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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성불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성불成佛 이 아니라 각불覺佛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에 이르러 다음 생에 불국토나 서방극락정토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삼악도에 떨어지거나 설사 요행히 천상인 삼계 가운데 태어나더라도 결국 복덕을 다 탕진하게 되면 또 다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생을 마감하게 되면 그 즉시 영혼이 소멸되어 6도 윤회를 받지 않는 존재로 흩어지고 사라져 버리는게 차라리 편치 않나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에전에 심령과학을 하던 안동민 선생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자신의 영혼이 절대 소멸되지 않는데 비극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영혼이 완전히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답변입니다.
질문이 길기에 몇 문단으로 나누어 답하겠습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성불에 이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성불은 '대승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즉 보살도를 닦아서 지혜와 복덕을 모두 갖춘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위 소승불교(아비달마불교, 부파불교) 수행의 목표는 성불이 아니라 아라한이 되어 열반하는 것입니다. 열반은 니르와나(nirvāṇa)의 한자 음사어로 '(번뇌의 불길을 훅!) 불어서 꺼버림'이라는 뜻인데, 적멸(寂滅)이라고 의역하기도 합니다. 불교 수행을 통해 생전에 아라한이 되면 죽은 후 적멸합니다. 즉 '고요히 소멸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성불成佛 이 아니라 각불覺佛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불과 각불은 다릅니다. 성불하려면 윤회하면서 3아승기100겁의 보살행을 하여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덕과 지혜를 모두 갖추어 성불합니다. 그러나 각불은 문자 그대로 '부처임을 자각한다.'는 뜻으로 '견불성(見佛性: 내 마음 속의 불성을 봄)'을 의미합니다. 견불성을 일반적으로 견성(見性)이라고 줄여서 말하며, 여기서 말하는 불성은 '부처의 성품'이기에 각불은 "나에게 부처의 성품이 있다."는 점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불과 각불은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에 이르러 다음 생에 불국토나 서방극락정토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삼악도에 떨어지거나 설사 요행히 천상인 삼계 가운데 태어나더라도 결국 복덕을 다 탕진하게 되면 또 다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삼악도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대승불전 가운데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과 같은 정토계 경전의 신화(Myth)에서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차라리 생을 마감하게 되면 그 즉시 영혼이 소멸되어 6도 윤회를 받지 않는 존재로 흩어지고 사라져 버리는게 차라리 편치 않나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 영혼 또는 자아는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입니다. 제행무상은 "연기(緣起)한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의미이고 제법무아는 '나라고 할만한 것은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다." 또는 '그 어떤 것도 자아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영혼 같은 자아는 없다는 것이 제법무아의 가르침입니다. 조건이 모여 만들어진 모든 것은 조건이 흩어지면 사라지기에 무상하며, 이렇게 모든 것이 무상하기에 '변치 않는 자아', '자기동일성을 갖는 자아'는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비유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이나 '자아'는 마른 억새풀밭에서 억새를 태우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작은 불길과 같습니다. 얼핏 보면 불길이 실체를 갖고 동에서 서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그 작은 불길은 매 순간 새로운 억새를 태우면서 위치를 변경하는 것입니다. 그 불길은 매 순간 꺼지면서 옆의 억새에 붙어서 새롭게 타오릅니다. 즉, 그 불길은 매 순간 꺼지면서 새롭게 타오르는 것이지 이동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如實)' 볼 경우 그 불길은 무상합니다. 그래서 그 불길에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무아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혼이나 자아도 이런 불길과 같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모든 것이 매 순간 달라지면서 늙어갑니다. 불전(佛典)에서는 이렇게 무아이면서 무상한 나의 마음을 보다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자상속(自相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쪽에서(自) 찰나찰나 생멸하면서 이어지는(相續) 심신의 흐름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이렇게 무아와 무상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남의 마음을 표현하는 용어는 타상속(他相續)입니다. '남에게서 일어나는 심신의 상속'이라는 의미입니다. 마른 억새풀밭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작은 불길도 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다른 작은 불길도 있을 수 있듯이, 모든 것이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지만 '이쪽(自)의 심신의 상속'과 '남(他)의 심신의 상속'은 엄연히 다릅니다.
질문에서 '영혼'이라는 말을 쓰셨기에 불교의 근본 가르침이 '변치 않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게 되면 그 즉시 영혼이 소멸되어 6도 윤회를 받지 않는 존재로 흩어지고 사라져 버리는게 차라리 편치 않나"라고 적으셨는데, 나의 심신(心身) 가운데 몸(身)을 이루는 물질적 요소(분자)는 "흩어지고", 마음(心)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바로 불교 수행의 궁극 목표인 열반입니다.
