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는 왜 국가예산으로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대장경 편찬사업을 하였을까?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세차례의 도감이 설치되었다.
도감이란 국가사업으로 대장경을 편찬하는 기관이다.
첫번째는 대각국사 의천이 속장경을 편찬하기 위해 설치한
교장도감이다.
두번째는 몽골의 침략을 이겨내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출간한 대장도감이다.
세번째는 유교국가 조선에서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으로 우리말 대장경을 편찬하기위해 세조가 설치한 간경도감이다.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가장 중요한 실무를 담당한ㅈ인물은 신미대사와 그의 동생 김수온이다.
세종이 꿈꿨던 '지혜의 평등'을 구체적인 책의 형태로 완성해낸 주역들이다.
신미대사는 불교 철학에 정통한 고승이었고, 김수온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자였다.
이 두 사람이 손을 잡음으로써 종교적 전문성과 유려한 문장력이 결합된 수준 높은 언해본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신미대사는 단순한 승려를 넘어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에도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불교 경전의 난해한 개념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최종적인 검토를 맡았다.
범어(산스크리트어)에 능통했던 그는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한글의 특성을 활용해 불교 용어를 어떻게 표기할지 결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집현전 학사 출신인 김수온은 유교와 불교를 두루 섭렵한 보기 드문 학자였다.
신미대사가 해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백성들이 읽기 편하도록 매끄러운 우리말 문장을 구성했다.
신미대사와 김수온은 세조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간경도감에서 이루어지는 방대한 출판 사업의 실무적인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이 두 사람의 협업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에서 승려와 유학자가 함께 경전을 번역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식의 경계'를 허물려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간경도감에서 신미대사와 김수온이 중심이되어 주요경전과 선어록등이 언해본으로 출간되었다.
그중 능엄경 발문에 보면 번역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역할이 나온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든다.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번역사업에도 중심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세종대왕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들이 이후 번역 사업(언해)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단순히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글자가 실제로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수온은 집현전 출신으로서 세종 대의 학문적 성과를 세조 대의 번역 사업으로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신미대사 역시 한글 창제 과정에서 음운학적 조언을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복잡한 불교 철학을 한글로 정밀하게 옮기는 실무를 맡았다.
능엄경언해의 발문은 바로 이러한 창제 멤버들의 전문성'이 번역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기록이다.
이 발문이 중요한 이유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
발문에는 세조가 아버지 세종의 뜻을 이어 한글을 보급하려 했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다.
유교 국가에서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이것이 세종 대부터 계획된 국가적 사업임을 강조한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였기에, 단어마다 한글을 어떻게 적을지(표기법)에 대한 표준이 필요했다. 발문에는 신미대사와 같은 전문가들이 모여 한자음과 우리말의 대응 관계를 얼마나 엄격하게 검토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어, 국어학적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어려운 한문을 우리말로 옮길 때의 원칙이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말씀은 한 글자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이 읽었을 때 뜻이 막힘이 없어야 한다는 직역과 의역의 조화를 고민한 흔적들이 발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발문을 쓴 김수온은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러 왕을 모시며 한글 사업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세조가 유학자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언해) 사업을 밀어붙인 과정은 조선 초기 정치사에서 매우 역동적인 장면중 하나이다.
특히 세조는 단순히 힘으로 억누르기보다 치밀한 전략을 사용했다.
세조의 전략은 크게 세 가지이다.
세조는 이 사업이 본인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선왕인 세종대왕의 유업임을 강조했다.
유교 국가에서 부모(선왕)의 뜻을 잇는 '효(孝)'는 그 무엇보다 강력한 명분이었기에 신하들이 정면으로 반대하기 어려웠다.
사찰에서 개인적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라, 간경도감(刊經都監)이라는 국가 임시 기구를 세워 사업을 공식화했다.
이를 통해 예산과 인력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며 반대파 유학자들이 개입할 틈을 줄였다.
신미대사와 같은 승려들만 참여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김수온이나 한계희 같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을 번역 사업의 실무자로 끌어들였다.
간경도감은 세조가 죽고 성종 2년에 페지되었다.간경도감의 활동이 계속되었다면 유럽보다 앞선 출판강국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