추억 어린 남천관의 담이 바라다보이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남천관의 모습은 전과 아주 달랐다.
전에 비해 훨씬 호화스러워졌고, 단청이며 길이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편액이 걸려 있었다.
〈 玄陰魔宮(현음마궁) 〉
남천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어야 할 장소에 걸려 있는
마궁의 편액이 무천룡을 분노케 했다.
"흥, 괘씸한 도적들!"
무천룡은 이제껏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으나
편액을 보자 화가 치밀어 냉소를 치며 모습을 나타냈다.
흑의인영이 숲에서 날아와 편액을 향해 날아가자 여기저기 탄성이 일어났다.
"어엇…?"
"웬 놈이냐?"
"감히 현음마궁 안으로 침입하는 자가 누구냐?"
매복해 있던 현음마궁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침입자를 저지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들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다.
꽈아앙―!
무천룡이 허공에서 두 손을 흔들자
현음마궁의 편액이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대문과 함께 산산이 박살났다.
"으하하하… 내가 왔다! 칠마전의 마두들을 지옥으로 들여보낼 지옥제일검이 여기 왔다!"
무천룡은 광소를 터뜨리며 그 즉시 남천관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의 경공은 자신의 말소리보다 빨랐다.
그는 찰나간을 달려 남천림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울창한 죽림은 과거 그대로였다.
무천룡이 남천림을 뚫고 들어갈 때였다.
"그… 그 놈이에요!"
"유… 유향(流香)! 정말 그 놈이라면 여기 있어서는 위험하오.
어… 어서 여기를 떠납시다.
지존마궁으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오."
남천관주의 거주하던 자리에 새로 지어진 호화로운 누각 안에서
바들바들 떨며 달려나오는 일남일녀가 있었다. 둘 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석진영과 독낭자였다.
석진영은 바지만을 걸친 채였고,
독낭자는 매미 날개같이 얇은 자삼 하나만을 걸쳐 투실투실한 젖무덤이 훤히 내비쳤다.
그들은 신혼의 단꿈에 젖어 서로를 탐하는데 밤낮이 없었다.
이 날도 새벽 정사를 즐기다 청천벽력 같은 음성에 급히 빠져나온 것이다.
"현음궁주도 놈을 막지 못할 것이오."
"낭… 낭군, 놈은 필경 우리들을 노리고 왔을 겁니다."
독낭자가 덜덜 떨자 석진영도 겁에 질려 그녀의 손을 쥐고 이끌었다.
"놈은 단정학을 타고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소. 지체할 시간이 없소. 어서!"
"멈춰!"
돌연 그들의 고막을 때리는 소리가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죽림가에 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흑의복면괴인 하나가 있었다.
"석진영, 정말 오랜만이구나!"
복면인의 목소리는 만년빙굴(萬年氷窟) 안에서 흘러나오는 빙풍보다 차가웠다.
그의 음성은 만물을 꽁꽁 얼려버릴 듯 싸늘했고 살기에 차 있었다.
"네… 네놈이 버… 벌써 오다니…?"
석진영은 복면인의 손에 쥐어진 지옥령을 보고는 사색이 되었다.
평소 기세 등등한 그가 아니었다.
"지… 지옥갱에 던지기 전 네놈의 머리에 파멸진기를 발출했는 데도…
네놈이 다시 살아났단 말이냐?"
석진영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검을 쳐들었다. 백의검제의 신병이었던 백룡보검이었다.
무천룡은 눈에 한망을 발했다.
"훗훗…그 정도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믿었느냐?"
"으으…그때 네놈을 이 보검으로 잘라버렸어야 했다.
천한 하인 놈을 경시해 그냥 지옥갱에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석진영이 공포에 젖어 분개하자 무천룡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 신분이 천하게 살아 온 것 같구나."
"더러운 하인 놈! 네가 무림맹주일 수 없다.
더러운 하인 놈 주제에 절세고수일 리가 없다!"
