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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글 서예의 초기 역사
한글이 창제된 세종 이후에 훈민정음 원본을 위시하여 판본류의 여러 책들이 간행되었다. 이때 까지 한글에 대한 공식적인 명칭이 없었으므로 훈민정음에서 본 따서 일반적으로 정음이라고 부른다. 1527년에 목활자 본의 훈몽자회를 비롯하여 1557년에는 목판본으로 훈민정음 언해본이 출간되면서 공식적으로 언문이라고 불렀다.
1700년 대의 영, 정조 시대는 조선시대의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극성기를 누린 시기이다. 이 시대는 한글의 궁체가 발달하여 완숙해 가던 시기이다. 역시 목판본, 놋쇠활자본, 동활자본 등의 책이 많이 출간되었다. 판종이 다양한 만큼 글자체도 다양한 서체를 나타내었다. 반 고딕체로부터, 정자체, 반흘림체, 흘림체 등의 판본이 간행되었다.
1894년에 고종이 국, 한문 혼용에 관한 칙령을 반포하면서 한글의 공식 명칭은 언문에서 국문으로 변경 되었다. 이 시기에도 다양한 판본의 서책을 발간하였다.
판본류의 원전에서 서체의 기본형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을 꼽아보면 다음의 서책을 예로 들 수 있다. 1443년에 훈민정음 원본이 나왔고, 1447년에는 동국정음과 월인천강지곡, 1459년의 월인석보와 세종어제 훈민정음, 1527년의 훈몽자회, 1558년의 소학언해를 들 수 있다. 대체로 정사각형에 가까운 글자체를 하고 있다.
1600년대에는 시경언해가 1613년에 나온 후로 1688년에 금속 활자본으로 대학율곡언해와 1693년 본의 어제어필맹자언해가 나왔다. 이때는 방점이 없어지고, 글자획이 상하로 길어지는 경향을 보여준다.
1700년 이후로는 필사체로서 궁체가 발달하여 완숙한 경지에 이른다. 판본체와 필사체는 근본적으로 글자에 차이가 난다. 서예의 연원을 따진다면 판본체보다는 궁체가 훨신 더 가깝다. 영, 정조 시대인 이때는 조선의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최고의 번영을 이룬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서책의 출간도 많아지고, 필사본의 소설이라든지, 여인들도 글을 익혀서 내간체 등 실용적인 한글이 유행하였다.
1737년에는 놋쇠활자본의 여사서가 나왔고, 1747년에는 묵판본의 송강가사 성주본이 나왔다. 1777년에 동활자본의 쇽명의록, 1782년에 유동외대쇼신서륜음 등은 글의 선이 가늘고, 길다. 1797년에 나온 오륜행실도는 놋쇠, 목활자본으로서 글자체를 세로 획을 약간 사선으로 그으므로 유연하게 하여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1800년대의 다양한 판본은 다양한 서체를 나타내었다. 이들 서체를 크게 반고딕체, 정자체, 반흘림체, 흘림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실용적인 한글이 많이 퍼지면서 필사류의 글씨체도 많이 나타났다. 판본류는 인쇄에 의하여 많은 서책을 찍으므로 많이 남아 있지만 직접 봇으로 쓴 글씨는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필사류의 글은 서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개개인에 따른 일회성 글이었으므로 통일된 서체를 형성하기도 어려웠다.
1700년 대에는 많은 소설류가 유행하였다. 궁중 여인들이 소설 읽기를 즐기면서 소설의 언문 필사가 유행하였다. 나중에는 언문 서사만 전문으로 하는 서사상궁이 있었고, 이들에게 한글 필사에 대한 교육도 시켰다. 이들이 남긴 글은 대부분이 정자체와 반흘림이었다. 이들이 교육을 통하여 이어지면서 하나의 서체 형식을 형성하면서, 이를 궁중서체, 또는 궁체라고 부른다. 소설류의 궁체 원전인 옥원듕회연, 낙셩비룡 등의 서책이 오늘에 궁체쓰기의 교본으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이르기 까지 서사상궁의 교본용으로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정식으로 교재로 사용한 것은 없다.
