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화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그림자를 옮기는 시간』(푸른사상 시선 184).
불행과 고통에 좌절하지 않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이 시집에 펼쳐진다. 세상의 갈피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을 사랑하고 보듬는 마음이 열매처럼 익어간다.
2023년 11월 30일 간행.
■ 시인 소개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201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방송통신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과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시집으로 『치통의 아침』이 있다. 현재 경남 진주에서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운영 중이다.
■ 시인의 말
내 일은 남의 집 초인종을 눌러야만
먹고사는 일이다.
내가 누른 초인종 소리를 한데 모은다면
작은 암자 종소리만 할까?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할까?
낡은 트럭 스피커에서 울리던
과일 장수 목청과는 또 어떨까.
■ 작품 세계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관점을 벗어나 심리학적인 측면으로 옮아간다면, 우리는 미적 거리라는 관념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행하는 역학에 관해 물음을 던질 수도 있겠다. 시인의 미적 표상은 그의 가슴속에서 무엇을 승화하고 무엇을 억압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비추어 이미화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면 어떨까. 일단 이 시집에서 반복하는 주요한 비유가 있다. 마음은 열매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열매라는 심상이 이 시집의 미적인 역설을 만들어낸다고 전제해보자. 다시 말해 그것은 마음을 반쯤 드러내는 동시에 반쯤 감춘다. (중략)
무엇보다 이미화 시인이 그리는 아름다움의 표상들은 사람의 체취를 간직하고 있다. 아니, 뒤집어서 말하는 편이 이 시집에 대한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애초에 사람 자체가 시인이 좇는 아름다움이다. “앞사람 뒤꿈치는/종교다”(「뒤꿈치에 관한 명상」)라는 문장처럼 사람이 삶이라는 길을 전진하게 만드는 동력은 누군가의 뒷모습이다. 사람을 절망하게 하는 원천이 사람일 수 있음에도, 시인은 “누가 꺼내주지 않으면/생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해바라기는 한번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는다」)라고 쓴다. 한 여자가 그가 놓인 가정과 그를 둘러싼 가족 때문에 절망에 빠졌다고 말하는 대신 그 여자에게 손 내밀 또 다른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이미화 시인의 문법이다.― 박동억(시인) 해설 중에서
■ 추천의 글
이미화 시인은 이쪽 모서리에서 저쪽 모서리로 제 그림자를 옮기는 나무를 따라 걷는다. 나무의 뒤꿈치를 종교처럼 바라보면서 우물물을 마시고 미용실에 들러 푸념 가진 사람들과 북적거리고 바람의 언덕을 오른다.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의 신발이라고 여기고 오래된 아파트 단지를 오르내리며 별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초록색을 칠한다. “가계부를 적다/한풀 더 꺾여버린 여자”(「해바라기는 한번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는다」)의 눈물을 꺼내 비 그친 오후의 마당에 펴서 말리며 거꾸로 매달린 것들을 노래한다. 하늘의 텃밭을 호미로 고르면서 어머니가 좋아하던 별을 한 소쿠리 심고, “노란 밀밭에서 푸른 힘줄을 보이며 밀을 베는 백 년 전쯤의 남자를 만나 그의 아내가 되고 싶”(「푸른색과 노란색」)어한다. 화물차 안에 놓여 있는 목장갑과 먹다 만 찐빵, 저쪽 모서리에서 들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발견하고 유등의 불빛이 난로처럼 비추어지기를 기도한다.
― 맹문재(시인·안양대 교수)
■ 시집 속으로
맨드라미들의 노래
이미화
시각장애인들에게 내 친구는
노래를 가르친다
햇살의 혀에 달린 노래로
담장 아래 핀 맨드라미들
열정적이다
눈먼 사랑을 선곡해온 선생님 민망할까 봐
여기는 다 눈먼 사람뿐이라며
교실 안 화르르 꽃 피우는 사람들
더워서 옷 벗는 것도 이곳에선 개그가 된다
옷 좀 벗겠다는 선생님 말에
아무도 못 본다는 화답
누가 알아요 벗는 순간 눈이 번쩍 뜨일지
햇살의 혀끝에서 개그가 만개한다
눈먼 학생들과 척척 죽이 맞는
내 친구가 가르치는 교실엔
노래와 개그가 있다
붉은 맨드라미 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