석진영은 악에 받쳐 외치다가 무천룡의 가슴을 향해
천영마검(千影魔劍)이라는 검마의 절학으로 격사시켰다.
파츠츠츳―!
금석을 두부같이 베어내는 백룡신검의 검 끝에서 무수한 검화(劍花)가 피어올랐다.
수백 개의 검화는 밤하늘에 터지는 유성제처럼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좋은 수법! 전보다 강해졌군."
무천룡은 천천히 말하다가
백룡보검이 가슴 바로 앞에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경미한 파공성과 함께 석진영의 손이 허공에서 중지됐다.
"허억? 네… 네가 맨손으로 천영마검을 막다니…?
너의 무공이 소문대로 전보다 백 배 강해졌단 말이냐?"
석진영의 백룡보검은 무천룡의 오른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
무천룡은 맨손으로 검을 쥐고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석진영, 이런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겠지?"
무천룡이 눈에서 살광을 일으킬 때였다.
"놔라, 악적!"
바들바들 떨고 있던 독낭자가 어디서 힘이 났는지 산천초목이 울릴 정도로 호통을 터뜨렸다.
그녀의 쌍수가 어지럽게 흔들리며 독분(毒粉) 여덟 종류가 허공에 퍼졌다.
"하하…독가루를 날리는 귀여운 나비로군?"
무천룡은 독가루를 보고도 호흡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숨을 들이마셔 독낭자를 경악케 했다.
"아앗, 만독불침지체(萬毒不浸之體)?"
독낭자가 자지러지게 놀랄 때 그녀 역시 무천룡의 손아귀에 제압되었다.
"흑윽!"
독낭자는 점혈되며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낙… 낙가야! 나의 아내만은 살려다오."
석진영이 전과 달리 애절할 표정을 지었다.
'구색이 맞는 한 쌍이군.'
무천룡은 천하의 악인과 독녀가 부부라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석진영의 태도는 아주 진지했다.
"죄인은 나다. 그러니 나를 죽여라. 나의 아내는 그대로 놔 줘라
. 과거 주인으로 섬기던 사람의 부탁이니 한 번만 들어줄 수 있지 않느냐?"
무천룡은 그래도 아내만큼은 끔찍이 생각하는 그가 대견스러웠다.
"아내를 살리고 싶으냐?"
"진…진심이다."
"좋아. 그럼 네 아내가 어떤 여인인지 말해 봐라."
석진영은 얼굴 가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뭣이라고?"
"독낭자의 신분에 대해 말해 보란 말이다!"
무천룡의 표정을 살피며 석진영이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의 아내는 천약선자(千藥仙子)의 전인이다. 그 사실은 너…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그 이전이 중요하다."
석진영은 애써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 전에는 고아였던 것 같다.
황하 근처의 비적 떼 소굴 안에 있다가
백독마부주(百毒魔府主)에게 구출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흠, 유향이라는 이름은 본명이냐?"
"그런 것 같다. 유향의 얘기로는 열 살 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된 것 같다."
무천룡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런가?"
그는 모든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황하 근처의 비적 떼, 열 살, 본명이 유향이라면 의심할 나위가 없군. 틀림 없어.'
무천룡은 낙유향이 낙노인의 딸임을 확신했다.
'독낭자는 살인명단에서 제외해야겠군. 은인의 딸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무천룡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석진영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안 돼…나를 죽이고 그 분을 살려다오!"
독낭자 낙유향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는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무천룡의 손은 가차없이 석진영의 두개골을 박살내 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으깨진 석진영의 시체는 썩은 통나무처럼 풀썩 쓰러졌다.
칠마전의 소전주로 중원에 파견되어 지옥제일검으로 공포의 악명을 떨친 그가 죽은 것이다.
영원한 마도천하를 꿈꾸며 다음 세대의 지배자로 내정된 그의 최후치고는 너무도 허무했다.
"아아악… 낭군!"
독낭자는 남편의 참혹한 죽음에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으흑흑…네가 그 분을 죽이다니! 네…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리라!
