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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건축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 / 열왕기상 6:1-38
미국의 42명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나라를 위해 최선의 봉사를 다한 세사람을 꼽는다면, 첫째 아브라함 링컨, 둘째 플랭클린 루즈벨트 셋째, 조지 워싱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대통령들의 공통점은, 재직기간 중 전쟁의 위기를 온 몸을 던져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쟁의 위기를, 나라와 민족을 향한 봉사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남북전쟁의 승리를 통해 노예를 해방시켰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2차대전을 종식시켰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나라를 위해 최대의 봉사를 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헌신은,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심령의 봉사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헬라적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심령의 봉사는 히브리적사고, 곧 신앙적인 사고에 기초한 봉사이며, 주님의 은혜에 말할 수 없는 감격함을 가지고 하는 봉사입니다. 체질적인 봉사입니다. 약삭빠른 계산이 깔리지 않은 희생적인 봉사입니다.
일에는 원리가 있는데 그 원리를 잘 알아야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예로 운전을 잘 하려면 세 가지를 장악해야 됩니다. 차를 장악해야 하고, 길을 장악해야 하고, 운전자 자신을 장악해야 된답니다. 보충하면, 자기가 운전하는 차의 성능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고, 자기가 가는 길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운전하는 자신의 컨디션 따라 페이스를 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계속 의식하고 운전하다 숙달되면, 낯선 차, 낯선 길도 금방 적응이 돼서 오래 운전한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일만 원리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믿음생활도 원리가 있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그러려면 세 가지가 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름하여 행복한 크리스천의 3대 안정, 뭘까요? 가정의 안정, 교회의 안정, 일터의 안정이 그겁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만 무너져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선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은 이 세 가지가 모두 안정되어져서, 이 땅에서 행복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까? 교회를 나옴으로써, 어떤 재미있는 일이 주어지기를 원합니까? 교회가 여러분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를 원합니까? 하지만 교회를 바라보면서,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교회와 자신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곧 교회 따로, 나 따로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당에 가면 ‘따로 국밥’이라는 메뉴가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따로 국밥이 어떤 것인가 호기심으로 먹어봤는데,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냥 국과 밥을 따로 내어 놓는 것이, 따로 국밥이었습니다. 원래 국밥은 국과 밥을 함께 말아서 내어 놓는데, 국과 밥을 따로 분리하여 ‘따로 국밥’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교회는 나와 교회가 따로 분리된 관계가 아닙니다. 국과 밥이라는 각기 다른 것이, 하나 되어 국밥인 것처럼, 각기 다른 몸이 모여서 교회라는 관계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체가 교회이기에, 교회가 나에게 재미를 제공해주기를 원한다는 것은, 곧 내가 나에게 재미를 제공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교회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함으로써, 교회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항상 심판이 선포되어진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원하는 재미있는 일은 없고, 듣기 거북한 심판만 선포됨으로,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대해, 불만이 쌓여가게 되겠지요.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종교생활의 현장이라는 것을 눈치 채야 할 것입니다.
시편 84:1-4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여기 보면 영혼이 쇠약할 정도로, 주의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기에 영혼이 쇠약하였다는 말을 할까요? 또한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의 제단에서 참새와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집이라는 것은 안식처입니다. 집을 새끼 둘 보금자리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새끼를 둘 보금자리는 안전한 안식처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비도 안식처를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84편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궁정이나, 주의 제단, 주의 집이라는 것은, 모두 지금의 교회와 연관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곧 여러분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84편의 저자와 같은, 여호와의 궁정을 향한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주의 제단에서 안식처를 얻지도 못한 채, 교회를 그저 종교단체로만 인식을 하면서, 재미만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이, 교회를 찾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이 변할 수 없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게 되고, 그 관심이 충족되지 않기에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난 자들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기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스스로 교회 아님을 인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비록 예수를 위해서 한다고 스스로의 당위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1절에서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성전 건축이라는 거대한 공사를 시작하는 솔로몬의 입장에서는, 분명 여호와를 위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모시기 위한 의도로 짓는 성전이기에,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다윗 왕 때부터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을 거부하셨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초라하다거나 화려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곧 외형이 성전의 본질이 아니란 것입니다. 본문에는 성전의 규모에 대해 언급하고, 14절부터는 성전 내부 장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규모는 그다지 큰 건물은 아니었다고 해도, 예전의 성막보다는 큰 것이었고, 내부 역시 백향목과 잣나무, 보석 등으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이 정성을 들여서, 7년간 건축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솔로몬이 자신이 지은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과연 7년의 세월을 허비하면서 성전을 지었을까요? 솔로몬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은, 자신의 손으로 지을 수 없고, 그 어떤 인간의 손으로도 지어질 수 없는 것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붕어빵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외형이 붕어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성전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 외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만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상 세계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궁정, 곧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락하시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나는 너희들의 손으로 지은 곳에는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증거로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무너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는 집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신의 불의함과 악의 결과로 인해, 패망을 당하게 되고 성전도 무너지게 됩니다. 거룩한 성전이 그 어떤 기능도 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 건물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손으로 지은 것은, 자신들의 죄와 심판에 대해,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예배당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11-13절을 보면, 열심히 성전을 짓고 있는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12-13절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성전 건축한다고 ‘수고 한다’라는 칭찬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고, 율례를 행하며, 계명을 지키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고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성전을 짓지 않아도,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도를 따르고, 율례를 행하고,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을 지키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전을 건축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인간의 성전 사상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성전 사상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마 26:61절을 보면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일 죄를 찾던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거룩한 성전을 모독한 참람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잘못된 성전사상으로 인해, 성전의 모퉁이 돌로 오신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인간의 죄로 인해 희생하는 거룩한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는 것에 있습니다. 성전의 크기나 화려함이, 죄사함의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물의 희생이 곧 죄사함의 기능을 가지고, 인간들 세계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실체로 다가온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겨난 무리를 교회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 곧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 대해 마음이 전혀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은혜라는 말은 하지만, 은혜와 자신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국밥’처럼 별개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시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다른 조직체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집을 지으면서,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구조로 만들어 넣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 에덴동산을 만든다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겠습니까? 아마 빼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불리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인간이 원하지 않은 선악과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에덴동산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은, 우리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것이기에, 교회에 대해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피로서 선포되어진,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곧 성도는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누리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리는 것이 없이 받고자 하는 것만 있을 때, 인간은 종교적 인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 없이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죄인 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진 용서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 입은 자의 내용은 용서인 것입니다.
