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가(航海家) 콜럼버스(Columbus) 이야기
스페인 지도 / 안달루시아 문장(紋章) / 안달루시아 주기(州旗)
유럽 역사, 아니 세계 문화사(文化史)의 한 페이지를 큼지막하게 장식한 스페인을 나는 두루 여행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특히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를 둘러본 기억이 깊이 남는다.
스페인 남부지방을 뭉뚱그려 안달루시아(Andalucia)지방이라고 부르는데 이 지역을 살펴보면 먼저 주도(州都)인 세비야(Sevilla)를 비롯하여 그라나다(Granada), 말라가(Malaga), 알메리아(Almeria), 우엘바(Huelva), 카디즈(Cádiz), 코르도바(Córdoba), 하엔(Jaen)의 8개 자치주(自治州)로 나누어진다.
주도 세비야(Sevilla)는 오랜 역사의 도시로 과달키비르(Guadalquivir) 강가에 세워진 항구도시인데 신석기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며 AD 8세기, 이슬람이 통치하던 시기의 수도(首都)였고 훗날 신세계 탐험의 중심인물들이었던 콜럼버스(Columbus), 마젤란(Magellan) 등 탐험가들이 첫 항해를 시작한 출발점이기도 했던 역사적 도시이다.
세비야(Sevilla)는 BC 4세기, 로마의 지배를 받을 때 히스팔리스(Híspălis), 또는 세빌(Seville)이라고도 불렸는데,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Rossini)가 작곡한 너무나 유명한 코미디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의 세빌리아(Seviglia)도 세비야를 일컫는 말이다.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고 난 이후 엄청난 금은보화가 세비야를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왔고 이로 인해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스페인은 오히려 광대한 식민지를 거느리는 강대국으로 변모하여 번영을 구가하게 되는데 모든 것이 스페인 통일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이사벨 여왕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세비야의 인구는 200만 정도로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에 이어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콜럼버스의 관 1,2 / 산타페 협약 동상(그라나다 까톨리카 광장)
세비야성당 박물관에 들어서면 화려한 가지가지 장식품들과 성물(聖物)들로 눈이 어지러운데 그 가운데 특히 사람들 이목(耳目)을 끄는 것이 왕관을 쓴 네 사람이 콜럼버스의 관을 어깨에 메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 콜럼버스의 관(棺)에 얽힌 이야기가 재미있어 소개해 본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범선(帆船) 세 척과 선원들, 그리고 식량을 지원받은 이탈리아의 항해가(航海家) 콜럼버스(Columbus)는 금과 진주, 그리고 향료가 무진장이라는 인도(India)를 향해 대항해를 시작하는데 그가 탔던 배가 바로 산타마리아(Santa Maria)호다.
당시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등, 과학자들에 의해 지동설이 처음으로 제기되고 지구는 둥글다는 이론이 나오자 모두 반신반의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지구는 평평하고, 땅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는 멀리 나가면 폭포처럼 공중으로 쏟아져 내리는 것으로 알려져서 근해에서만 고기를 잡거나 항해를 하고 먼바다는 두려워서 나가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커다란 지각판(地殼板)을 네 마리의 거북이 받치고 있는데 이따금 거북이들이 꿈틀거리면 지진이 일어난다는 허무맹랑한 설(說)까지... ㅎㅎ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당시 모험가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사막을 지나고 산맥을 넘어 무작정 갔더니 인도라는 나라가 나타났는데 밀림 속에 황금으로 된 도시가 있고 코가 긴 코끼리라는 짐승이 있고, 사막 근처 바위 밑에 샘물이 있어 목이 말라 마시려고 했더니 냄새가 나서 마실 수 없었다. 낙타도 못 마셨는데 불을 붙이니 불이 붙었다(원유). 이런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거짓말쟁이, 허풍쟁이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코를 손처럼 사용하는 동물이라구? 샘물에 불이 붙다니.... 말 같지도 않은 말을... ㅎㅎ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니까 동쪽으로 가지 말고 서쪽 바다(대서양)로 배로 가면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부자들을 찾아가 ‘나에게 배를 대어 주시오. 나는 서쪽 바다로 인도를 가겠소.’
인도는 황금도시도 있고 진주와 향료가 무진장이라고 하니 한 번만 다녀오면 그 몇 배로 갚아 주겠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모두 콜럼버스를 정신 이상자로 취급했다고 한다.
◐ 이사벨 여왕의 현명한 결단
콜럼버스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스페인 여왕 이사벨(Isabel)을 찾아가서 배를 대어 달라고 요청하는데 이사벨 여왕은 자신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까지 처분하여 콜럼버스에게 배를 세척 대어주고 계약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산타페 협약(Santa Fe Capitulations)이며, 이른바 벤처 투자였던 셈이다.
