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1-7
선지 생도의 아내 / 손상률 목사
성도는 세상나라의 사람이지만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이중적(二重的) 국적을 가진 신분입니다. 죄와 마귀의 권세에 지배당하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성령과 교통하는 신령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특권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육신을 가지고 있는 자연인으로서 세상이라는 환경으로부터 온갖 재난과 질고와 역경에 시달리며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자이기도 합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선지 생도의 아내는 이와 같은 이중적 신분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는 성도들의 표본이 됩니다. 그의 남편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선지학교에서 훈련받는 선지 생도였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아합 왕의 폭정으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수난을 당하던 시대에 엘리야와 엘리사가 중심이 되어 몇 곳에다 선지학교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영계에 먹구름이 덮이고 아합 왕과 이세벨에 의해서 하나님의 종교가 무너지는 때에 선지자로 나서는 사람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파수해야 되는 때였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아내의 경우 어린 자식들을 키우며 가계를 꾸려나가는 등 평범한 주부로서 육신생활을 영위하여야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죽어버리고 남편이 남겨 둔 부채를 갚지 못해 두 아들을 남의 종으로 내어 주어야 되는 딱한 사정에 이른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이 지향하던 신령한 길과 현재 자기가 당면한 육신 생활의 어려움을 놓고 심한 갈등과 고민에 직면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앞에서 전혀 새로운 세계의 체험을 하면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Ⅰ. 문제 해결의 첩경을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을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의 말하는 것 중에 그 남편이 선지자요 여호와를 경외한 자라는 것과, 그리고 자기가 당면한 일 곧 남편이 죽었다는 것, 갚기 어려울 만큼 빚을 졌다는 것, 또 채권자가 자기의 두 아들을 종으로 끌고 가겠다는 것 등 그가 겪고 있는 갈등과 고민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며 좌절할 수밖에 없는 체념이요 또한 절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그것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1) 주권자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지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도 불행은 있게 마련입니다. 흔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이 주님을 위해 충성을 하고 헌신을 하게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만사를 형통케 하여주실 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휘말리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나오고 큰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려야 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욥 2:9). 성도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계시에 의존하는 방향감각을 잃게되면 판단을 그르치게 되고 더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게 됩니다. 옛날 사울 왕은 사무엘에게 책망을 듣고 나서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다고 판단한 나머지 점장이를 찾아갔다가 낭패를 당했습니다(삼상 28:8).
여기 선지 생도의 아내처럼 어떤 문제가 생기든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해결 못할 고민거리를 가지고 자기를 찾아 주는 것을 기뻐하시며 또한 거기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2) 말씀에 대한 신뢰입니다.
선지자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주권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은 그 말씀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살전 2:13).
비슷한 경우이지만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자기의 문둥병을 고치기 위하여 선지자 엘라사에게 나아갔으나 엘리사가 하는 말이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등을 돌렸습니다. 열왕기하 5:11에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나아만처럼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거나 그 생각에 맞는 말을 해주기를 바란다면 곤란합니다. “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듣고자 하나이다”하고 나아와야만 됩니다(행 10:33).
(3) 전적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여인의 딱한 사정을 다 들은 엘리사는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하였습니다(3-4절).
이 여인은 즉시 두 아들과 함께 엘리사의 말한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하고 돈을 갚지 못하면 채주가 와서 아들을 끌고 가겠다고 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왜 빈 그릇을 빌려오라 하는지, 또 병에 조금 남아 있는 기름으로 어떻게 그 많은 그릇들을 채울 수 있을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 명령을 하는 엘리사는 거기 대한 어떤 설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유를 묻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5에 보면 갈릴리 가나 혼인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 집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 하인들은 예수님의 분부대로 돌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다시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었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해있었습니다(요 2:9).
Ⅱ. 축복의 원리를 보여 줍니다.
성도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복은 신령한 것도 있지만 육신적인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도 있지만 수용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그 사람의 도량의 크기에 따라서 주시는 것도 있습니다.
(1) 인간의 책임
본문 말씀 2절에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가 그 여인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고 물은 것은 네가 내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 여행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 먹이시고 반석을 쪼개고 생수를 내어 마시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기적이라도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엘리사도 물론 신비로운 능력을 행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먼저 그 여인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게 한 것입니다. 자기 할 일은 제쳐두고 기적을 기다리거나 요행을 바라는 심리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유대인들은 기적을 바라고 따라 다니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여주기를 요구하곤 하였습니다(마 16:1). 성경은 사람이 어려움에 처할수록 자기 할 일에 성실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도록 일러줍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눅 19:17).
