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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라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심지어 그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 같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혼자 있는 시간에 무심코 텔레비젼의 채널을 돌려보았습니다. 이곳 저곳 돌려보다가 이럴수가 이럴수가 ... 갑자기 그의 시선이 꽂혀 버렸습니다.
그것은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게다가 더 흥분되는 것은 몰래카메라를 통하여 바로 녹화되고 있는 실시간 방송이었습니다. 그것도 멀지 않는 바로 가까운 곳의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자주 지나쳤던 우리 집 옆집의 옆집 맞아 바로 저 집이야!
“저 정도 미모이면 벌써 결혼을 했을지도 몰라...아니 누가 뭐래나 그냥 좀 얘기만이라도 좀 해 봤으면 좋겠어. 저렇게 매력적인 사람과 이야기를 한다는 것만도 얼마나 가슴 설레이는 일이야” 하면서 전화를 걸게 되었습니다.
누구의 이야기일까요?
다름 아닌 다윗 왕의 밧세바의 사건을 현대판으로 잠깐 바꾸어 본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채널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채널을 돌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의 정보가 우리의 귀를 통하여, 눈을 통하여 들어와서 우리의 생각이 되고, 그것이 우리안에 있는 좋은 생각들을 깨우기도 하고, 나쁜 욕망들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은 생각하는 데로 바뀌어집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생각, 마음을 만드는 재료가 오감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혀로 맛보고, (시,청,촉,미,후) 냄새를 맛는 것을 통하여 외부의 정보가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얼굴에 몇개의 구멍이 있을까요? 일곱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 3개의 구멍은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통로지만, 나머지 4개는 들어오기만 하는 통로입니다. 무엇이 나갈까요? 들어온 것이 나갑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이 그리 복잡한 생각들을 하면서 사는 것 같아도 아주 단순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가 하면 들어온 것을 생각하며, 그것은 몇개 연결시키며 조합시키며 해석하고 그렇게 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사이에 우리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하는 그것이 결국 우리의 운명이 됩니다.
한 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 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이 꼴지워지고, 마음이 메이게 됩니다.
1) 무엇을 담느냐에 우리 운명이 결정됩니다.
보고 듣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결정합니다. 우리의 사상을 결정합니다.
꽃을 담으면 꽃단지 꿀을 담으면 꿀단지, 꿈을 담으면 우리는 꿈단지가 됩니다.
우리는 그릇입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집니다.
[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 2:20-21)
이 통로를 잘 지켜야 생각을 지킵니다. 운명을 지킵니다.
https://youtu.be/fqfkUHBFNy8?si=Q6ZDnKsY6fFJExB8
https://youtu.be/eNUpTV9BGac?si=PIxdPDu9FPkoYx6B
https://youtu.be/Y-8MkE1In04?si=DqFTfaXCR_GY2-Wu
https://youtu.be/EVF0O8P169M?si=deUyrnWSXthkt2zX
https://youtu.be/GAyVhObg6ZI?si=kmGufRvN3-rI-14-
https://youtu.be/8MzEn9VCggQ?si=7mb1-ZZQeklQi3X-
https://youtu.be/NaNQ_hFJzVE?si=DUwlG1bWxt3uMX92
* 아이들은 어른보다 외국어를 휠씬 빨리 배웁니다. 아마도 10배는 빠른 것 같습니다. 아니 영어 뿐만이 아닙니다.
* 한 사람의 가치관이 무엇으로 형성되며, 결정될까요?: 먼저 듣는 것으로 사상이 이루어집니다. 그 만들어진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판단합니다. * 사단의 제안: 먼저 나에게 시간을 주시오. 그러면 나중에 아무리 다른 것을 가르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모세의 생애는 보십시오. 품에 안고 기른 애굽의 교육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시간 - 그 어머니의 위대한 가르침이 애굽의 수많은 영광과 명예를 거절하고 하늘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3-25)
무엇을 먼저 듣고 보느냐! 이것이 당신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먼저 무엇을 먼저 듣고 보느냐! 이것이 당신의 가치관을, 사상을 결정합니다.
