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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4.3사건, 그리고 6.25전쟁!
(기 발간된 책자 자료 요약과 인터넷 자료, 참전용사 증언, 탐사간 들은 지역주민 제보내용이니 오해없기를 바랍니다)
*내용이 방대하여 1.2로 구분하여 1은 1~6장까지, 7장부터는 2에 수록했음
제1장 격동의 해방전후 우리의 모습
제1절 해방직후의 어수선한 우리 사회
[1994년 4월 3일 제주 탑동광장에서 한국 현대사의 비극 중의 하나인 4.3항쟁 영령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이어서 4.3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4.3항쟁 진상규명회의 구성을 요구하였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발생한 4.3항쟁 또는 민중봉기라 불리는 4.3사건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제주민중들의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서 4.3항쟁은 이 무렵 다른 민중봉기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채 진상규명이 금기시되어 왔다.
해방 후 일반 국민듥은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할 독립정부를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통치는 일제식민지 시대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은 바로 비개혁적인 미군정에 분개한 노동자 및 농민대중들의 항거였다.
주1, 9월총파업: 해방이후 남한사회는 개혁이 지체되면서 경제상황이 갈수록 나빠졌다. 게다가 해외에 강제징용당했던 노동자들이 귀국하면서 실업자 수는 빠르게 늘어났다. 이 무렵 특히 심각한 것은 식량문제였는데, 악덕 상인들과 지주들은 살을 사재기하여 쌀값 폭등을 일으켰다. 이에 미군정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 봄 곡물수집령을 공포하고 농민이 지닌 쌀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런 상황에서 9월총파업이 일어났다. 9월총파업은 조선 공산당의 주도로 일어났으나, 미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민중이 가세하여 온 나라로 퍼져나갔다. 9월 24일 부산의 철도노동자 7천여명이 파업을 일으켰으며, 이는 곧 4만여 전국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발전했다. 남한지역에서 26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이 파업에 동참했다.
주2, 10월 폭동(항쟁): 10월 1일 경찰과 테러단의 탄압에 항의하고 쌀을 요구하던 대구시민들에게 경찰이 총을 난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경찰과 대구시민사이에 유혈충돌이 벌어졌다. 분노한 민중들의 저항은 빠르게 온 나라 안으로 번졌다. 10월 한달 사이에 남한 전역에서 쌀 공출 폐지, 토지개혁 실시, 극우테러 반대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항쟁에 참여한 사람은 2백만 명을 넘었으며, 1천 여 명의 노동자. 농민. 서민. 학생들이 죽임당하고 3만여 명이 체포되었다.
9월 총파업과 10월항쟁으로 터져나온 민중의 저항은 미군정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지만, 국내 혼란과 함께 조직적인 민중운동으로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다.] ~한권으로 보는 한국사 101장면에서 발췌~
위의 퍼온 글을 읽고 또 읽고하면 어딘지 모르게 20세기 말 세계의 공산화 과정에 튀어나오는 용어들이 판을 침을 알 수 있다. 민족. 민중, 노동자, 농민, 지주, 토지개혁 등의 용어와 사회의 개혁을 민중혁명으로 달성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다음은 무엇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이미 역사 진쟁에서 다수의 공산국가가 탄생했고 그들의 일당독재에 오히려 인민 또는 대중들은 억압과 핍박속에 억눌림속에서 거짓 세상을 살고 있음을 보편적인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다.
[민족주의와 단독정부의 헤게모니 싸움의 진실은?]
과연 해방 후 친일파 제거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것이 민족적인 것인지 한번쯤 묻고 가야 한다.
먼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소련이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내밀어 남북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이를 이용하여 남로당의 박헌영 등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여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 다시말해 공산국가를 만들려는 술책을 간파한 우익이 주도하여 유엔감시하에 치러진 합법적인 선거였다.
이것을 북한의 김일성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치 자신들이 민족주의자인 것처럼 위장하여 남한의 공산화를 위해 온갖 책동을 남발한 것이 앞에서 언급되는 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인 것이다. 여기에 핵심세력들이 검거되면서 정판사위조지폐사건 등에 연류된 남로당 총책 박헌영. 이승엽 등이 월북하여 김일성 하수인으로 전락하고, 남한 남로당은 해방구를 제주도로 선정(무장하고 한라산에 은거가 쉽고, 제주도에 해방과 동시 일제시대 징병시대 노동자로 대동아 전재에 끌려갔던 인원이 엄청 유입되면서 치안부재의 상황으로 김달삼.이덕구 등 조직책들이 활동하기에 좋았다.)하여 무장하고 세력을 확장한다.
[5.10선거를 방해하려는 이유는 북한의 무장을 통한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한 시간벌기 였다]
유엔 선거감시단이 남.북한 동시선거를 위해 북한진입을 시도했으나 소련의 반대로 결국 남한만의 선거가 시작되는데 그들은 그동안 포섭된 남한의 프락치들이 약 30만여 명은 되리라 믿었다.
따라서 시간을 벌어 무력남침을 하면 쉽게 남한을 공산화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이 남한만의 선거인 5.10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 4.3 제주도 폭동이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 지역 경비대장인 제9연대장이 암살 되는 등 엄청난 군.경의 피해가 속출하게 된다.
당시 어수선한 시기에 경비대 입대 인원이나 경찰로 채용되는 인원의 신원확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많은 세포들이 유입되어 내부에서 지휘관을 살해하고 정보를 빼돌리며,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는 등 상상하기 어려운 만행이 이루어진다.
결국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 병력을 증원하기 위해 서북청년단이 투입되고, 육지의 군부대가 지원 투입되는 과정에 바로 제14연대의 여.순반란사건과 대구 제6연대의 반란 사건이 터지고, 군.경이 계속하여 제주남로당의 습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는다.
이 과정에 진압사령부가 설치 되고, 프락치들은 계속하여 진압군이 남자들은 다 죽인다는 등의 역소문으로 많은 제주 도민이 산속으로 들어가 자의반타의반 식으로 폭도들의 지원세력이 된다.
이에 진압군이 그들을 색출하는 과정에 일부 마을에는 가옥이 불타고, 많은 인원이 처형되는 불상사가 발생하고, 이를 폭도들은 계속하여 확대 재생산하여 도민들은 계속하여 산속으로 들어가고, 폭도들은 이을 악용하여 군.경 토벌대를 유인 기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본인들이 저지른 만행(우익 학살, 그 일가족 칼로 난사. 군.경 가족 살해, 마을에 방화, 경찰지서등 관공서 방화 등)을 마치 토벌대가 저지른 것으로 선전하여 마치 제주도 전체가 해방구로 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곧 북한에서 해방군이 내려와 조선을 하나로 통일시킨다며 목숨으로 미제를 몰아내고 단선선거를 부정하며, 이로 탄생한 정부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폭력 투쟁을 부추켰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세포들이 군이나 경찰에 침투해 있었는지 군만 따져보면 10만여 명의 병력에 약 14%수준이 세포들이었고(공식기록은 아니지만 10,317명 중에 4,749명이 기소되고 5,568명이 탈영하였다고 한다)제주 9연대의 문상길 중위 일당이 앞선 두 명의 연대장은 약을 먹여 아프게 함으로써 물러나게 하고, 뒤이은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한다. 제주도 폭도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게 된 여수의 제14연대는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등이 출동하는 당일 반란을 주도 하였고, 여기에 대구의 제6연대도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마산의 제15연대 연대장이 포섭되어 활동하다 지원작전에 지장을 초래하고 결국은 탈영하였다가 체포되어 처형되는 등 이로인해 48년 12월 1일 보안법이 탄생하게 된다.
[제주 평화공원이 아쉬운 점은?]
하지만 평화공원이나 진상조사 결과에 그 원인에 해당하는 남로당 문제나, 김달삼.이덕구의 제주도 남로당 유격대들의 무자비한 살해와 방화, 관공서 기습 등은 별로 언급이 없이 오로지 토벌군의 과잉진압이 빚은 제주도 자유 및 민족항쟁이란 것은 역사 앞에 오류다.
지금 그 곳을 찾는 많은 신세대들이 자칫 이런 것을 오해하여 다시금 낡은 민중사상으로 마치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오해를 갖게 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의 공산세력이 원하는 전법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달콤한 밀어에 속아서 북으로 올라간 남로당 핵심세력은 모두 처형되었다. 그들이 써먹기 좋은 김달삼도 6.25전쟁에 투입되어 죽고 박헌영 등 대부분은 전쟁 실패 책임을 마치 이들이 미군의 세포처럼 조작하여 모두 처형하였다.
따라서 지금 이 싯점에 다시 제주도 사건을 재조사하자는 것은 아니다. 현재 토벌대의 잔악상은 어떻게 보면 확대(토벌대가 그런 행위를 하게된 배경이나 이유는 명시하지 않고 있다. 폭도들의 공격이나 매복 기습으로 무수히 죽어간 군경이나, 경찰 가족들의 무참히 죽어간 모습, 군경에 협조적이라 하여 죽어가고 가옥이 불타버린 양민들의 피해 실태 등이 언급되어 있지않다) 하여 까발려져 있다.
다만 불을 지르고 죽창과 쇠창, 낫 등으로 무참히도 양민이나 군경을 죽이고 그 가족들을 무참하게 죽인 폭도들의 잘못을 열거하여 공정하게 비교되어야 했다. 더 나아가 폭도들의 목적이 분명 제주를 해방구로 하여 남조선의 공산화를 하려는 북한의 계략에 남로당이 하수인으로 참여한 분명한 남조선혁명전쟁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 명시 되어야 한다.
더 첨부하여 그렇더라도 당시 무정부 상태하의 제주도 실정과 무분별한 선무 공작이 혼란을 가중시켜 많은 양민들이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낮에는 토벌대가 밤에는 폭도들이 들이닥쳐 압력을 가하는 현실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희생을 강요당한 현실을 이해하는 차원의 화합형 내용으로 보완해야 미래가 있는 제주, 민주주의 국가가 도지 않을까 고심해 본다
제2절 건준의 실체와 미군정의 시작
해방 이후 국민의 열망은 바로 단일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8월 15일 일본의 패망이 알려지던 날 아침,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는 여운형(당시 일부 지도층들은 이미 일본의 패망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여운형으로 그는 1944년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면서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해방 이후를 준비했다)에게 재한 일본인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요청하면서 행정권을 이양했다.
엔도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은 여운형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결성하고, 일차적으로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던 정치범을 석방했다. 건준 위원장에 추대된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모체로 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균형을 이루는 좌우연합적인 조직을 구성하고자 했다.
건준 조직은 면단위까지 건준지부가 조직되면서 점차 기구가 확대되어 내분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1차 조직때의 연합전선에서 벗어나 점차 좌익세력이 주도하게 되었기 대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익세력이 건준을 탈퇴했다.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이틀 전, 진주할 미군에게 조선민족의 자치능력을 표시할 당면의 필요성에 의해서 건준은 해체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로써 건준은 출발한 지 불과 20여 일만에 해체되고, 명실상부한 건국준비는 손도 대지 못했다.
여운형은 미군정이 들어서기 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하나의 정부로 인정받으려 했다. 그러나 과거 조선총독부의 지위와 체제를 그대로 무려받은 미군정은 김성수. 송진우. 김동원 등 우익계 인사들을 기용하여 인민공화국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여운형도 근로인민당을 결성하기 위해 사임했다. 곧바로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임정수립 문제가 다루어지면서 인민공화국의 존재는 이름뿐인 것이 되고 말았다. 또한 북측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함으로써 서울의 인민공화국을 부정한 상태였다.
이로써 해방이후 자발적인 건국조직었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은 미군정의 대두와 함께 해체되었다. 좌.우익의 대립만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제3절 해방, 신탁과 반탁으로 갈라진 남.북한
해방 후 미군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각기 군정을 실시했다. 따라서 자주적인 통일국가 건설은 늦어지고, 북쪽은 소련의 사주하에 김일성식의 공산주의 국가가, 남한은 미국이 자본주의 국가건설을 꾀하는 정치세력을 지원함으로써 한반도에서 각자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다.
따라서 남한은 미국의 입김하에 대체로 친일경력이 있는 자본가, 지주출신의 인사들이 군정의 행정고문이나 관료로 임명되었다. 반면에 북한을 점령한 소련은 친일행적을 한 자와 지주 및 자본가를 탄압하고 노동자 농민을 우선하는 척 위장하여, 표면적으로 행정권을 각 도 인민위원회에 넘겨 인민정부를 설치, 영향력을 행사했다.(그들은 김일성을 앞에 내세워 그들의 전위대로 활용하며 결국 전권을 인수하게 하여 북한을 공산화하게 된다)
1. 신탁과 반탁으로 갈라진 남.북한
해방 직후 미.소는 1945년 12월 27일 밤, 민족분단을 예고하는 연합국의 신탁통치 결정이라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내용이 전해졌다. 신탁통치라는 지배정책은 제2차대전 후 당시의 강대국들이 자기나라에 유리한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신식민지 통치방식이었다.
사실 한반도에서의 신탁통치안은 1943년 영국 수상 이든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간의 회담석상에서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루스벨트는 테헤란 회담(1943.11)에서 소련의 스탈린에게 한국에서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하여 찬성을 받아낸 상태였다.
이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의 정치미숙을 들어 신탁통치 기간이 약 30년이 필요할 것이라 제안했으며 스탈린은 짧으면 잛을수록 좋다고 응수하여 구두로 합의 되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비공식적으로 승인되고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 되었다.
신탁통치안은 이와같이 미국의 구상으로 이루어졌다. 소련이 대일전전쟁에 참전하는 등 남진정책을 표방하자,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위한 미국의 복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의도 속에서 미국은 5년을 넘지않는 탁치기간과 미.영.중.소 4개국의 대표로 구성되는 집행위원회에서 권한을 수행할 것을, 소련은 미.소공동위를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강대국들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김구 및 임정의 한독당 세력은 신탁통치 문제가 알려지자 즉각 반탁운동에 나섰다. 지주중심의 한민당과 이승만은 관망적인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좌익진영도 일단은 반탁입장을 밝혔다.
인민공화국의 통일전선 제의를 거절하고 김구 등 임정 주도의 반탁운동이 전개되자 조선 공산당은 태도를 바꾸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섰다. 이때 좌익의 찬탁 결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소련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신탁으로 입장을 선회한 공산당은 신탁이 조선의 독립을 촉진하고 보장하기 위한 방안이라며 선전공세를 폈다. 이는 결국 신탁통치 문제로 우익과 좌익이 대립하게 된다.
반탁운동을 반공, 반소라는 측면에서 해석하려는 한민당과 이승만, 반탁운동을 통해 민족주의적 법통을 확인받으려 했던 김구와 임정계, 그리고 소련(북한)의 지령에 움직이는 좌익계는 서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혈투를 벌이게 되었다.
2. 반탁.신탁운동의 헤게모니
조선에서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제1.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조선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자 김구를 중심으로한 통일정부 수립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48년 8월 15일에 남한에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하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은 9월 9일에 김일성을 수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이로인해 신탁통치는 실시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탁통치문제로 남과 북은 치열하게 서로를 반민족주의자라 비판하며 결정적인 민족분열의 빌미를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남북의 대립은 사실은 좌익, 남한에서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 밑에 자리잡은 남로당 박헌영의 꼭두각시들이 북의 사주에 처음에는 반대에서 바로 소련의 지령(?)에 찬성(그이유는 소련의 진출을 보장)으로 바뀌면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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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박헌영(*김삼룡 이주하 김두봉 김원봉 이현상 이승엽 김달삼에 대해서도 차차 언급할 것임): 충남 예산 출신으로 경기고를 나와 모스크바 국립대를 나왔다. 광북이전에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광복이후에는 공산주의자로 활동하다 북으로 월북하여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키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결국 김일성에게 미제 간첩의 누명을 쓰고 숙청된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에 참여한 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해 오다 이후에 국내로 들어와 기자활동을 하며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에서 활동하던 중에 일제에 발각되어 검거된다. 그러다 해외로 탈출하여 소련에서 유학하다 코민테론의 지시로 상해에서 국제주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인 "국제선" 활동으로 검거되었다.
출옥 후에 국내파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경성콤그룹에 가입했다가 발각되자 전라 광주에서 은거하다 광복을 맞았다. 해방이 되면서 미군정이 들어오기 전에 공산주의자들이 좋아할 여러 이론과 선언으로 3.8선 이남에서 공산주의(조선 공산당) 파벌간의 반목에서 우위를 점하였다. 이후 총독과 협상하여 조선독립의 초석을 다지려던 건준의 여운형에게 다가가 그것들을 다 가로챈 뒤에 그것을 기반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를 주도했다
.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이 미군정에 인정받지 못하자 이를 버리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입하였다. 이로 인해서 미군정에 밉보이고, 우익의 증오를 삼과 동시에 민심도 얻지 못했다. 여기에 신탁통치건과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 대처를 잘못하여 3.8선 이남의 공산주의 조직인 조선공산당을 무력화시키게 되면서 세력이 약화되고 이 와중에 9월 총파업을 주도했고, 결국 맥아더의 포고령을 위반하게 되면서 쫒기듯이 1948년에 북으로 월북했다.