(2)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고 하는 엘리사의 물음에 여인은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여인의 집에 돈 될만한 것이 어떤 것이 있는 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대답은 자기 집에 빚을 갚을 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다는 뜻으로 말을 했습니다. 곧 한 병의 기름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것의 가치를 인정 하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요긴하게 사용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그것을 가지고 가장 존귀하게 만들어 놓으시는 것입니다(고전 1:27-29).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가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넘는 무리가 배불리 먹고 남을 만큼 큰 역사를 일으켰습니다(마 14:17-21).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 이어로 이적을 베풀어서 많은 무리가 배불리 먹은 다음 열두 광주리나 부스러기가 남았는데 제자들에게 그 남은 조각 하나도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명령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요 6:12).
(3) 수용할 수 있는 그릇만큼 받게 됩니다.
5-6절에 보면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이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고 하였습니다.
불과 한 병의 기름을 가지고 방안에 가득히 찬 그릇들을 다 채울 수 있은 것은 분명히 이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무궁무진 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준비된 그릇만큼 채우고 끝났다는데 유의하여야 됩니다.
만약 그 여인이 빌어온 그릇이 절반쯤 되었더라면 기름도 절반쯤에서 끝났을 것이고 반대로 그릇이 두배나 더 되었더라면 기름도 두배나 더 많이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예비해두신 축복은 무한하지만 그것은 받을 사람의 수용할 수 있는 한계만큼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용량을 키워야 되고 언제 어떤 경우에도 받을 수 있는 자세로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고후 6:2).
Ⅲ. 신자의 생활방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적 기초에 따라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언제나 삶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고전 10:31) 그 나아가는 걸음이 누가 보아도 표본이 될 수 있도록 건전한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8:19).
본문 말씀 7절에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고 하였습니다.
(1) 먼저 빚부터 갚아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생활에 있어서 규모있게 관리하여야 되고 무절제한 낭비와 사치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약 5:5). 그렇지 않더라도 가정 살림이나 사업을 할 때도 자기의 분수를 뛰어 넘어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든지 무리를 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게되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신뢰성을 잃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남에게 빚을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롬 13:8). 솔로몬은 남의 빚 보증을 해주고 감당을 못해서 가산을 차압당하는 일을 경계하게 하였습니다(잠 22:16).
그렇지만 사람이 살다보면 남에게 신세를 져야되고 돈을 빌려 써야 되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상황ㅇ[서도 그리스도인은 신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임을 받는 사람은 세상 사람 가운데서도 믿음이 가는 사람이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5:4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마음에 약속한 것을 손해가 가더라도 반드시 지키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욕심은 대 챙기면서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져버리면 곤란합니다.
여기 가난한 선지 생도의 아내가 모처럼 돈이 생긴 것을 보았을 때 당장 자기하고 싶은 것부터 먼저 하려고 욕심이 생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남에게 빚진 것부터 먼저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책임 있는 성도가 지켜야 될 당연한 순서입니다.
(2) 가족을 부양(扶養)하는 일.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 하라”고 하였습니다. 남에게 빚진 것을 먼저 갚고 나서 그 다음은 아들들과 함께 가족의 생계를 돌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와 가치를 인식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동시에 그가 소속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수행하여야 됩니다. 그 중에도 가장 우선적인 것이 가족을 부양하거나 가정을 돌보는 일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간혹 자기 가정에서의 책임은 소홀히 하면서 밖으로만 열심히 뛰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실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사명 때문에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때가 있고 가족들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도 먼저 가족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도록 성의를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오히려 가정에서 반발을 사게되고 가족들이 걸림돌이 되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몰리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5:8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가지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는 동안 목적 의식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직업이나 환경이 어떻든 간에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마 6:33).
여기 선지 생도의 아내나 그 아들들은 하나님께 부름 받고 헌신하다가 생애를 마친 사람의 가족들입니다. 우선은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특수한 신분과 긍지를 가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거기 맞는 생활을 하여야 되기 때문에 어떤 거리낌이 없도록 자기관리를 하여야 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채를 못 갚는 것이나 가족의 생계를 돌보지 못하면서도 그냥 체념하고 넘어 갈 일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삶에 거리낌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사명을 위하여 헌신하고 나선다면 더욱 거리끼는 것과 얽매이는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야 됩니다(히 12:1)
. 바울은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한다”고 하였습니다(고후 6:3).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명을 인식하고 성실히 자기 본분을 다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놓으십니다(롬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