일반 사대부 가정에서도 편지글을 주고 받는 유행하면서 여인들이 직접 내간체 편지글을 쓰기도 하였고, 이를 대필해주는 일도 많았다. 한편으로는 일반 가정에서도 소설 베끼기가 유행하였다. 이외에도 불경 베끼기 등 민간 용도의 필사가 많았다. 이들이 사용한 글자체는 궁중에서 사용하였던 궁체와는 달랐다. 1800년대의 추사 집안의 한글 서체는 특히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한글 서체를 살펴보면 한문처럼 어던 법첩이 성립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하였고, 개개인의 개성에 따른 일회적인 서체가 일반적이었다. 궁체처럼 엄격하지는 않더라도 일번적으로 하나의 유형을 형성해 간 것은 사실이다.
한글 서예를 국가기관으로 정식으로 교육한 것은 1911년으로 본다. 일제가 시작되면서 서양식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때 서예교본으로는 유한익이 쓴 보통학교 학도용 습자책을 사용하였다. 이 책은 한문과 한글을 혼용하고 있다. 그때까지 한글로서 어느 정도 형태를 유지한 것은 궁체이었다.
조선 미전에서 서예를 한 분야로 인정하여 공모전을 시행하면서 서예는 정식으로 미술의 한 분야로 인정을 받는다. 이때 조선 미전에 한글 서예를 출품하여 입선한 윤백영은 서예의 미술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궁체 글씨로 서예로 작품화하여 현대화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윤백영이다. 윤백영은 23대 순조의 딸인 덕온공주의 손녀이다. 이조 판서 지낸 윤영구(1853-1939)의 딸로서 궁중의 출입을 하면서 궁체를 익혔다. 또 궁체 서예를 후학들에게 가르키므로 서예의 작품화와 현대화에 기여하였다.
학교 교재가 아니더라도 정식으로 교본화한 것은 1910년에 남궁 억(1863-1939)이 쓴 신언문체법이었다. 일제 시대에 서예 교본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서화 협전에 한글 서예로 입선한 이철경도 이 교본으로 공부하였다. 이철경은 한국 서예 중에 궁체의 표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김충현 또한 궁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한굴 서예의 궁체에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함으로 한국 서예의 조형미 구축에 노력하였다. 자신의 연구를 바탕으로 궁체 교본을 만들었다.
근대 이전에는 한국 서예에서 규칙적인 필법에 의하여 쓰여진 서체는 없었다. 한문처럼 서예의 필법이 정해져 있지 않았으므로 개개인의 서체가 모두 달랐다. 목판본에 의한 글자체도 목판에 따라서 달랐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궁궐에서 언문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한글의 학습에 필요한 교재용의 자료가 나타났다. 그러나 정식 교본은 아니었다. 이때 비로소 일정한 형식을 갖춘 글자 모양이 형성되었다. 그럼으로 궁체의 서체가 나타났다.
민간에서 소설의 필사, 편지글 등 언문 베끼기가 잦아지면서 언문이 서예화되는 경향을 나타내었다. 아직까지는 공인된 서법에 의하여 쓰여진 서체는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한글 서예는 서예의 장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고,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한 글씨이었다. 조선 말기에 궁중을 중심으로 한글 글자체가 형성되므로 궁체 중심으로 서체가 형성되었다.
정규 교육 과정에 서예가 포함된 것은 일제 통치기인 1911년 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제1차 조선 교육령을 공표하면서 이다. 조선 총독부에서 나온 교본은 정자체의 획형과 유사한 서체로 쓰여 졌다. 그러나 1937~8년에 쓰여진 교본은 반흘림 서체로 쓰여졌다. 서예교본은 한글 서예의 서체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으로는 민간에서도 서예에 대한 연구가 있었다. 1911년에 조직한 조선서화미술회에서 글씨와 그림을 3년 과정으로 가르켰다. 서예에 한글도 포함되었는지는 자료가 없어서 알 길이 없다.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가 창립되었다. 여기서도 3년 과정의 서예 교육을 하였으나 한글 서예의 포함 여부는 알 수 없다.
