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칠선생
그제야 정신을 차린 댕기 머리 소녀. 두 소년을 보며 “고마워”하면서, 살짝 고개를 숙이며 크고 맑은 눈으로 감사의 목례 目禮를 한다.
이중부는 눈인사하는 소녀의 눈빛에 갑자기 가슴이 뜨끔해진다.
한준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아니 못된 짐승들이 감히 사람에게 달려드는 데 서로 돕는 것이 당연하지” 어른스럽게 의젓하게 답을 한다.
이제 어느 정도 안심이 되고 정신을 차렸는지 비로소 서로가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세 명 모두가 비슷한 또래 같았다.
댕기 머리 소녀는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아주 귀여운 얼굴이다.
이중부는 자신도 모르게 귓불이 붉어진다.
눈이 큰 댕기머리 소녀가
“우리 집은 저 강 위쪽 언덕 옆에 있는데 너희들 집은 어디야?”하고 물으니
이중부는 갑자기 목이 마름을 느끼며 “저, 저기...” 하면서 말을 더듬는다.
그러자 옆의 한준이 오른쪽의 구릉을 가리키며
“우리는 저 구릉 뒤쪽 마을에 살아”라고 답을 한다.
그때,
“향기야~~”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마른 몸매의 중년인 中年人이 건장한 청년 한 명과 각기 말을 타고 또 다른, 청 삽살개 1마리를 데리고 일행에게 다가왔다.
어린 송아지만큼이나 덩치가 큰, 긴 털의 삽살개는 짙은 푸른색 털이 너무 길어 면상을 모두 가려, 눈이 어디쯤 붙어 있는지 짐작하기도 쉽잖아 보인다.
중년인과 청년이 말에서 내리자,
댕기 머리 소녀는 중년인을 보고 “백부님” 하면서 얼른 뛰어가 안긴다.
중년인은 낯선 소년들을 보더니, 이름이 ‘향기’라는 소녀를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소녀에게
“이곳으로 오다가 숲으로 들어가는 승냥이 무리를 보았는데, 괜찮으냐?”면서 걱정스레 묻는다.
“그렇지 않아도 저기 밭둑에서 냉이들 캐다가, 그 승냥이 떼에 쫓겨 여기까지 도망
왔는데, 이 친구들이 승냥이들을 내쫓아 무릎 생채기 외에는 다친 데는 별로 없어요.” 한다.
이중부는 그제야 승냥이 떼들이 큰 삽살개 한 마리 때문에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한 것이 아니라, 후각과 청각이 예민한 승냥이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이미 듣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온다는 것을 미리 눈치채고 사라졌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중년인은 두 소년을 보고는
“어린 친구들이 승냥이 떼와 싸울 정도의 담력이라…. 대단하군” 하더니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어디에 사냐?”고 묻는다.
이번엔 이 중부가 “저 구릉 뒤쪽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답하니
중년인은 같이 온 청년을 보면서
“옥전 玉田을 말하는 거지?”라며 되묻는다.
그런데 청년의 생김새가 묘하다.
키가 무척이나 크게 보인다. 육척장신이다.
또, 은발과 금발이 뒤섞인 머리카락에 눈동자는 푸르고, 코는 매부리코다.
색목인 色目人이다.
눈동자가 검은 황색인종이 아니라, 푸른 눈동자의 서역인 西域人 출신이다.
중부와 한준은 생전 처음 보는 생김새다.
색목인 청년은
“예, 십칠 선생님 十七先生任. 산동성에서 지난겨울에 이주해 온 산동 주민들의 거주 마을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라며 공손히 답한다.
색목인은 흉노족 말을 스스럼없이 잘한다.
어릴 적부터 초원에서 살았거나, 아니면 조상 중에 서역 출신이 있는 것 같다.
그러자 이중부가
“예 맞아요, 우리는 산동성에서 온 지 몇 달 안 되었어요”
“촌장은 어느 분이시지?”
“우리 마을은 강훈 촌장님이 마을의 모든 일을 처리하십니다.”
“흠, 강 촌장 마을에 살고 있다고….” 하더니 십칠 선생은 갑자기 날카로운 휘파람을 두 번 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청 삽살개 두 마리가 이중부와 한준이 타고 온 당나귀들을 보고 ‘으르렁’ 그리며 위협하더니 급기야 뒷다리를 물어뜯는다.
삽살개의 느닷없는 공격에 놀란 당나귀들은 뒷발길질을 두어 번 하더니, 재빨리 도망을 간다. 삽살개들도 나귀 뒤를 쫓는다.
나귀들은 더 멀리 달아난다.
삽시간에 1 理(약 400m)를 달아난다.
나귀는 이중부와 한준에게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당나귀를 잡으려 각자 뛰어간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삽살개들은 나귀를 그냥 뒤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하여 크게 원을 그리며 교묘 巧妙하게 나귀들을 몰고 있다.
