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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0편 14절-15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1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은혜가 크면 고마운 마음도 크고 서원하는 마음도 크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아는 자라면 이런 마음이 나오기 미련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라고 했는데, 무슨 서원일까? 여호와 하나님께 향한 서원이 있는데, 무슨 서원이냐? ‘성수주일 잘 하겠습니다. 십일조 도둑질 안 하겠습니다. 전도 잘 하겠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보겠습니다. 새벽기도에 잘 나오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된 서원일까?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감사의 표현이 어떤 사람은 ‘나의 몸과 마음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의 전 재산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나의 사업을 다 바치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분석하고 분별하고 생각할 것은 자기는 진정으로 ’나의 전 재산을 바치겠습니다. 나의 목숨을 다 바치겠습니다. 나의 직장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서원을 할지라도 자기가 바로 알지를 못해서 거짓운동, 하나님께서 싫어하고 미워하는 쪽으로 자기의 것을 투자한다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서 한다는 그것이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바른 갚음의 서원이 되겠느냐?
내 쪽에서는 진심으로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문제는 자기가 어느 단체, 어디에 붙어서 그 일을 했느냐가 큰 문제다. 지금 교회를 보면 자기 기준의 신앙에 맞춰서 아무 교회나 가서 투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기가 세상 쪽으로 나가는 교회에서 투자를 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갚음이 되는 게 아니라 세상에 다 투자가 되고 만다. 사망운동에 투자가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목사님의 설교를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 목사님의 설교가 세상 쪽으로 흐르는 건지, 진리이치를 바로 가르쳐줘서 생각을 트이게 하고 영리하게 만드는 건지 분석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서원에 대해 오늘날 교인들을 보면 대부분 물질적 서원으로 말을 한다. 우리는 물질적 서원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 앞에 헌금을 얼마를 하기로 서원을 할지라도 사람이 살다보면 돈이 들어왔다 나가기도 하고, 가난하게 되었다 부자가 되기도 하고, 사업이 잘 되다가 까먹기도 하기 때문에 서원한 기간에 서원한 대로 헌금을 할 수 없게 되면 서원을 한 사람은 마음 속에서 근심 걱정이 생긴다. 이럴 때는 은행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서원한 대로 헌금을 해야 하느냐? 서원은 그런 게 아니다.
성경에 있는 서원을 물질적인 것에만 붙여서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더 좋은 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최고의 서원을 해야지 물질서원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무조건 받으시겠느냐? 생각을 해 봐라. 내가 지금은 돈이 없지만 살아생전에 하나님께 얼마를 헌금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이건 하나님과 자기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굳이 목사님에게 언제까지 얼마를 헌금하겠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사람들 앞에서 헌금을 하겠다고 서원을 했는데 아닌 말로 하는 사업이 잘 풀려서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갚으라는 뜻인가 보다’ 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와는 반대로 하던 사업이 잘 안 된다면 이건 서원한 것을 지키지 말라는 뜻이냐? 그러니까 이런 물질적인 면의 서원을 강조하고, ‘그걸 갚아라. 왜 갚느냐?’ 이럴 필요가 없는 거다. 성경은 다른 뜻으로 말씀을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안 것은 이렇게도 돌리고 저렇게도 돌리신다. 내가 물질적인 것을 서원한다고 해서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런 물질적인 것에 집착해서 서원을 하게 되면 스스로 고통에 빠지고 시험에 들게 된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으려고 할 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 물질로써 갚음이 되는 거냐? 자기가 구원 얻은 것이 돈으로 환산이 되느냐? 진리 깨달음이 돈으로 환산이 되느냐? 안 된다. 돈으로 환산이 될 수 없는 것이 믿음의 세계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다. 그러면 헌물이나 헌금은 왜 드리는 거냐? 받은 은혜가 감사해서 감사의 표시로써 자기 분수대로 드리는 거다.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한 서원이 무엇일까? 지극히 높으신 자가 무엇을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 하시겠느냐? 반대로 무엇을 제일 슬퍼하고 고통스러워 하시겠느냐? 주님의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는 서원이 무엇일까? 지극히 높으신 분에게도 기쁘고, 인간 나에게도 기쁜 게 최고로 좋은 서원이다. 그것은 나의 인격과 성품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온전을 닮아서 내가 하나님의 의사단일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거다. 이렇게 되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말씀에 순종하면서 이런 사람으로 말들어지는 게 서원의 갚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거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거다.