이철경은 일제시대에 궁체를 연구하여 1939년에 동아일보에 궁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광복이 되자 글씨 쓰기에 관한 내용을 정자체와 흘림체로 나누어서 책으로 발간하였다.
, 일제시대에는 1921년에 조선서화협회가 미술전을 개최하였다. 이것이 미술전람회로서는 최초이다. 1936년까지 15회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한국 서예의 전시 여부는 알 수 없다. 1922년에 제 1회 조선미술전람회를 열면서 서예를 한 분야로 인정하여 10년 간 참여하였다. 이때는 한글 서예도 공모 대상이었다.
서부는 내부의 반대도 있었으므로 1931년의 10회 전람회를 마지막으로 조선미전의 미술분양에서 제외 되었다. 1932년 부터는 조선서도 전람회라는 이름으로 조선미전에서 분리되어서 따로 개최하였다. 1945년까지 13회를 지속하였다. 특징이라면 서예라고 하지 않고 서도라고 한 점이다.
조선미전의 10회 동안에 한글 서예는 4인의 작품 6점만이 입상하였다. 선전에 입상하였던 작품은 모두가 궁체이었다. 조선미전 때, 또는 그 이후에 활동한 서예가 이철경, 남궁 억, 김충현의 작품들도 모두 궁체이었다. 이러한 자료는 광복 이전의 한국 서예는 궁체 일변도이었음을 말해 준다.
1921년에 쓴 윤백영의 궁체반흘림체는 전형적인 궁체로서 약간 거칠은 듯 하면서도 힘차고 날카로운 느낌이 난다. 1930년대의 작품에는 거칠음 대신에 조금 부드럽고, 갸날픈 반흘림체로 썼다. 일제 동안에 궁체가 한글 서체를 대표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미를 추구하였음을 말해 준다.
일제 말기에는 한글 사용을 금하였고, 학교의 교육 과정에서도 한글 서예는 제외 되었다. 한글 서예도 암흑기에 접어든다.
광복 이후에는 1945년 9월에 손재형이 서예인의 단체인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를 발족하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이 사용해오던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에 서예(書藝)라고 바꾸었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의 바뀜만이 아니고 서예에 대한 개념의 변화를 불러온 사건이기도 하다. 이후로는 서예라는 말이 일반화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한글 서예가 큰 발전을 한다. 그 배후에는 한글 전용을 주장한 최현배가 있다. 더 나아가서 한글을 숭상하려는 사회적 배경도 간과할 수 없다. 미군정청의 편수국장이었던 최현배가 이철경에게 한글 글씨본의 교과서를 의뢰하였다. 1946년에 이철경은 초등 글씨본 1, 2, 3권과 중등 글씨본 1, 2, 3권을 한글 궁체로 꾸며서 발간하였다. 이로서 광복 이후의 한글 서체는 궁체가 중심 서체가 되었다. 한글 서예는 여성을 중심으로 급속한 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철경은 남궁 억이 만든 교본(서예 공부를 할 때 이 교재로 하였다고 함)과 조선의 궁궐에서 나인들이 쓴 글씨체를 바탕으로 하여 한글 서체로 궁체를 다듬었다. 궁체 글씨는 원래는 나인들이 실용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던 글씨체이었다. 작은 글자체로 다듬은 이철경의 궁체는 큰 글자처럼 웅장한 맛보다는 작은 글자의 곱고, 부드러우며, 단아한 글씨체가 되었다. 동생 이미경과 궁체의 보급에 노력한 결과로 오늘의 한글 서체는 궁체가 대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충현이 만든 궁체는 좀 더 남성적이고, 강건하여 힘이 넘쳐나지만 한글로서 대자의 힘찬 글씨의 맛을 내는데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한글 서예가 궁체 일변도로 흘러가면서 새로운 난제에 부딪하는 것 중에 이런 것도 하나가 되었다.