월북한 박헌영은 자신이 남한 내 공산주의 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만들었던, 1946년의 남조선 남로당을 김삼룡을 이용하여 뒤에서 조종한다. 이남에서 빨치산을 선동하여 테러활동을 자행토록 하고, 조선 노동당 간부와 병력을 남파해서 빨치산 조직을 직접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남한에서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발치산의 근간이 무너져가는데도 자신의 지령만 떨어지면 이남에서 대대적인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같은 망상으로 김일성과 함께 남침전쟁을 주도했다. 그는 김일성등 공산주의자들에게 자신의 말 한마디에 "남한에서 혁명의 불길이 치솟을 것"이라고 장담했는데 막상 전쟁이 일어나니 남한에서 유의미한 빨치산 조직의 폭동은 없었고 유엔군과 남한 국군의 반격에 밀리면서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한다.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 충남 예산군 신양리에서 양반가 박헌주와 어머니 신평 이씨 사이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집안이나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과부였던 신평 이씨를 받아들여 박헌영을 낳았으며 박헌영은 학업이 우수하여 경성제일고등학교(경기고)에 진학하였다. YMCA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꿈꾸었으나 좌절하고 1919년 2월 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을 경험하며 상하이에 가게 된다. 3.1운동 당시에 선전역으로 참여한 것이 문제되어 퇴학당할 뻔 했으나 퇴학은 면하였다.
미국유학을 희망하고 아르바이트와 중노동으로 비용을 마련했으나 턱없이 비싼 배삯을 지불할 수 없어 포기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였으나 일본제국 경찰에 쫒겨 대입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도쿄로 건너간지 2개월 만에 1920년 1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중에 이르쿠츠크 고려 공산당파에 가입하여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당시 고려공산당은 이동휘의 상하이파와 여운형의 이르쿠츠 고려공산당파가 있었는데 이루쿠츠크 고려공산당이 까다로운 조건없이 받아들여 가입하게 되었다. 1922년 여운형과 함께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민족 대회에 참석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굳혔으며,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코민테론의 지시를 실천하려 국내로 들어왔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1924년 옥에서 풀려난 후에 동아일보 기자를 하던 중 화요파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며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출되어 활동한다. 그러나 다시 일경에의해서 기자직에서 해직되었다. 1925년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이 터지자 여운형과 모스크바에 있던 조봉암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일제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 조직이 발각되면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신의주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동료 박순병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감방에서 자살소동도 벌이고 재판중에 정신병자 행세도 하고, 감옥에 똥도 바르고 먹기도 하며 온갖 추한 행동을 하여 결국 1927년 11월 27일 정신병으로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실제 당시 소설가 심훈(고보 동창)도 인정하기도 한다. (실제 이 사건은 나중에 박헌영이 일제와 짜고 비밀리에 타협했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이후에 아내의 고향인 함경도 함흥에서 1927년 사라져 버리고 1928년에는 아내와 함께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해 버렸다. 당시 만삭인 아내로인해 일경들이 감시를 소흘히 한 결과였으며 감시조 일경은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1928년 아내와 모스크바에 들어가는데 아내가 기차에서 딸인 박 비비안나를 낳았다. 이들의 극적인 탈출은 세간에 화제가 되었고,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에 의하면 "눈물젖은 두만강"이 김용환이 이에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다 한다.
1928년 11월에 그 곳에서 유학중이던 공산주의자 김단야의 추천으로 국제레닌대학을 다녔다. 그리고 1929년 2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국제레닌대학을 졸업 후 노동과 고학으로 동방근로자대학 2년 과정을 졸업하면서, 당시 소련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각국 혁명가들의 자식들을 양육하던 시설인 스타소바 육아원에 딸을 맡기고 1932년 1월 아내 주세죽과 상하이로 건너갔다.
상하이로 들어간 박헌영은 "코뮤니티"라는 잡지를 국내에 반입시켰다. 당시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이 죽는 쾌거가 발생했다. 사건 당시에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는 극소수에의한 폭력"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 당시에 박헌영이나 조봉암 등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이승만 같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측들도 이 의거를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기관에 도움을 줄 뿐이다"라고 폄하 한적이 있다고 한다.
원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인적인 테러리즘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일부 무정부자들의 테러행위는 자본주의 권력을 무너트리는데 아무런 공헌도 못한다고 비판했다. 혁명가 개인의 파괴행위는 설령 일부의 지도자를 살해했다 하더라도 체제는 그를 대신할만한 사람을 얼마든지 배출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윤봉길 의사 건으로 상해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높아지자 박헌영은 한국명 이두수, 중국명 왕양목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다 상해 부두에서 일제경찰에 미행으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되었다. 6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5년만이 1939년 9월에 가석방으로 출소하여 이 당시에 경성콤그룹(이관술 이순금이 주도해서 1939년 1월, 김삼룡과 접촉하여 새 조직을 만들기 시작하여 1939년 4월에 지도부를 형성한다. 이현상등이 합류해서 국내 거의 모든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합류한다. 1939년 12월 12일에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였던 이관술이 박헌영을 직접 만나보고 영입을 결정한다.
박헌영이 들어올 때에 이미 경성콤그룹은 1년간의 확장을 통해 전국적인 지역 책임자를 두고 있었다. 이관술은 이재유 그룹이자 국내파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화요파이자 코민테론 사람인 박헌영과 파벌이 달라 일면식도 없었다.
박헌영은 국제선 공산주의자의 지도자였고 이재유는 비국제선이었다.(당시 일경의 공산주의자와 독립운동가를 말살하기위한 통제가 심했기 때문에 대부분 민족해방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이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1년에 경성콤그룹이 발각되어 검거가 일어나는데 박헌영은 전라 광주로 도피했고, 전남지역 공산주의자들과 연락을 하였다. 태평양 전쟁기간에는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별의별 위징직업으로 그들의 눈을 피했다. 김성삼이란 가명으로 변소청소, 벽돌공장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경성의 소련 영사관 샤브리와 비밀 교신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다른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인 이관술이나 이현상 등은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에 탈출해서 해방순간까지 대전에서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했으나 당시에 박헌영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현상이 이때 많은 활동을 했다고 한다. 1941년의 대규모 검거와 박헌영의 연락두절에도 조직원들은 공산주의자협의회, 자유와 독립그룹, 조선건국동맹과 연계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며 광복순간까지 항거한다.
*박헌영(가명 이정)과 정순년의 만남과 헤어짐
이 기간중에 박헌영은 정순년(충북 영동의 포수집안에서 태어난 정순년은 18세인 1939년 고등교육을 받은 당숙 정태식(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감옥을 갔고 출옥 후애 경성콤그룹에서활동했다.) 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이순금(*이관술의 배다른 동생으로 동덕여고 시절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조투쟁을 주도하는 등 여성운동가 중에 가장 많이 투옥됐던 탁원한 공산주의자러 박헌영과 함께 활동했다.)과 지내다 이금순을 따라 잠시 청주로 내려와 무심천이 보이는 어느 집에서 당숙 정태식과 함께 온 이정(박헌영임)을 만났고 아들인 원경스님을 낳았다.
당시에 이정과 함께 이정을 돕는 김삼룡(이재유, 이현상과 같이 1930년대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했던 경성트로이카로 1939년 조손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경성콤그룹을 조직한 박헌영의 오른팔)이 함께 왔다. 그리고 한달 후에 이정은 정순년을 데리고 서울 아지트로 올라왔고 결국 4년훙인 22살에 애를 낳게 된다(원경스님). 당시에 정순년이 이정에게 결혼 유무를 묻자 이정은 모스크바 결혼은 언급을 안하고 상해에서 만난 공산주의자 주세죽과 결혼 했으나 주세죽이 김단야와 연애를 하여 헤어졌다고 했다(당시 주세죽은 유배로 러시아에서 살고 있었으나 이정은 몰랐다). 그리고 그런건 묻지 말라고 한다. 정순년은 이정이 박헌영이고 공산주의자인줄은 몰랐고 독립운동가인줄 알았다 한다.
이정은 애를 낳기 위해 다시 정순년을 청주로 보냈고 보내면서 자신을 박헌영이라 알리게 된다. 그리고 청주에 예산에서 박헌영의 어머니가 올라왔다. 출산 후 얼마 되어 이번에는 친정 부모들이 들이닥쳐 친정으로 끌고 가고 태어난 아들과 생이별을 했다.
그러고 정순년의 부모들이 딸을 재혼시켰다. 그런데 하필이면 재가한 남편이 겉보기엔 목수였집만 공산당의 평당원이었다. 남편이 한국전쟁에서 죽자 그는 술집을 운영하다가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아이를 낳고 살던 중에 아들인 승려 원경을 다시 재회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김삼룡, 이주하 등과 경성으로 올라온 박헌영은 경성콤그룹의 이관술, 이현상, 이주상 등을 만나 조선 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갑짜기 어디 은거하다 나타난 박헌영에 모든 동지들이 박수를 친 것은 아니지만 코민테론이나 소련과의 연계로 힘을 실어 정당성을 확보하고 바로 중앙당을 조직하는 대신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결성했다. 전국의 좌파 세력을 결집하여 당 조직을 견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경성 콤그룹 중심의 재건파보다 먼저 8월 16일 서울파인 이영, 정백과 화요파인 조동호, 이승엽 및 ML파인 이정윤, 최익한과 이현상 등은 서울 장안빌딩에서 또 다른 조선 공산다, 즉 장안파 공산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장안파 대부분이 일제 강점기에 공산주의 활동을 포기한 약점 등이 있어 정통성 면에서 우세한 재건위가 출범하자 장안파는 와해 되어가고, 9월 11일 박헌영은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박헌영이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장안파가 와해되며 일단 대부분 재건파로 흡수되었다. 재건파라해서 다 박헌영을 절대지지자는 아니고 반박헌영 기조를 유지하다 나중에 대회파로 나가기도 했다. 장안파 출신중 화요파들은 박헌영의 최측근이 되었다. 이후 재건파의 두 주류는 경성콤그루과 화요파가 되는데 장안파 출신 화요파는 전향자가 많았다. 다른 정당에 비해 조선공산당이 가장 독립운동가 비율이 높았다. 그런데 박헌영이 비전향자라도 자신과 소원한 관계자는 배척하고 전향자라도 친하면 핵심자리에 기용하여 당내 갈등을 야기했다. 박헌영파 중에도 김삼룡과 이주하는 리승엽, 조두원 등 전향자(일제말기 감옥에서 나오려면 전향해야 했기 때문에 비전향자는 극소수였지만 리승엽과 조두원은 친일정도가 심했다)를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김삼룡, 이주하에겐 유감이지만 박헌영은 조두원 처제 윤레나와 결혼한다. 월북 후 박헌영은 리승엽 조두원 등 전향자는 북에 남아있게 하고 김삼룡 이주하 이현상 등 비전향자는 남한에 보내 지하활동을 하게 한다.
[*김삼룡 이주하 리승엽]
[김삼룡:일제강점기에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고 경성콤그룹을 조직한 공산주의 게열 독립운동가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남조선로동장 서울지부부 책임자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정부가 김삼룡을 체포했을 때에 여러개의 안경이 나왔는데 "일곱 개의 얼굴"등으로 별명이 있다. 좌우 정치성향을 떠나 광복 후에 행적은 호불호가 갈린다. 우선 김삼룡은 남한 반박헌영파에게는 패권주의자라 비판받았다. 이런 걸 보면 박헌영의 심복이었나 싶지만 김삼룡은 북한에서 박헌영 비판에 가담해서 북로당계의 신임을 얻었다. 남로당계 중 가장 김일성과 사이가 좋았던 인물 중 함 명이다.
김삼룡은 1910년 2월 9일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26세가 되던 1934년 조선공산당의 일본충국 간부였던 이재유를 중심으로 이관술과 그의 동생인 이순금, 이현상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한다.
그 후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다 1937년 이재유가 체포되자 공향인 충주로 피신하였다. 1939년 이관술 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그를 임명하자 경성으로 상경하여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활동하다 1940년 12월 조직선이 들어나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소한 그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서 들어가 장안파 공산당을 약화시켰다. 김삼룡은 패권주의적 행보를 보여 반박헌영파가 엄청나게 싫어했던 인물이다.김옥에서 권투를 하여 단단한 체격에 거만하거나 권위적이지 않았다고 하며 하급당원에게도 친근했다고 한다.
같은 해 9월 11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조직국책을 맡았으며 '46년 9월 미군정이 정판사 위조지폐 서건으로 좌익탄압을 본격화 하며 이관술을 체포하고 '46년 9월 박헌영 리강국 등 공산당 간부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했다.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남조선 로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조직부장을 맡게 되었다.
3당합당을 둘러싸고 공산당 내에서 박헌영 이주하와 감삼룡 사이에 적지않은 이견이 있었다. 김삼룡은 박헌영 비판에 가담해서 박헌영의 정적이었던 북로당의 신임을 얻었다. 김삼룡은 박헌영이 여운형을 배제하고 반박헌영파를 배제하는 것에 불만을가졌던 것같다. 계속 남한에 남아 지하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ㄷ된 이후에 1949년 불법화된 남조선로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가 되었다. 1949년 5월에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한 후 7월 전원회의에서 박헌영ㅇ, 허헌, 리승엽, 리기석과 함께 남로당 출신으로 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이주하와 함께 지하조직을 결성을 하여 암약하다 1950년 3얼 27일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평화공세를 벌이던 북한에서 조만식과의 교환협상이 오가다 전쟁이 발발, 1950년 6월 26일 총살되었다.
*** 당시 어마어마한 간첩사건에는 군의 숙군 작업을 빼놓을 수 없으며, 사회일원의 간첩색출에는 오제도 특별검사가 주도해서 색출하는데 가장 정보를 많이 준 전향자는 홍민표( ), 당시 서울지부장이었다. 그는 북에 있는 박헌영의 지령을 김삼룡으로부터 받았으나, 제주 48. 4.3 폭동의 무력하에 이어서 같은 해 10.19에 여순 제14연대의 반란사건이 무력화 되면서 남한에서의 무력적화는 어렵다고 보고 스스로 체포되어 오제도를 독대한다. 이 자리에서 오제도 검사의 집에서 저녁식사를 받고 싶다고 하여 함께 찾아간 오검사의 집이 너무 왜소하고 가난하게 살고 있어, 그 스스로 부패한 남로당 고위급들의 모습과 비교하며 더이상 속고 살아도 안되고 민중을 속여서도 안되겠다고 술술 남로당원 명부를 넘기고 , 실제 본인이 서울 각 지부장 들을 설득하여 전향하게 하여 박헌영이 획책하려던 "서울의 불바다(2,000만원의 공작금으로 수류탄을 구입하여 6만 당원에게 주어 폭력 활동게획)"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남한은 구제되었다고 한다.
감삼룡은 이주하보다 서열이 낮았다. 그런데 남로당 총책이 된 이유는 이주하는 북로당과 사이가 좋지않았다는 설이 있다. 이현상 이주하는 김일성을 싫어했는데 김삼룡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는 김일성 일당이 본색을 들어내놓기 전이다. 독재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중인데 여운형도 박헌영보다 김일성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박헌영은 1946년까지는 온건 노선을 취하다 1949년쯤 되면서 남로당에 과격투쟁의 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김삼룡은 남로당의 정부조직을 말하지 않았고 이주하는 고문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주하는 다 말해버렸다. 위장 진술인지 아니면 아니면 정말로 김일성과 사이가 나빠서 공산주의가 싫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김삼룡은 남한에서 총살되었지만 북측은 북한 애국렬사릉에 남조선혁명가 직함으로 가묘가 조성되어 있고1993년 7월에는 공화국 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그의 부인 이옥숙은 북한에서 천수를 누렸다. 남로당 계열은 대부분 최후가 비극인데 반해, 북한에서도 기록말살까지 되었다.]
[ 이주하: 함경도 북청출신이다. 일명 이주화라고도 한다. 1909년 아버지가 의병활동을 하였다고 의심을 받아 가족 모두가 원산으로 이주했다. 1914년 원산 광성학교에 입학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사의 유인물 제작을 돕다가 탄로가 나 형이 있던 갑산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원산에서 객주집 심부름군, 일본인 상점 점원, 우편 배달부 등을 했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23년 동맹휴업을 주도하여 퇴학 당한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에 수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지바에서 공산청년동맹에 참여하다 학비부담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 원산부두에서 화물운반 날품팔이로 일하면서 원산노동연합회 재건에 힘썼고,1929년 조선 공산당재조직정비에 위원회에 가입하였다가 태평양노동조합 함경남도 책임위원을 맡았다가 체포되어 5년 형을 받고 1936년까지 복역했다.
해방 직후에 1945년 8월 원산에서 조선공산당 함경남도지구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에 선임된다. 12월 당의 요청에 따라 월남해서 1946년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1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 위원이 되었다.
1948년 8월 이후에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지도하고,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다. 1950년 3월 안영달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되고, 북측에 억류중인 조만식과의 교환 제의가 오가던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서대문 구치소에서 처형되었다.
리승엽: 경기도 부천 성재리 출신으로 가난한 뱃사공의 아들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다. 그는 인천공등상업학교에 재학 중에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조치되었다. 이후에 공장에 취직하여 노동자로 생활하다 노동운동가가 되고 1923년 조선공산당청년동맹에 가입한다.