목양견 牧羊犬의 양몰이 솜씨다.
이를 알 리 없는 이중부와 한준은 열심히 나귀의 꼬리만 보고 뛰어가고 있다.
의도적 意圖的이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속도를 적절히 조정하며 나귀를 몰아가고 있다.
아주 철저하게 숙련된 훈련견의 뛰어난 몰이 솜씨다.
그 모습을 십칠 선생과 청년은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약 5리 정도의 거리를 달린 후, 십칠 선생은 휘파람을 길게 한번 불자, 청 삽살개들은 속도를 줄이며 나귀들을 원래 있던 곳으로 몰아간다.
그러자 잠시 후 나귀들은 원위치로 되돌아왔다.
정신없이 나귀를 뒤쫓던 이중부와 한준도 허덕거리며,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기력이 탈진했다.
칡 줄기와 갈대로 엮은 한준의 신발 한 짝은 어딜 가고 없다.
둘은 각자 걸음을 비틀거리면서도 당나귀의 고삐 줄을 겨우 잡고서는 다시는 놓치지 않을 듯이 손에 두 번 돌려 감아쥐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도 잠시. 흙바닥에 그냥 드러누워 버렸다.
주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렸다.
숨이 차다. 아니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다.
누워있어도 가슴이 ‘쿵쾅~ 쿵쾅~’ 널뛰기한다.
좀전의 승냥이 떼들과 대치할 때, 이미 알게 모르게 자신들의 기(氣)를 상당 부분 소모해 버렸는데 이번엔 나귀, 아니 삽살개 때문에 모든 체력이 고갈 枯渴되어 버렸다.
향기는 “큰아버지 장난이 심하시네요”하며 십칠 선생을 흘겨보더니, 십칠 선생의 말 안장에 걸려있던 표주박으로 만든 호리병을 가져와 호리병 마개를 열고, 누워있는 이중부에게 다가가 “목마르지 물 마셔” 하며 건네준다.
‘물’이란 소리에 이중부는 얼른 일어난다.
순간,
중부가 잡고 있던 나귀의 고삐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무심코 줄을 밟고 있던 소녀의 오른발을 옭아매듯이 당겨버린다. 그러자 중심을 잃은 향기의 왼발이 오른쪽 발목에 얽혀지면서 비틀거리더니 “어 어.”하면서 두 팔을 벌린 자세로 앞으로 넘어졌다. 그런데 넘어진 곳이 하필, 일어나려는 이중부의 가슴에 넘어져 둘이 서로 끌어안는 형상이 되었다.
갑자기 고비 줄이 당겨지자 그 충격에 놀란 나귀는 옆으로 몇 걸음을 내디딘다.
그러자 소녀 소년은 어쩌지 못하고 서로 얼싸안고 나귀에게 끌려간다.
나귀에게 끌러가다 급기야 서로의 얼굴이 마주 대이게 되었다.
소년은 아래에서 소녀는 위쪽에서 서로 두 팔로 부둥켜안고, 양 볼까지 포개져 중심을 잃은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당나귀에 이끌려가고 있다.
민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자, 옆의 색목인 장정 壯丁이 재빨리 오른손으로 나귀의 고삐 줄을 낚아채고 “워~워~”하며 왼손으로 나귀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리며 진정시킨다.
잠시 후, 나귀가 멈추자 그제야 소녀 소년은 겨우 자세를 바로잡고 일어난다.
둘 다 얼굴이 온통 붉은 홍씨다.
홍조를 띤 향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체, 얼른 큰아버지 옆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외면한 채 납작한 돌 위에 주저 앉는다.
소녀의 붉은 얼굴 못잖게 목까지 빨갛게 물든 이중부도 얼굴을 들지 못하고 땅만 바라본다.
그러자 조금 전 소녀가 들고 오던 호리병이 눈에 들어온다.
소녀가 넘어질 때 땅에 떨어뜨린 표주박 호리병이 물을 반쯤은 바닥에 쏟아 놓은 채 나둥그러져 있다. 얼른 땅바닥에 누워있던 호리병을 주워서 입에 대고 ‘벌컥벌컥’ 서너 모금을 마신 후, 옆의 한준에게 호리박 물병을 건네준다.
물을 몇 모금 마시니 겨우 정신이 든다.
모든 주위 사물이 뿌옇게 보이더니 이제야 사람들 얼굴이 제대로 보인다.
그러자 조금 전의 남세스러운 장면이 새삼 떠올라 머쓱하다.
자신도 모르게 소녀를 옆 눈길로 살펴보니, 아직도 큰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소녀의 귀여운 뺨과 귓불이 아직도 붉게 보인다.
물을 주어 ‘고맙다’라고 인사를 해야 하겠는데, 좀 전의 민망스러운 사건으로 차마 입을 떼 지못한다.