이 은혜 갚는 것을 무시하고 종교적 영웅성으로 사명의식의 바람을 불어넣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크다. 종교 사업주의로 나가게 하고,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는 일을 하는 자들이 목사님들의 세계에 많고, 자기는 사명자라고 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다’ 하며 나가는 자들에게 많이 있다. 그런데 본인은 그걸 모른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장이 제 멋대로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을 안 듣는다. 그러면서 세상 것으로 말을 하고, 세상 쪽으로 인도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따라간다. 결국은 육적 종교적 정치적 이스라엘 말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팔려가고, 나라도 빼앗기고, 노예가 되고, 죽는 심판을 받았다. 지금은 어떠냐? 지금도 똑같다. 다른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는 사람이 꽉꽉 찬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서원을 모르면 마귀 짓을 하게 되고 패역을 부리게 되는데, 자기가 이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명자라. 충성봉사자라고 자칭하며 떠들게 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식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적중한 교훈을 해야지 세상기준을 놓고 ‘죄인이다. 나쁜 놈들이다. 악한 놈들이다’ 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지 세상 법이나 세상 도덕적 기준을 가지고 와서 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교회에서 세상의 재판관을 불러다가 교회를 재판해달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 이치가 벌써 틀렸다.
서원을 할 때 시간적으로 사건 환경적으로 자꾸 바뀌어 돌아가는 물질적인 것을 놓고 하면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의 온전을 닮고 싶습니다. 내가 이를 위해 노력을 하겠습니다. 힘을 쓰겠습니다. 그러니 이 서원이 하나님 앞에 갚아질 수 있게 나를 깨닫게 해 주옵소서. 가르쳐 주옵소서’ 이거 얼마나 좋으냐? 이런 기도는 금대접에 담겨지는 기도다.
우리교회에서는 돈 강조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것을 가르친다. 성경에 감사헌금이나 십일조는 의무적이지만 다른 헌금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드리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내 앞에 올 적마다 빈 손 들고 오지 말라’고도 했다. 이게 무슨 뜻일까? 교회에 올 때는 성경책과 찬송가라도 들고 오라는 말이냐?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이미 은혜를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있을 수 있고, 또는 은혜를 받기 위한 뜻에서 감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없어서 못하고, 하기 싫어서 못하고, 또 있을 때는 하기 싫고, 없을 때는 하고 싶고.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사람이 이렇게 돌아가게 되면 인색해진다. 사람이 인색하면 짜지고 구두쇠가 되고 마음이 오그라져 있기 때문에 사람을 못 사귄다. 그리고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 가지가 차단이 돼버린다. 물질은 누구를 위해 쓰는 거냐? 뭘 위해서 쓰는 거냐? 물질은 자타의 이룰구원을 위해 쓰여지는 거다. 돈을 사람을 위해 쓸 줄 알아야 한다.
돈을 빌려줄 때 그 돈을 돌려받고 싶으면 각서를 쓰든지 문서화 하라. 그러나 그렇지 않거든 그냥 줘버려라. 그리고 받은 자는 마음 속으로 ‘갚아야지’ 하는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자까지는 못 주더라도 원금은 꼭 갚아야지’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믿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줬으면 받을 생각을 말고 잊어버려라. 줬으면 잊어버려라. 그러나 받은 사람은 그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한다. 우리가 돈에 인색하면 안 된다. 사람이 돈에 인색하면 육의 사람이고, 이 사람의 마음은 쭈그러져 버린다.
15절: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 날에 뭐라고 부르느냐?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러니까 뭐라고 부른 거냐? 건져달라고 부른 거다. 그리고 건져주면 어떻게 하리로다?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난에는 ‘일반환난과 특수환난’이 있다. 일반환난은 전쟁이요 기근과 흉년이요 온역과 염병과 지진이요 홍수요 태풍 등등이 있다. 이런 환난은 누구든지 다 안다. 그리고 특수환난이 있는데, 이 특수환난은 예수 믿는 사람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되는 거다. 이 특수환난은 진리가 환난을 받는 것인데, 다시 말하면 진리를 가진 성도가 진리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말한다. 한두 사람이 받는 게 아니라 온 교회가 받는다. 이 진리환난은 예수님의 고난과 같은 거다.
