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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8호를 내면서
해결할 수 없는 자본주의 위기는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지난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번 전쟁은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 군대의 지상전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각종 위기의 원인을 다양한 근거와 자료로 자본주의라고 지목하였다. 이러한 위기는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계속될 것이며,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시기에 ‘전쟁이냐 혁명이냐’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던질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은 명확하다. 노동자 국제주의와 민족주의 반대이다. 「코뮤니스트」 18호에서는 특집으로 ‘전쟁이냐 혁명이냐’를 다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에서 민족주의와 종교가 어떻게 지배계급에 복무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입장은 예외 없는 국제주의이며,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추상적 이상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그 제국주의적 생존 전략에 대해 일관된 유물론적 반대에서 예외는 없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오직 국제주의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모든 노동자가 모든 지배계급을 적(敵)으로 삼아 연대해야 한다. 자본주의 제국주의 시대에 어떠한 진정한 국제주의자도 노동 분업의 고유한 적(敵)인 지배계급과 함께 싸우며 다시 한번 강탈당할 수 있는 '자신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 계급투쟁을 중단할 수 없다. 이제는 다른 지배계급이 아닌 자국의 지배계급에 의해 강탈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국가가 어떻게든 탄생하더라도, 그것이 이슬람 국가든, 세속적 사회민주주의 국가든, 스탈린주의 정권이든,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은 코뮤니스트 혁명에 더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오직 더 강력한 팔레스타인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여 자신들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을 억압할 것이다. 민족주의 운동은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을 제쳐두고 자본가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코뮤니즘의 전제 조건이 아니다. 이른바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국기를 흔들고 최근 경제위기에 대항하는 반(反)하마스 집회를 진압한 이슬람주의자들의 학살을 옹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국가적 해결책은 없다. 계급전쟁만이 해결책이다!’)
□ 특집 ‘전쟁이냐 혁명이냐’에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코뮤니스트좌파 진영의 입장을 통해 국제주의 원칙을 강조했다.
”양측의 노동계급은 이른바 ‘성전’을 수행하거나 ‘민주주의’라고 믿는 것을 수호하기 위해 무방비 상태의 주민을 학살하도록 내몰리고 있으며, 실제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억압, 착취, 피를 통해서만 지배를 영속시킬 수 있는 반대편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을 학살하도록 허용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탄압과 공습으로 사망한 팔레스타인인 수가 이슬람 부르주아지 세력인 하마스의 희생자 수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 이스라엘 부르주아지보다 하마스가 덜 살인적이거나 변명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전쟁은 자신이 노동계급의 편이라고 주장하는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의 실체를 드러낸다. 민족 자결권이라는 명분으로 어느 한 편의 자본가 분파를 지지하기 위해 줄을 서는 전쟁은 사회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을 대변한다는 환상을 폭로한다. 그들은 현시대에 민족해방을 위한 진보적인 전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능한 어떠한 새로운 국가도 노동계급을 위한 또 다른 감옥일 뿐이며, 세계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가 그 억압의 과실을 세계 부르주아지의 다른 분파와 공유하지 않고 '자신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하마스가 저지른 학살을 은근히 기뻐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부르주아지의 살인 논리를 공유하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 국가가 자행한 파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반영하는 태도이며, 둘 다 똑같이 범죄이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 ‘최근 중동에서 벌어진 학살은 일반화된 전쟁을 향한 행진의 일부이다.’)
“노동계급은 지배계급의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고 양측의 착취자들에 대항해 싸워야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노동계급이 전쟁 고통과 대학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민족주의를 비롯한 양측의 모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고 노동계급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해 민족과 국경을 넘어 투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위기와 전쟁이 강요하는 노동자 희생을 거부하고 지배계급에 대한 계급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인 계급투쟁만이 대량 학살과 전쟁을 끝장낼 수 있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 ‘중동에서의 대학살에 맞서, 민족주의를 넘어 지배계급에 맞선 계급전쟁을!’)
□ 코뮤니스트 정치에서는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부르주아 선거 환상, 기후위기, 후쿠시마 핵폐기물 해양투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킨다. 자본주의 체제의 운영은 필연적으로 전 세계 노동계급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적 투쟁, 즉 제국주의적 쟁탈전으로 이어진다. 이 체제는 전쟁에 의한 파괴를 통한 자본 가치의 대규모 평가절하 외에는 해결책이 없으며, 이윤율 하락의 더 깊고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세계의 지배계급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프롤레타리아트의 삶을 파괴하는 동안에도 이윤 창출을 위해 착취를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국익과 위기극복을 내세워 노동계급에 희생과 죽음만을 강요한다. 이렇게 자본주의가 전쟁과 야만으로 질주하는 것은 이윤추구 체제 자체가 작동한 결과이다. 이것은 잘못된 지도자나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하게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이다.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비용을 치르기를 거부할 때마다 자본은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권도 경제위기 심화에 따라 계급전쟁을 선포하고 노동계급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제 한국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서야 한다. 노동계급의 대대적인 반격 없이는 자본가계급의 공격을 멈출 수 없을 뿐 아니라 기본권과 생존권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현재의 모든 위기는 자본이 초래한 위기이기 때문에 노동계급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NWBCW 한국위원회」, ‘자본주의 위기 전가, 생존권 위협, 노동 탄압에 맞서’)
□ 국제에서는 복지 국가이자 자본주의 낙원인, 이른바 ‘안전한 섬’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노동쟁의와 파업을 다룬 「국제주의자목소리」(IV)의 글과 노동자 투쟁에 대한 왜곡, 약화를 목적으로 한 스탠드-업 파업을 비판한 「국제주의노동자그룹」(IWG)의 전단 글을 실었다.