할 일 없이 주위를 휘둘러 본다.
다른 사람들은 별 표정 없이 담담해 보이는데, 한준이 녀석은 마시던 호리병을 들고 이중부와 소녀를 번갈아 보며 남세스럽게 히죽히죽 웃고 있다.
중부는 놀림을 받는 느낌에 괘씸하지만 ‘이 녀석 나중에 한번 보자’ 속으로만 벼르고 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감히 내색할 수가 없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비로소 몸과 마음이 안정되어간다.
나귀는 주변의 풀을 뜯고 있었고, 개들은 세 마리가 어울러 장난을 치고 있는 모습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가로워 보였다.
그제야 십칠 선생이란 중년인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얼핏 든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른다.
십칠 선생을 바라보고 볼멘 목소리로 “아저씨!” 크게 외친다.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바라보고 있던 십칠 선생은 태연스레 고개를 돌려 이중부를 바라본다.
“왜 저희에게 이렇게 장난을 치십니까?”
“허 허. 장난이라 했나?”
“그럼 이렇게 고의로 사람을 고생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뭘 잘 못 했나요?”
“하 하. 자네들이 잘 못 한 것은 없네. 그런데 뜀뛰기가 고생이라? 젊은이들이 달음박질을 고생이라 생각하면 안 되지!” 하더니
“체력 단련엔 달음박질보다 더 좋은 운동은 없네, 너무 원망스러운 생각은 하지 말게”
“체력 단련도 운동도 좋지만, 본인이 원 할 때 해야 효과가 있고 보람을 느끼지, 이처럼 속임수로 당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입니다.”
소년의 항의가 계속 이어지자 십칠 선생은 돌연 정색하며
“자네의 얘기가 이치에 맞는 말이네, 담력과 체력만 좋은 것이 아니라 말주변도 대단하군, 그럼 주책없는 이 사람이 사과하겠네” 하더니
“우리 손녀를 승냥이 무리로부터 구해준 은인을 이렇게 무례하게 대한 나를 용서해 주시게” 하면서 이 중부와 한준을 보고는 왼 손바닥을 오른손등 위에 겹쳐 모아 쥐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허리까지 깊이 숙여 국궁 鞠躬의 예를 표한다.
이에 놀란 이중부와 한준 얼른 십칠 선생을 마주 보고, 두 손을 겹쳐 모으고 역시 국궁의 예로 답하며
“아저씨 아닙니다. 저희가 오히려 무례한 언행을 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예부터 바닥에 무릎을 꿇어 엎드려 윗사람에게 드리는 배(拜 : 절)가 최상의 예의 표시고 다음이 국궁의 자세다.
‘배’는 실내에서 하는 예식 행위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기 어려운 야외에서는 ‘국궁’이 최상의 예절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 국궁은 동년배 간에도 좀처럼 행하기 어려운 예법인데 하물며 아들뻘 정도의 어린이에게 국궁으로 예의를 차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이중부와 한준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자신들이 태어나 국궁의 인사를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더구나 상대는 자신들의 아버지뻘 대는 연세가 많은 어른이다.
십칠 선생은 속세 俗世의 자잘한 구속 拘束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대범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십칠 선생에 대한 원망이 봄눈 녹듯이 사라진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각자의 얼굴과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중천 中天에 뜬 춘양 春陽,
정오의 봄 햇살도 차가운 대지를 따뜻하게 달구어 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부드러운 봄날의 분위기로 바뀐다.
역시 분위기는 여자가 빨리 타는 법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렇다.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향기가 제법 밝아진 목소리로 말한다.
“큰아버지 계속 여기에 계실 거예요?”
십칠 선생은 이중부와 한준을 보며
“자네들 지금 특별히 바쁘지 않지?” 물으니 이중부와 한준은 얼떨결에
“네, 괜찮아요” 쉽게 답을 해버린다.
“하 하. 그렇군, 그럼 오늘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집으로 가서 차나 한 잔하지” 하면서 같이 온 청년을 보더니,
“석늑군! 여기 젊은 친구들을 집으로 안내해 주게, 나는 향기와 먼저 가서 차를 준비하고 있겠네” 하면서 먼저 말에 올라타 향기를 두 손으로 잡아 올려, 자신의 안장 앞에 태우고는 곧바로 출발한다.
석늑이라 불린 색목인 장정은
“예, 선생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라며 아주 공손히 답한다.
그동안 한준은 벗겨진 갈대 신발을 찾아 신었다.
이를 지켜보던 석늑은 이중부와 한준을 바라보며
“자~ 우리도 출발하자”라며 먼저 말 위에 오른다.
이중부와 한준도 옷에 묻었던 흙먼지를 털고 나귀에 올라탔다.
말 두 필과 나귀 두 마리에 다섯 명이 나누어 타고 출발하자, 나머지 개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삐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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