앞서 시편 84편에서 말씀드린,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이 의미하는 것은 죄사함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됨을 아는 자에게,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은 안식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에서 제일 기쁜 때는, 자신이 죄인임을 온 마음으로 자각할 때여야 합니다. 사업이 잘되고, 돈 벌고, 자식이 잘된 때가 아닙니다. 내가 죄인임을 자각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그 순간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임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만을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그리스도께 있으니,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라는 고백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진심으로 거룩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성전은 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러한 성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죄 사함의 은혜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의 궁정을 영혼이 쇠약할 정도로 사모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것은, 인간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정성이며 열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정성과 열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정성을 받아들이신다면, ‘네가 이런 정성을 내게 보이니, 너의 정성을 봐서,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확실히 이루어 주겠다’ 뭐 이런 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곧 ‘네가 이 성전을 건축한 것과 상관없이, 내가 보는 것은 네가 내 법도를 따르고, 율례를 행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이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의 정성을 보시고, 그 정성이 귀해서 다윗에게 한 말을 이루시겠다고 하신다면,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정성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의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그 마음이 전혀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말을 이루실 수 있다는 조건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하는 솔로몬의 마음이 지속되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까? 왕상 11:9절을 보면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에,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의 정성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그 정성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지으면서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을 수도 있는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언약은 성전을 건축하는 정성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명과 율례를 그대로 지켜 행할 때 이루어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에게 하신 이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에게 계명과 율례를 지켜 행하라는 것도,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이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 계명과 법도를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뭔가 하는 것입니다. 왕상 11:33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내 법도와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함이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행하지 않고, 다윗의 행함같이 하지 아니한 솔로몬에게 남은 것은, 여호와의 진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34-35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택한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그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의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진노 아래 멸망을 받아야 할 솔로몬의 나라를, 그 생전에는 빼앗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솔로몬 때문이 아니라 다윗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켰기 때문에, 다윗을 보시고 솔로몬의 생전에는 그 나라를 보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36절에서 “그의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거기에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의 아들에게는 한 지파를 주어서, 다윗의 등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내실 다윗 자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끊어짐을 면할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솔로몬은 성전을 짓는 자신의 정성이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끊어짐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자신을 살리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성전을 지음으로써, 자신의 정성과 마음을 보이고자 하는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솔로몬이 지키지도 아니할 계명과 율례를 지킬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솔로몬을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까? 오늘날 사람들도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것처럼, 이런저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정성과 열심을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전혀 눈길조차 주지도 않으시는데,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하겠다고 난리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참히 짓밟히고 무시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윗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성과 열심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오직 율례와 법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한 자가 없기 때문에,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신 다윗 자손을 보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짐을 면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솔로몬처럼 성전을 짓는 것으로,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정성과 열심을 보이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의지하지 않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약속에 거했던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보여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오신 사랑의 귀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맛을 본 사람이라면, 사랑 앞에 인간이 보이고자 하는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하고 부끄러운 것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까? 아들을 죽이시는 사랑 앞에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런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의 정성과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뭔가 들고 나오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두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과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성과 수고를 분명히 기억하십니다. 그것을 행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칫 잘못하면 빈 껍데기 성전만 짓고, 스스로 만족하는 자리에 빠지고 마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에 관하여는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에게, 늘 마음에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권면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역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말씀이 있게 하옵소서.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언약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늘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의 복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성전은 회개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회개를 통해 기도가 열리고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게 하옵소서. 사명이 회복되고, 찬송과 기쁨이 회복되며, 축복의 문이 열리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나와 순종과 회개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