무슨 짓을 하던 네놈의 살을 씹어 먹겠다!"
"낙유향, 네가 복수를 하겠다면 말릴 수 없다. 하지만 난 널 죽이지 않겠다."
무천룡이 손아귀에 힘을 빼 그녀를 자유로운 몸으로 만들어 주었다.
독낭자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죽어라, 원수!"
무천룡은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 부드러운 진기에 휩싸인 그녀는 삼 장 밖으로 나가동그라졌다.
독낭자는 자신의 미약함을 한탄하고는
머리가 으스러진 석진영의 시체를 끌어안으며 통곡했다.
"으흑흑…낭군! 소첩은 기필코 놈을 죽인 후 낭군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무천룡은 씁쓸한 기분이 되어 등을 돌렸다.
'상대가 아무리 악인이라도 지어미 앞에서 살해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군.'
그는 전면의 숲을 향해 외쳤다.
"와 있다는 것을 안다. 숨어 있지 말고 나서라."
천지를 진동시키는 음공에 수림 전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으음… 귀신보다 더 하군. 소문 이상이구나!"
대나무 숲에서 걸어나오는 은포노인 하나가 있었다.
공포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은포노인의 머리 위에는
권위를 잃은 은관 하나가 씌워져 있었다.
은포노인의 눈빛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가 지금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것이다.
"소문을 듣고 의아해 했는데…
이제 보니 그 엄청난 소문도 사실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 소문보다 훨씬 뛰어나구나."
은포노인은 두개골이 산산이 으스러져 죽어 있는 석진영의 시신을 바라보며
입가를 파르르 떨었다.
"하하…!"
무천룡은 그가 걸치고 있는 은포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살기 짙은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장에서 내 손에 죽은 세 명도 노괴와 같은 차림이었지.
노괴는 필경 현음마(玄陰魔)겠군."
"그렇다. 노부는 이곳 현음마궁의 궁주인 현음마이다."
"주인이라고? 노괴는 이곳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
"뭐… 뭐야?"
현음마의 표정이 살벌하게 굳어지자 무천룡은 준엄한 어조로 응대했다.
"이곳의 땅 주인은 바로 나다.
너희들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남의 땅을 차지한 도적 떼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너희들을 물리치고 주인으로서 권리를 찾겠다."
"터무니없는 소리 마라!"
"훗…믿을 수 없단 말이냐? 봐라!"
무천룡이 소매를 흔들자 신패(信牌)하나가 소매 속에서 퉁겨나가
현음마 바로 아래 떨어져 내렸다.
〈 雷公令(뇌공령) 〉
그것은 바로 남천신군이 죽기 직전 무천룡에게 준 남천문의 뇌공삼보 중 하나였다.
그것은 무천룡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밝히는 신표이기도 했다.
"으음…!"
현음마는 뇌공령을 보자 할 말이 없는 듯
한숨소리를 내다가 눈을 들어 무천룡을 매섭게 살폈다.
"뇌공령을 지녔으니 네녀석이 이곳의 진짜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겠다.
그러나 너는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없다.
중원불사신이라는 별호도 오늘로 끝이다."
무천룡은 오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설마 내가 당라고산 칠마전 총단에 들어가 음마와 비마,
그리고 선마를 죽였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단 말이냐?"
"물론 들었다. 그러나 노부는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너를 죽일 자신이 있다."
현음마는 냉막히 말하며 오른손을 가볍게 쳐들었다.
츠츠츳―!
죽림(竹林) 이곳 저곳에서 사람 그림자가 번득거리는 가운데
남천관주의 거처였던 곳을 중심으로 진세 하나가 만들어졌다.
칠십이지살대진(七十二地煞大陣)!
이것은 안에 갇힌 사람이 날개를 달고 있다 해도 살아나갈 수 없다는
천고의 절진(絶陣)이었다.
진세가 펼쳐지자마자 주변은 삼엄한 살기로 가득했다.