수 천년의 역사를 지닌 한문 서예가 오체(五體)의 서체를 지니므로 다양한 예술적 조형미를 구현할 수 있는 반면에 한글의 단조로움은 한글 서예가들에게 하나의 숙제를 남겨주었다.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 새로운 미를 추구하고 탐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 대열에 앞장 선 대표적인 서예가는 손재형과 김충현이었다. 손재형과 김충현은 1949년에 제 1회가 열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를 무대의 장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손재형은 광복이 된 지 일 개월 만에 조선서화 동인회를 결성하면서 서예계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김충현은 1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참여함으로 서예계의 중진으로 영향력을 나타내었다.
10회인 1961년의 국전까지 모두 418점의 서예작품이 입선하였다. 이 중에 한글 서예는 31점이었다. 매 회에 평균 3점 정도의 작품이 입선하였고, 특선 이상의 작품은 한 점도 없을 만큼 한글 서예는 미약하였다.
실제로 한글 서예는 아직 걸음마 단계이었으므로 작품으로서 미적 기준도 모호하였다. 입선 작품의 서체는 대부분이 궁체이었고, 흘림체도 비교적 많았다. 작품 제작에 쏟는 서예가의 열의나 성의도 모자라서 매년 출품되는 작품의 경향도 비슷하였다. 낙관의 형식도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못 하였다. 글자 수도 한문이 평균 150자 인데 반하여 200~600자를 차지하다보니 소자 위주의 글씨들이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손재형과 김충현은 한글 서예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초기의 한글 서예에서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들었지만 노력만은 인정해주어야 한다.
이철경은 갈물 한글 서화전의 전시회를 통하여 순수한 한글 서예를 주창하면서 한글의 조형미를 탐색하였다. 손재형은 한글의 전(篆), 예(隸)체화로 나아갔고, 김충현은 한글 창제 당시의 고체(古體) 즉 훈민정음체에서 한글 서예미를 추구하였다. 이들이 시도한 배경을 보면 손재형은 한문을 전문으로 쓰면서 한문의 오체(五體)를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글의 오체화에 관심을 기울이었다. 김충현은 일찍부터 한글의 전통 서예를 한문과 다른 뿌리로 보고 한글의 고체에서 조형미를 구축하려 하였다.
손재형이 1951년에 진해의 이충무공 동상문에서 한글을 예서체로 쓴 것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첫 사례가 된다. 이것은 궁체 일변도의 한글 서체에 대한 새로운 시도이었다. 그 외에도 예서체에 얼마간의 전서적 필획을 사용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서체에 대한 모색은 아직까지 서법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한글 서예에 법칙성을 부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손재형의 서체는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 퍼져 나갔다. 특히 김기승은 손재형이 창안한 서체를 아주 높이 평가하면서 자신도 그 서법을 따라서 한글 서예를 하였다. 한글 전서체는 추종자들이 받아 들여서 변형을 거듭함으로 현대적 조형미를 풍기는 현대 서체로 발전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 서회환은 한글 서예의 미적 추구를 더욱 심화시켰다.
손재형의 전서체 한글은 새로운 탐구이지만 단순한 느낌을 주는 것이 한문과는 미적인 효과가 달랐다. 그의 서체는 필획에서 조형미를 추구하기 위해 직선의 획을 과도하게 곡선으로 변형시키므로 글자의 형태가 심한 왜곡을 초래할 만큼 변형되었다. 글자의 본래의 의미가 형태를 통한 의미 전달이라면 심한 변형은 글자의 본래의 용도를 벗어났다는 평도 들었다.
