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하버드> 9화. 미국의 교육 제도 + <법정> 29화. 일에서 이치를
<하버드> 9화. 미국의 교육 제도
며칠이 지났다. 언니가 시카고에서 서머스쿨(summer school)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 때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빠른 시일 내에 언니와 내가 학교에 등록하는 일이었다. 개학이 몇 주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민을 오게 된 오직 하나의 이유가 언니와 나의 교육이었던 만큼 아버지는 아파트를 얻을 때도 이 점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아파트는 근처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까지 걸어서 약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미국의 중· 고등 학교 교육 제도가 한국과 가장 다른 점 중의 하나는 소위 능력분별 제도(tracking)를 따른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시험 성적과 교사의 판단에 따라서 능력에 적합한 레벨(level)의 학급에 배정된다. 특히 이민자가 많이 모여 있는 남가주(南可州 · Southern California)에는 영어 미숙자 과정인 ESL (English as Second Language)과 정규 과정(regular) 등 두 레벨로 나누어져 있다.
한층 더 나아가 ESL 과정은 보통 네댓 개의 레벨로 세분되어 있고 정규 과정도 서너 개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정규 과정에서 가장 높은 레벨은 거의가 영재 교육 그룹에 들어 있는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재 교육 프로그램인 GATE(Gifted and Talented Education)에 들어가려면 1,2년마다 실시되고 있는 CTBS (Comprehensive Test of Basic Skills)라는 시험을 봐서 전체 학생 중 상위 5퍼센트 정도에 속해야 한다. 퍼센티지는 각 주마다 조금씩 다르다.
서부에 있는 주들은 보통 5내지 15퍼센트 사이를 구분선으로 정하고 있는 반면, 중부나 동부 쪽 주들은 5퍼센트 이하나 심지어 1 퍼센트 정도의 엄한 구분선을 정하고 있다.
영재 교육이라 해서 어떤 특별한 교육 과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난이도가 약간 더 높다는 것과 지도 교사의 조언을 좀더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과 비교해 보면 어쩌면 미국의 이런 영재 교육 과정이 보통 중학교 과정 수준밖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 짐작된다.
그만큼 미국 중학교의 정규 교육 과정이 학생 능력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지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엔 난이도가 낮고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 한국 중학 교육을 조금이나마 받고 간 나의 생각이다. 이 의견은 서부의 공립 학교만 쭉 다녀온 나의 판단일 따름이다. 동부 쪽에서 교육받고 하버드에 들어온 많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곳의 몇몇 사립 학교나 이름 있는 공립 학교들은 한국 못지 않게 수준 높은 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다.
내가 체험한 중학교 영재 교육과 정규 교육 과정의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GATE 과정이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당당한 태도와 자신감에서 차이가 난다. 영재 교육 프로그램인 GATE 과정에 들어 있는 학생은, 자신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영재’라는 생각과 함께 우월감에 물들어 매사에 ‘난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는 한편, 그렇지 않은 학생은 나는 그저 ‘보통’일 뿐이라는 생각에 잠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능력의 한계점을 정하는 것이다.
이런 ‘영익영(英益英) 둔익둔(鈍益鈍)’ 경향이, 가장 낮은 정규 과정에 배정된 학생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뻔한 사실이다.
학생의 학문적인 성공은 대다수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는냐에 달려 있고 또 그 노력의 양은 학생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과 한계를 얼마나 크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된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이 제도에는 커다란 심리적인 문제가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런 제도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능력을 가진 학생끼리 모여, 보다 효율적으로 최고의 교육 효과를 낳자는 의미에서 보면 크게 잘못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점이다.
과연 하나의 규격화된 시험으로 능력과 재능의 종류와 분야가 제각기 다른 어린 학생들을 일방적으로 영재, 보통아이, 또는 둔재로 단정지은 후, 거기에 맞다고 생각되는 수준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인가?
<법정> 29화. 일에서 이치를
두어 달 전에 출가 수도하겠다고 들어왔던 사람이 오늘 아침 하산(下山)을 했다. 그의 말인즉, 일이 고되서 견딜 수가 없으니 내려가야겠다는 것이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붙들지 말라 했으니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 생활이 솔바람소리나 들으면서 한가롭게 지내는 걸로 알았던 모양이다. 놀고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수도생활의 기본적인 태도인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대중들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시간에는 빠짐없이 일터에 나와 다같이 일을 하는 것이 승가(僧家)의 시퍼런 불문율이다. 하지만 나이 많은 노스님들이 일하는 것을 젊은 스님들은 딱하게 여긴다. 그만 들어가 쉬시라고 권해도 듣지 않는다. 어느 날 그런 노스님의 연장을 감추어버린다. 연장이 없으며 일터에 나올 수 없으니까. 노스님이 일터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젊은이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식사 때인 대중 공양(供養) 시간에도 노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그날은 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먹을 자격이 없어서였다는 것.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이것은 승가의 보편적인 생활윤리다.
승가에서는 특히 처음 출가한 행자(行者)들에게 궂은일을 많이 시킨다. 그들을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통해 인욕(忍辱)하고 정진하라는 뜻에서다. 누구나 겪은 바지만 몸에 배지 않은 일로 몇차례 코피를 쏟아야 한다. 자기 하나의 무게를 어쩌지 못해 뛰쳐나온 사람에게 공허하고 사변적인 이론이란 사실상 무력한 것이다. 견디기 어려운 일을 통해서 새로운 이치(眞理)를 터득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인간이 재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마솥을 한자리에서 아홉 번이나 갈아 건 행자가 있었다. 그는 솥을 걸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서투른 솜씨로나마 정성을 기울여 솥을 걸고 흙손으로 곱게 흙을 발랐다. 스승이 와서 보고 잘못 걸렸으니 뜯어서 다시 걸라고 한다. 잘못 걸린 것 같지 않은데 다시 걸라고 하니 그 뜻을 거역할 수 없어 무너뜨리고 다시 건다. 이번에는 솥이 기울어졌으니 반듯하게 걸라는 것이다. 그는 묵묵히 다시 솥을 건다.
이렇게 하기를 아홉 번이나 했다. 대개의 경우라면 두어 번 걸었다가 욕지거리라도 해주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솥을 거는 동안 울컥울컥 치미는 화를 안으로 삭이면서 인욕이 무엇인지를 몸소 배웠고, 그 일을 통해서 스승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동시에 터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뒷날 이 인연으로 구정 선사(九鼎禪師, 9번 솥을 건 스님)가 되어 묵묵히 솥을 걸던 그 의지력으로써 많은 감화를 끼친다.
출세간(出世間)에서 일상적인 행동을 떠나 수도가 따로 있을까. 경전을 연구하고 참선(參禪)을 하는 것도 결국은 모순과 갈등으로 얽히기 쉬운 우리들의 일상(日常)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라는 말은 이를 뒷받침한다.
일에 서툴거나 게으른 사람이 기도나 그밖의 수행을 올바르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일하는 것도 기도하는 것도 똑같은 그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다. 일에서 이치를 배우고, 이치를 일로써 나타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수행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