1924년 제1차 조선공산당 창건 작업에 참여하였고, 1924년 9월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기자가 되었다. 1925년 8월에 기자직을 사직하고 9월 화요회계엵의 주도로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자 입당하여 노동운동을 하며, 조선노동총동맹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그뒤에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며 1930년 경남 부산에서 박장송 안영달 김형운 등과 노동운동을 하며 전단지를 제작 배포하려다 체포되어 "부산반전반체제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1931년, 박헌영 김단야 등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했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구치소에서 4년간 복역하였다.
193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제4차 조선공산당청년동맹 사건으로 붙잡혀 1939년까지 복역하였다. 1940년 다시 체포되었으나 전향서를 쓰고 출옥하여 식량배급조합 이사로서 공산주의 운동을 잠시 이탈하였다. 이후 1941년 1월, 야마토주쿠에서 활동하면서 변절자가 되었다 한다.
광복 이후 1945년 8.15 직후에 장안파 공산당 제2비서가 되었으나 8월 16일 박헌영이 돌아와 통일재건 조선공산당 재창 당시에 박헌영계의 재건파가 되어 건국준비위원회에도 가담했다.
1945년 11월 1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여운형(조선인민공화국 국가주석 권한 대행)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결국 해체되자 민족주의 민족전선에 가담하고 남조선노동당이 창당되자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46년 6월에 남조선노동당 경기도 책임 당무위원장직을 부여받고 이어 박헌영으로부터 남조선노동당 기관지 "해방신문" 주필겸 편집국장이 된다.
1948년 1월 6일,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평양으로 월북하여 1948년 8월 4일 북한최고인민위원회 제1기 대의원, 1948년 9월 9일 북한정권 수립 후에는 로동당 비서와 초대 사법상겸 내각 호위실 차장, 노동성 부상을 거쳐 국가 검열상을 역임하고 1949년 6월 24일 북조선 노동당과 남조선 노동당이 통합할 때는 중앙위원겸 동당 제2비서가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김일성을 따라 남하하여 1950년 6월 28일 서울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된다. 이후 서울시장이 되어 조선노동당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김두봉이 당시에 주석임. 그러나 실세는 김일성이었다 )이 되었다. 당시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던 김규식, 안재홍, 정인보, 김용무 등의 납치를 지도한다.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이 개시되자 인민군 패잔병을 규합하여1950년 9월 27일 서울을 떠날 때까지 경인지구 전투를 벌이며 유격전을 전개하여 김일성에 의해 공화국 영웅으로 서훈을 칭송받았다.]
하지만 박헌영의 후원하에 조선로동당 비서까지 되었으나 남로당을 제거하려는 김일성의 견제를 받아오다 평양 금강정치학원 사건이 결정적 빌미가 되어 모든 직에서 해임되고 1953년 8월 3일, 반당종파행위 관련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박헌영 리승엽 간첩사건이란 시대적 종말을 맞아 1956년 7월 30일(또는 1954년) 총살형으로 처형된 것으로 추측된다.
[ *김두봉: 8.15해방 후 북한에서 조직된 북조선 노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냈%으며 한글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는 경남 동래에서 출생했으며 1908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중앙.보성.휘문 고보 등에서 교사를 했다. 주시경 밑에서 한글을 연구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에 신의주를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상해에서 신채호가 주필인 신한문신문인 "신대한신문"의 편집을 맡아 보다 신문발행이 중지되자 김규식 등의 신한청년당에 가담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창기에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1920년에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모임에 가담하여 공산당에 입당도 했다. 당시는 공산당에 가입은 했으나 반일투쟁의 운동가로 평가받았다. 1924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35년 6월에는 의열단 단장으로 일제에 저항한 경력이 있는 김원봉, 그리고 김규식 등과 조직한 한국민족혁명당을 조직한다. 김규식이 총재였고 김원봉은 당 서기였으며 김두봉은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37년 1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남경이 일본군에 함락되자 남경을 떠나 사천성 중경으로 간다.
상하이 활동 중 아나키스트 계열(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 독립운동가 김진익과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 이후 김두봉의 첩과 김진익이 성관계를 갔고 임신을 하면서 김두봉은 첩과 김진익과 결별하였다. 그 밖에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받는 김규식 김원봉의 노선에 다소 불만을 갔었다. 1940년 김원봉이 의열단을 중심으로 개편한 조선의용대의 편집위원이 되었다.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와 합작하게 되자,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투쟁방안을 하자는 그의 의견이 거부당하자 그는 중경을 떠나 한인촌이 밀집한 화북으로 떠나는데 어린 딸을 데리고 벙어리 행세로 연안으로 갔다고 한다.
1942년 연안으로 활동무대를 옮겨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했으며 7월에 주석에 취임한다. 이때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한 최창익 일파가 합류하고 연안에서 별도로 무장투쟁을 하던 김무정도 자신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합류한다. 1944년 10개의 독립동맹 분맹과 의용군 지역지대를 설치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김두봉은 독립연맹의 주석으로 중국 공산당과 연계, 공산당의 군대인 팔로군과 연대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1944년 김두봉은 연안 한인촌의 조선청년학교 교자이 되고 1945년 2월 학교를 군관양성소로 개조, 조선혁명군정학교로 고치고 다시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5년 광복후 일본의 패망을 예측했던 김두봉은 9월 3일 귀국을 결정하고 의용군 4개 대대를 인솔하고 연안에서 4천7백리나 되는 한반도를 향해 걸어서 왔다. 당시 화북지역은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철로마자 없는데다 의용군의 군용차량도 없었다. 귀국하늕 길에 중국에서 새로 만난 아내 역시 연락이 끊기고 14세된 딸 김해엽을 데리고 왔으나 아들인 12세 김상엽과는 생이별하여 가정적인 불행을 격었다. 11월 말 신의주에 도착했으나 광복직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무장해재제를 당하고 다시 만주로 추방되자 남득할 수 없는 일이라며 항의 하였다. 1945년 12월에 평양에 들어가 1946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자 부위원장(*위원장은 김일성)을 맡는다. 조선독립동맹이 조선신민당으로 개칭되자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8월에 조선신민당이 북조선 공산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이 조직되자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의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겸 상임위원장, 임시 헌법제정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여 북한정권 창출에 기여한다. 1946년 10월부터1948년 9월까지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이다.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데 동조했다.
1952년 2월 29일, 북한 인민 정부 국가검열상겸 인민대표검열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8개월 후에, 1952년 10월 5일 유격대 양성기관인 평양 금강정치학원이 북한정부 전복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후에 1953년 3월 5일 반당종파분자 선동 교사 행위와 미국 간첩혐의로 체포되었고, 5개월 후에 리승엽도 1953년 8월 3일에 국가 검열상(겸인민대표검열윙원장)에서 파면되며 후임으로 *김원봉이 그 직책을 이어 받게 된다. 그러나 1958년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하며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 싯점은 미정이다.]
[김원봉: 경남 밀양 출신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다. 만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냈다. 1918년 금릉대학에 입학했고,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단장(그는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에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갔고 1919년 11월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사람들과 뜻을 모아 만중에서 의열단을 만들었다.자신의 목숨을 받쳐서러도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려 했고 종로경찰서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져 일본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일제의 가장 높은 현상금이 걸렸다고 한다)이 된다. 중국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30년대 베이징에서 안광천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을 결성했다. 레닌주의 정치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 운영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우리나라민족주의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고, 김구의 한국국민당과 서로 대립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1939년 5월에는 김구와 전국연합전선협회를 결성했고, 단일당 결성에 합의 하였으나 결국 실패한다.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회의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 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었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국무의원 및 군무부장에 올랐다.
8.15해방 후 12월에 귀국,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결성되면서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 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1인이 되었으며, 중앙위원직도 맡았다. 1946년 10월에 발생한 대구 10월 사건 등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구금된 이래 경찰에 체포와 고문 등 수모를 겪었다. 이후 계속 되는 좌익 단체에 대한 탄압과 테러에 실망과 좌절이 반복된 후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 검열상이 되었다.(김원봉은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가 김일성을 만나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협상을 벌였다.하지만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채 김원봉은 돌아오지 않고 북한에 남게 된다)
1952년 5월 노동상을 맡았으며,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9월에는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다. 또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그러나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그 후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현상(1906. 충남 금산)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로 알려져 있다. 중앙고보에서 재학중이던 1925년에 조선공산당창설에 참여했으며,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산하의 여러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1928년 반일동맹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4년간 복역한다.
출소이후에 박헌영 김삼룡 등과 함께 경성 콤 그룹을결성하여 당 재건을 준비했다.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불법이 되어 평양으로 갔으나 1948년 당 결정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시작했다. 6.25전쟁 중 전황이 불리해지자 강원도까지 북상했다가 다시 남하하라는 당의 지시로 소백산 일대로내려왔다. 1951녕 덕유산에서 그의 주재로 그이 주재로 남한 6도 당위원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조선인민군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하동군)에서 토벌군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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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북협상의 허구
해방 이후 국민의 바램은 단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단일국가운동은 대체로 3단계로 진행되는데, 제1단계는 임정세력이 귀국하기 직전 국내에 남아 있었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정부수립운동이다.
제2단계는 김규식과 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 운동으로, 중도통일 세력을 집결하여 '합작 7개원칙'에 합의했으나, 극좌.극우의 반대와 미소 냉전체제로 인해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좌절 되었다.
제3단계는 단일 선거 및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운동이다.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권행사를 계속 유지시키는 맥락에서 반탁운동의 고삐를 더욱 죄어 나갔다,. 이 방법이 통일의 전망을 밝게하는 것이라 믿었던 갓이다.
이에 비해 이승만은 단전.단정을 실현하고자 했다. 1946년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독자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한다. 이어 미군정도 1947년 사실상 '남조선 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자 유엔총회는 유엔한국위원회 설치안, 한국 총선거안, 그리고 단독정부수립 후 양군철수안을 가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김구는 '남한만의 단일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초래할 뿐, 민족의 염원인 통일에의 접근은 부가능한 것'이라고 경고한다.
1947년이 저물어갈 무렵 건준의 여운형과 장길수 등이 암살되고 조소앙은 정계은퇴 선언을 하는 등 정국이 불안안 기운이 감돈다.
1948년 1월 26일 이승만은 유엔에 의한 남한 단선 결정을 강조하고, 반면 김구는 미.소양군이 철수한 후 자율적인 남북협상을 통한 총선거를 주장한다. 다음날 김규식도 담화를 발표하여 남북요인회담을 남한에서 갖자고 제의 하며 김구와 김규식은 손을 잡고 남한만의 단선을 반대하고 유엔한국위원회에 남북협상안을 제시하면서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 2월 10일 남한단정수립 반대의 뜻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다.
드디어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두봉.김일성에게 남북정치회담을 정식으로 제안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5.10선거를 들고 나왔고, 김구는 여기에 불참하겠다고 맞섰다.
[*여기서 나는 매우 중요한 한가지를 짚고 가려한다. 당시에 북한의 공산화 과정에 앞에서 언급한 김두봉이나 김원봉의 북에서의 활동을 보면 김일성에 대한 정보가 너무 미약하고 소련의 야심에 대한 경계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미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통해 만주에 진출하면서 그들이 구한말 조선땅에 진출하려던 헤게모니를 잡을려고 했고 그 목적 달성을 위해 김일성이 전격적으로 발탁되어 앞장서게 되는바, 사실 소련은 한국의 통일 정부를 원하는 것은 그들 입맛인 스탈린식 공산주의 국가였고, 미국은 이를 눈치채고 남한만이라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놓고자 했다. 여기에 이승만이 현실적으로 편승한 것이라고 본다면 어떨까.
김두봉이 해방 후에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들어왔다가 2개 대대 병력이 무장해제 당하고 만주로 일시적 쫒겨난 사실이나, 우리가 잘 아는 여운형, 김원봉, 김두봉 등이 모두 일제강점기 반일운동은 했으나 그 사상적 리더는 당시 전세계에 일고 있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로서 공산주의 사상에 더 가깝게 서 있었고, 실제 그들의 행적 또한 그러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다만 그 당시에 김일성에 대한 꼭두각시는 아니였다고 본다. 김일성에 대해 잘 몰랐고 소련의 검은 의도도 잘 몰랐을 것이다.]
한편, 남북정치회담 제의에 대해 북측은 마침내 수락의사를 밝혀왔고, 김구는 회담을 위해 준비단을 평양에 보냈고 김일성은 양김을 영접하겠다고 전달했다. 김구는 북행을, 김규식은 측근들의 만류와 미국 군정관 하지중장의 중지요청으로 갈등을 겪었다. 이때 108명의 문화인이 남북협상을 지지하고, 북행을 통일의 신호라며 지지를 발표하자 김규식도 마침내 북행을 결심했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우익의 강력한 반대시위를 피해 38선을 넘었고, 20일에는 한독당의 조완구.엄항섭.조소앙이, 21일에는 김규식과 민련대표 일행이 평양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4월 26일가지 8일간 합동회의가 진행되었으나 남측의 에상과는 달리 북측의 각본에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여 김구.조소앙은 본회의장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와같은 분위기 속에서 4월 27일부터 30일 사이에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라는 명목으로 정치회담이 열리는데, 남측에서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엄항섭 등이 북측에서 김일성.김두봉.최용건.박헌영.주영하.허헌.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5월 5일 다시 38선을 넘어와 협상경위와 협의사항을 설명하고 5.10선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유엔감시단 통제하 5.10선거는 기정사실화 되었고 이를 막을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결국 남한은 5.10선거로 8월 15일 남한만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되고, 북한은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며 2년 후에 한국 전쟁이 발생한다.
여기서 한가지 어필하고자 한다. 과연 그 당시에 김구나 김규식의 통일원칙이 단지 민족이 하나되는 것인지 아니면 쉽게 표현하여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준한 선거와 정부 탄생이었느지 말이다. 목적이 옳으니 방법도 옳다고 보는 것은 큰 오류를 가져온다.
이미 북한은 소련의 사주로 김일성 독제체제로 굳어져 갔고, 회담에 응한 그 면면을 봐도 그 후에 진행된 북한의 독제체제를 훤히 들여다 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표단은 대부분이 민족주의자였지만, 사상면에서는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닌 공산주의 내지 무정부주의자,사회주의자가 많았고, 실제 그렇게 과거에 활동했고, 해방 이후에도 대부분 그런 행적을 남기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당시에 남한의 지도자들이 이유가 어떻게 되었던 평양에 나타남으로써 사실 김일성의 행적에 의문을 가져왔던 많은 북측의 사람들이 김일성을 다시보게 되는, 다시 말해 그 지도력을 인정하게 하는 빌미도 되었다고 보면 어떨까~?
단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욕심에 남한만의 단선, 5.10선거를 밀어붙혔는지, 아니면 미군정과 유엔의 통제하에 진행되었느지는 보는 이의 판단에 따라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일방적인 정치적 야심가로 폄하만 하는 것은 좀 과한 느낌이 들고 그 당시에 소련의 음모를 냉철히 지켜본, 당시에 외교무대에 많이 나아가 있었기에 공산주의의 범람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상황이 미국의 일정기간 신탁을 어떻게 보면 받아들일 수도 있었고, 한민족이란 명분에 그만 공산주의식(?) 통일을 기다리며 더 많은 기간을 무정부 상태로 몰고가 6.25전쟁시 3일만에 서울이 피탈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싸워보지도 않고 바로 서울을 적화시키고 한반도가 붉은기가 펄럭이고 소련의 부동항이 부산이나 목포가 될 수도 있었다고 보면 반민족주의자일까~?]
[여운형, 김규식, 조소앙은 누구인가?]
1.여운형 :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연설가이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21세 한지근(평북출생) 등에 의해서 암살당함.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시작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을 조작하여 둑립운동가 105명을 감옥에 가둔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된다)으로 조선의민족주의 진영 및 반일 기독교 진영이 대 탄압을 받게 되자 여운형은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의 윌슩이 민족자결주의를 내걸고, 러시아는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면서 세계정세의 변화를 격게 되는데, 여운형은 상해에 머물고 있던 미대통령의 사절인 크레인을 만나 유창한 영어 솜씨로 한국 대표의 파견을 요청하여 파리 강화회의에(종전 후 패전국 처리문제)독립청원서를 전달함과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어 대표까지 보낸다.
다른 한편으로는 2.8 독립선언과 3.1운동에 간접적인 형태로 비밀리에 참여도 했다 한다.. 초기 상해 임시정부에서 외무부 차장을 지내는 등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말, 3.1운동의 여운이 식어가는 싯점에 여운형은 일본을 방문한다. 이는 그가 친일이 아니냐는 옥죄가 되고 있다.당시 일본은 문화통치로 유화적인 억압을 하는시기인데 하지만 사실 이 시기에 여운형은 3주간 수차례 걸친 회담에서 회유를 거부하고, 조선의 즉시 독립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일본의 농간이었고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믿었던 파리강화회의가 결국은 또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 재분할이라는 것을 알고 새로운 돌파구 수단으로 사회주의.공산주의와 접촉을 시도하게 된다.
여기에 1920년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은 소수민족의 해방과 권리를 선언하는데 , 이는 많은 조선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 해방의 또 다른 길을 보여주었다. 이에 여운형은 같은 해에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1921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2차례 레닌을 만나 러시아 혁명을 거울삼아 조선독립의 모습은 민족해방과 민족 내부 평등의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러시아에서 돌아와 임정 활동을 자처하나 그의 생각대로 녹록지 않았다.
