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 序
나는 1938년 ㅇ월 ㅇ일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계라리의 南陽房氏 昌平公派 글방 집 ㅇ字ㅇ의 3남 3녀중 큰 오빠 그리고 언니를 이어 둘째 딸로 태어나, 철저한 男尊女卑 집안의 풍토에 따라 신식교육은 언감생심 이었기에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께 어깨 너머로 千字文을 익히다가, 스물네살 되던해 봄에 둘째 고모의 중매로 해남군 화산면 연정리 안동 권문의 ㅇㅇ에게 출가하여, 이듬해 남편의 직장을 따라 광주로 이사나와 살면서 3남 1녀를 두었다.
광주에서 ㅇㅇ년 서울로 거주지를 옮겨 광주에서부터 시작한 서예의 글씨공부를 성곡 임헌기 선생문하에 들어가 계속하여 2004년 한국서가협회의 초대작가에 선발되는 영예을 얻었으며, 이즈음 용암 임영규 선생을 만나 한문공부의 필요성과 서예작품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 한시짓기에 관심을 갖고 여러군데를 찾아 공부하다가, 인사동의 현암서당을 찾아 현암 소병돈 선생님 문하에 든지도 어언 여덟 해 이다.
옥편보는 방법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여 각 글자의 높낮이인 평측을 가리고, 시제와 운자에 어울리는 시어를 찾아 다섯 字나 일곱 字의 시를 한 줄씩 얽어가는 재미는, 먹물로 글자의 조형을 이루는것 만큼이나 나에겐 신비로우며 새록새록한 즐거움이 돋는 늦게 찾은 노년 최고의 신바람 나는 공부이다. 그간 서예에서의 수상만큼은 아니더라도 전국유수의 백일장에 참석하여 몇 번의 수상도 해보며 재미와 흥미를 느껴 보던 중에 이렇게 서당동료들의 덕택에 힘입어 그동안 모았던 500여편의 한시중 책 한권 만큼을 가려 책으로도 출판하게 되었다. 이 모든 영광은 함께 서당에서 공부하는 동료들의 공 일 뿐이다.
배운지 오래되는 孟子님의 말씀중에 " 舜임금님은 천하에 법도를 펴서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나는 아직 시골사람 노릇이나 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근심할 만한 것이다. 그것을 근심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舜임금과 같아지도록 해야 할 뿐이다 <舜은 爲法於天下하사 可傳於後世어시늘 我는 由未免爲鄕人也하니 是則可憂也라 憂之如何오 如舜而已矣니라> 오늘 아침에도 문득 떠오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孟子 離婁章句下의 한 대목이다. 배우고서 그것을 익히고, 읊조림에 비록 千辛萬苦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우매한 재주와 천박한 식견 때문에 많은 공력을 들인 들, 한 구절의 好句도 얻기 어려우니 한시공부의 실상이며 공부가 빠르게 진보하지 못하는 제일의 이유인 까닭이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옆에서 끌어주는 동료와 앞에서 인도해 주시는 선생님을 만나 여기까지 왔다. 지금 그나마 동료들과 선독하여 가려뽑은 100여수의 漢詩를 목차를 달아 인쇄에 부치노니, 한시에 관심있는 서예가및 읊조리는 詩法에 관심있는 동학들께 혹 指南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임인년 섣달 보름 즈음에 南陽 房侹孝 공손히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