"예전에 심령과학을 하던 안동민 선생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자신의 영혼이 절대 소멸되지 않는데 비극이 있다"고 적으셨는데, 수십 년 전 안동민 선생의 심령과학 책이 많이 읽힌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몇 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자신의 영혼이 절대 소멸되지 않는데 비극이 있다"는 것은, 불교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이상, 즉 해탈, 열반하지 못한 이상 "영혼이 절대 소멸되지 않는데 비극이 있다"는 설명일 겁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어서 아라한이 되면 적멸합니다. 소멸합니다. 사라집니다. 다시는 육도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극락에 태어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냥 사라집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의 경우 불교 수행의 목표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면 공포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아직 '일체개고',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고통이다."라는 가르침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의 세계에 무언가 좋은 게 있으려니 하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존재의 세계는 그대로 고통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체개고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苦)도 고(苦)이지만, 낙(樂)도 궁극적으로 고(苦)입니다. 모든 상대적인 낙(樂)은 처음에 얻었을 때만 낙일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고통으로 변합니다.
예를 들어 잠자리에 누워서 가장 안락(安樂)한 자세로 누워도, 그 자세가 오래 되면 다시 몸이 배겨서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안락한 자세로 바꾸기 위해서 엎치락 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자세가 다시 고통으로 변합니다. 다시 뒤치락 합니다. 우리가 잠자리에서 이렇게 엎치락뒤치락 하며 자는 이유가, 락이 오래되면 그대로 고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 오래 서 있으면 앉고 싶고, 그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오래 누워 있으면 누워 있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섭니다. .... 윤회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에서는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열반, 해탈을 목표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일체개고 ...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상, 즉 열반, 해탈하지 못한 이상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절대'라는 수식어는 옳지 않습니다.
정말 영혼이 완전히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 '영혼'의 '소멸'이라는 표현보다 '삶의 소멸'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불교 수행의 목표인 아라한, 또는 부처(= 대승 아라한)가 되면 '삶이 소멸'합니다. 아함경이나 니까야와 같은 초기불전을 보면 불교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었을 때, 일률적으로 부르는 노래 (또는 시구)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삶은 이미 다했다. 청정한 행은 이미 세웠고 할 일을 이미 마쳤으니, 다음 생을 받지 않을 것을 나 스스로 아노라."
(我生已盡,梵行已立,所作已作,自知不受後有 - 잡아함경)
이렇게 아라한이나 부처가 되어야만 대열반의 죽음 후 적멸에 듭니다. 즉, "완전히 소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완전히 소멸하려면, 윤회의 세계에 '맺힌 한(恨)'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恨)을 불교 전문용어로 '번뇌'라고 부릅니다. 즉, 번뇌를 모두 제거하면, 아라한이 되어 윤회의 세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적멸입니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탐(욕망), 진(분노), 치(종교적 어리석음)와 같은 것이 번뇌입니다. 탐진치를 삼독(三毒)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를 이런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독약과 같기에 삼독이라고 부릅니다. 삼독은 이런 번뇌를 분류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번뇌는 인지적(認知的) 번뇌인 견혹(見惑 = 迷理惑)과 감성적 번뇌인 수혹(修惑 = 迷事惑)의 2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고 견혹을 다시 88가지로, 수혹을 10가지로 세분하면 98가지 번뇌가 되기도 합니다. ... 불교의 번뇌론은 복잡다단하고 방대하기에 이 정도만 소개하겠습니다.)
탐진치의 삼독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탐욕(貪欲) - 식욕(食欲), 음욕(淫欲),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睡眠欲)
진에(瞋恚) - 분노, 화, 질투, 저주 ....
우치(愚癡) - 종교적 어리석음, 사견(邪見), 잘못된 세계관 ...
이런 번뇌가 있기에 우리는 계속 윤회하며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즉 한 풀이 하기 위해서 태어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먹는 것에 한이 맺히든지, 이성과의 사랑에 한이 맺히든지, 돈에 한이 맺히든지, 명예에 한이 맺히든지 ... (貪), 풀지 못한 원한이 있으면(瞋), 그 한을 풀기 위해서 다시 태어납니다.