무형의 장벽이 형성된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어느 것도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진이었다.
현음마는 부하들이 죽림을 주변으로 진세를 구축하자
저으기 안심하는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진이 이루어지기 전이었다면 몰라도 지살대진은 완성된 이상
너는 여기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어리석군."
무천룡이 차게 중얼거렸다.
현음마의 득의양양하던 표정이 무겁게 굳어졌다.
"뭐야, 어리석다고?"
"훗훗…나는 석진영을 죽이는 동안에도 주위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노괴가 부하들을 이끌고 근처를 철통같이 포위한다는 것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면 포위 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단 말이냐?
무천룡은 삼엄한 진세 속에서도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하하…칠십이지살진 정도로 어찌 나를 속박할 수 있겠느냐?
이 정도 진식은 굳이 손을 쓰지 않고서도 박살낼 수 있다."
"지독히도 오만한 놈이군.
무신이라 해도 손을 쓰지 않고 진식을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진식을 이룬 칠십이지살은 칠마전 안에서 현음마에게 특별히 지도를 받은
칠마전의 정예 중 정예들이었다.
진식 한 가지를 익히기 위해 이십 년 간을 각고의 수련 속에서 보낸 사람들로
진식을 펼치고 거두는 데에는 천하제일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현음마도 감히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음마가 무천룡의 말을 일소에 돌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진세를 파훼한다면 도전을 받아 주겠다."
"훗…가소로운 자들!"
무천룡은 실소를 짓고는 칠십이지살진을 이루고 있는 무사들 중 한 사람을 살폈다.
붉은 경장을 걸친 노인으로 손에 삼각소기(三角小旗) 하나를 쥐고 있었다
. 칠십이지살 중 가장 뛰어나 보였다.
노인은 무천룡의 예리한 시선을 의식하고 흠칫했다.
무천룡은 손끝으로 홍의노인을 가리켰다.
"진식이 펼쳐지면 나는 제일 먼저 노괴를 박살낼 것이다."
"허억…?"
홍의노인은 질겁하며 바싹 긴장했다.
그는 칠십이지살진 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쓰러지게 되면 칠십이지살진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말 것이다.
'으음… 벌써 진세를 파악했단 말인가?'
홍의노인의 무천룡의 예리한 지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다음 나는 너희 둘을 쓰러뜨릴 것이다.
왜냐하면 저 자가 쓰러질 경우 너희들이 진세의 주축이 되기 때문이지."
무천룡은 홍의노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두 명의 흑의중년인을 가리켰다.
"으음…!"
"무서운 놈!"
칠십이지살은 손바닥을 보듯 환하게 지살대진을 꿰뚫는 그의 안목에 오금이 저렸다.
무천룡은 현음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된다면 현음노괴가 직접 나서 진을 주도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노괴가 제 자리로 가기 전에 감문(甘門)과 곤문(坤門)의 생문(生門)을 찾아 움직인다
. 즉시 노괴 곁에 이른 후 천강정(天 掌)을 쳐내 노괴의 목숨을 끊을 것이다."
"크으으!"
현음마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휘청휘청 세 걸음 물러났다.
무천룡의 파훼법은 칠십이지살진을 세상에 창안해 낸 사람을 능가할 정도로
지살대진에 정통했다.
그가 말한 대로 움직인다면 칠십이지살진은 오 초 안에 산산이 박살나 버리고 말 것이다.
지살대진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현음마는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네 정체가 뭐냐?"
"하하… 제 이대 무림맹주이며 중원불사신임을 아직 모르고 있느냐?
너희들이 유린하고자 하는 중원무림을 지키려 하는 사람이시다."
무천룡이 웃다가 손을 들어 복면을 벗었다.
그의 영준무비한 용모가 나타나자 현음마가 또 한번 치를 떨었다.
'으음…세상에서 좋은 것은 혼자 다 갖고 있는 놈이군.
뛰어난 무공과 지혜로운 두뇌, 게다가 헌칠한 용모까지 갖추었다.
