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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松 건강칼럼 (394)... 朝鮮 임금들의 健康
박명윤(보건학박사,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조선시대 임금(王) 이야기
필자는 지난 2000년부터 15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문학(人文學) 강좌를 아내와 함께 수강하고 있다. 금년에는 명지대학교 史學科 교수 韓明基 박사(문학)의 조선시대 왕들의 이야기를 다룬 ‘한국사(韓國史)’ 강의를 들었다. 지난 3월 7일 개강하여 12월 5일 종강 시까지 총 16강좌(32시간)를 경청했다. 내년에는 전북대학교 철학과 陳晟秀 교수의 ‘동양의 사상가(思想家)에게 배우는 리더십’을 수강할 예정이다.
조선(朝鮮)은 이성계(李成桂)가 고려(高麗)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나라이며, 1392년 즉위한 태조(太祖) 이성계에서 1910년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太祖-定宗-太宗-世宗-文宗-端宗-世祖-睿宗-成宗-燕山君-中宗-仁宗-明宗-宣祖-光海君-仁祖-孝宗-顯宗-肅宗-景宗-英祖-正祖-純祖-憲宗-哲宗-高宗-純宗)이 승계하면서 518년간 지속되었다.
한국사 강좌는 조선 왕(王), 중국의 황제(皇帝), 일본의 천황(天皇)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조선 국왕의 일상과 사생활, 조선의 궁궐(宮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후 조선 국왕 각론으로 들어갔다.
조선 국왕은 27명 중 제1대 태조(太祖ㆍ1392-1398) 이성계(李成桂)를 시작으로 제3대 태종(太宗ㆍ1400-1418) 이방원(李芳遠), 제4대 세종(世宗ㆍ1418-1450) 이도(李祹), 제7대 세조(世祖ㆍ1455-1468) 이유(李揉), 제9대 성종(成宗ㆍ1469-1494) 이혈(李娎), 제14대 선조(宣祖ㆍ1567-1608) 이연(李昖), 제15대 광해군(光海君ㆍ1608-1623) 이혼(李琿), 제16대 인조(仁祖ㆍ1623-1649) 이종(李倧), 제19대 숙종(肅宗ㆍ1674-1720) 이순(李諄)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우리나라 국보(國寶) 제151호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은 1997년 유네스코(UNESCO) 등재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정치, 외교, 사회, 경제, 학술, 종교, 천문, 지리, 음악 등 조선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방대한 역사서이다. 또한 중국, 일본, 몽골 등 주변 국가들의 이야기도 다수 기록되어 있어 동아시아 역사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 왕들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역사서이며, 조선을 세운 태조 임금부터 제25대 철종 임금까지 472년(1392-1863) 동안 일어난 일을 소상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역사를 연구하려면 가장 기본적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제25대 철종(哲宗ㆍ1849-1863))이후에도 제26대 고종(高宗ㆍ1863-1907)과 제27대 순종(純宗ㆍ1907-1910) 임금이 나라를 다스렸지만, 태조부터 철종까지만 조선왕조실록 안에 포함시킨 이유는 고종과 순종 실록은 조선이 멸망한 이후인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ㆍ1910-1945) 때 만들어져서 사실 왜곡이 심하고 실록으로서의 가치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실록을 편찬하면 모두 4부를 인쇄하여 4대 사고(史庫)에 보관했다. 사고는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에 있었다. 선조 25년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주(全州) 사고만 남고 세 곳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주 사고본을 이용하여 다시 4부씩 인쇄하여 산속 깊숙이 사고를 만들어 전쟁이나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막으려 했다. 이에 5대사고(五大史庫)는 춘추관,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 적상산 사고를 말한다.
춘추관(春秋館) 사고본은 17세기 전반에 화재를 당해 소실되었다.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가져가서 동경제국대학에 보관하였으나,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불에 타 버려 일부만 남아 있다. 적상산 사고본은 6ㆍ25전쟁 때 북한으로 넘어가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다. 태백산 사고본은 현재 국가기록원 부산지원에 보관되어 있고, 정족산 사고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역대 27명의 임금 중 질병 없이 건강했던 왕은 한 명도 없었으며, 평균수명은 46세로 짧은 편이다. 문종(39세), 성종(38세), 연산군(31세), 효종(41세), 현종(34세), 순조(45세) 등 대부분 국왕이 30-40대에 사망했다. 한편 환갑을 넘긴 왕은 태조(74세), 정종(63세), 광해군(67세), 영조(82세), 고종(68세) 등 5명뿐이다.