“자본주의의 낙원 ‘안전한 섬’을 뒤흔들었던 사흘간에 걸친 역사적 와일드 캣 파업에 참여한 기관사들은 영웅이었다. 하지만 이번 파업은 심각한 취약점도 있었다. 비록 대중들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다고는 하나, 기관사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형제자매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파업이 다른 영역으로까지 확대된 것도 아니며, 시작부터 사흘간만 지속할 것으로 결론지어진 것이었다.
임금 노예가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는 존재한다. 지상의 지옥이 노동계급, 임금 노예를 기다리고 있다. 계급투쟁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우리 계급이 나아갈 길은 아직도 멀었다.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 계급투쟁의 망령을 두려워한다. 계급투쟁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 붕괴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 더러운 자본주의 체제는 무너져야만 한다.” (「국제주의자 목소리」, ‘자본주의 안전한 섬을 뒤흔든 3일‘)
“스탠드-업 파업”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는 그저, 유럽 때로는 미국에서 시행된 ’순환‘ 파업의 새로운 명칭일 뿐이다. UAW(미국자동차노동조합)이 ’새롭게‘ 명명한 이 유형의 파업은 노동자 투쟁(항상 자본가에게 주도권을 넘긴다)을 사보타주할 목적으로 날조된 두 가지 거짓말 중 하나다. 자동차 제조업자들에게 사전에 파업을 경고함으로써, 기습적 요소를 상실해 버린다. 그렇게 해서 생산 마비가 효과적 행동을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을 차단한다.
이러한 공격을 거부하려면 우리는 ’순환‘ 파업을 거부할 필요가 있다. 대신 우리의 이익을 보호해 줄 ’무기한‘ 파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너무도 장기간 노동조합들이 노동자 투쟁 속도를 차단해 왔다. 다른 플랜트와 영역의 노동자들 사이에 세워진 장벽을 통과하려면 우리가 직접 페이스를 설정해야 한다. 이것은 공식적 계획 속도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시대에 앞서 다른 플랜트로 파업을 확대, 파장을 일으키는 것(2019년 프랑스의 병원 노동자들의 성공적 사례처럼). 출입구를 막는 것. UAW 기능직들의 지시에 따라서가 아닌, 노동자들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는 집회에서 스스로 이런 행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과거 패배는 과거에 두고, 국제적 투쟁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대표단이 될 수 있다. 사회적 체제, 그것의 존재는 때때로 노동자 이익에 반(反)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기껏해야 체제의 이윤 확대를 위한 자원이며, 3차 세계대전의 먹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다.” (「국제주의노동자그룹」, ’자본가의 계획에 제동을 걸려면 투쟁을 장악해야 한다!‘)
□ 기회주의에 맞선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에서는 헤르만 호르터의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실었다. 호르터는 레닌 최악의 저작인 「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에 대해, 레닌이 서유럽과 러시아의 정치경제 상황, 계급역량, 계급 사이 관계에 대한 차이를 간과한 것을 지적하면서, 러시아에서의 전술과 서유럽에서의 전술은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호르터의 공개편지는 전체를 연재할 예정이며, 그동안 왜곡되었던 코뮤니스트좌파의 혁명적 원칙을 제시하고 있으니, 정독을 권한다.
“러시아와 서유럽 혁명의 일치성에 대하여, 서유럽 혁명의 조건들, 말하자면 계급 관계에 대하여 올바르지 않게 판단하였고, 이에 따라 당신은 좌익, 반대파가 성장하는 토대를 잘못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신의 출발점을 수용한다면 소책자(「유아적 무질서」)는 올바른 것처럼 보이지만, 출발점을 거부하면, 모든 소책자는 오류입니다. 모든 당신의 옳지 않은, 부분적으로 옳지 않고, 부분적으로 확실히 완전히 오류인, 판단은 특히 독일과 영국의 좌파운동에 대한 비난에 이르게 했습니다.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러시아에서(보기를 들면, 코르닐로프 공격이나 다른 사건 이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동했다거나, 이러저러한 시기에 의회에 진출했다거나, 노동조합에 남았다거나, 그러므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도 똑같이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이 모든 것은 전혀 의미가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적용될 필요도 없고, 적용될 수도 없습니다. 투쟁과 혁명에서 서유럽 계급 관계는 러시아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호르터,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 코뮤니스트좌파 진영 쟁점에서는 ‘행동주의 반대’, ‘국제대회의 비극’, ‘해체에 관한 테제 최신 안’, ‘ICC 내 소수파의 정치적 딜레마’를 실었다.