그러고 보니 이 놈은 정의무성과도 흡사하구나!'
현음마는 완전히 압도당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현음마, 너는 이제 칠마전 칠마 중 네 번째로 죽어야 할 차례다.'
무천룡은 눈에서 살광을 흘리며 현음마를 직시했다.
한참을 고심하던 현음마가 정색을 하고 무천룡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우리 타협하자!"
"뭘 타협하자는 게냐? 나는 사악한 무리들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다."
"칠십이지살진을 풀겠다.
대신 이곳에서의 혈겁(血劫)을 나 한 사람으로 한정하겠다고 약속해다오."
"……?"
무천룡은 그의 예기치 못한 타협안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신을 희생하며 수하들을 살리려는 그의 의도가 가상했지만 의심을 떨치기 힘들었다.
'이 자가 진심에서 하는 소리인가?'
사실 현음마는 칠마전의 마두 중에서 가장 많은 글을 읽은 사람이었다.
그의 기질은 강호인이기보다 노학자(老學者)로서의 기질에 흡사했다.
무천룡은 칠마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현음마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관대했다.
그래서 이제껏 손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현음마는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노부는 살 만큼 살았다. 이제 죽는다 해도 여한은 없다.
그러나 노부를 따르는 제자들은 아직 젊다.
그들이 노부와 함께 죽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
무천룡의 냉담한 어조가 다소 누그러들자 현음마는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허허…너는 석진영의 아낙인 독낭자 낙유향을 살려 주었다.
그것으로 네가 악독한 살성이 아님을 알았다.
아마 너도 많은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칠마전에도 제법 쓸 만한 사람이 있군."
무천룡은 그의 기개에 다소 감동하며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노마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겠다."
"고맙다."
현음마는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
"모두 이곳을 떠나게."
칠십이지살은 일제히 오체복지 했다.
"궁… 궁주! 어찌 저희들을 버리시려 하십니까?"
"궁주, 중원불사검이 강하다고는 하나 중과부적이 아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산다는 맹세를 하고
칠마전에서 이곳 중원으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그들은 결연하게 외치며 하나같이 의기를 불태웠다
. 죽음을 각오한 그들의 기세를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현음마는 그들이 함께 싸우기를 고집하자 호승심(好勝心)이 크게 일었다.
칠십이지살과 힘을 합한다면 나름대로 승부가 되리라는 생각도 되었다.
'마도천하를 위해 우리 모두가 동귀어진을 택할 수도 있지 않은가?'
현음마는 잠시 그런 생각에 젖다가 길게 드러누워 있는 석진영의 시체를 보고는 침음성을 발했다.
"으음…!"
그의 얼굴에 잠깐 떠올랐던 호승지심이 순간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돌아가라. 마지막으로 하는 명령이다."
현음마는 뜻을 굽히지 않고 칠십이지살에게 떠나기를 명했다.
칠십이지살은 현음마의 표정과 음성으로 미루어 그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원불사검이 일당만(一當萬)이란 말인가?'
'아…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칠존전에 들어 수십년 간 고생해 겨우 중원에 개선하게 되었는데…
삼일천하(三日天下)에 불과하단 말인가?
칠십이지살은 현음마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속속 몸을 일으켰다.
"궁주, 옥체(玉體) 보존하십시오."
"중원불사검이 궁주에게 죽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칠십이지살은 격동에 찬 어조로 외치고는 죽림 속으로 사라져 갔다
. 그들이 펼친 지살대진이 해소되자 무형의 살기도 씻은 듯이 가라앉았다.
현음마와 무천룡은 그들이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휘이잉―!
죽잎을 스치는 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쳤다.
현음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다."
"뭐냐?"
"네 사문(師門)에 대해 알고 싶다
. 네가 오마의 공동전인(共同傳人)이라는 것이 사실이냐?"
무천룡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 싶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 그러나 나는 사문의 무공보다 가전무공(家傳武功)을 최고의 절기로 삼는 사람이다."