1920년 5월에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국제공산당 위원인 보이틴스키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제안에 공산당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 볼셰비키정부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제공한 자금을 이동휘. 김립이 가로채 독단적으로 처리하자 고려공산당은 분파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열릴 에정된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출발했으나 장소가 모스크바로 바뀌어 고비사막과, 바이칼호를 건너 1922년 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조선의 사정을 논의 하였다고 한다.
한편 중국 국민당의 손문과 중국 공산당의 구추백과 친분이 있었던 여운형은 그들 사이에 국공합작이 보이지 않는 조정자 역할을 했는데 결국 중국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1929년 일제에 수감된다.
이 싯점으로 몽향은 사상적으로 기독교적.세계관에서 민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까지 섭렵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탈바꿈한다.
1932년 4개월 형기를 남기고 출옥한 몽향을 일제는 그냥 두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를 제국주의 정책에 편입시키려 했다. 30년대 조선 내부는 다양한 대중운동이 등장한다. 조선 공산주의 운동을 필두로 노동.농민. 청년. 부녀 운동 등이 전개되고, 좌우 합작 민족 협동전선인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개량적 민족주의자들의 친일행적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설 곳이 점점 없어지는 가운데 여운형은 합법적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국내 항일 운동에 복귀한다.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에 연루되어 37년 중앙일보는 폐간되었다.
1940년대 일본이 중일전쟁에 이어 진주만 기습으로 이어지며 일제는 인적 물적 착취가 더욱 심해지는 가운데민족운동은 어려움을 격게 되고 1942년 다시 투옥되었다가 1943년 일제는 전향문을 쓰게 하고, 친일담화를 한 것처럼 날조하여 독립운동가로서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는 해방 이후 계속적으로 그를 따라다니는 실마리가 되었다.
몽향은 형무소 생활 당시에 새로운 구상을 하는데, 1944년 출옥하여 비합법적 조직인 "조선 건국동맹"을 출범하게 된다. 그는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 조직이 조섡의 유일한 건국 준비 조직체였고, 해방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모체가 된다.
정치 성향은 중도 좌파로 김규식.안재홍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주장하는 김구나. 중도 세력에 비우호적이던 박헌영.이승만.한국민주당 등의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1946년 말 좌우합작과 좌익 3당 합당이 실패하자, 그를 영도자로 앞세웠던 좌익진영은 그를 친일매국노.기히주의자.김일성의 앞잡이로 매도한다.
우파 또한 소련 및 김일성과 내통했다며 등을 돌렸다. 실제로 여운형은 5~7차례 38선을 넘나들며, 거물 정치인 행세를 했다. 그는 그의 자식(막내 아들(일본여자와 사이에 태어남), 차녀와 3녀 및 이들은 남한의 아버지 묘소를 방문도 했다. 북에 약 30명의 유족이 있다고 추정된다)을 김일성에게 부탁하여 그 자식들은 북에서 생존하여 높은 대우를 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
여운형은 친일매국노.기회주의자.정치곡예사.협잡꾼.스탈린의 광견.정계의 칠면조로 폄하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민족의 거성.위대한 선각자.철저한 사회주의자.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민족주의자 등 수식어 많다. 여운형은 한국 현대사에 극장 정치.포플리즘 정치.후흑 정치의 원조다. 그가 남긴 유산은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와 패션 좌파로 회자되는 수많은 정신적 사생아들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건국훈장 1급을 수여하고, 기념관을 짓고 기일까지 챙겨주는 아름다운 민주국가다
2. 김규식 : 1881년 1월 29일 경남 동래에소 출생했다.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는 김성,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으로 귀화했을 때는 김중문, 모스크방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참석 시에는 박경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젊은 시절 미국에 건너가 공부를 한 뒤 귀국하여 10여 년간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그리고 1918년 모스크방에서 열린 약소민족 대회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 김규식은 신채호와 함께 창조파의 입장에 섰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실망감을 느껴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정을 떠나 1920년 초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자 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영국,미국, 프랑스 등 강대국을 비난했다.
이어 민족 혁명당을 만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일하다 해방이 된 뒤 조국에 들어와 김구와 반탁운동을 이끌었다.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김구와 함께 38선을 월북하여 김일성이 마련한 평양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한 그런 자유통일이 아닌 김일성 주도 공산통일이라는 사실에 돌아 온 이후에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두문불출하다 6.25전쟁시 납북되어 1950년 12월 만포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공산주의란 것은 천하에 몹쓸 것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안된다. 내가 만주나 러시아에서 러시아 사람을 많이 사귀어 보았는데 러시아인은 원래 대단한 선량인이다. 그러나 레닌이 일어나서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러시아 사람들이 대단히 잔인해 졌다. 이것은 결국 공산당이 잔인하고 가혹한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 알바니아에서 공산혁명을 할 때에 하룻밤에 몇 만명을 죽인 바가 있는데, 결국 공산주의란 것은 잔인한 것이다. 그런데 한민족은 내가 알기로는 상당히 잔인한 민족이다. 그러니 공산주의만 되면 러시아 정도가 아니라 더욱더 잔인해 질 것이다. 그러니 한국에는 공산주의가 들어오면 안된다. 또 공산주의에 한번 빠진 사람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김규식의 측근 강원룡이 역사학자 이정식을 면담한 자리에서 한 증언1969.12.12
*개조파 / 창조파는 무엇인가?
이는 1919년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 1923년 2월 21일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편을 통해 독립운동의 활로를 마련하기 위한 회의 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준비정부로 탄생했기 때문에 정식정부의 수립을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대한 외교에 집중하눈 한편, 각종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런데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의 외교적 쟁취가 무산되고 1920년 청산리 전쟁에 이은 경신참변(3.1운동을 계기로 만주지방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독립군 운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20년 일본군이 만주로 출병하여 무고한 조선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 훈춘 사건이라고도 한다. 당시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습격을 당해 많은 타격을 입었던 터라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에 군대를 출병을 결심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구실이 필요하였는데,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에 있던 일본 영사관을 테러하게 한 뒤에 테러범을 조선인으로 몰아 가고, 만주에 일본인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약 4개월 동안 만주에 있는 조선인을 무차별로 학살했으며, 그 수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등으로 독립전쟁이 크게 타격을 입은 뒤라 준비정부로서의 임시정부 성격을 희석되고 말았다.
1920년 이승만이 상해에서 대통령이 된 후에 분란이 가속되며, 1921년 초에 이동휘.김규식.안창호 등 임시정부 초기의 주도자들이 줄줄이 임시정부를 떠났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주권의지로 수립한 것이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독립운동 전체를 재정비하려고 1921년부터 국민대표회 소집이 제기 되었다. 박은식.원세훈.안창호.김동삼 등이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1월 3일부터 그해 5월 15일까지 상행에서 국민대표회가 열렸다.
주요 의제가 먼저, 임시정부을 보존(이승만. 이시영)하여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효과적으로 개편, 보완하여야 한다는 개조파의 주장이 맞서 난항을 거듭했다. ( 오랫동안 소요된 경비가 모스크바에서 지원한 20만원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함)
*국민대표회의 설파?
상해임시정부는 수립과정부터 이미 이념.노선.지연의 차이로 내부 대립의 요인을 안고 있었다.
외교노선을 견지한 임정은 만주.노령지역의 무장 독립군을 통일적으로 지휘할 수 없었으며,해외 독립운동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이에 임정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점차 베이징을 중심으로 반임정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1920년 9월,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는 베이징에서 북경군사통일회를 조직하여 임정을 부인했다.
이들은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 단체의 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장차 전개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것을 주장한다.
한편 임정 내부에서도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15인이 우리동포에게 고함이란 격문을 발표하여,임정은 무능하고 국민의 기대에 이바지 못한다며 국민대표자 회의를 통해 강력한 정부수립과 독립운동의 방향을수립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만주지역에서도 1921년 5월에 김동삼.이탁.여준 등이 임정 개혁안을 작성하여 임정에 통보하였다.
이에 임정지지 세력들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게 되는데, 1921년 3월 5일 윤기섭 등 45인은 반임정파의 불신임에 대해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김구.이시영.이동녕.신규식 등은 임정 외곾단체로서 협성회를 조직하여 임정유지를 호소한다.
반임정계인 창조파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정구단을 조직, 이승만의 무책임과 무능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무조건 임정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였고 임정의 외교노선을 거부하면서 현실적인 군사방침을 수립하여 대일항전을 실행하고자 한 무장투쟁 노선이었다. 이에 자극되어 베이징에서는 4월 20일 10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 군사통일준비회를 개최, 군사지휘권의 문제 및 이승만의 위임통치문제 등을 논의한다.
그러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끝임없이 대립과 운동 노선 차이등, 서로간의 파벌과 이념으로 대립하다 폐회한다. 그 후 임정은 임정대로 다시 재건 되었고, 중국 동북지역의 독립운동계도 일정 기간 진통을 격다가 1920년대 중반에 신민부,정의부,참의부의 3부로 정리되어 재통일 되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문제 : 이승만이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 조선의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되 일정기간 국제연맹의 통치를 받아 완전한 통일국가로 거듭난다는 내용으로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대통령에게 청원한 내용이다. 이에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많은 인원들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서고 이로인해 이승만이 코너에 몰리게 된다. 이승만은 대통령의 책무를 소흘리 하고, 미국에서 장기간 채류하며 상하이로 돌아오지 않아 결국 탄핵으로 제명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국권 피탈의 해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무능한 지도자를 원망하고 신세 한탄만 한 것은 아니였다.
3. 조소앙 : 1887년 경기 파주 출신이다. 1919년 2월 1일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엿고, 곧바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을 지도하여 2.8독립선언을 작성하도록 지도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고, 삼균주의 이념(정치균등.경제균등.교육균등)을 바탕으로 첫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작성했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로 활동했고, 김구 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 외교할동과 이론수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 임정요인 1진으로 45년 11월 23일 귀국하여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이승만 등과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핟다가 1948년 4월에 김구.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당시에 임정출신인 신익희가 여러번 찾아가 말리고, 김성수.이승만도 만류하였으나 참여하고 , 5월에 내려와서 "이번 방북 길은 완전히 실패다. 완전히 모욕 당하고 들러리를 섰다.이북에 가보니 김일성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단독정권을 세울 준비를 다 끝냈는데, 단독정부 수립을 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으니 우리가 완전히 이용당한 것이다"
그는 김구와 남북협상 실패 문제로 김구.김규식 등과 대립하다 김구와 결별하고 한국독립당에서 떨어져 나와 사회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지한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조소앙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두고 정보를 빼내고, 그를 속였다. 하지만 조소앙은 남북협상 실패를 인정한 후 그 프락치들을 모두 내쫒아 버렸다. 그의 비서, 전남 광산 출신 김흥곤과 사범대를 나온 그의 아내가 프락치도 모르는 프락치 였다.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였다. 1950년 제2회 국회의원선거에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당시 상대가 미군정시 경무국장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조병옥이었고, 조병옥이 조소앙은 북한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소문을 내자 선거 당일 지프를 타고 자신의 건재함을 지역구에 알리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시 납북되었다. 북에서도 김일성에게 중립화 통일방안의 입장을 고수하기도 했다. 58년 9월 북측이 엄항섭 사건으로 엄항섭을 체포하자 이를 조작이라며 이에 항의하다 단식투쟁으로 병을 얻어 9월 10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다. 70년대 말에 평양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엄항섭: 1898년 경기 여주 금사면 주록리 출신이다.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칠 무렵, 3.1운동이 일어나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정의 국무원 법무부 참사에 임명된다. 1922년 항저우 지강대학을 수학하고 김구의 의정활동을 보좌하였다. 1929년부터 청년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 1월 창당된 한국독립단의 조직책이 된다.1932년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41년 의정원 의원이 되고 외무위원장을 맡았으며 1944년 5월에는 임정의 국무원 선전부장과 김구 주석의 판공비서에 임명되었다.
해방 후에 임정 1진으로 11월 23일 환국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으로 김구를 보좌하였다. 1946년 2월 1일 개최된 비상국민회의에서 선전위원장이 되고, 47년 3월 1일에는 국민의회 전국대표자 대회에서임시정부 확대 강화에 따른 정무위원이 되어 선전부장이 되었다.
1948년 4월 20일, 한국독립당 대표단 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갔으며, 돌아 와서도 김구를 따랐다. 6.25전쟁시납북 되었다. 58년 반당 반혁명 행위로 체포되었다. 1962년 7월 30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으며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고 한다.]
제2장 해방과 제주 좌익
제1절 좌파조직의 범람
앞에서 언급했듯이 1921년 1월 27일 좌익 단체인 '서울청년회'가 결성되는데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제주출신 김명식이 중앙집행위원이 된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되면서 1927~1931년 어간에 제주 공산당이 창당된다.
해방이 되면서 1945년 9월에 조선인민공화국 제주지부가 결성된다. 당시에 일본.만주.동남아 등지에 징병이나 노무자 등으로 나가있던 인원이 6만 명이나 들어와 갑작스레 인구가 증가되면서 인민위원회 소속, 치안대니 보안대, 청년동맹.부녀자동맹 등이 난립하며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친일파를 찾아 학교운동장에 집합시켜놓고 주민들에게 '어떤 형벌을 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어 곤장 10대하면 곤장 10대를치고, 직책 파직하면 직책을 파직시켰다고 한다.
한 예로 1945년 12월 12일, 지역일대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중문 면장 윤성종의 집에 몰려가 악랄하게 공출하여 가져간 놋그릇이며 쌀.보리 등을 내놓을라고 윽박지르자 윤성종이 못내놓겠다고 버티자 주민들이 윤성종을 죽이라고 소리지르며 청년들이 달려들어 폭해을 하게 된다. 이를 신고받은 경찰과 미군이 트럭 1대를 타고 와서 마을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상예리 농민 김행오(37세)가 경찰 총에 맞아 죽게 된다.
또한 예로 해방과 동시에 고향으로 들어온 일부인원이 한라단을 조직하여 일제에서 앞잡이 노릇을 한 친일부역자 명단을 작상하고 특히 징용업무를 담당한 제주도청 노무계장 집으로 달려가 찾아내서 집단 구타로 초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소식이 퍼지며 친일행각의 부역자 경찰이나 공무원들이 잠적해 들어갔다. 이렇게 되어 한라단원과 공산당 치안대간에 혈투가 벌어지며 숫자가 적은 한라단이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사실상 제주도는 사실상 좌파의 치안대가 장악하고 정부 행세를 하게 되었다.
제2절 제주도 좌.우익의 세력 비교
1945년 9월 8일에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이미 조선땅에 와 있던 일본인 고위관리 60여 명을 남게하여 미군정을 돕게 했다. 그리고 11월 9일 미 제59군정 중대가 제주도에 도착하면서 제주도 인민위원회와 마찰을 갔게 되었다. 미군은 총독부의 기구 및 인원을 그대로 활용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니 인민위원회 산하 치안대와 보안대는 불법단체가 되어 반항하기 시작했다.
1946년 8월 1일 스타우드 소령이 제주지사에 임명되고 박경훈은 한국인 도지사에 임명되었다. 미군정은 경찰을 증강하여 1945년 8월 15일 남한에 총 8,000명이던 경찰이 45년 12월 말까지 15,000여 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1. 좌파 조직
1946년 11월에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신민당, 백남운의 남조선 신민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합당 되고 남로당 제주도당이 등장하게 되었다. 좌파 청년단체는 인민위원회 산하의 청년동맹이 제주도를 장악하고 있다가 '47년 1월 12일 민전산하 민청이 발족되어 읍.면.리까지 조직되고, 그 후 남로당 산하 민애청으로 개편되었지만 조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각 마을마다 민애청에 가입하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6년 12월 입법위원 선거에 문도배,김시탁 등 인민위원회 소속 좌파세력이 모두 선출되어 좌파의 세를 과시했다.
2. 우파 조직
1946년 2월 8일에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제주지부가 조직되어 위원장에 박양상이 되었으며, '46년 7월 14일 한국독립당 제주지부가 결성되었다. 대한독립촉성 청년동맹이 발족되고, 광복청년회가 조직되면서 '47년 이 두 단체가 대동청년단으로 합쳐졌으나 회원은 불과 1,000여 명 정도로 미약하였다.
제주도는 원래 전라남도에 속해 있다가 1946년 8월 1일에 제주도로 승격된다. 이로 인해 '46년 9월 11일 제주경찰청으로 승격되고 서귀포경찰서가 신설되어 제주에는 제주경찰서와 서귀포경찰서가 있게 되었고 경찰관도 '45년 8월에 100명이 '46년에는 200명이 되었다.
3. 남로당 제주도당 세 확장
'47년 2월 23일 제주도 읍면 좌파 대의원과 단체 대표 315명, 방청객 200여 명이 제주읍 조일구락부에서 민전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친일파들의 동향보고와, 대구 10월 폭동으로 투옥된 동무들 석방문을 작성하여 하지중장에게 전달하기로 결의 한다. 애월읍에서는 대의원 425명, 참석자 1,500여 명이 모여 민청위원장을 선출하는 등 조직이 재정비 되고, 제주읍 부녀동맹도 조직이 재정비 되는 등 제주지역은 좌파들의 독무대로 변해갔다.