한편 노익장(老益壯) 관료는 적지 않아 아흔까지 정승(政丞)을 한 인물도 있다. 75세에 정승이 된 심수경(沈守慶ㆍ1516-1599)은 75세 때 아들을 낳은 데 이어 81세 때 또 득남했다. 황희(黃喜ㆍ1363-1452)는 69세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20년간 현직에 머물렀다. 그밖에 허목(84세), 송순(92세), 원혼(93세) 등이 있으며, 최장수 인물은 안동 출신으로 118세까지 산 이약(李鑰ㆍ1572-1689)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하루 다섯 번 수라상(水刺床ㆍ임금에게 올리는 진짓상)을 받았다. 오전 10시 아침 수라와 오후 5시 저녁 수라는 전국에서 진상된 각종 산해진미(山海珍味)로 채워졌다. 그러나 아침 수라 이전의 초조반상, 점심의 낮것상, 밤의 야참은 간단하게 요기를 하는 정도였다. 오전 10시는 체내의 양기(陽氣)가 가장 충만하게 펼쳐져 있는 시간이며, 오후 5시는 하루의 기(氣)가 갈무리되기 직전의 시간이다. 따라서 이때 음식을 섭취하면 음식물의 분해, 흡수, 저장이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왕들의 수명이 짧았던 원인으로 산해진미로 가득한 고(高)칼로리 음식물 과다섭취, 운동 부족,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등을 꼽을 수 있다. 54세까지 산 제4대 임금 세종(世宗)은 밥상에 육류(肉類) 없이는 식사를 못할 정도로 육식을 즐겼으며, 사냥 등 운동을 싫어해 체구(體軀)가 뚱뚱했다. 또한 새벽 5시부터 밤늦게까지 업무에 몰두했다. 35세 이후 소갈(消渴)이 심해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은 당뇨병 합병증으로 안질(망막병증)을 앓았고, 두통과 이질, 부종, 수전증 등 잔병이 많았다. 이에 세종은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가장 오래 장수(長壽)한 왕은 제21대 임금 영조(英祖)로 82세(1694-1776, 在位 52년)까지 살았다. 영조의 장수 비결은 무수리 출신 어머니와 함께 사가(私家)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식사도 소박한 식단으로 소식(小食)을 즐겼으며, 즉위 이후에도 침실에 몸을 편하게 하는 물건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영조는 72세 때 1년에 20여근의 인삼(人蔘)을 먹었고, 73세 때 검은 머리가 다시 났다고 한다.
조선 왕들의 사망원인은 태조, 정종, 태종은 중풍(뇌졸중), 세종과 숙종은 소갈(당뇨병), 중종은 소화기계 감염, 선조와 영조는 폐질환, 문종, 성종, 효종, 정조, 순조는 종기(폐혈증), 연산군, 현종, 경종은 전염병, 세조와 인조는 만성질환, 인종과 명종은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1457년(세조 3년)에 죽었다.
조선에서 처음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된 것은 제9대 성종(成宗ㆍ1469-1494) 때이다. 1469년 11월 28일, 제8대 임금 예종(睿宗ㆍ1468-1469)이 죽자 신하들은 세조(世祖)의 비(妃)인 정희왕후(貞熹王后)에게 후계자를 정해 달라고 청한다. 예종에게는 제안대군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겨우 4세였다. 이에 예종의 형인 의경세자의 두 아들 중 자을산군을 택했으며, 이가 바로 성종이다. 신하들은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부탁했으며, 정희왕후는 8년 간 수렴청정을 마치고 권력을 손자에게 넘겨주었다.
사화(士禍)란 사림(士林)이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성종(成宗) 때 사림들이 대거 중앙정치에 진출하여 삼사(三司)를 중심으로 대간(臺諫)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상황이 달라진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는 보통 왕들과 다르지 않았으나, 왕권 강화를 위해 대간들과 사사건건 충돌하게 된다. 1498년(연산군 4년)에 발생한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는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에서 비롯됐다.
무오사화가 끝난 뒤 5년 동안 연산군은 별 문제없이 정치를 했다. 이러던 와중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난다.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성종 때 질투가 심해 중전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은데 관련된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낸다. 두 차례의 사화가 벌어진 뒤에 연산군은 전국의 미인을 모아 궁에서 잔치를 열고,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백성들의 집을 헐어 버리는 등 온갖 폭정(暴政)을 벌인다.
주색(酒色)에 빠진 제10대 연산군(燕山君ㆍ1494-1506)에게 의원(醫員)들은 음욕(淫慾)을 채우려는 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양기(陽氣)를 돕는 풀벌레와 뱀을 진상했다는 기록도 있다. 연산군은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운 증세가 나타나는 번열증(煩熱症)까지 있었다. 왕을 비판하는 기능을 하는 사간원과 홍문관도 없애 버린다. 결국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훈구 세력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을 내쫓고 중종(中宗)을 왕위에 올렸다.