현음마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너는 이곳 남천관의 하인 출신이라는데 어떻게 가전무공이 있단 말이냐?"
"하하…여기 하인으로 들어오기 이전 생가(生家)에서 익힌 무공이 있다."
"생가라고…?"
무천룡의 눈빛에 신비로운 금망이 어렸다.
"노마도 잘 아는 곳이다."
"노부가 잘 아는 곳이라고…? 그렇다면 너의 가문이 강호에서 유명한 곳이란 말이냐?"
"노마는 사 년 전 우리 집에 왔다 가지 않았느냐?
사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 일을 잊었단 말이냐?"
"뭐… 뭐야?"
현음마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는 무엇을 느꼈는지 점점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무천룡은 시선을 서쪽 하늘로 돌렸다.
"당시 노마는 현음지력이 나를 친 바 있는데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냐?"
"으으… 이럴 수가!"
현음마의 얼굴빛이 그 순간 잿빛으로 변했다.
그의 은포가 찢길 듯이 흔들렸다.
"그… 그렇군, 너는 대무신국(大武神國)의 무천룡 태자구나!"
"흥! 이제 깨달았는가?"
무천룡의 얼굴에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대무신국을 떠올리자
자신의 왕국을 참담하게 폐허로 만든 원수의 존재가 새삼 그의 분노를 자극한 것이다.
현음마는 길게 탄식했다.
"허어… 천려일실이라더니 네가 죽지 않았구나."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군. 그래서 음마사형과 비마사제, 선마사제가 네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겠군
. 오마의 마공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천룡의 신분을 알게 된 현음마는 오히려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서인가?
그는 뒷짐을 지며 천천히 걷다가 물었다.
"무천룡, 너는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느냐?"
"나는 너희 칠마의 연환공격에 쓰러진 후 대무금붕에게 구해져중원으로 날아왔다.
다행히 이곳의 총관이던 낙씨 노인에 의해 구출되었지.
그것이 바로 나의 모든 비밀이다."
무천룡은 말을 마치고는 열 손가락을 빳빳이 세웠다.
현음마는 그의 손가락이 담홍색(淡紅色)으로 물들며
은은한 열기를 발하자 식은땀을 흘렸다.
"노부의 현음지(玄陰指)에 극성이 되는 수법을 익혔구나!"
"그렇다. 나의 할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무칠살식 중 네 번째 초식 쇄음식(碎陰式)이다."
"대무칠살식?"
무천룡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지강이 더욱 짙은 빛을 발했다.
"할아버지가 너희들을 찾아가 겨루신 다음 칠마령을 얻으셨을 때 심득(心得)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대무칠살식의 기원이다.
너희 칠마의 마공에 극성이 되는 수법들이지."
"허어, 그런 것이 있었다 말인가?
정의무성은 결국…우리 칠마 모두를 철저히 부셔 버리는구나!"
현음마는 괴로워 외치다가 십지를 펼치며 자신의 절학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근처에 눈이 날리고 지면에 두터운 서리가 형성되었다.
그의 눈썹과 머리까지 허옇게 빙기가 서렸다.
"현음마지공의 극성이 되는 수법을 안다니 더할 말은 없다.
다만 너와 양패구사(兩敗俱死)하기를 바랄 뿐이다."
현음마는 냉광을 일으키다가 무천룡을 향해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들며 손가락을 쫙 벌렸다.
슈슈슝―!
열 줄기 현음지력이 일어나며 땅이 동토(冬土)로 화했고 죽림은 온통 서리로 뒤덮였다.
웬만한 무림 고수라도 심장이 동결될 극음지기였다.
"쇄음식(碎陰式)!"
무천룡은 서 있던 곳에서 일 촌도 움직이지 않고 날아드는 현음마를 향해 열 손가락을 휘저었다
. 아무런 발출음도 나지 않는 가운데 열 가닥 열류(熱流)가 일어났다.
그것은 열 가락의 붉은 광선이었다.