제3장 제주도의 좌. 우익 충돌
제1절 한반도의 3.1절 행사시 좌.우충돌
'46년 3.1절 기념행사 때 전국은 좌우로 찬탁과 반탁의 격렬한 대결을 하게 된다. '47년 3.1절이 또 돌아오고 있었다. 서울의 남로당은 민전을 중심으로 남산공원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미군정에 집회허가를 받았다.
'47년 3월 1일, 남산에는 남로당 간부 이주하와 김삼룡이 당 간부들에게 총동원령을 지령하자 각 지역 세포들이 피켓과 현수막을 만들고 민청은 행사장 경비를 하고 밤낮으로 선전운동을 하여 행사 당일 남산을 사람으로 뒤덮이다시피 하였다.
'47년 3월 1일 12시에, 서울운동장에서는 우익이 행사를 했다. 미군정의 하지중장을 대신하여 브라운 소장이 참석했다. 이 행사는 반탁을 외치며 1시 30분에 끝났다. 당초 약속은 시가행진이나 데모 등은 않기로 했으나 우익청년들은 곧바로 해산하지 않고 미군정청 앞 광화문 서대문 서울역 시청 앞에서 행진을 했다.
좌파 진영인 민청을 중심으로한 남로당은 3.1절 행사를 11시 30분에 시작하여 오후 3시 30분에 끝났다. 행사를 끝낸 청년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남산에서 남대문쪽으로 내려오다 남대문에서 우익진영 청년들과 만나게 되었다. 양쪽은 함성을 지르며 서로 죽여라고 소리지르며 투석전으로 맞서게 되는데 총소리가 요란하여 보니, 기마경찰을 수도청장 장택상이 인솔하여 나타났다.
장택상이 현장에 나타나서 보니, 이미 양 진영은 모두 흩어지고 우익 청년만 두명이 죽고 40여 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경무부장 조병옥이 3.1절 행사에서 발생한 좌.우의 폭력사태로 사망 16명, 부상 22명이고 사울에서의 사건은 허가없이 벌어진 일라고 발표했다.
수도청장 장택상은 좌익측에서 무장대를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우익에게 발포한 사건이라 발표했다. 이로인해 서울은 남로당에 대한 나쁜 여론이 분분하였고, 기자들은 장택상이 거짓말을 했다고 성토했다. 오히려 경찰이 발포해 놓고 뒤짚어씌운다고 발표하여 서울은 다시 한번 벌집이 되었다.
이에 장택상은 수도청에 출입기자들의 진입을 막았다. 그러자 남로당은 바로 이런 것을 이용해 역전선에 활용하여 위조지폐사건이나 대구폭동사건이 모두 경찰의 잘못으로 발생했고 조병옥과 장택상의 잘못이라고 선전하여 국민들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남로당은 활기를 되찾았다.
부산에서는 민전주최로 3.1절 시민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왜 친일반역자를 처단하지 않는가, 이승만은 이완용과 같은 사람이다" 등의 축사가 이어지자 이 연설을 듣고 있던 광복청년단원 3명이 연단에 올라가 욕설을 퍼부으며 연사를 구타하자 민전 청년들이 "저 새끼들 죽여라"라고 소리치며 우르르 몰려들어 격투가 벌어지자 주위의 관중들이 돌을 들어 연단에 던졌다. 연단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경찰이 출동하여 발포로 7명이 죽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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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전?
미군정 시기 대한민국의 정치 단체로 1946년 2월, 서울에서 결성된 좌파 게열의 연합이다.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줄여서 민전이라 한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놓고 한반도의 이남지역에서는 좌우로 완전히 갈라져 대결하는 이념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심화 되었다. 결국1946년 2월에 한반도 이남 지역에 좌파계열 정당 및 사회주의 단체가 집결하여 결성되었으며 의장단에 박헌영.허헌. 김원봉. 백남운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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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47년 3.1절 행사는 제주,정읍.인천.군산.부안.부산.영암.영월 등 찬탁과 반탁으로 좌우 진영이 갈라져 격돌장이 되었다. 그러나 제주는 우익이 약하여 좌익의 일방적인 선전장이 되었다. 그래서 경찰과 군인이 얽히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제2절 '47.3.1 제주도 발포사건
제주도에서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의장단이 제주도 군정청에 제주 북초등학교에서 3.1절 기념행사를 하겠다는 허가신청을 제출한다. 그저자 미 군정청은 제주 비행장에서 가지도록 통보했다. 그러나 제주 남로당은 계획대로 북초등학교에서 불법 집회를 강행했다.
경찰은 제주 경찰 345명에 '47.2.23일 충청도 응원경찰 100여 명을 지원받게 된다. '47.3.1일 오전 9시경 오현중학교 운동장에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삽시간에 2,000여명이 넘었다. 여기서의 결의문은 북초등학교에서는 민주주의 애국투사 석방, 인민항쟁 관계자 석방,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 철회((위조지폐 사건으로 북으로 도주하였다), 일제적 통치기구 분쇄, 입법의원 타도,정권을 즉시 인민위원회에 넘겨라 등이고 오현중학교에서의 학생 결의문은 3.1정신으로 독립을 쟁취하자. 모스크바 삼상회를 절대 지지한다(북한과 남로당이 신탁지지) 등이였다. 너무 많은 학생 25,000여 명(17,000명이 좌익성향이고, 8,000명이 일반군중)이 모이게 되자 기마경찰이 운동장으로 진입하여 해산을 명하자 오히려 학생들은 "미군은 물러 가라 "등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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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이 사건은 1946년 5월 미군정 시기에 정판사에서 공산당의 통제로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사건으로 결말이 났다. 조선공산당의 당원인 은행직원이 이관술의 지휘하에 10만 원의 위조지폐를 만들다가 야간순찰 중인 미군정청 수도경찰에 적발 되었다.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이 조선정판사에 있는 지폐 원판을 이용, 선전활동비 등 당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남한 경제를 교란시키기 위해 모두 6차례에 걸쳐 1천2백만원의 지폐를 위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일본인 건물이던 근택빌딩 1층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인쇄소가 입주해 있었다. 적산관리법에 따라 미군정으로부터 건물과 함께 인쇄소까지 불하받은 공산당은 인쇄 이름을 "조선정판사"로 고치고 기관지 해방일보를 인쇄했다. 이때 인쇄소 직원들은 모두 일제 때부터 일해온 이들을 재고용했다.
그러나 최근 진실규명 위원회에서는 당시의 재판과정과 진술 내용 등을 근거로, 이 사건은 미군정이 독립운동가와 노동자에게 "조선정판사"라는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누명을 씌운 조작사건이라 한다.
사건의 피의자 이관술.박낙종.송언필.신광범.권오직은 독립운동가이며 경찰 노덕술.이구범.최난수.검사 조재천.판사 양원일은 친일파라 했다. 특히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일제 강점기에 그를 수차례 고문한 고문기술자가 노덕술이라는 점에서 노덕술로 대표되는 미군정과 결탁한 친일파와 이관술로 대표되는 독립운동가의 대립이 부정할 수 없는 사건의 중요한 본질이 되고, 이 사건의 결과로 친일경찰 체제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발생한 뚝섬 위조지폐사건을 알아야 한다
일제 패망시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은 불법 조선은행권 인쇄를 남발하는데 근택인쇄소에 인쇄명령을 내린바 있다. 조선은행권은 원래 일본에서 제조하여 반입하다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에 인쇄했다. 그런데 일본 패망시 조선통독부는 퇴각자금으로 사용하려고 엄청난 양의 조선은행권을 불법 인쇄하게 되는데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로만은 안되니 사설 인쇄소를 동원하게 된다.
이 때 근택인쇄소 인쇄공 김창선이 위폐를 인쇄할 수 있는 징크판을 빼돌려, 배재룡.랑승구.랑승헌 등 뚝섬위폐단에게 팔아 넘겼다. 김창선은 근택인쇄소 직원이었으나 조선공산당의 근택빌딩 입주 후 정판사 직원이 된다. 김창선은 또 징크판을 빼내서 팔아보려다 경찰에 검거된다.
뚝섬 위폐사건의 피의자 중 이원재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둑섬지부 조직부장이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권유로 만들어진 우익단체였다.
뚝섬 위폐 사건에 독촉이 연관되어 있어 미군정이 지원하던 우익단체인 독촉이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였기에 미군정은 우익을 보호하고 좌익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미군정경찰은 뚝섬 위페사건 피의자 중 김창선이 정판사 직원임을 알게 되자 1946년 5월 8일 정판사를 급습하여 정판사 직원 14명을 연행하여 취조한다. 정판사 직원들은 1946년 2월 경 일괄적으로 자신들을 고용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기에 1946년 5월 체포 당시 모두 공산당원이었다.
정판사 사건 피의자들은 고문을 당하며 조선공산당 간부의 지시로 위조지폐를 인쇄했다는 진술을 강요받았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당시 조서에 참가한 대부분의 경찰은 친일 경찰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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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기마경찰이 지나가다 6살 어린이를 치고 그냥 가버린 사건(?)이 발생하여 여기에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경찰을 죽여라"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군중이 불어나게 되고 말이 놀라서 경찰서로 뛰어들게 되자 망룽에서 보초를 서던 육지경찰이 놀라서 경찰서를 시위대가 공격하는지 알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가하였다.
시위대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6명이 죽고 6명의 중상자가 발생한다. 도립병원으로 환자들이 이송되어 오는데 당시에 도립병원에 경찰관 2명이 교통사고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부상인원들이 밀려오자 대구폭동사건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총상환자들이 들이닥치는 현관 문을 향해 총을 난사하게 되었다.
이번 제주 3.1절 행사에 참여한 인원이 10만여 명으로 제주도 30만의 1/3이 좌파주도의 행사에 참여했다는 결론이고 좌파들은 우파들에게 행사에 참여하지 안했다며 테러를 하기도 했다.
위와같은 경찰 발포 소식이 금방 제주도 전역에 퍼져나갔다. 제주도 도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제주경찰은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통금을 시키고, 응원 경찰을 요청하여 서울 경무국에서 목포 경찰 100명을 3.1절날 오후 5시에 목포항을 출발하게 하였다.
좌파위주의 3.1절 준비위원회는 경찰에게 합동조사를 요구하지만 경찰은 시위대가 먼저 경찰관서를 공격하려고 해서 자체 방위상 발포하였다며 이에 응하지않고 테러에 가담한 주동자들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제3절 남로당 제주도당 3.1사건 투쟁위원회 조직과 총파업
좌파들은 '47.3.5일 도당간부 수십 명이 제주읍 삼도리에 모여 투쟁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당의 영웅적 대중투쟁을 통한 합법 투쟁과 미제 및 반동 진영의 약체화에 대한 결정적 최후적 투쟁을 강조하고 제2혁명단계로 대중적 투쟁에 의한 완전한 사상적 무력적 준비를 강조한다.
제주 남로당에서는 여기에 동조하는 차원에서 직장 총파업과 기타 투쟁방법의 지도, 당 외 투쟁조직으로 남로당에서 표면화 되지않은 인사로 3.1사건 대책위원회 조직, 3월 10일을 기하여 총파업, 발포 책임자 강동효 경찰서장 및 경찰관을 살인죄로 즉시 처형 등의 방침을 내걸었다.
이에 따라 투쟁위원회와 남로당은 미군 책임자의 사과, 미.소 공위를 즉각재개(신탁찬성 유도), 조국의 분단 음모 제거(적화통일 지지), 인민공화국 만세 등을 외치고 여성동맹 등은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벽에 붙이며 도민 선동에 나섰다.
드디어 '47년 3월 10일 제주도내 모든 관공서.공장.회사.심지어 파출소.면사무소.상점까지 총파업에 가담하여 제주도내 모든 행정이 마비 되었다.
'47.3.12일까지 제주도내 모든 관공서.은행.회사.중학교.초등학교.교통.통신.면사무소 등 165개 단체 41,211명이 총파업에 들어가고 제주도를 마비시켰다. 순경도 65명이 가담하였다.
제4절 경무부장 조병옥의 수습방안
미군정에서는 조사단장에 하지사령부의 카스티어 대령을, 그리고 수도경찰청 수사과 고문관 레더루가 조사위원이 되어 3월 8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정밀하게 조사를 시작했다. 이 조사결과 경찰의 발포사건이 잘못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자 당시 제주도 감찰청장 강인수가 3월 11일 유감을 표하고 처음으로 경찰의 잘못을 시인하였다.
제주도 모든 기관이 총파업에 돌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조병옥은 수행비서를 데리고 3월 14일 미 수송기편으로 제주도로 향했다. 제주도에 도착하여 제주도 감찰청장 강인수로부터 3만에 가까운 시민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격을 가했닥고 보고하고, 시민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들이 바로 남로당이라 하였다.
정당방위인 사건을 가지고 총파업을 하는 것에 대해 강경진압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47.3.15일 전남북 경찰을 제주에 응원토록 하여 당일 전남 122명, 전북 100명, 경기 99명의 총 321명이 제주도를 향해 떠났다.
조병옥은 가는 곳마다 연설을 하여 응원경찰을 동원하여 파업 주동자들을 즉시 검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이에 강청장은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무조건 연행하라 하여 제주도민의 불안이 증폭되어갔다.
제주도의 젊은이들은 "경찰에 잡히면 죽는다,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다"하고 일본으로 육지로 일부는 모슬포의 제9연대로 입대하여 경찰의 추격을 피했다. 이것이 후일 제9연대에 좌익이 많아 진압작전에 많은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한번은 조병옥 일행이 애월면을 순시하는데 벽보에 총파업을 알리는 벽보가 도배되어 있었다. 그래서 애월지서에 들어갔는데 경찰이 한 명도 없었다. 경찰 지서장이 파업 성명서를 붙이고 모두 파업에 동참한 것이다. 그리고 한림지서에 가서 현황을 청취하니 면사무소가 파업본부 있다고 지서장이 보고하자, 공무원들이 이렇다면 분명 공산당이 조종했을거라 믿고 취조를 통하여 그 실체를 밝히려 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육지에서 온 경찰들은 "내가 다 안다, 너 빨갱이지?"하고 고함쳐 윽박질렀으나 대부분 묵비권으로 맞서는 것이다 사실 당시에는 좌익이라도 처벌할 법이 없었다.
조병옥이 한림을 떠나 모슬포 대정지서에 가니 썰렁했다. 벽에는 "미 제국주의 물러가라"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러자 조병옥은 강청장에게 이번 총파업은 남로당 빨갱이들이 도민을 선동하여 일으킨 일이라고 강조하고 파업에 동참한 불순한 자들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강조했다. 조병옥은 강청장에게 이번 파업에 동참한 경찰 66명을 즉시 파면하라고 지시한다.
강청장은 즉시 파업에 동참한 경위1명, 경사 8명 순경 57명을 파면하고, 제주출신 경찰을 불순하게 보고 중요부서에는 육지에서 온 경찰로 교체시키고 제주출신은 한직으로 발령하자 파업에 동조하지 않은 경찰들도 불만을 갔게 되었다.
제주도에 6일동안 머무른 조병옥은 떠나기에 앞서 담화문과 성명서 등을 통해 파업의 부당함에 엄중경고함과 아울러 제주도립병원 앞에서의 발포행위는 경찰관의 잘못이라 인정하며 당시 경찰관을 처벌하겠다고 하였다. 따라서 작금의 파업은 연합국의 일원인 미군정에 대한 반항으로 취급당하게 됨을 자중해야 하고 희생당한 이에 대한 한없는 동정과 조의를 표하고 이제 직장으로 모두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묘한 반전은 제주지사인 박경훈이 사직을 하고, 4월 7일 민전 의장에 추대된다.
제5절 총파업에 대한 미군정의 조치와 경과
미군정에서는 제주지사 박경훈의 후임에 전북 출신이며 한독당 농림부 장관을 역임한 유해진이 부임하고 강 청장 후임에는 서울 출신 김영배가 3월 31일 부임하였다. 제주 제9연대장은 장창국 후임으로 이치업 소령이 5월에 부임한다.
김영배 감창청장(경찰청장)은 경찰도 파업에 가담한 사실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깜짝 놀라 제주 출신 경찰에 대해 사상적으로 의심하게 되었다.그래서 핵심부서는 육지출신으로 교체하고 제주출신은 한직으로 보냄으로써 자연적으로 불평 불만을 갔게 되고, 100여 명이 사표를 제출했다.
파업을 선동한 500여 명을 체포하여 199명을 기소하고 61명 기소예정, 178명 계속 구금, 258명을 석방하였다. '47년 5월 7일 육지에서 응원온 육지 경찰 400명은 제주도를 떴다.
새로 부임한 제주지사는 부임 당시에 경호원으로 서청단원 7명을 데리고 와, 이들이 밤에 지사의 관사를 경비하였다.
경무부에서는 5월 7일 응원경찰을 본대에 귀대시킨 후 제주 경찰만 가지고는 치안이 어려울 것 같아 반공청년단체인 서청단원을 계속 제주도에 상주시켰다.
1. 3.1사건 파업 해제
3월 16일 남로당 제주도당 3.1사건 대책위원들은 파업을 해제하는것이 옳다고 의견이 모아져 도청을 중심해서 관공서부터 해제하기로 하였다.
3월 19일 파업에 가담한 174개 단체에서 56개 단체가 파업을 해제하고 118개 단체는 파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관공서들은 파업을 해제하고 학교와 일반단체만 해제하지 않았다. 학생들도 3월 24일부터 조금씩 등교하여 3월 말에는 엄청난 피해를 가져온 파업이 거의 해제되었다.