2) 마귀는 낚시의 법칙을 사용합니다.
죄의 채널은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멀리 우리를 끌고 갑니다.
자 다시 다윗의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다윗은 처음에는 이름만 알아볼 심산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름만이라도 한번 물어보지, 그게 뭐 죄가 되겠어..그렇게 시작했는데 죄는 그가 원하는 것보다 더 멀리 그를 끌고 갔습니다.
그래 뭐 몇푼 돈을 지불하고 나면 다 잘 끝나 버릴꺼야 라고 생각했던 그 죄의 값은 거기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그녀는 바로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가 아닙니까? 은밀한 관계를 청산하고 하나님앞에 바로 서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하는데 전화가 걸려온 것입니다.
그것은 임신을 했다는 기별이었습니다. 그 임신내용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의 남편을 죽음의 자리로 내몰게 됩니다. 그리고는 밧세바를 데리고와 자기의 아내로 삼습니다. 모든 것이 감쪽 같이 끝나버린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하십니다. 다윗은 회개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무서운 죄의 결과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자기의 아들이 죽고, 반역을 하고, 가족끼리 미워하고 죽이는 엄청난 재난까지 일어납니다. 다윗이 이런 결과를 거둘 줄 알았더라면 과연 그런 죄를 짓기를 선택했을까요? 천만의 만만의 말씀이겠지요.
그것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 하나쯤이야 라고 시작했던 선악과를 따먹는 죄악이 온 갖 죄악의 수문을 열어 온 인류를 고통과 사망가운데 있게 했습니다.
왜 그토록 신실한 믿음의 사람인 다윗이 넘어지고, 죄를 몰랐던 순결한 아담과 하와가 넘어졌을까요? 그 이유중의 하나는 마귀가 “낚시의 법칙”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낚시에도 법칙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낚시꾼은 물고기가 가장 좋아하는 미끼를 쓴다는 것이고, 둘째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을 섞어 놓는 것입니다. 가장 나쁜 것인 미늘은 눈치채지 못하게 감춘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낚시꾼인 사단은 영혼이 가장 좋아할 특별한 미끼를 사용합니다. 무엇이 저 사람의 약점일까? 무엇이 저 사람의 취미일까를 유심히 연구한 마귀는 그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사용합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미늘은 감춘다는 사실입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합니다. 그 미늘은 한번 물리면 뺄수 없도록 끝이 휘어져 있습니다.
물고기가 맛있어 보이는 지렁이를 무는 순간 온 몸이 하늘로 솟구칩니다. 역시 맛이 있구나 정말 황홀하구나 하는 순간 어느새 땅바닦에 내동댕이쳐집니다. 그리고는 억센 발이 그를 밟고 채다먹지도 못한 지렁이를 빼내고, 운명이 달라지게 됩니다.
* <사단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라는 책을 통하여 신상언씨는 오늘날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범죄를 교육하는 비디오, 영화, 대중가요들의 실상을 고발해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아무 양심의 가책없이도 죽이고, 강간하고 폭행한 많은 원인들이 영화 교육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물런 모든 영화를 다 매도할 필요는 없지만, 죄를 교육하는 수많은 비디오들을 단호히 근절시켜야 합니다.
1991년 5월 서울 신정경찰서에 칼로 강도 짓을 하다가 붙잡힌 두명의 고등학생이 수갑을 찬채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다시는 비디오를 보지 않을께요” 또 어떤 고등학생은 스타킹으로 복면을 하고 주부혼자 있는 집의 담을 넘어 들어가 칼로 위협하여 손발을 묶고 폭행하고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피해자의 속옷을 발기발기 찢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비디오를 본 것을 그대로 해 보고 싶었어요”라고 태연히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 대중매체에는 이슬비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처음부터 이 아이들이 잔혹한 폭력물이나 선정적인 애정비디오에 중독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재미로 이것 저것보다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슬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죄에는 서서히 서서히 물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속에, 드라마 속에 감춰진 불행의 씨앗들을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채널은 대부분 재미를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재미있는 채널들을 찾아서 리모콘을 누릅니다. 리모콘이 오래도록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는 좀더 재미있고, 좀더 농도짙은 쾌락들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은 서서히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또 그러한 것들이 이제는 자연스런 것처럼 되어져 버렸습니다. 의미보다 재미를 추구하다, 가치와 도덕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성경보는 것이 중요합니까? 텔레비젼 보는 것이 중요합니까? 라고 물으시면 당신은 무엇이라 말하시겠습니까? 성경읽는 것이 당연히 중요하지요. 그러면 당신은 어디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고 계십니까? 질문을 드린다면 그 질문에도 “당연히 성경이지요.” 입니까? 우리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들에 길들여집니다. 무엇과 함께, 누구와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시나요?