음(陰)과 양(陽) 서로 성질이 판이하게 다른 지공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가운데
수만 근 화약이 일시에 터지는 소리가 났다.
꽈르르르― 릉―!
땅바닥이 움푹 파이고 거대한 폭풍이 사위를 휩쓸었다
. 대나무가 뿌리 채 뽑히며 우수수 쓰러졌다
. 주변의 거석이 공깃돌처럼 날았다.
"크으으으―!"
살이 익는 냄새와 함께 단말마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현음마가 실 끊어진 연처럼 훌훌 날아 올라가며 토해내는 비명소리였다.
그의 앞가슴에 동전만한 구멍 열 개가 파였고 그의 전신은 숯처럼 타버렸다.
현음마의 얼굴은 잠깐 사이 백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무천룡의 쇄음식이 그의 순음진기(純陰眞氣)를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현음마는 십 장이나 날아가 곤두 박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로써 오래 세월 천하에 공포의 상징으로 군림한 칠마 중 네 번째 마두가 사라진 것이다.
동시에 현음마궁도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천룡의 모습은 근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현음마가 땅에 떨어지기 이전 절정신법을 일으켜 홀연히 사라졌다.
바닥에는 을씨년스러운 두 구의 시체만 남았다.
머리가 박살난 석진영의 죽은 시체와 시꺼멓게 타버린 현음마의 끔찍한 시체가 그것이었다.
이들의 죽음은 강호마도의 말로(末路)가 다가왔음을 알려 주는 예고였다.
무정한 바람이 시체를 휘감을 때였다.
"으흑흑…!"
울음소리인지 웃음소리인지 모를 여인의 숨소리와 함께 저주에 찬 절규가 이어졌다.
"낙헌지! 낙헌지, 네놈의 간을 깨물어 먹겠다
. 나의 낭군을 죽인 네놈을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네놈이 죽는 모습을 보지 않고는 이 한이 풀리지 않으리라!"
흐느끼는 여인은 다름아닌 독낭자 낙유향이었다.
낙노인의 딸이라는 신세 때문에 살수를 모면했던 낙유향은 비틀비틀 일어나
석진영의 시체 곁으로 가며 복수를 맹세했다.
'놈은 지독하게 고강하다.
심마대전주(心魔大殿主)조차 놈의 상대는 안될 것이다.
남이 놈을 죽여주기 바라고 있을 수 없다. 내 손으로 놈을 쓰러뜨리리라!'
독낭자 낙유향은 너무도 심한 충격에 히죽히죽 웃었다.
"오호호…!"
그녀는 반 미친 듯 석진영의 시신을 끌어안고
그의 팔을 자신의 가슴 안에 집어넣었다.
"당… 당신은 죽지 않았어요. 나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요.
원수는 꼭 죽을 것이니… 제발 나를 떠나지 마세요."
낙유향은 주르륵 두 줄기 혈루(血淚)를 흘렀다.
악인을 사부로, 그리고 악인을 남편으로 삼았기에 신세가 기구해진 여인의 눈물이기는 하나
역시 진한 눈물이었다.
'사흘 안으로 너를 죽이리라!'
낙유향은 입술을 터져라 깨물었다.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리게 만든다는 여인의 한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무서운 계략은
천하 영웅의 목숨을 앗아갈 만큼 무서운 것이었다
한편, 현음마궁의 궁주를 척살한 무천룡은
즉시 현음마궁을 나서 금시단정학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금시단정학은 무천룡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무천룡이 오자 울음소리를 내며 반가워했다.
"하하하… 이제 곽산으로 가세."
무천룡이 웃으며 허리를 가볍게 틀자 수 장 거리가 찰나지간에 좁혀졌다.
금시단정학은 무천룡이 안장에 내려앉기 무섭게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으로 쭈욱 솟구쳐 올라갔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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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독
감사합니다.😘
드디어 이루어 냈구나??
감사 드립니다
하나하나 정리가 되어 갑니다?
즐독 허고 갑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