2. 서청 제주도에 투입
서청은 평남청년회,함북청년회,함남대한혁명청년회,황해청년화 등이 통합하여 '46년 대구사건 후 11월 30일 서울에서 조직된 우익단체다
서청대표는 정주출신 선우기성이었다. 회원은 약 6,000명이었으나 '47년 6월에는 약2,000명으로 줄었다. 이들의 목표는 '조선의 국제 문제를 방해하는 음모자들을 제거한다'였다. 즉 반공이었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가 없었다.
서청은 원래 해방직 후에 소련이 북한에 들어와 공산당 때문에 살 수 없어 월남한 인원들이다. 이에 따라 북에서는 서청인원의 가족들을 수감하거나 살해하고 추방하거나 재산을 강탈하였다. 이에 서청단원들은 공산주의라면 이를 갈며 한을 품었다. 그들은 막상 남으로 내려왔으나 먹고 살기가 막연했는데 그렇다고 미군정이 지원해 주지도 않았다. 이승만과 조병옥이 이들에게 약간의 경제적 지원을 했고, 조병옥이 이러한 서청을 제주에 보냈다.
서청은 민청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반면 민청은 본인들이 제주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서청이 갑작스레 나타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자 서로간 적개심이 극에 달해갔다.
민청 회원 수는 전국에 17,671개 지부에 826,940명으로 서청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병옥이 하지 중장에게 민청은 남로당의 외곽단체로 테러 단체이므로 해산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지 중장이 그러면 서청도 해산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자 조병옥은 현재 경찰의 힘만으로는 치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설득하여 47년 5월 16일 민청은 해산되었으나 서청은 그대로였다. 그러자 민청은 '47.6.5일 이름을 바꾸어 민애청으로 다시 출범하여, 민애청과 서청은 극과 극이었다.
3. 3.1발포사건의 결과
이 사건은 경찰의 잘못된 발포가 도하선이 되어 결국 156개 단체 41,211명이 파업에 가담하였다. 무엇보다도 관공서, 경찰 등이 일부 가담하면서 치안 부재가 되었다. 결국 제주감찰청장과 제주 지사가 도중 책임을 지고 바뀌고 육지 경찰이 일시적으로 들어와 중요 직책을 담당하면서 오히려 제주출신 경찰들의 불평과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경무부 조병옥이 사건 해결을 위해 제주도를 6일간 순방하며 실체를 파악, 남로당의 후원하에 이런 총파업 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보고 사건을 일으킨 경찰을 파면하는 선에서 책임자를 처벌하고, 대신 파업에 가담한 500여 명이 체포되어 330명이 재판을 받아 52명이 실형 선고를 받게 된다. 파업에 가담한 경찰 66명도 파면된다.
대구폭동사건을 경험한 응원경찰이 공포에 질려 순간적인 판단 실수로 벌어진 사건으로 경찰이 계획적으로 발포한 사건은 아니였다.
이 사건으로 제주 남로당의 세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좌파들은 기관이나 정부에서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과대 포장하여 국민들을 선동하여 세를 확장해 나가는 것이 전략전술이다. 좌파들은 부정 부패나 빈부 격차를 교묘히 이용하여 국민을 선동하고 이간질하기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4. '47.8.12일 전국 남로당 간부 검거
7월 20일 남산에서 민전이 주최한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 인민대회 때 좌파 20만명이 모였다.
이에 조병옥 경무부장은 8.15행사를 기해 남로당에서 전국적인 폭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에 의해 경찰측은 이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하여 좌파단체 간부들을 전원 체포하라고 전국 경찰에 명령을 내렸다.
8월 12일 밤부터 전국 경찰은 일제히 좌파 간부 검거에 나서 남로당, 민전, 전평, 전농 등 좌익단체 간부 1,300여 명을 연행했다. 이에 좌파에서는 좌파를 제거하려는 수작이라 항의하였다.
제주도 경찰도 8월 14일 민전 간부와 남로당에 가입하였던 공무원을 연행해 갔다. 연행자 중에는 전 제주지사 박경훈, 조천면장 출신 민전부의장 김시범, 도청직원 8명 등 30여 명이 연행되었다. 일부 간부들은 연행 당하지 않으려 육지나 일본으로 도망쳐야 했고, 도망치지 못한 사람은 연행당하지 않으려 한라산으로 숨어들어 갔다.
이에따라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좌익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던 우익은 좋은 기회라 판단하고세력 확장을 하기 시작했고, 경찰도 '47. 7월에 제주경찰학교를 설립, 12월까지 146명을 배출하였다. 이에 제주경찰은 465명으로 증가하였다. 따라서 남로당의 활동은 점점 약화되었고, 남로당에 가입한 공무원에 대해서 권고 사직 등으로 일제 쇄신을 꾀하였다.
남로당 제주도당도 이때부터 중앙당 군사부 조직과 같이 군사부를 신설하여 군사부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해 갔다.
제4장 남로당 5.10선거 반대와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 발생
제1절 신탁통치 결정 배경과 내용
여러 장에서 인용되겠지만 신탁통치 문제는 1939년 제2차세계대전 당시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과 영국 미국 소련 중국의 연합국의 전투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전세가 기울게 되자 1943년 12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일본에 대한 군사행동과 전후 처리를 논의 하게 되며, 이 회담에서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보장받게 된다.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에 관한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소련군이 1945년 8월 11일 한반동에 진주한다.
독일이 항복하자 1945년 7월에 연합국들은 독일 포츠담에서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 하며 , 포츠담 선언를 통하여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고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하였으나 일본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나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양분으로 38선이 그어지고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군이 들어오게 되었다.
1945년 12월 미.영.소 3국의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 하면서 힌반도 문제가 다루어져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과 이를 톱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고, 최고 5년 신탁통치 실시가 결정되었다.
사실 미국은 '45년 9월에 한반도의 38선 문제를 지연시킬 경우 분단이 고착화 될 것을 우려하여 하지중장에게 평양의 소련 치스챠스코프와 직접 교섭토록 하여, 하지가 접촉을 시도 했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를 '45.9.24일 본국에 보고하였다. 그러다 1945년 10월 24일 미국무성 극동국장 빈센트가 미국 외교정책협의회 석상에서 '조선에는 우선 신탁통치를 실시할 예정이다'라는 발언이 터져나와 한반도의 각 사회단체들은 민감한 반응으로 서로의 이익을 저울질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945년 10월 13일, 초기 기본훈령으로 한반도에서의 군사점령을 통합한다는 것과 단일 행정기구를 설치한다는 내용이 작성되었다. 당시 미국은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울 계획도 없었고, 공산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중립적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면서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남한에 혼란을 가중시킨 것은 사실이다. 즉 미국은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세우려고 이런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나 소련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에서 인민위원회를 앞세워 공산국가를 세우고자 전력을 다해 미국 하지 중장의 신탁통치 협상을 거절했다.
1945년 11월 18일 미국 정부는 소련주재 미국 대사 해르만을 통해 소련 외상 몰르토프에게 서한을 보내 교섭을 요청했으나 소련은 거부하였다. 이유는 신탁통치가 되면 영국과 중국이 미국 편을 들어 소련의 발언권이 약해지고 회담때마다 미국의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45년 12월 16~26일 소련에서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을 가져 한반도에 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대 전제하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한반도의 정당 사회단체와 협의하고, 미.소.영.중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에 관한 협상을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상의 내용이 '45.12.27일 발표되자 이때부터 김구를 중심으로 우익은 반대하였고 좌익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처음에는 반대하였다가 북한을 갔다 온 뒤로 결사적으로 찬성으로 돌아섰다.
제2절 1.2차 미소 공동위원회
미.소공동위원회는 예비회담을 1946년 1월 16~2월 6일까지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된다. 38선을 경계로 미소 분할점령에 따른 전력,교통,통신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미소로 입정차이로 결렬된다.
미국은이 회담에서 우선 정치적인 논의는 배제하고 38선을 철폐하고, 전국을 하나의 경제적 행정적 단위로 묶자는 입장으로 임했다. 하지만 이미 소련은 북한의 공산화가 진행되고 있는 과정이었으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미국측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문제들을 의제로 내걸었다.
우선 정치적인 문제 해결없이는 미소의 분할점령 이후 적용된 이원적 체제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나아가 쌀문제와 전기문제를 연계하여 열악한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려 북한의 원자재 및 다른 상품과 교환조건으로 남한의 쌀을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다 당시에 남한도 쌀 부족을 겪고 있어 들어줄 수 없다고 한다. 이에 소련은 전력을 포함한 교역문제를 더이상 할 수 없다고 선언하게 된다. 따라서 미.소는 제1차 회담을 '46.3.20~5.9일까지 남한의 덕수궁에서 갖기로 합의했다.
1. 1차회담
덕수궁에서 진행된 회담에서 양측은 3월 말, 향후 회담의 방법에 합의하여 순주롭게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 대상이 되는 정당, 사회단체, 선정 문제에 들어가자 난관에 부딪친다. 소련이 찬탁인 단체나 정당과 협의해야 한다며 반탁인 남한의 대부분의 우익정당이나 단체와는 협의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반면, 미국측은 민주주의를 근거로 반탁운동참여 유무가 협의 대상을 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게 된다.
회담이 난항을 거듭된 가운데 소련이 먼저 과거에 반탁을 했더라도 향후 찬성으로 돌아선 단체나 정당은 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유화적 제스쳐를 내밀자, 미국은 우익 단체들을 설득(미소공동위원회의 결과를 존중하고, 먼저 회담에 임하자는 제안)하여 대부분의 단체나 정당이 서명하고 참여를 결정하였다. 그러자 소련은 반탁단체의 참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여 제1차 회담을 결렬되었다.(*당시에 김구와 이승만은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를 결사반대하였고, 남로당은 적극 찬성하였다.)
2. 2차 회담
다시 미소공동위원회 회담은 '46.가을부터 미.소의 필요에의해 상호 접촉이 이루어지고 '47.4월에 미국의 마샬 국무장관과 소련 외상 몰로토프간에 합의가 이루어져 '47.5.21~10.18일까지 진행된다. 남한의 많은 반대세력인 우익도 일부 참여를 선언하는 등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6월 25일에는 미소공동위원원들과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앉기도 했다.(당시에 남한에서 참가할 단체는 425개였으며, 이중 반탁에 속해 있는 170개 단체중 결사반대는 24개였다)
그러나 7월 초순, 협의 대상인 정당. 사회단체의 명부 작성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 과정에 소련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유령단체,그리고 반탁투쟁위원회에 가입한 단체들을 제외해야 한다며 주장하여 결국 8월 말 경 실질적 결렬상태가 되었다.
당시에 소련은 이미 북한의 김일성을 사주하여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침략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남로당은 '47.7.29일 간판을 내걸고 합법적인 찬성활동을 하며, 남산공원에 20만이 모여미소공동위원회 성공 촉진 인민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에 우익 진영은 반탁시위를 치열하게 전개하여, 6월23일 학생들의 반탁데모를 회담장인 덕수궁 정문 앞에서 진행하고 공위대표단에게 투석을 하여 공포분위기도 조성했다.
'47.8.12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남로당 중앙본부 사무실을 수색하여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의 발행을 취소시키고 8월12일까지 1,300여 명의 남로당원을 체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마샬 국무장관이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논의할 것을 제안하고 소련은 반대하게 되자, 미국은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총회에 상정하여 가결하게 된다.
제3절 한반도 통일문제 미군정 유엔에 상정
'47.8.29일 미국의 로버트 국무차관은 '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포기한다하면서 대신 한국문제를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임시입법의한 선거를 하여 남북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소련측에 제안했다. 그러나 침략준비에 들어간 소련이 받아드릴리가 없었다. '47.9.4일 소련은 거부의사를 발혔고 이에 관게없이 9월 17일 미국은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연합에 이관하기로 결정, 제3차 유엔총회 의제로 제출하였다."
사실 이 사안에 대해 일부 의견이 미국이 골치아픈 한반도문제에서 빠져나가려는 계획이었다고 꼬집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미 군부가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여 미군의 철수를 요청하였고, 의회는 대한 경제 원조를 거절하였으며, 미 국민들도 대구폭동사건의 잔인성을 보고 한국 문제에 불평이 높아지고있었다. 남한에서도 김구 선생 등 일부 국민들이 미군정 정책에 대해 불만을 나타냄으로써 접합점이 없지않아 있었다고 보여진다.
'47. 9. 23일 유엔은 소련의반대에도 미국 제안을 41:6 기권6으로 가결했다.
'47.10. 28일 유엔은 한국 문제에 있어서 미국 안은 선 정부수립, 후 외국군 철수였고, 소련은 선 외국군 철수 후 정부수립으로 맞섰다. 투표결과 41:0으로 미국 안이 가결되었다.
유엔은 '48. 3. 31일 이전에 한국에서 동 위원단의 감시 하에 인구 비례에 따라 보통선거 원칙과 비밀투표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부가 구성되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은 철수한다라고 결의 했다. 그러나 북한으로의 유엔 감시단 진입은 소련군의 입국 거부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에 유엔은 '48. 2. 26일 유엔 감시하 남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한다는 미국측 제안이 31:2로 가결되어 '48. 5.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 되게 되었다.
제4절 5.10선거 반대 활동
이에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 선생은 "단선은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한다"라는 주장을 하며 2월 북조선 지도자들에게 '통일 민주정부의 수립을 위한 제반 조처"를 토의하기 위해 남북한 정치지도자 회담을 제의하였다. 김구 선생은 신탁을 반대하다 이제는 5.10선거도 반대하고 남북이 협상하자고 제의하여 정책의 일관성 결여되어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고, 김일성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4월 14일 평양에서 열도록 합의 하였다.
1. 전국 남로당 5.10선거 반대 2.7폭동
김구선생이 신탁통치안인 남북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5년동안 미.소가 협력한 다음 한반도에서 철수한다는 신탁 안을 반대하고, 남북한 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세운 후 외국군을 철수한다는 안은 김구와 박헌영, 북한이 반대하니 미국은 참으로 한국이 골치아픈 나라였다.
북한은 인구비례 투표는 인구 수가 적어 불리하기에 당연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김구선생이 반대하는 이유는 미국측에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김구선생도 기반이 적어 이승만에 밀리는 상황이었기에 반대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 남북한 총선을 하면 가장 유리한 사람이 이승만보다 박헌영이었다. 다만 박헌영이 위조지폐사건으로 38선을 넘어 북으로 숨어들어가 김일성과 같이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것이 비극이었다.
남로당은 사실 통일정부가 되어야 희망이 있지 남북의 정부가 따로 들어서면 남로당은 북한에서나 남한에서 설자리가 없었다. 따라서 남한의 단독선거는 남로당의 사활이 결려 있는 것이였다. 그러니 김구선생이 단독선거를 반대하니 천만다행이었다.
이에 박헌영은 당의 운명을 걸고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해야한다고 김삼룡에게 지령을 내렸다. 남로당 간부들은 민전산하 130개 단체에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하게 되었다. 이 지령으로 '48년 2월 7일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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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룡
충북 충주 출생, 어려서 시골의 학당을 다녔고 다른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다. 서울 동대문 밖의 고학생 자활단체인 고학당에 관계하였다. 1934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간부였던 이재유를 중심으로한, 이관술과 그의 누이동생인 이순금(김삼룡의 처), 이현상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여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다가 1937년 이재유가 검거되자 고향인 충주에 은신했다.
1939년 이관술.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조치하자 상경하여 경성콤 그룹을 조직하고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을 맡았다. 1939년 출옥한 박헌영의 지도로 경성전기.대창직물.경성방직.용산철도공작소.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 확장에 기여하다 1940년 12월 조직선이 들어나 일제에 잡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감하여,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서 김형선 등과 함께 조직책을 맡아, 먼저 출범한 장안파 공산당을 약화시키고 9월 11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조지국책을 맡았으며, 1946년 2월 115일 좌익단체의 연합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 하였다. 1946년 9월 박헌영.이강국 등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였다.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동하여 출범한 남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후보로 조직부장을 맡았다.이승엽 등과 함께 남로당 지하운동을 조직 지도하였으며,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노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로 활약하는 등 이주하와 함께 지하조직에 몰두 하였다.1950년 3월 27일에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그 뒤 남침을 준비하면서 평화공세를 벌이던 북한의 조만식 선생과의 교환협상이 오거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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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생산기관,교통,운수기관,영남,호남까지 파업과 폭동과 파괴가 자행되었고 전화 전기선이 절단 되고 경찰지서도 습격을 당하였다. 부산,삼척,화순 등지의 해상과 탄광까지 파업에 들어가고 중학교와 대학에서도 동맹휴학을 벌이게 되었다. 남로당의 투쟁 목표를 보면 요즘 우리 사회의 투쟁문화와 비교해 보면 좋은 비교가 된다.
가.조선의 분할 침략을 계획하는 유엔 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나.남조선 단독정부를 반대한다
다.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통일민주주의 정부수립을 우리 조선에 맡겨라
라.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파를 타도하자
마.노동자 사무원을 보호하는 노동법과 사회 보험제를 즉시 실시하라
바.노동 임금을 배 이상 올려라
사.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라
아.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라
자.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
이상의 구호에서 5.10선거 반대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경찰은 대구사건을 교훈삼아 남로당의 폭동이 있을 것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하여왔다. 단 하루 만에 폭동을 진압했지만 그 피해는 사망, 경찰이 15명. 선거공무원 15명. 후보의원 2명.공무원11명. 양민 107명 등 230명이었다. 여기에 경찰서 피습 26건. 무기 약탈 12건. 동맹 휴교 60건. 파업 14건. 검거인원 8,479명 참가 인원은 약 30만 명이었다.