한 네티즌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제목을 패러디하여 “악마는 TV드라마를 쓴다”는 글을 적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의 많은 내용들은 행복하고 정상적인 가정이기보다 불륜과 삼각관계, 삶의 문제들을 다룹니다. 때로는 드라마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려고 애를쓰고, 또 방영되는 드라마는 그와 같은 욕망들을 부추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상은 깊은 명상이나 독서, 아름다운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보다 영화, 드라마 등 대중매체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는 그저 눈이 있으니 보고, 귀가 있으니 듣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내게 미칠 영향, 내 자녀들에게 미칠 영향을 분명히 생각하고 채널을 선택해야합니다.
온 세상은 채널로 가득차 있습니다.
텔레비젼만 채널로 되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것이 다 채널로 되어져 있습니다. 인터넷은 수백, 수천의 채널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단어를 넣고 검색을 하면 수많은 정보를 보여줍니다. 그림으로, 동영상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 걷는 세상, 다 채널입니다.
3) 하늘 채널에 주파수를 맞추고 사십시오.
온 세상은 채널입니다. 어둠의 눈을 가지면, 어둠을 보고, 하늘의 눈을 가지면 하늘을 봅니다.
* 한 영국의 과학자가 학생들에게 무신론을 가르치려고 칠판에다 이렇게 적었습니다. No where is God -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다. 그때 한 학생이 나가서 where의 w를 앞 단어 no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전혀 다른 의미의 말이 되었습니다. Now here is God -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 보면, 우리는 모든 것 속에서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더 좋은 것으로 덜 좋은 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눈을 열기만 하면, 하늘로 채널을 고정시키기만 하면, 온 천지만물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성품인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그가 만드신 만물을 보고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롬 1:20)
“ 신앙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본다.
장엄한 자연의 풍경에서나, 삶에 찌든 노동자의 모습에서나
언제나 주위의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본다.
폭풍우 속에서도,
참새의 노랫소리 속에서도,
아기의 웃음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너무나 다정하게 우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필체를 아는 이는
글씨만 보아도 사랑하는 이를 느끼며 사랑하듯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속에서
사랑하는 주님의 손길과 임재를 보는 것이다“
4) 행복을 위하여 우리는 눈과 귀에 보초를 세워야 합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 119:37)
“이제 막 차운전을 배운 왕초보가 자가용을 몰고 신나게 운전하며 나갔습니다. 붕....그런데 갑자기 앞에 전봇대가 보이는 것입니다. 길이 휘어져 있는 것입니다. 운전대를 돌려야 하는데 미처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어어어...하다가 그만 빵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배터진 붕어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붕-어- 빵말입니다.
피해야 할 때 피해야 합니다. 돌려야 할 때 운전대를 돌릴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어어어 하다가는 빵이 되고 맙니다. 흔히 우리는 “이러면 안 되는데..이렇게 살았다가는 큰 일나는데..어어어”하면서도 내 삶의 채널을 바꿀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빵입니다.
오늘 채널을 바꾸시지요. 가장 좋을 듣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면 우리의 삶은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좋은 것을 향하여 채널을 돌리세요. 그곳에는 언제나 풍요롭고 아름다운 하늘의 생명의 양식이 넘칩니다.
붕어빵이 되지 않으시려 거든 오늘 채널을 하늘로 돌리세요. 당신의 운명이 바뀌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