김충현도 궁체에 머물고 있는 한글 서예의 서체를 발전적으로 변형시키기 위해서 실험과 탐색을 하였다. 김충현은 훈민정음체라는 서체를 만들었다. 이 서체도 엄격한 의미에서는 전, 예체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서체이다. 김충현 자신은 이 서체를 고체라고 이름 붙였다. 김충현이 고체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61년의제 10회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이다. 그는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한글 고체를 본 받았으므로 고체로 이름 붙인다고 하였다.
김충현은 1940년대부터 한글 서체를 꾸준히 연구해 왔고, 한글 교본도 만들어서 보급하였다. 그가 시작한 한글 서체는 궁체이었다. 광복 이후에 궁체가 한글 서체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서체의 단조로움 때문에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이철경이 우아함에서 길을 찾으려 하였다면, 김충현은 좀 힘차게 표현하려 하였다. 김충현은 한글이 창제된 처음의 자체에서 구하려 하였고, 손재형은 이미 한문에서 확립되어 있는 서체에서 구하려 하였다.
두 사람의 자체가 차이가 난다는 단순히 조형미적인 차이가 아니고 한글 서예를 바라보는 관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충현은 한국 고유의 판본체인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석보에서 서체를 탐구하였으나, 표현은 전, 예체의 필법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훈민정음본을 바탕으로 삼은 이유를 한글 제정의 본 뜻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조선 전기의 판본체를 연구하면서 변화의 과정이 한문의 전, 예의 변화와 같다고 보았다. 그렇더라도 한글의 서체는 단순히 한문의 서체에 준하지 않는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전각을 한 이기우는 전각에서 사용하는 전서체의 글자체를 한글의 전각에 적용하였다. 그도 훈민정음의 고체를 한글 전각에 적용함으로 철농체(鐵農體)라는 새로운 그의 서체를 시도하였다.
1968년에 열린 제 17회 국전에서 서회환의 서예가 국전 최초로 대통령 상을 받았다. 서예의 위상을 높였을 뿐 아니라 한글 서예의 위상을 높이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할 만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서예계가 국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온 모순이 폭발한 계기가 되었다. 서희환은 ‘애국시’를 전서체의 한글로 써서 출품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서화된 한글 서체에 대한 찬, 반 논쟁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이 논란은 단순히 한글의 서예미에 관한 미학적 논쟁이 아니고, 수많은 상징성과, 암시성과, 당시 서예계의 배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따라서 역사성이 깊이 개재되어 있는 사건이므로 좀 더 상세히 다루어 볼 필요가 있다.
<한글 전서체에 대한 논란>이 논쟁의 불을 붙였다. 1968년의 국전에서 대통령 상을 받은 전서체 한글은 서희환이 출품하였다. 6.25 전쟁으로 중간에 열리지 않았던 해가 있었으므로 국전이 열리고 20년이 지났다. 20년 국전에서 서예가 대통령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서예의 전통성을 지닌 한문이 아니고, 한글 서예이었고, 더더욱 한글 서예를 대표하는 궁체가 전서체이었다.
서예계로서는 경사로운 사건인데도 서예계의 중진인 김응현이 ‘주간 한국’지에서 ‘한글 전서는 글씨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에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정환섭이 역시 주간한국에 반론을 펼쳤다. 서예에 관심이 많다는 독자 윤내현도 기고의 글을 올렸다. 입상 작품이 독창이 아니고, 모방임에는 불만이나 한글 전서 자체는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세 사람의 논쟁은 단순히 한글 전서체의 예술성을 두고 벌린 미학적 논쟁이기 보다는 이면에 너무 많은 문제점이 숨어있는 사건이었다. 서예가 국전에서 20년 만에 대통령 상을 받았다는 것은 영광 이전에 국전에서 서예의 위상을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국전에는 미술분야의 7개 분야가 참여하여 그 중에서 한 명의 대툥령 수상자를 뽑는다. 대통령 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에서 동의해주어야 한다. 그때까지 대통령상을 받은 사람은 서양화가 9명이고, 동양화가 3명, 조각이 2명, 건축이 1명, 공예가 1명이었고, 아직 사신은 한 명의 수상자도 내지 못 하였다. 당시의 사진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서예도 그와 같은 위상을 이었음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두 번째는 심사의 공정성이 문제가 되었다. 서회환은 손재형의 제자로서, 그의 애국시는 손재형의 서체를 그대로 본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손재형이 국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국전 1회 때부터 관여한 그의 영향력이 대통령상을 이끌어 내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국전의 입상자 중에 큰 상은 그의 제자들이 독식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17회 국전의 심사위원도 반박하는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5명이었다. 손재형과 그의 제자인 김기승, 정환섭 그리고 배길기와 김충현이었다. 배길기와 김충현도 그의 제자는 아니지만 그의 추종자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손재형의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국전을 불신하고 있었다.
