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강경읍사무소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허와 19세기 강경 이란 주제로 열린 광장으로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이자리에는 천주교 대전교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과 황명선 논산시장 연구발표토론에 나선 연구원 가톨릭 신부님 교우 논산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하여 깊은 관심속에 진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 4월 30일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갈 때 라파엘호를 타고 갔다가, 8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11명의 교우 등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입국할 때 타고 왔던 배의 이름이다. 조선의 일반 목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면서, ‘토비아의 길을 인도하였다’는 여행자들의 주보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배의 이름을 지었다. 고합니다.
1845년 1월부터 4월까지 서울 돌우물골(石井洞)에 거처하였던 김대건 부제는, 이 땅에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교우들과 함께 배를 구입하여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가게 되었다. 김대건 부제 일행은 출항 하루 만에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으나, 깊은 신심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5월 28일 마침내 중국의 오송항에 도착하였다. 그런 다음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에게 8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라파엘 호는 풍랑에 표류하게 되어, 상해를 떠난 지 28일 만인 9월 28일에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였다. 배를 정비한 일행은 다시 북상하여 10월 12일에 강경 황산나루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와 생사를 함께한 기간은 5개월 12일이나 되었다. 고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허와 19세기 강경주제의 회의 장소로 강경읍사무소를 선택한 것은 연고가 깊은 강경으로 관활 행정기관이어서 라고 합니다.
주차하기위해서 돌아보니 전 강경상업고등학교와 전 강경경찰서가 인근에서 보이네요 강경상업고등학교는 우리집안과 인연이 깊어요, 저의 아버지께서는 전신 강경상업전수학교를 나오시고 저의 삼촌 두분과 저의 동생이 나온 학교라서 오랫동안 보았습니다.
13시에 시작한다고 해서 12경에 도착해보니 논산 부창동성당 교우님과 강경읍사무소 직원님들이 땀을 흘리면서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다과와 간식준비가 너무 완벽했으며 오늘 행사는 17시에 끝났으며 4시간의 강행군이었습니다.
황명선 논산시장은 시작과 끝을 확실하게 마무리 해주었으며 강경의 재조명과 정신 문화 관광의 성역화 사업에 차질없이 잘 준비하기를 기원하고 적극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천주교 대전교구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의 첫번재 주제로 정치적 종교적으로 보면 시대적인 갈등으로 천주교가 박해를 받을 시기였습니다. 특히 제사의 금지 민중 종교운동등으로 1801년 신유박해, 을해박해를 지내면서 천주교 신자의 2/3가 천민이었고 신자들은 서로의 만남이 천국이고 죽어서 가는 영원한 삶을 사는 곳이 천국이고 두개의 천국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허와 19세기의 강경 토론장에 나온 사람은 윤종관 신부, 윤종학 강경본당 신부,이해준 충청남도 논산역사 문화 연구원장, 이한열 강경읍장, 전현구 강경역사문화 연구원장, 이칠성 건양대학교 한국사 교수, 차기진 천주교 청주교구 양업교회가 연구소장, 이인배 충남발전연구원 선임연구원, 류제엽 논산문화원장, 정선기 충남대학교 교수 등 여러분이 분야별로 연구한 내용을 놓고 심도있게 토론했습니다.
오늘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허와 19세기의 강경 토론은 4시간 동안 쉬는 시간이 없이 계속 되었으며 복도 화장실 입구 까지 꽉 메웠고 내용이 많아 시간이 부족했으며 유인물로 대치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단상토론과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습니다.
내용의 중복 발표가 많고 짧은 내용을 오랜시간을 끌고 가는 경우가 있어 일부 사람에게는 지루함을 주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첫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유허는 각종 서한을 근거로 분석해보면 전북 익산시 나바위가 아니고 강경 황산포 나루 부근 구순호의 집으로 유력하며 강경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간 구용녀의 중언에 의하면 충남 강경읍 홍교동101번지(현 홍교리101번지)가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집은 옛집이 아닐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지로의 정서와 일반 방문객의 관심이 복원에 어려움이 있을것이다.
셋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허는 사제로서 한국에 첫발을 디디고 성무집행을 한 신성한 곳에 의미가 깊다고 합니다.
넷째 논산시의 문화 관광 사업에 연계해서 자원화하고 성지로서의 정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개발함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제주 포착 기념관에 보관된 라파엘호이며 추후 복원된 것이라고 합니다,
라파엘호
라파엘 호는 김대건 신부가 1845년 4월 30일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갈 때 타고 갔다가, 8월 31일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11명의 교우 등과 함께 상해를 출발하여 조선으로 입국할 때 타고 왔던 배의 이름이다. 조선의 일반 목선을 타고 상해를 떠나면서, ‘토비아의 길을 인도하였다’는 여행자들의 주보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을 따서 배의 이름을 지었다.
1845년 1월부터 4월까지 서울 돌우물골(石井洞)에 거처하였던 김대건 부제는, 이 땅에 선교사들을 영입하기 위해 교우들과 함께 배를 구입하여 제물포를 떠나 상해로 가게 되었다. 김대건 부제 일행은 출항 하루 만에 큰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게 되었으나, 깊은 신심으로 난관을 극복하고 5월 28일 마침내 중국의 오송항에 도착하였다. 그런 다음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에게 8월 17일 사제 서품을 받은 후, 8월 31일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라파엘 호는 풍랑에 표류하게 되어, 상해를 떠난 지 28일 만인 9월 28일에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였다. 배를 정비한 일행은 다시 북상하여 10월 12일에 전북 익산의 황산포 나바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라파엘 호와 생사를 함께한 기간은 5개월 12일이나 되었다.
페레올 주교가 파리의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45년 10월 29일자 서한에 따라 배의 구조를 살펴보면, 길이 25자, 너비 9자, 깊이 7자의 크기에 아주 높은 돛대 두개, 가마니로 이은 돛 두 폭이 달려 있고,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은 채 널판은 나무못으로 서로 이었으며 타마유나 틈막기도 전혀 없었다. 뱃머리는 선창까지 열려 있는데 이것이 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권양기 끝에 나무로 된 닻이 하나 있었다. 아울러 라파엘호 갑판의 일부분이 자리로 되어 있고, 일부분은 아무런 고정기구로 고정되지 않은 채 그저 잇대어 깔아 놓은 나무판자로 되어 있으며, 갑판 위에는 배 안으로 들어가는 구멍이 3개 있고, 하늘이 흐리면 닻을 내리고 배에 짚으로 된 덮개를 덮을 수 있도록 하였다.
출처 : 제주교구 제주 포착 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