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을 들고 앉아 벽에 걸린 풍경화를 바라본다. 액자 속 풍경으로 들어간 나는 숲길을 걷고 있다. 숲길이 끝나는 언덕 위에 노란 유채밭이 펼쳐진다. 건너 바다는 하얀 포말이 연신 일고 시원한 해풍이 옷깃을 스친다.
차를 마시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찻물로 우려내 입안을 적시면, 자르르 흘러드는 따스함이 온몸을 녹인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이 사르르 잠을 부르기도 한다. 차를 마시는 풍경이 여유롭다.
차는 집안의 향기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은은하게 코에 스미는 감미로운 향기, 고요한 분위기에 들어가면 나른한 휴식에 젖는다.
나는 쑥차를 좋아한다. 쌉쌀한 쑥 냄새가 집안을 돌면 어릴 적 들길로 나가 쑥을 캐던 나의 모습을 작은 대바구니에 담는다.
봄이면 쑥차를 만든다. 잘 자란 쑥을 캐서 말끔히 씻어 소금물에 살짝 데쳐 그늘에 말려, 볶은 콩이나 율무를 섞어 함께 갈아 만든 쑥차를 우리 집에 오는 손님에게 내놓는다. 그럴 때마다 한 마디씩, 듣는 말이 있다. 도톰한 찻잔과 넉넉한 쑥 향기가 꼭 나를 닮았다고, 어쩌면 그 말의 유혹에 쑥차를 만드는 솜씨 또한, 늘어 가는지 모른다. 요즘엔 우유를 섞어 쑥차라떼를 만들어 나만의 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차에도 세대가 있다. 어릴 때 어머니는 겨울이면 대추를 고아 체에 걸러 만든, 걸쭉한 대추차를 사발에 가득 담아 몸살감기에 좋다며 할머니께 드리곤 했다. 여름이면 시원한 감주를 준비해 감나무 아래 평상에 둘러앉아 풀벌레 소리 들으며 가족과 즐겨 마셨다. 정다웠던 분위기가 아련히 피어오른다.
커피는 현세에 깔려 움직이는 춤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요즘 세대들은 커피를 좋아한다. 브라질이라는 먼 나라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진 커피의 풍미가 요즘 세대에 걸맞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찻잔 위에, 떠올라 처음부터 커피에 맛 들여진 세대들은 먼 나라를 동경하고 떠나고 싶은 유혹을 갖는지 모른다. 또한, 하나의 열매로 갖가지 다른 맛을 내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느끼는 감각도 음미도 제각기 달라 커피 속엔 언제나 동적인 맛이 흐른다.
유자차가 남풍을 가득 담았다면 녹차는 살결을 스민다. 남풍과 함께 실려 온 유자 찻잔 속에는 장다리 개나리 꽃잎이 실려 노란 빛깔 만큼 눈부시다. 분위기에 이끌려 ‘내 고향 남쪽 바다~ “아련한 옛 추억 한술 띄워 마신다.
녹차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알싸한 온기가 온몸에 돈다. 드넓은 평원에서 녹차 잎을 한 잎 두 잎 바구니에 따 담는 정갈한 티벳 여인의 모습도 비친다. 한 잔 두 잔 몸속으로 젖어 들면 어느덧 평원속의 여인이 된다.
찻잔은 품위를 지킨다. 서로 말을 많이 하며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주고받는 술잔이나 갈증 나면 마시는 물과는 격이 다르다. 안방에 자세를 갖추고 마주 앉으면 굳이 말이 없어도 찻잔 속에 잔잔한 교감이 흐른다. 마치 돛단배 하나 강나루 버들잎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운치에 든다.
봄이면 모든 식물이 차가 된다. 겨우내 움츠렸던 새싹들이 환호하며 손짓하고, 자신을 내주어 누군가에게 맛을 품위로 녹여내며 다가서는, 이 얼마나 우리 곁에 밀착된 사랑인가.
봄마다 쑥차를 넉넉하게 만들어 우리 집에 찾아오는 손님과 나눌 것이다. 누구나 설록차를 많이 찾지만, 쑥은 어디서나 잘 자라고 볼 수 있는 이웃의 맛이 있어 친숙하다.
질 좋은 질그릇의 도톰한 찻잔 속에 떠오를 내 모습과 품위를 가다듬으며, 햇볕 내리는 좁은 길을 따라 숲길을 돌아선다.
시원한 해풍과 고운 햇살, 연초록 잎들이 돌아가는 길을 숨죽여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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