더욱이 17회 때에는 그해 파리에서 돌아온 남관이 서양화 분과의 심사위원장 이었다. 심사 도중에 ‘돌려먹기 식 심사’라는 폭탄 발언을 하고 심사위원직을 사퇴하면서 도중에 퇴장해 버렸다. 이 사건은 심사의 불공정성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수상작가가 손재형의 제자이고, 작품도 손재형의 아류라고 하였다. 여기서 다시 서예의 조형미라는 서예 미학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하였다.
김응현은 전서는 한문에만 있는 자체(字體)이므로 국문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펴면서 ‘졸렬한 먹 작난은 글씨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심사위원이었던 정환섭이 작품평이 아닌 손재형에 대한 비방이다,라고 말함으로 서예계에 존재하였던 파벌을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에 서예가는 아니었지만 서예에 관심이 많았던 김상옥(시인)이 논쟁에 가세함으로 서예미학론으로 번졌다. 1968년 11월호의 세대지를 통하여 ‘서예가 무슨 예술이냐’라는 일부의 주장이 있음을 소개하였다. 물론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예가 이런 악평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미술과 마찬가지로 서예도 세계의 경향에 발 맞추어서 변화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서예인들도 서예의 비예술론을 겸허히 받아들여서 새로운 발전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변화를 시도한 전서체 한글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서예미학을 찾는 계기로 삼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과거의 서법과 법첩을 임, 모만 함으로 새로운 현대 미술의 조류를 따라 갈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전서를 통하여 새로운 조형미를 추구한 손재형을 두둔하는 글이 되었다.
김상옥은 단순히 누구의 편을 든다는 것을 뛰어 넘어서 새로움의 추구라는 미학적 문제를 거론하였다.
김응현은 이에 대한 반론을 1969년 1월 호의 세대지에 펼쳤다. 서예의 특성상 임,모를 부정하고는 서예가 존재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쳤다. 그러면서 특기할 점은 한글의 서예의 도안화를 서예에서 분리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말하자면 서회환의 전서체는 서예미학의 관점에서 작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문자 도안이라는 것이었다.
논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 서희환은 나중에(월간서예 1989년 8월호) 그의 서론을 이렇게 펼쳤다.
기초적인 과정을 거치고 난 다음에는 서격(書格)의 터득에 마음을 쏟아야 한다. 서격의 터득은 안목을 기르는 일로서 천부적인 재능과 부단한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깨우치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이 모든 것 을 벗어나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고 하였다. 이것을 수(守), 파(破), 리(離)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서희환은 그 후에 평생 동안 한글의 서예의 미학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궁체가 한글 서예를 풍미하고 있다.
이 사건은 서예가 발전을 하지 못 하고 정체된 현상에 대한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논쟁자 모두가 한글 서예의 변화를 모색하였기 때문이다. 새로움의 추구, 서예미의 확립을 가로막는 산적된 문제는 외면한 체 국전의 장에 안주하고 있는 기득권의 아카데미즘적 경직이 만들어 낸 부작용의 결과이다. 서예계가 국전이라는 활동의 장을 차지하려는 싸움보다는 서예미의 추구로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