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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작가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보면, 학식과 인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지킬 박사가 인간의 몸에 선과 악, 두 가지의 본능이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것을 분류하고 증명하고자, 여러 실험을 통해 약품을 만들어 자신에게 투여함으로 성공합니다. 두 가지 본능이란, 하나는 본래의 지킬 박사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악의 분신인 하이드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지킬 박사로, 밤에는 하이드로 온갖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 소설은, 우리의 몸에는 상충된 두 인격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이며,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우리의 인격인 자아를 “이드, 에고, 슈퍼에고”로 분류했습니다. “이드”는 “선천적 자아”이며, “에고”는 “도덕적 자아”이고, “슈퍼에고”는 “감정적 자아”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합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지만, 이것으로도,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자아분류와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아의 분석을 보며, 마 26: 41을 떠 올리게 됩니다.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십니다. 마음에는 원하지만, 육신이 이를 이루지 못하는 것에서, 우리는 갈등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갈하지 못함으로, 우리는 심적 고통을 겪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두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마 5: 3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보시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합니다. 여기서, 심령 즉,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실현시키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우리의 자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의지일 뿐, 실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 우리의 의지를 실현시키기에, 성도인 우리는 본문을 기록한 사도 바울과 같이, 거룩한 탄식을 하게 됩니다. 성도로서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것이, 성도들이 이루어 가는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우리의 의지를 이룬다면, 우리는 좌절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결과로 인해, 본문의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며, 탄식을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탄식은, 성도로서의 자리에 더욱 가까이 나아감에 있어서 나타나는 탄식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내 의지를 꺾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선한 의지로 인해, 우리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은 탄식을 하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가 모두 사함을 받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의 시민으로 구원받은 자가 되었지만, 현재의 나는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마치는 그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덴마크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키에르 케고르”는, 사람을 정의함에 있어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요, 불안 그 자체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살피는 가운데, 사도 바울의 탄식이 그 만의 고뇌가 아니라, 오늘날 성도된 우리 모두의 고뇌임을 알고, 이에, 하나님께로, 우리의 모든 것을 맞추고, 내어맡기는 놀라운 결단이 성령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참된 자유와 행복을 삶 속에서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9 - 20절을 보시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성화의 과정에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는 가운데, 점차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나가게 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선을 이루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것의 근원은, 아담의 타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악의 본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자아를 우리 안에 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지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는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성도된 우리의 선이요, 우리의 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이며,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을 보시면,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성도인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이 있는 데, 그것이, 사도 바울의 탄식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선행의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아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는 계속하여 죄가 도사리고 있는가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죄책감을 갖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심을 의심하는 죄라며,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받았기에, 우리가 무엇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본문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선택받고, 하나님에 의해 이방의 사도가 되어, 놀라운 기적을 행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도 바울이, 이러한 탄식을 한 것은, 로마서를 기록하는 그 때가 아니라, 그 이전의 상태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받아야 하겠습니까? 답은 “아니다 틀렸다”입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만일 하나님 뜻을 마음대로 다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 사도 바울이나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해서, 또, 삶 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전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 내재한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해, 우리는 날마다 성화의 자리로 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곧, 우리는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과 같은 탄식으로 인해, 날마다 분초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우리의 자아가 아닌,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갈 5: 16을 보시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고, 하나님의 선을 행할 능력이 1마이크로미터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항시 이끌어 주시기를 우리는 간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 그는 언제나 자신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의지했으며,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다윗도,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여러 사람들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환경에서든 항시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며, 이끌림을 받는 가운데, 점차 성숙한 성도의 자리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2 - 23절을 보시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인격 속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본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네덜란드의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만약 우리가 거듭남으로써 어떤 연약함과 갈등도 없이, 완전한 거룩을 이루었다면 이런 간구와 탄식은 필요 없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반대로 하면, “우리는 어떠한 연약함도 없이, 완전한 거룩을 이룰 수 없다”는 겁니다. 본문 22절을 보시면,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시 1: 1 - 2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시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합니다. 곧, 사도 바울이나 성도인 우리나 모두가 탄식을 하며, 갈등을 하게 되는 이유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여, 그 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을 보시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게 포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죄에게 포로가 되었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푯대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고 달려갔기에, 거룩함에 더욱 가까이 갈수록, 자기에게 있는 죄의 실체를 더 깊게 보았고, 느꼈던 겁니다. 그래서, 고전 15: 9을 보시면,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하였고, 딤전 1: 15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던 겁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언제나 죄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깨달았기에, 이러한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실체를 고백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역시, 거룩한 탄식을 통해, 항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도록 간구하며, 성령의 능력 아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을, 신앙년수로 말하거나, 교회에서의 직분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아닙니다. 또,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을 인격의 겸손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도 아닙니다. 신앙이 성숙한 성도된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며, 하나님과 늘 깊은 교제를 힘쓰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의 이성만을 앞세우게 되고, 자신의 의지만을 앞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는 성경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이 됩니다. 고후 13: 5을 보시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우리의 인격 속에 남아 있는 옛 사람의 본성을 경계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올바른 성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법과 싸워 이길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양쪽에 두고 탄식하는 그 갈등을 극복할 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묵상하며, 늘 기도하심으로,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4 - 25절을 보시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합니다. 성도의 거룩한 탄식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에서, 사도 바울이 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며, 비탄한 탄식을 하였습니까? 그것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자아와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려는 악의 의지가 싸우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가리켜, 곤고한 사람이며, 사망의 몸이라고 한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이 축복의 생활이라는 것만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곤고한 생활이요, 사망의 생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자신만 사랑하며, 자신이 계획하고 실행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빗나간 의지를 갖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행위의 결과가 일으키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성도 간의 갈등을 조장하며, 교회를 어지럽히게 되며, 모든 것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참담한 행동이고,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탄식을 하며, 곤고한 사람이며, 사망의 몸이라고 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에서 배제되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이 우리를 주장할 때의 상황을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 이끌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사망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본문 24절에서 “곤고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탈라이포로스”라고 하며, 그 의미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적의 포로가 되어 기진맥진한 군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악의 의지 가운데, 악의 의지가 선의 의지보다 더 강하게 두드러지게 드러날 때, 우리는 곤고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감동하심이 우리의 삶에 없다면, 우리는 죄의 포로가 되어 곤고한 중에 거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25절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합니다. 비록,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지만, 그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가 자신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영과 모든 삶에 있어서 완전한 해결자가 되십니다. 우리를 사망의 몸에서, 곤고한 자리에서 건져내어 구원할 자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곤고와 사망의 몸에 있는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