‘행동주의 반대’에서는 역사적 목적에 관한 관심을 두지 않고 행동에 뛰어드는 행동주의는 승리한다면 일시적이며, 위태로운 본질적 정치 문제와는 결코 관련이 없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행동주의는 기회주의이며 항상 기회주의가 될 것이며, 아마도 가장 위험한 것은 '정직한' 기회주의일 것이라고 비판한다.
‘국제대회의 비극’에서는 「국제주의자전망」(IP) 웹 사이트에 게시된 ‘코뮤니스트좌파 대회’에 대해 종파주의라고 비판한 글이다. 특히 자본의 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공격이 양적, 질적으로 점점 더 큰 규모로 발전하리라는 조건에서 종파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국제주의 혁명가들의 제한된 역량을 약화한다고 비판한다.
□ 이론에서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상)’를 16, 17호에 이어 실었다. ‘맑스주의와 섹슈얼리티’에서는 4세대 페미니스트의 한계와 코뮤니스트활동가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부분은 자본주의를 훼손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으며,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조차도 페미니즘을 우리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임금 노동, 화폐, 국가의 폐지가 아니라 부의 재분배와 복지 국가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제―우리는 이것을 재산을 소유하기 위해 사회를 부계 권력 아래의 가족 단위로 조직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를 약화했지만, 가부장제를 완전히 종식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유재산과 분업이 폐지된 사회만이 그 과제를 완수할 수 있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이 오늘날 성적 억압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미래 사회의 옹호자로서 우리는 입에 발린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우리는 당대의 성적 적대관계의 사례들을 더 광범위한 자본주의 위기의 상황과 연결해야 한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맑스주의와 섹슈얼리티’)
□ 역사에서는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를 실었다. 보르디가는 1923년 대부분을 로마의 감옥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료 피고인들의 변론 준비와 이탈리아 코뮤니스트당의 정치적 선언 작성과 토론을 했다. 인터내셔널 퇴행에 대한 보르디가의 저항은 1930년 무렵에 중단되지만, 이탈리아 코뮤니스트좌파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보르디가의 체포 이후 당원에 대한 체포와 탄압이 잇따르면서 조직이 약화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는 보르디가가 우려했던 위기가 아니었다. 그가 선언문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더 심각한 위기는 이탈리아 당의 "원칙적인 전체의 틀"과 그가 정중하게 "인터내셔널과 그 집행 조직의 다수파"라고 부르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즉 점점 더 반(反)혁명적인 소련의 외교 정책이라는 목표를 위해 구성 정당들을 관료적인 '예스맨'으로 만들려는 인터내셔널 내에서 권위적 입장을 꾸준히 행사하고 있는 러시아 코뮤니스트당 사이에 균열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 ‘아마데오 보르디가의 옥중 선언’)
□ 코뮤니스트 정신 계승에서는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데이먼 동지의 활동’을 실었다.
“데이먼은 말할 것도 없고, 단 한 명도 혁명가로서 자신의 임무를 회피하지 않았다.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은 우리 당이 견뎌낸 부르주아 재건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계속되었다.
당의 창립부터 오늘날까지 다른 투쟁과 문제들, 무엇보다도 1952년의 분열이 데이먼을 참여시켰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에서 정치 조직을 쇄신하는 투쟁에 대한 그의 공헌은 헛되지 않았다.
자본 축적의 새로운 위기는 이 위기에 특정 맑스주의, 즉 해체된 지식인 스탈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의 맑스주의가 혼합되어 있다. 이것은 이 위기를 예견하고 조사한 혁명가들의 맑스주의가 아니라 오늘날 당(Pcint)과 오노라토의 교훈 속에서 지속하는 바로 이 맑스주의이다. 그 잔해는 영원히 무의식적인 희생자가 될 수 없으며, 미래의 유일한 기준점은 코뮤니스트좌파, 프롤레타리아트 국제당이 될 것이다.
오노라토는 「국제주의프롤레타리아트당」의 쇄신을 위한 기본적 및 조직적 정책을 유지하고 오늘날까지 지속하기 위해 간부를 양성하고 활동하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오노라토 데이먼과 같은 동지들의 투쟁을 통해 형성된 성원으로서 우리는 그의 교훈을 함께 실천할 것을 맹세한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 ‘코뮤니스트 운동에서 데이먼 동지의 활동’)
창간 11주년을 맞은 「코뮤니스트」는 일반화된 전쟁으로 향하는 시기, ‘전쟁이냐 혁명이냐’의 엄중한 정세를 맞아 국제주의 원칙과 전망을 일관되게 제시하려 노력했다. ‘독자의 소리’는 우리에 대한 지지와 비판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 이유를 밝혀주기도 한다. 앞으로도 「코뮤니스트」는 독자의 소리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일 것이며, 코뮤니스트 정치에 관한 관심이 열린 토론과 실천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민족주의 반대! 대량학살 체제 타도!
자본주의 체제 전복을 향한 국제적 계급투쟁으로 전쟁을 멈추자!
2023년 11월 10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