그러면 진리환난이 어떤 거냐? 교회 안의 거짓과 이단이 사교와 이방세상과 연합을 하여 권세를 부리기 시작을 하면, 즉 거짓된 육의 교회들이 세상과 단짝이 되어서 진리인 것처럼 행세를 하며 진리신앙의 노선을 걷는 자들은 알게 모르게 압박과 핍박을 주는데 이게 진리환난이다. 말하자면 교회에서 거짓 것이 활동을 막 하게 되면 교인들이 다 그 쪽으로 흡수가 되고 진리성도들은 숫자적으로 적기 때문에 위축이 돼버린다. 이렇게 되면 거짓 것들에게 흡수가 된 교인들은 진리성도를 절대로 좋게 보지 않고 거짓 것들과 합세해서 핍박을 주게 된다. 이렇게 되니 진리성도들은 알게 모르게 압박을 당하게 되는 거다.
거짓된 교인들이 많아지면 진리성도는 전도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거짓된 교인들은 옳은 진리성도들을 자꾸 흉을 보고 잡아 뜯는다. 이런 정신들이 진리성도 주위에서 옳은 신앙정신을 죽이려고 서서히 자기를 조여 올 때 이것을 알면서 당하는 게 있고, 핍박임을 느끼지 못하면서 당하는 것도 있다.
이런 현상의 한 예를 들면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은 교회에는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든다. 돈이 많은 교회에서 여름방학이 되면 주일학생들까지 외국에 보내주고 하면 그곳으로 다 가버린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성경대로 바로 가르치는 교회에서 주일학생들이 도망을 가버리는 현상이 생기게 된다. 우리교회는 찬양대도 없고, 눈요기할만한 프로그램도 없고, 각자 점심을 싸와서 먹게 하고, 설교나 짧나? 기본이 한 시간이고. 그러니 무슨 재미가 있느냐? 그래서 속에서 조바심이 나는 사람은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은 다른 교회로 가버리는 거다.
우리는 일반환난도 특수환난도 구별하고 분별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도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큰 일 나겠구나’ 이걸 빨리 직감해야 한다. 교회들이 온통 롯처럼 세상 저축주의로 나가고 있다면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무엇을 직감해야 하느냐? ‘앞으로 세상이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유황불 바다가 될 터이니 열심히 모여서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면서 마음으로부터 롯의 마음을 버려야 되겠구나’ 라고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가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이 발견이 되면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며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
일반환난과 특수환난을 아는 우리는 자기가 어느 환난을 더 크게 느끼느냐? 이게 문제다. 더 크게 느끼는 쪽으로 기도가 되는 거다. 어느 것을 더 크게 느끼느냐에 따라 기도가 달라진다 그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느 기도에 자기를 건져주시겠느냐? 어느 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 자기를 건져주셔서 자기를 영화롭게 만들어 주시겠느냐? 어느 기도를 해야 이렇게 되겠느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어떤 환난 날? 특수환난 날. 그러면 일반환난 날에는 하나님을 부르지 말라는 뜻이냐? 우리가 가정적으로도 직장적으로도 일반환난이 있을 수 있다. 이 때 뭐라고 기도해야 하느냐? 자기의 마음의 소원성이 물질에 빠지지 않도록 이 어려움을 말씀으로 믿음으로 잘 이길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를 하라. 그리고 특수환난 때는 뭐라고 기도를 할까? 특수환난은 진리환난인데, 비진리적인 요소가 진리를 가지고 있는 자기를 넘어뜨리려고 정신 사상적으로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자기를 헐뜯고 조여 올 때 뭐라고 기도할 거냐? ‘잡은 진리를 놓치지 않고 거짓된 모든 사상을 다 분별해서 이길 수 있도록 나를 깨닫게 해 주옵소서. 버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가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건 환경을 통해서 성도에게 환난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로 알지 못해서 죄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의 정신으로 살고 있는 나를 깨닫게 해 주려고. 안 믿는 정신으로 들어가 있으면 이 사람은 죄 가운데 있는 거다.
지금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죄 가운데 있느냐, 선 가운데 있느냐? 생명 가운데 있느냐, 죄 가운데 있느냐? 다 사망 아래서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 예수 믿는 자기가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죄 가운데 있는 거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환난의 자극을 줘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거다.
두 번째는 잘못 들어선 자기의 신앙노선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비진리적, 세상적, 육적 인본주의의 교회에 있을 때 환난의 고통을 주기도 하신다. 이 때 얼른 깨달아야 한다. 이런 환난의 고통이 올 때 대부분 보면 ‘내가 행동적으로 무슨 잘못을 했을까?’ 이것만 생각을 하는데, 자기가 몸담고 있는 교회의 가르침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세상을 가르쳐 주는 건지, 하나님의 온전에 대한 이치를 밝혀주는 건지?