이사벨 여왕과 콜럼버스의 산타페 협약은 무슬림(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Granada)가 함락된 몇 개월 후인 1492년 4월에 체결하는데, 그 협약의 내용은
①콜럼버스에게 스페인 여왕이 작위(爵位)를 부여하고,
②앞으로 발견되는 지역의 대 제독과 식민지 총독으로 임명할 것이며,
③이러한 작위(爵位)는 그의 자손들에게 영구히 상속되고,
④그곳에서 생산되는 모든 귀금속의 10분의 1을 콜럼버스가 소유하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
이 산타페 협약 체결 모습의 동상이 그라나다(Granada) 대 성당 앞 광장인 ‘이사벨 라 까톨리카 광장(Plaza Isabel la Catorica)’ 가운데 우뚝 세워져 있다.
◐ 콜럼버스 항해의 성공
콜럼버스 / 당시의 범선(帆船) / 바하마제도 도착
항해를 떠나 70일 만에 아메리카 대륙 앞 바하마(Bahama) 제도의 작은 섬에 첫발을 디딘 콜럼버스 일행은 그곳이 인도인 줄 알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도사람이라는 의미의 스페인어 인디오(Indio)라 불렀는데 영어로 하면 인디언(Indian)이다. 콜럼버스가 첫발을 디딘 곳은 바하마제도의 쿠바 북쪽에 있는 작은 섬 구아나아니(Guanahani) 섬이었는데 이름을 ‘구세주’라는 뜻의 산살바도르(San Salvador)라고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도 미국 앞의 바하마제도를 ‘서인도제도(西印度諸島)’라 부르고, 미국 원주민을 인도사람들이라는 뜻의 인디언(Indian), 중남미 원주민을 같은 의미의 스페인어 인디오(Indio)로 부른다. 그리고 동양의 진짜 인도(印度/India)는 ‘동인도(東印度)’라고... ㅎ
콜럼버스가 첫 항해 성공으로 엄청난 환영을 받았지만, 그 후의 항해에서 금과 향신료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자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고 콜럼버스에게 냉랭하게 대했던 모양이다. 콜럼버스는 그 후로도 세 차례 더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을 다녀왔는데 금이나 향신료를 가져오지 못하자 세 번째 항해 이후 총독 지위는 물론이고 그동안 신세계에서 얻었던 모든 재산을 잃고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불행히도 그가 마지막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며칠 후 자신을 가장 믿고 지지해 주었던 이사벨 여왕이 죽었고, 콜럼버스도 2년 뒤 바야돌리드에서 숨을 거뒀는데 스페인에 서운한 감정을 가졌던 그는 자신이 죽으면 ‘절대로 스페인 땅에 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겨 결국 자신이 발견한 쿠바(Cuba)에 묻혔다고 한다.
그러나 스페인은 훗날 그들에게 엄청난 부와 영광을 안겨준 콜럼버스를 기리기 위하여 콜럼버스의 시신을 스페인으로 모시고 오지만 그의 유언을 거스를 수 없어 땅에 묻지 못하고 세비야성당에 모시면서 지금처럼 공중에 붕~ 떠 있게 설계하고 스페인의 네 명의 왕이 관(棺)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설계하여 최고의 존경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사벨 여왕이 스페인을 통일하기 전 아라곤(Aragon), 카스티야(Castilla) 등 작은 네 개의 왕국이 있었는데 이사벨 여왕이 콜럼버스의 항해에 투자(投資)하자 각 왕국의 왕 중에서 두 명은 찬성하고 두 명은 반대했다고 한다. 콜럼버스의 관을 앞쪽에 메고 의기양양하게 머리를 들고 있는 왕들은 찬성하였던 두 왕이고, 그리고 뒤쪽 두 왕은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모습인데 반대를 하였던 당시 왕들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에 부(富)를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콜럼버스가 죽은 후, 멕시코에서 아즈텍(Aztec) 제국을 무너뜨린 코르테스(Hernán Cortés), 남미에서 잉카(Inca) 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Gonzalo Pizarro)로 대변되는 스페인의 정복자, 탐험가들의 활약으로 스페인은 엄청난 부를 쌓게 된다.
이처럼 콜럼버스를 비롯한 탐험가들이 발 벗고 모험에 나서게 된 직접적인 발단(發端)은 이탈리아 베네치아(Venice)공화국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과 더불어 황금도시 엘도라도(El Dorado)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곁들여진다.
숨겨진 이야기지만, 콜럼버스의 잔인한 성격과 원주민 대학살 등 상상을 초월하는 당시의 시대 상황은 일단 접어두고, 또 한가지는 콜럼버스(1450~1506)가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하였지만, 훗날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1454~1512)가 아메리카 대륙을 다녀온 후 그곳이 인도가 아니라며 자신의 이름으로 아메리카(America)라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선배 이름을 따서 콜롬비카(Columbica)라고 하던지 나쁜 후배 놈... ㅎㅎ
남미에 있는 나라 콜롬비아(Colombia)는 콜럼버스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지었으니 착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