그런데 음욕을 끊고, 식욕을 끊고, 재물욕을 끊어서 ... 이런 감성적인 한이 없어도 세상에 대해서 종교적, 철학적으로 애매모호한 게(認知의 恨) 있으면 다시 태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누굴까?",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전생이 있었나?", "죽은 후 내세가 있나?" 등등의 종교적, 철학적 의문에 대해 명료하게 답을 하지 못하면 다시 태어납니다. 이런 의문을 풀지 못했기에 어리석다(우치)고 하는 것입니다. 또는 이런 의문에 대해 다른 여러 종교나 철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사견(邪見, 삿된 견해)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탐욕, 분노, 우치와 같은 번뇌를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이 계, 정, 혜 삼학(三學)의 불교 수행입니다. 먹이와 섹스를 추구하던 동물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고(持戒), 마음을 집중하여(禪定)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아서 연기(緣起)와 공성(空性)에 대한 궁극적 지혜(智慧)가 생기면 번뇌가 사라집니다.
즉, 음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성에 대한 동경이나 섹스의 욕구를 완전히 끊고, 이름을 날리고 싶은 욕망(명예욕)을 완전히 제거하고, 내 마음에서 질투심이나 분노의 뿌리를 완전히 뽑으며, 여러 가지 종교적 철학적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경우 다시 태어나지 않는 아라한이 됩니다. 즉 죽은 후 '완전히 소멸'합니다.
이러한 탐욕, 분노, 우치의 번뇌 가운데 탐욕과 분노는 그 정체가 명확하기에 제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의문'을 들게 만드는 우치의 경우 제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세상이 왜 존재하는가", "내생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풀기는 쉽지 않습니다. 온갖 종교에서 이에 대해 다양한 답을 주지만 믿을 수도 없고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모두 해결하는 것이 불교 수행을 통해 체득하는 반야의 지혜입니다. 요점만 얘기하만다면 "이런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이 모두 허구의 의문임을 자각함으로써 의문이 해소"됩니다. 즉 치심이 사라집니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의문은 모두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즉 흑백논리로 작동하는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다면 이런 종교적, 철학적 의문들은 모두 실제의 의문들일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 작동하는 방식을 면밀히 관찰해 보니, 세상과 무관하게 작동합니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 "세상이 왜 존재하는가", "내생이 있는가?"라는 종교적, 철학적 의문이 모두 '가짜 의문', 세상과 무관한 '허구의 의문'입니다. 이 점을 자각할 때 종교적, 철학적 의문이 해소됩니다. 엄밀히 보면 지금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
이런 우치의 제거에 대해서는 본 카페에 개설한 중관학 강의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게시판 주소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 청소년을 위한 중관학 4강 https://cafe.daum.net/buddhology/UI1g
* 중관학 10강 - 색즉시공의 논리 https://cafe.daum.net/buddhology/UI1m
이 강의를 녹취, 보완한 책으로 <중관학 특강 - 생즉시공의 논리>가 있습니다. 책 소개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https://cafe.daum.net/buddhology/Tk1r/24
* 중관학 24강, 조계종 교육원 https://cafe.daum.net/buddhology/UI5C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계, 정, 혜 삼학(三學)을 통해 탐진치의 번뇌가 모두 사라지면, 진정으로 사라지면 내생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생명의 세계, 윤회의 세계에 맺힌 게 없기 때문입니다. 즉, 더 이상 희구할 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 상태를 무원삼매(無願三昧) 또는 무작(無作)삼매라고 부릅니다. 무원삼매는 (예를 들어서 먹이와 섹스를 추구하고 투쟁하는) 윤회 세계에 "더 이상 원하는 게 없는 삼매"라는 뜻이고, 무작삼매는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는 삼매"라는 의미입니다.
"완전히 소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라고 물으셨는데, 이상에서 보듯이 욕심, 분노, 종교적 어리석음의 삼독을 제거하면 죽은 후 완전히 소멸합니다. 아라한의 죽음입니다. (참고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는 열반하면 常, 樂, 淨하다고 설명합니다)
이상 답변을 마칩니다.
첫댓글 자세하고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부처님 당시 아라한의 경지에 오르신 분이 1250명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입멸 후 현재까지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분이 과연 몇 분 정도 되는지 모르겠군요
물론 달마대사부터 6조 혜능까지 부처님으로부터 정법을 이어받은 분들도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신 것인지 아니면 아라한을 뛰어넘어 보살의 경지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군요
아라한은 생사의 굴레를 뛰어넘어 다시는 6도를 윤회하지 않는 존재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보시기에는 아라한은 본래 생사가 따로 없음에도 생사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이를 뛰어넘고자 수행한 결과 생사윤회를 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기에 결국 본전을 한 데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더 이상 수행하거나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부처님께서 3승이 아닌 1승을 설하시는 것을 보고 스스로 반성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때문에 서방극락정토를 가더라도 아미타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일대사인연은 오탁악세의 말법시대를 대비하여 법화경을 설하고자 오셨다는겁니다.
교수님 체계적이고 친절하신 답변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