세상을 가르치는 교회라면 먼저는 거기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진리신앙 노선을 걷는 교회로 들어가야 한다. 진리교훈을 받아야 지혜가 생기고, 영리해지고, 똑똑해지고, 사건 환경이 와도 자기를 다스려 나가게 되는 거지 세상적인 교훈을 받게 되면 어떤 사건을 만나면 맨날 세상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의 살 길을 자꾸 세상에서 뭘 어떻게 해서 찾아보려고 하며 세상에 눈길을 돌린다. 자기 속에서 지혜가 나와서 지혜를 써먹을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게 없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 교인들끼리 패가 나눠져서 싸움이 일어나면 먼저는 그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분석을 해야 한다. 교회에서 목사파, 장로파, 집사파로 나눠져서 싸운다면 누가 그렇게 가르친 거냐? 목사가 그렇게 한 거다. 목사가 교인들이 그렇게 싸울 수밖에 없도록 그 성질을 길러준 거다. 옳은 목사라면 교훈으로서 교인들 속에 들어있는 그런 뿔을 잘라버린다. 듣기 싫어서 도망을 갈지라도 고치라고 한다. 그런데 세상 교만의 뿔이 길게 자랐음에도 헌금도 많이 내고 교회에서 일도 많이 하는 교인이 있으면 자꾸 감싸고 직분도 주고 하니 이 교인은 그 속에서 뿔이 자꾸 더 돋는 거다. 그리고 그 뿔이 커지면 목사나 교인들을 막 받아넘기는 거다. 교만이라 그 말이다. 누가 이렇게 키웠느냐? 목사가 키웠다.
그리고 교회에서 싸운 후에 다른 교회로 간다고 해도 자기가 설교의 정신을 분석하지 못한다면 옮기려고 하는 그 교회에서도 세상의 눈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것이니 그곳에서도 역시 또 그 교인들과 싸울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아무리 여러 교회를 옮긴다고 할지라도 역시 목사님의 설교정신을 분석을 하지 못한 상태로는 계속해서 또 그런 일을 만나게 되는 거다. 그러니 얼마나 피해가 많은지 나중에는 아예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데까지 나가게 된다.
신앙정신에도 길이 있는 것이니 목사는 교인들이 이걸 잘 분석해서 깨닫도록 해야 한다. 교인들도 이걸 잘 깨달아야 한다. 자기가 어느 신앙노선에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안 그러면 자기가 죽는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기가 사는 곳에 가서 살아야지 왜 죽는 곳에 가서 살겠느냐?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나의 나태함을 깨우쳐 주려고. 나의 게으른 것을 깨우쳐 주려고 환난을 주기도 하신다. 환난이 오면 모든 면에서 어려워지기 때문에 사람이 이럴 때 하나님을 붙드는 게 있다.
네 번째는 바른 신앙자를 높이 드러내 주려고. 엉터리 신앙자는 작은 환난에도 고꾸라지고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옳은 신앙자는 환난을 당해도 오로지 하나님만을 굳게 붙잡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통해서 이 옳은 신앙자를 높이 들어서 올려주기도 하신다.
자기가 환난을 당할 때 이 환난을 통해 잘못된 자기를 바로 세우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를 할 때는, 첫째는 먼저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두 번째는 진리의 바른 신앙노선을 찾아야 한다. 세 번째는 바른 신앙노선을 찾았느냐? 그렇다면 나의 정신과 사상을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에 맞춰야 한다. 자기가 바른 신앙노선이 아닌 곳에 있으면서, 말하자면 넓은 길, 사망 길의 신앙노선으로 가면서 목숨을 걸고 충성봉사하면 할수록 이는 사망성공이다. 심판이 크다 이 말이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신앙노선을 잘 알아야 한다. 우리교회의 신앙노선이 어떤 거냐? 본인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목사인 나의 신앙노선이 뭐냐? 이걸 모르면 안 된다. 내세복음주의다. 말로만이 아니라 정신과 사상이 내세복음주의로 되어야 한다. 내가 말로는 내세복음주의라고 하면서 교훈을 하면서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는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 된다’ 라고 가르친다면 나는 무슨 노선을 걷고 있는 거냐?
여기서 나에게 교훈을 듣다가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을 텐데, 그럴 때 내 설교가 그곳의 설교와 뭔가 다른 게 느껴지느냐, 아니면 이거나 저거나 똑같으냐? 듣는 귀가 명확하면 소리분석이 빠르다. 듣는 감각성이 둔감하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