이후 남로당의 젊은 당원들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38선을 넘어가고, 아니면 산으로 도망치거나 경비대에 입대하였다. 남로당은 육지에서의 5.10반대 투쟁을 제주도로 선택하였다. 그 이유는 경찰이 출동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한라산이라는 지리적 배경, 남로당이 건재하고 제주도민이 열성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판단과 특히 전 제주지사 박경훈이 민전 의장으로 된 것이 남로당에 큰 힘이 되었다. 여기에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가 한라산의 여러 굴속에 산재해 있어 활용하기에 적격이었다.
2.제주도 남로당원 검거
'47.12월에 강정리에서 경찰이 틀림없는 남로당원을 잡았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하지않고 고문을 가하면 고문을 했다고 소문을 내고 고문을 안하면 오리발을 내밀어 골치가 아팠다.
그러던 차에 '48.1.13일 강정리에서 수사관들이 김석천을 검거하여 회유하는데 정성을 다한 결과 1월 15일 입을 열어 일부 인원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잡혀온 인물이 도당 조직부 연락책 김생민이며 조직부 아지트가 조천 신촌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결국 잡혀온 김생민이 김석천과의 대질 신문 등으로 설득하여 1주일 후에 제주도당의 조직을 모두 불어 106명이 붙잡혔다.
이렇게 되자 남로당 도당 간부들은 1월 26일 애월에서 회의를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것도 김석천이 정보를 알아내어 경찰에 알려줌으로써 결국 며칠 사이로 김달삼 등 제주도 남로당 핵심간부들이 체포되게 된다. 이 과정에 김달삼 등이 압송과정에 도망쳤으나 다시 3월5일까지 221명이 모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남로당은 미군정하에서 합법적 정당이기 때문에 구속시킬 수는 없었고 , 시위나 폭동을 주도했다면 죄기 되나 폭동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구속하기가 곤란하였다.
여기에 한국에 상주하고 있는 유엔 한국선거 감시단이 선거분위기를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정치범을 석방해 달라는 건의를 미군정이 받아들여 결국 다 풀어주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결과에서 5.10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제주도 남로당원이 일망타진 되었으나 모두 풀어줌으로로써 바로 4.3사건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3. 술 한잔이 가져온 제주도 2.9폭동
남로당 전국 2.7폭동 때는 제주도는 남로당 핵심간부가 모두 경찰소 유치장에 있어서 폭동에 가담하지 못하였으나 지역별로는 작는 시위들이 끊이지 않았다.
48년 2월 9일 안덕지서 최주임과 오순경이 사계리 순찰을 나가 마을을 한바퀴 돌았다. 그러나 아무 일이 없자 최주임이 오순경에게 술 한 잔 하고 들어가자고 제안했다.
최주임: 오순경 한 잔 어때?
오순경: 아니 일찍 들어가지요, 기다릴텐데
최주임: 뭐 특별한 것 없잖아 이리와 한 잔 하게
오순경: 추운 겨울에 뭐 있겠어요. 괜히 호들갑 떨고 고생시키는거지
최주임: 야 우리가 언제 하고 싶어 순찰했니. 저 놈들이 시도때도 없이 테러를 하고 방화하고 하니 그렇지.
오순경: 알았어요, 딱 한 잔입니다.
최주임: 야 바싸게 굴지말아. 마실 때가 좋은거야
이렇게 해서 둘은 인근 주막에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술이 한 잔이 아니라 점점 많아지며 이제 신세한탄과 불평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최주임: 오순경 너는 그래도 집니 여기잖아. 난 육지에서 왔어. 언제 집에 갈지도 모른다.
오순경: 집이 여기면 뭐해요. 나도 벌써 몇개월째 집에 못갔어요. 옆에 두고 못가는 내신세도 보통은 아닙니다
최주임: 그래 내일이 설날인데 또 별빛만 바라보게 되었다.
오순경: 우리는 설날에 육지에 간 모든 친척들이 고향으로 와서 함께하는데 이거 섣달 그믐날 쓸데없는 순찰이나 돌고 있으니.
최주임: 야 한 잔 더하자. 주모 한 병 더요
오순경: 그래요, 말하면 뭐하겠어요. 그놈의 빨갱이 새끼들 때문이지. 미군놈들도 왜 와서는 걸치작거리는지 모르겠어요.
최주임: 그래도 그 놈들이 일본놈을 때려잡아 우리가 해방이 안되었나. 이제 우리가 정신을 차량야 하는데 이렇게 갈라져 다투니 이것이 문제야.
오순경: 육지 경찰은 왜 왔어요?
최주임: 그야 가라니까 왔지. 그런데 갑작스레 여기가 조용한거야. 거 참 신기하네.
이렇게 둘은 설음식 만드는 냄새를 맡으며 감정에 불을 당겨, 주거니 받거니 하다 술에 곯아 떨어져 고망술집에서 그만 잠들어버렸다. 흔들어도 기척도 없이 뻗어버렸다.
한편 사계리 송죽마을 청년들은 5.10선거 반대 시위를 하려고 준비를 끝냈는데 이 소식을 접하고 이양호 임창범 등이 오전 9시경 고망술집으로 가서 아직도 술에 취에 잠들어 있는 경찰 2명을 붙잡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도 빼앗아 버리고 둘을 묶어서 향교로 끌고 갔다.
이들은 경찰을 묶어놓고 폭행과 발길길로 어떻게 아로 왔느냐고 캐물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그저 일상적 순찰인데 그걸 그대로 받아줄리 없었다.
그런데 이걸 동네 사람이 목격하여 지서에 신고하였다. 안덕지서는 중문지서에 도움을 요청하여 오후 3시경에 안덕지서와 경찰학교 졸업생이 합동작전을 벌였다. 그러자 청년들은 산으로 도망쳤고, 데리고 가다 경찰 2명은 버리고 가 요행으로 살아났다. 경찰은 도망가는 청년들을 향해 사격을 하고 마을에 청년들을 이잡듯 뒤져서 찾아냈다. 산으로 도망간 집 가족들을 지서로 연행했다.
이렇게 하여 마을이 쑥밭이 되자 마을 유지들이 나서 우리가 설득하여 주동 청년들을 찾아낼테니 가족들을 풀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경찰이 가족들을 풀어주고 동네사람들이 설득하여 임창범 이양호 등 주동자 7명이 자수했다. 이들은 6.25전쟁 때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에 처형되었다.
48년 2월 10일 한림 고산마을 청년 300여 명이 5.10선거 반대시위를 하면서 고산리 지서를 습격하였다.이어서 신양.오조.시흥 마을 청년들 그리고 한경지역 청년 150여 명이 5.10선거 반대시위와 지서를 습격하였다.
제주도 전역 마을 청년들은 48년 2월 8일부터 10일까지 17건의 5.10선거 반대시위와 지서를 습격하는 등의 테러를 하다 많은 인원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하여 이승만 타도와 단독정부 수립반대, 미군을 물리치고 우리는 독립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조국의 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민을 선동하였으며 경찰은 시위 가담자 290여 명을 연행하였다.
4. 신촌회의에서 4.3폭동 결정
1948년 2.7폭동 후 김달삼은 남로당 중앙으로부터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는 지령을 받았다. 48년 2월 20일 경 조천 신촌에서 김달삼을 비롯한 남로당 핵심멤버들 19명이 모였다.
신촌회의는 면당 주요 책임자 221명이 경찰에 연행된 후 당의 진로를 결정하기 위한 대책 회의 였다. 여기서 김달삼은 5.10선거 반대 무장투쟁을 역설하여 결정하였다. 2월 25일에는 군사부를 신설하였다.
5.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발생
경찰서에는 붙잡혀 온 청년들을 대상으로 심문이 연일 진행되고 있었다.
예1)조천지서에서 제주중학 2학년 김용철(21)이 혹독한 고문으로 48년 3월 6일 죽고 말았다.
경찰: 너 누구랑 참가했지?
김: 난 모른다
경찰: 곤봉 한대 때리며, 너 옆에 있던 놈은 누구냐?
김: 난 모른다
경찰: 김달삼은 어디 이지?
김: 그건 김달삼에게 물어라, 난 모른다
경찰: 마구마구 밟고 굴리고 때리며, 넌 나갈 수 있어, 누가 주동했지?
김: 으하하, 난 모른다
예2)무릉지서에서는 2월 9일 모슬포 영락리 양은하(27)가 연행되어 왔다. 2월 20일 모슬포 지서로 옮겨져 3월 14일부터 심문이 시작되었다.
경찰: 너희들 단선반대시위 주동자가 누구냐?
양: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경찰: 뭐 몰라? 그럼 지서습격은 누가 시켜서 하였느냐?
양: 난 몰라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경찰: 그래 몰라. 그럼 알게 해주지.
경찰 여럿이 몰매를 가하고 밟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나 양은하는 굳게 입을 닫고 맞다가 쓰러졌다. 고환이 터져 숨졌다.경찰은 양은하를 뒤뜰에 버리고 모두 도망가 버렸다. 소문을 들은 가족들이 지서에 달려와 기물을 부수고 양은하를 안고 통곡하였다. 5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은 경찰을 떼려잡기 위해서는 군대밖에 없다며 모두 제주 9연대에 입대하게 된다.
예3)한림 금릉리 박행구(22)는 좌익청년으로 토지개혁을 늦추고 친일 어용을 처단하지 않는 미군정을 비판하고, 신탁을 반대하여 분단과 분열을 초래한다며 우익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였다. 박행구는 48년 3월 말 선박 진수식에 참석한 후 마을사람들이 한 잔씩 권한 술에 취해 여러 사람들에게 위의 불만을 토로하였다.
즉시 경찰에 신고가 들어가고 경찰과 서청원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금릉마을에 도착한다. 이에 박행구는 맨발로 도망쳐 몇 집 건너 창고에 숨었다가 붙잡혀 곤봉과 총개머리판으로 맞고 서청원들이 차에 태워 한림쪽으로 끌고가 총으로 쏴 죽였다.
6.고문치사 경찰 체포
모슬포지서에서 양은하를 고문치사 한 혐으로 경찰관 2명을 포함해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 11명이 체포되어 군정재판에서 징역 5년에서 3년 형의 선고를 받아 과잉수사 책임을 물었다.
지금의 제2월 9일 폭동은 4.3사건과는 거리가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제주에서나 육지에서의 당시의 모든 사건은 사실 모두 남로당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이것은 공통이다. 관련이 있다 없다가 사실은 문제가 아니다. 그 시대적 배경은 북한의 지령에 의해서 남한의 좌익세력은 꼭두각시가 되어 시키는대로 했고, 시간차이나 지역별 차이가 조금 있을 뿐이다.
이미 중앙에서 5.10선거 반대 투쟁을 위한 폭동계획을 사전 탐지하여 48.2.7일 많은 남로당원들이 체포되었다. 제주도 2.9 폭동은 그 도하선이 경찰이 술을 먹고 주막집에 잠들다 그만 남로당에 붙잡혀 총을 빼앗기고 린치를 당하는 과정에 출동한 경찰이나 서청원들의 보복 작전이 빚은 결과였다
제5장 5.10선거 반대 제주 4.3사건
제1절 사건 개요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 여에 걸쳐 2만5000~3만여 명의 제주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사건이다.
2000년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4.3사건의 시기를 경찰의 발포 사건이 있었던 47년 3월 1일부터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되는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 동안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당시 제주도민 인구의 11% 가량에 해당하는 2만5000에서 3만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고, 가옥 4만여 채가 불타고 상당수 마을이 페허로 변했다.
4.3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어 오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진상규명과 정부의 공식사과, 희생자 보상 등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당시에 제주도에는 남로당의 지령을 받고 행동에 옮기는 인원이 분명 많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 또한 무장하여 지서를 습격한다던지 경찰이나 우익세력에 대한 테러행위를 자행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나아가 4.3일부터는 지령에 의해 지서와 관공서, 군 조직에 대한 테러행위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진상조사 위원회에서는 무장대라 하지만 그건 너무 한쪽에 치우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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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국민방위군 순직실태 탐사간 느낀 실태]
나는 국민방위군 순직자의 유해를 찾기위해 제주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제주 전역을 돌아 다니며 자료수집과 현장조사를 실시해 봤다. 그런 과정에 일부 과격한 인원들에게 모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대부분 그당시에 강정리에 들어서는 해군 항구 개설에 반대하면서 4.3사건의 피해자라며 군에 대한 배척의 정도가 심하였다.
하지만 많은 인원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면서도 당시는 제주도가 수많은 인원이 남로당에 가입 혹은 그들을 따라 행동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런데 현싯점에서 그 실상을 알고 있는 군의 원로도 없고(모두 타계), 지역 주민도 별로 없으며 침묵을 지키려 했다. 이유는 피해받은 사람의 집안들은 한을 갔고 통곡하며 처벌과 보상을 요구하지만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한 인원은 많은 인원이 육지에서 갔기에 현지에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누가 그 사실을 진술할 대상이 없는 것이다.
얼마전 타계한 이종록(예,중령) 6.25전쟁 참전용사는 당시 제주도에서 함병선 밑에서 정보장교를 했다. 따라서 나는 그 증언이 진실여부를 떠나 많은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방부에서 이루어진 진상규명 위원회 증언자로 참석도 못했다. 그 이유는 어깨 큰 인원들이 찾아와 "오래사셔야죠~!"하며 삼각지 접근 자체를 못하게 막아버렸다. 나는 거의 10여 년을 그분과 업무상 동행하여 격전지를 탐사 및 탐방하였다. 그래서 함병선 연대가 제주도에 주둔시에 벌어진 테러행위와 군의 진압작전, 경찰과의 헤게모니 싸움 등에 많은 기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없는 진실 규명은 사실 이미 답을, 군과 경찰을 심하게 표현하면 폭도로 몰고 반대로 당시에 빨갱이 또는 폭도라 불리던 세력은 무장대라 하여 경찰과 군인의 "무자비한 살육(?)"에 대한 정당한 저항세력으로 표현하고 결말이 난 것이다. 당연히 아무 잘못도 없는데 피해를 당한 인원과 그 유가족에게는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마치 군.경은 폭도처럼 몰아가는 것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평화공원에 가서 그 많은 분량의 사건관련 내용을 모두 읽어 보았다. 물론 책임의 유무를 떠나 국가가 국민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다. 경찰의 과잉진압과 고문치사 등, 그리고 군.경의 오인사격과 갈등 등 많은 피눈물 나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김달삼 등 제주도 남로당이 무장하여 피해를 입힌 건은 침소봉대하여, 마치 아무런 행위를 하지않했는데 군경이 살인행위를 한 것처럼 묘사 되어 있다. 47년의 3.1사건과 48년 2.9 사건의 연장선에서 4.3사건을 구성하는 것은 재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경찰의 무자비한 고문치사 사건을 확대 해석하여 이 울분이 마치 도하선이 되어 4.3사건이 발생한 것처럼 이어가는 것은 무리다.
경찰과 서청단원의 횡포와 살상, 미군정의 무정부적인 오락가락하는 태도로 사건을 키웠다고 하는 것은 어느정도 맞는 부분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 남로당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단일 민족이란 슬로건으로 북이 원하는 신탁으로 결국 한반도의 공산화를 가져오게 하려는 차원에서 남한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려 가장 무장하기 쉽고, 접근하기 곤란하며, 이미 많은 인원이 포섭되어 있는 제주도를 해방구로 만들어 그 바람을 육지로 밀어 올리려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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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군 내부에 간부나 병들 중에 무려 10%이상의 세포들이 들어와 있었고(군의 숙군 작업이 그 실태 증명) 그 선상에서 여수 순천 제14연대 반란 사건과 대구 제6연대 반란 사건 등이 발생하게 되고, 여순반란사건 당시 48년 10월 19일 밤에 발생된 사건으로 경찰 100여 명, 시민 500여 명이 반란군에 살해 되었고 10월 21일 여.순지역에 게엄령이 선포 된다. 10월 24일까지 군인 270여 명이 반란군에 전사하게 되고 27일 새벽에 진압이 되고 주동자들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빨치산이 되었다.이 사건이 종결된 것은 1957년이었다. 48년 12월 1일 제정된 보안법에 따라 숙군작업으로 무려 군내부에서 4,700여 명이 배제되었다. 그 당시에 일본으로 밀입국한 조선인이 무려 5만여 명이 되었다고 하며 미 검거자를 포함하면 20만~25만까지 되었다고도 하니 당시 남한에 심어진 좌익세력의 규모가 엄청나다. 그 회오리는 너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가져왔고, 결국 6.25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제2절 남로당 제주도당 강경파들의 4.3사건 결정 배경
당시 제주도당 남로당은 조천 등 외곾을 장악하여 제주읍을 고립시켜 접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5.10선거 반대 투쟁을 하며 기폭제가 되어 전국에서 호응할 것이고 제주의 제9연대는 중립을 지킬 것으로 판단했다.