황진이(黃眞伊)는 제11대 중종(中宗ㆍ1506-1544) 때의 송도 기생(妓生)으로 미모와 가창력, 서사(書史)에도 정통했고, 시가(詩歌)에도 능했다. 황진이는 당시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破戒)시켰다.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했으나 실패하여, 뒤에 사제(師弟)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에 박연폭포(朴淵瀑布)ㆍ서경덕ㆍ황진이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부른다.
제12대 임금 인종(仁宗ㆍ1544-1545)의 친모(親母)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産後病)으로 7일 만에 사망하였다. 이에 인종은 자신을 길러준 계모(繼母)인 문정왕후(文定王后)에게 효도를 다하기 위해 극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은 아버지 중종(中宗)의 상중(喪中)에 너무 슬퍼한 탓으로 왕위(王位)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사망했으며, 문정왕후 아들이 제13대 임금 명종(明宗)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제14대 선조(宣祖)는 양쪽 귀가 들리지 않고 심병(心病)이 깊어졌다고 한다. 제15대 광해군(光海君)은 화병(火病)이 있어 스스로 “마음의 병이 있어 말이 이치에 어긋나고 정신이 어두워져 죽음과 이웃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제19대 숙종(肅宗ㆍ1674-1720)은 “노심초사(勞心焦思)하여 수염이 하얗게 세고 느긋하지 못한 성격으로 닥친 사무를 버려두지 못하며, 식사도 때를 어겨 노췌하고 현기증(眩氣症)이 있다” 말했다고 한다. 즉, 일 중독증(워크홀릭) 증세를 보였다. 숙종은 대동법(大同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농업 생산력 증대와 청나라ㆍ일본 사이의 중개무역이 성행했다. 활발한 상업 활동과 맞물려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통용하여 화폐 경제를 정착시키고 사회 인프라 구축으로 조선 후기 시장경제 활성화를 가져왔다. 숙종 때 쌓인 부(富)를 바탕으로 화려한 제21대 영조(英祖ㆍ1724-1776), 제22대 정조(正祖ㆍ1776-1800) 시대가 가능했다.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 사이에는 후사(後嗣)가 없었다.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아들인 제20대 경종(景宗ㆍ1720-1724)은 어릴 때부터 쇠약했으며, 성기능 장애로 생식능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숙빈(淑嬪) 최씨(崔氏)의 아들이 제21대 영조(英祖)이다. 22세에 후궁으로 들어간 장희빈(張禧嬪)은 역관(譯官)이었던 아버지로부터 개화된 사상을 배워 시장원리에 밝은 여인이었다고 한다. 이에 숙종의 경제적 조력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장희빈의 악녀(惡女) 이미지는 서인(西人)들이 나중에 꾸며낸 이야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조선의 도덕 교과서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세종 때 만들어졌으며 효자, 열녀, 충신에 대한 이야기가 각각 110편식 총 330편이 실려 있다. 세종이 ‘삼강행실도’라는 책을 만든 이유는 1428년(세종 10년), 김화라는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유교를 근본으로 삼은 조선에 충격을 던진 사건이었다. 이에 세종은 유교의 가르침이 아직 뿌리내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 책을 편찬, 보급하여 백성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 시대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었던 법전(法典)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173권 1484년(성종 15년) 12월 4일에 예조에 명령하기를,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 나는 것을 바로잡아 새로 만든 경국대전을 을사년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여 시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성균관(成均館)이나 향교(鄕校)가 나라에서 세운 공립 교육기관이었다면, 서원(書院)은 나라에서 별로 간섭하지 않는 사립학교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며, 당시 제사를 드리는 기능이 더 중요했다. 1548년에 유학자 이황(李滉)이 풍기 군수가 되어 교육기능을 강조했으며, 서원에 입학한 학생들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소학, 가례 등을 배웠다.
이씨조선 시대 신하들은 임금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잘못된 점을 계속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관리를 대간(臺諫)이라 불렀다. 대간들이 하는 일을 간쟁(諫諍)이라고 하며, 왕을 직접 만나서 하는 것보다는 주로 글로 지어 올리는 상소(上訴)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대간은 여론인 공론(公論)을 바탕으로 왕의 잘못을 지적했다. 홍문관(弘文館)은 원래 학술 기관이었지만 조선 중기 이후로 언론 기능도 담당하게 되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쳐 삼사(三司)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5년 임기를 마치고 국민의 칭송(稱頌)을 받으면서 청와대(靑瓦臺)를 떠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직언(直言)을 할 수 있는 현대판 대간(臺諫)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희망한다.
글/ 靑松 朴明潤(서울대학교 保健學博士會 고문, 대한보건협회 자문위원)
<청송건강칼럼(394). 2014.12.15. www.nandal.net www.ptc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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