나아가 한반도에서 미.소가 철수하면 북한의 김일성과 남로당의 박헌영 세력이 강하여 49년도에는 인민군이 38선을 넘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를 위해 전남도당 지도위원인 이명장이 참여하여 폭동을 지도하였다.
*1945년 9월 20일 소련 스탈린과 군 참모총장이 극동전선 최고사령관 및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에 보낸 암호전문에 북한의 단독정권 수립을 지시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소련이 이미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남북한 통일정부 수립이 아닌 그들의 지시와 통제를 받는 김일성 주도의 공산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증거이다.
전남 도당부의 지령에 의하여 제주 4.3사건의 목적은, 당의 조직수호와 방어 수단으로, 단선 단정 구국 투쟁의 방법으로 전 도민을 궐기시켜 무장 반격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시기는 4월 3일 2시~4시에 무장공격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제3절 제주인민 유격대 4.3폭동을 위한 조직 및 작전계획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투쟁에 필요한 200명 예정의 자위대를 조직하기도 한다. 병력 조직 대상은 13면에서 5면을 제외(성산.서귀.안덕.추자) 8개면에서 유격대 100명, 자위대(후속부대) 200명(각 읍 면 단위로 10명씩 조직), 도.군위 소속 특경대 20명 등 320명이 편성 완료되어 10인 1개소개, 2개 소대가 1개 중대, 2개 중대가 1개 대대가 되도록 편성했다.
이러한 조직은 99식 소총 27정과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연막탄 7발 등이었고 기타는 죽창과 철창으로 무장을 하게 된다. 거사 일이 4.3일 오전2~4시로 당시 암호는 콩과 팥이었다.
거사 대상과 책임분담으로, 제주읍 감창청과 제1구서(제주 경찰서)는 국경(국방경비대)이 담당 분쇄하고 도내 14개 경찰지서는 유격대 및 자위대 400명을 배치하여 습격하기로 했다.
당시 국경프락치에게는 무장반격에 동원 가능한 병력 수를 사전에 문의한 결과 800명 중에 400명은 확실성이 있고, 200명은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반동은 주로 장교급으로 하사관까지 합쳐도 18명이므로 이들만 숙청하면 문제가 없으니 병력 동원에 필요한 차량 5대만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이러한 보고를 중심으로 차량 5대를 보내고, 거점 분새 연락병으로 학생 특무원 20명을 제주읍내에 침투시켰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같이 전남도당 이명장이 3월15일 재차 제주도에 내려와 무장반격에 관한 지시와 아울러 "국경(국방경비대)프락치는 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으며, 이번 무장의 반격에 국방경비대 프락치를 최대한으로 동원하여야 한다고 언명하게된다. 따라서 4.3사건은 제9연대 좌익세력과 합동으로 폭동(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 자기들은 인민군 대표라고 표현하여 스스로 반란군임을 입증하고 있는바 이런 내용은 평화공원내 어디에도 그 내용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1. 남로당 제주도당 세부작전
3월말 제주도당 군사.정치의 책임자였던 김달삼과 조몽구, 국방경비대의 당 세포 책임자였던 문상길 중위 등이 참석하여 무기탈취의 결정을 내렸다.
3월 28일 이들은 다시 모여, 제1단계 작전이 성공하면 전열을 정비하여 점령지역을 난공불락으로 만들기 위해 무기.탄약.식량 등을 비축한 후에 최후의 거점인 제주경찰국을 총공격하기로 한다. 나아가 한 달만 있으면 해방된다고 믿고 사상교육이 이루어졌으며 3년만 버티면 주변 정세는 남로당에게 유리하게 북조선 인민군의 남하와 원조는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이 당시에 먼저 육지에서 여수 제14연대의 반란과 인민군의 남침을 기다리고 있었고, 자위대원이나 여맹원 그리고 남로당원을 이용하여 일본군 제5군단이 매몰해 놓고 간 무기를 찾아 무장하게 된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중공 팔로군 출신과 일본군 출신이 기간이 되어 있었다.
남로당은 투쟁을 위해 막바지로 조직을 12개 중대로 편성하고 마을마다 연락병을 조직했다. 사령관 김달삼은 제주도내 160개 리에 민애청의 열성당원들을 동원하여 입산시켜 유격대에 합류하게 했다. 입산할 때의 암호는 흰수건으로 얼굴을 세번 닦는 것이였다 한다.
도 사령부 즉 제주 인민군사령부에는 특별기동대가 있고, 기동대원은 25명으로 이들에게는 전원 소총이 지급되어 3개 중대가 있었다. 이들은 중산간 마을에서 살았으며 남에게 보이거나 중대 지역을 떠나지 않았다. 중산간 마을은 유격대를 지지하였고, 완전히 지지하는 부락을 민주마을이라 불렀다.
토벌대가 오개 되면 그 인접 마을에 있는 세포들이 연락을 해주어 숨게 되고, 토벌대를 기습하거나 동굴 등으로 잠적해 버렸다. 유격대는 조금만 참으면 반드시 북한 인민군이 지원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한라산은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120여 개의 토치카를 구축하였는데 인민 유격대는 이런 시설을 이용하고 마을마다 정보원을 두었으며 샛별오름이나 검은 오름 등 인본군이 사용하던 굴을 활용하였다.
당시에 경찰은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것을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그 안에 침투한 세포들의 활동으로 수수방관 했을 수도 있다.
2. 제9연대 사정 *석연찮은 연대장들의 병~!
제주 경비대 제 9연대는 46년 11월 16일 모슬포 비행장에서 창설되었다. 창설 요원은 장창국 중위와 안영길(좌익), 윤춘근,김태복 등 소위 계급의 장교들이었다. 사병은 전남 광주에서 50명이 차출되었다. 장교들과 장병들이 제주도 마을을 찾아다니며 경비대에 입대하도록 해도 모병이 잘 안되었다.
당시 장창국 중위는 22세로 일본 육사59기로 재학 중에 해방을 맞아, 46년도에 육군사관학교 부교장이 되었고, 46년 11월에 제9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모병이 되지않는 이유는 제주 남로당에서 경비대에 입대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고, 남로당에서 세포원을 경비대에 입대시켜 부대를 장악하려 했다.
장창국 연대장은 제주도에 온 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47년 5월에 총사령부 작전국으로 전임되고, 이치업 소령이 연대장이 새로 부임한다. 당시 연대는, 말은 2대 대대지만 실제병력은 1개 대대 정도였다. 그 이유는 제주도민이 입대를 꺼려하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니 제주도의 좌익이 조직적으로 막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치업 소령도 어찌된 일인지 배탈이 나고 힘이 빠져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서울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47년 12월 1일 부연대장이던 김익렬 소령이 연대장이 되었다.
제주 남로당과 이미 연동하여 무기 탈취계획을 수립한 세포 문상길 중위는 경북 안동출신으로 일본 육사 3기이고, 오일균 육사 구대장의 포섭으로 남로당에 가입하여 9연대 남로당 조직책이 되었다. 문상길은 유격대 김달삼. 이덕구와 접선하며 제9연대 내에 세포조직 확장에 전력을 다하고 연대를 남로당 군대로 만들려고 김달삼 인민유격대와 협력하려고 공작하였다. 이 공작에 장창국과 이치업이 말을 잘 듣지 않자 약을 먹여 서울로 쫒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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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삼]
김달삼은 본명 이승진이다. 당시 25세로 미남같이 잘 생겼다고 한다. 그는 1944년 일본 경도 성봉중학을 졸업, 동경 중앙대 예과에 합격하여 다니다 중퇴한다. 이때 김달삼은 남로당 중앙위원 강문석의 딸(강영애)과 결혼한다. 그는 남로당 서귀포 대정면 조직부장이었다. 48년 4.3사건 때 유격대 사령관이었다.
김달삼은 1923년 8월 4일, 제주도 대정면 영락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명근이 경상북도 대구부로 이사하면서 대구에서 유소년-청소년기를 보냈다. 대구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 후에, 일본에 유학하였다. 대학 2학년 재학 중에 일본 예비사관학교에 지원하여 일본군 소위가 된다. 일본국 복무 중에 1945년 1월 19일, 역시 제주도 대정읍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군수공장을 운영하며 사장이자, 일본 공산당 비밀 당원인 강문석을 만나 그의 장녀로서 오사카 고등여학교에 재학중이던 강영애와 혼인한다. 그러다가 일제가 패망하자 혼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 대구에 체류하며 장인 강문석을 통해 알게된 조선공산당 경북인민위원회 이재복과 손을 잡고 9월 총파업에 이은 10월 1일 대구10.1 사건에 가담하였다. 여기서 인정받아 남로당 지도부의 신임을 얻었다. 46년 12월 경북에서 대대적인 좌익검거에 고향인 제주도로 몰래 잠입하여 대정중학교 상업과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과 교사, 귀환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치고, 좌익세력 규합에 나선다.
1947년 3.1절 행사때, 제주북국민학교에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 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여 명의 군중과 기타 군중 8,000여 명 등 총 3만여 명의 군중이 기념행사를 하고, 여기에 반해 제주경찰 330명, 육지에서 파견된 경찰 100명 등 경찰 430명이 주변 경비를 하다 가두시위과정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굽에 어린아이가 치여서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러나 경찰이 그냥 지나가 버려 행사군중이 소요가 발생하며 기마경관에 돌을 던지며 야유를 하고 경찰서까지 몰려가자 경찰이,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발포를 함으로서 시위대 6명이 죽고 6~8명이 부상한다. 이 제주도 3.1절 사건을 계기로 김달삼이 제주도 남로당 당책에 임명되어 군사부장까지 겸임하였다.
1948년 5월 1일, 오라리마을 사건의 진상은 누가 불을 질렀느냐와, 누가 그 원인을 제공하였느냐의 관점에서 달질 수도 있다. 불을 지른 것은 차후 조사결과 대청단원들이 보복차원에서 질렀다고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그 원인은 방화에 앞서 대동청년단 단원 2명의 실종과 그 가족 2명의 납치 및 1명의 피살이 원인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김달삼은 김익렬과의 협상이 깨지면서, 연대장인 김익렬은 5월 6일 9연대장에서 해임, 여수 주둔 제14연대장으로 전출된다. 김달삼은 1948년 8월, 사태 수습이 안 되고 자아비판을 요구받자, 이덕구에게 지휘권을 맡기고 월북하였다.
김달삼은 월북 후에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린 남로당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 여기서 제주 4.3사건에 자신이 세운 공적을 선전하여 박수를 받고 북한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고, 국기훈장 2급 수여에 북한헌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출세하였다.
이 후에 김달삼은 태백산을 거쳐 일월산까지 침투하여 지방좌익과 빨치산을 규합하는 등, 남로당의 1949년 9월 공세를 지원하고 경북일대에서 지서습격, 교량파괴,식량약탈,민간인 학살과 납치 등의 활동을 주도하였다.1950년 2월에는 김달삼이 이끄는 빨치산 부대가 청송면 월외리에 내려와 양식과 약품을 구하는 것을 지역주민의 신고로 체포되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70여 명의 김달삼 빨치산 부대가 2월 6일 야간에 마을을 습격하여 주민 12명이 희생된다.
3월 20일 다시 강원도 정선의 반론산에 침투하려다 우리 제8사단 21연대의 공격, 매복에 걸려 총살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는 그는 여기서 살아서 다시 월북하여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강동정치학원 유격대원 3백명으로 조선인민유격대 제 3병단을 주문진 항에 상륙 후, 경북 청도 운문산 지구로 침투하여 활동하다 신불산 지구에서 부산지구에 침투할 계획으로 해로로 남하하던 중에 사살되었다고도 한다. 이는 국제정치학자 토르쿠노프가 쓴 책, "한국 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구종서역)"에 "남한의 신문 라디오는 김달삼의 사망을 보도했으나 그는 현재 빨치산 활동을 위해 북한을 방문 중"이라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가 모스크바로 보낸 전보(50.4.10)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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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선 고양산 탐사와 신불산 탐사]
나는 정선읍 고양리에서 고양산(1153)을 지나, 배재-상승두골로 나왔다. 반론산(1010)은 고양리 여량초교 분교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그 우측은 1068m의 반론산이 있어 고양리-고장골-고양산 노정은 그리 힘든 탐사가 아니다. 이 일대는 동서남북이 1,000m 주봉으로 이루어져 천하의 은신처라 한다. 그러니 이곳에 김달삼의 유격대가 들어와 은거하다 전멸되고 김달삼이 죽었다는 것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고지군에 남겨진 전쟁의 흔적은 그리 없었다.
* 인심좋은 부부의 100년 해로를 빌고 빈다
이곳이 고향인 탐사반 전소령과 함께 동행 탐사하며 내려오다 너무 허기가 져서 빈사상태인데 마침 상등두골에서 한 젊은 부부를 만나 집으로 초대되어 갔다. 이 부부는 서울이 본거지이고 부인의 집이 여기이덨다. 남편이 병에 걸려 요양차 내려와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는데 마침 점심을 준비해 놓았는데 우리 둘이 오니 바로 우리에게 식사를 내주고 다시 식사 준비를 한다. 정말 고마웠다.
큰골은 분지형으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같았다. 이곳에는 그 옛날 누가 살았다면 바로 도가사상같은 삶을 영위 했으리라 보인다. 그러니 6.25전쟁 전후의 우리 농촌과 산촌을 그려보면 여기에 누가 은거하면 알 수 없는 곳이다. 바로 이곳에 김달삼 부대가 저기 대구북방 영천의 보현산이나, 아니 울산의 신불산까지 침투해 갔다가 밀리면서 다시 아지트로 들어왔다가 우리의 매복에 걸려 사살되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북한 영웅묘역에 남아 있는 내용이나 러시아 평양대사의 보고내용은 또 다른 의문을 갔게 한다. 그가 6.25이후에 남하하다 죽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던 나는 여기서 다시 울산으로 이동하여 신불산을 올랐다.
신불산은 밀양 당장면 이천리로해서 차량으로 내리정에서 사슴목장-간월산-간월재-신불산으로 이어지는 구간을 따라 간월재가지는 차량으로 진입이 가능하다. 이곳도 공비토벌작전이 오랫동안 진행된 곳이다. 여기 산 능선에는 당시 구축된 개인호의 흔적이 상당부분 존재하고 있다. 오히려 정선 고양산보다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신불산은 군립공원이다. 1209m의 주봉을 깃점으로 1,000m이상의 능선이 길게 남북으로 이어지며 , 북으로는 합천 해인사의 주봉인 가지산(1241)으로, 서쪽으로는 1189m의 천황산과, 1109m의 재약산이 둘러치고 있고, 남으로는 양산 통도사 영축사로 능선이 이어가는 산새가 좋고, 억새풀이 장관인 지역이다.
울주군 삼남면 가천리 마을회관에서 '12년도에 지역주민 간담회를 실시해본 결과 이 신불산 일대는 '50.12월부터 '54년까지 공비토벌작전이 계속 되었고, 수도사단 기갑연대, 미 제10군단 특별 공격대, 의용경찰대가 참여하여 약 400여 명의 공비들과 교전이 있었다. 낮에는 아군지역이고 밤에는 공비 세상이었다. 보급대들이 들어와 시신을 처리했는데 김달삼이란 이름을 들어본 적은 없다고 한다.
지역주민의 증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귀도(87): 의용경찰이 선두에 서고 군인이 후속하여 진입했다. 수도사 기갑연대 1개 중대가 들어가 1개 소대만 남고 모두 전사 했다. 부산 수영만에서 비행기 4대가 날아와 폭격도 했고 UN군 중대장도 전사했는데 이는 모두 수습해 갔다.
김연래(71):부친이 대창들고 전투에 참가했고 2차 전투때는 총을 주어서 가지고 갔다. 야간에는 공비들이 와서 쌀을, 낮에는 전투경찰이나 군인이 와서 밥을 달라고 해서 힘들었다.
이은성(83): 의용경찰로 2차 전투 때부터 참여했다. 보급대원들이 들어와 유해를 처리했다. 많은 전사자가 있었지만 나중에 보니 유해는 없었다.
여기서 가슴아픈 증언은 당시에 이장을 했던 분의 아들인 분의 눈물나는 제보다. 이분은 절대로 본인의 이름을 밝히지 말라하여 나도 더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성명 미상 제보(당시 11세): 당시에 아버지가 이장인데 아침에 군인 대위가 들어와 밥을 해오라했다. 그런데 이미 밤에 공비들이 와서 동네에 집집마다 다 뒤져서 가져가 버려 봄에 밭에 뿌릴 씨앗도 없게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밥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군인이 공비에게 다 받치고 아군에게는 없다고 한다며 뺨따구를 얼마나 때렸는지 입 안이 다 터지고 골병이 들어 앓다가 돌아가셨단다. 아저씨는 간곡하게 나에게 부탁했다. "장관에게 말하여 군인들 배불리 먹게 해주세요" 참 기막힌 증언이며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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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주도는 제주도지사 박경훈이 인민투쟁위원장이고, 제주읍장이 부위원장이며, 각 면장이 면투쟁위원장이었다. 이와같은 상황에 김달삼은 자신이 생겼고 그에 따라 폭동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 부임한 김익렬 연대장은 일단 남로당 토벌에 미온적 태도를 유지했고, 모든 정보는 이미 인민유격대로 노출되고 있었다.
제4절 남로당 제주도당 4.3폭동
48년 4월 3일, 자정에 김달삼의 명령에 따라 책임자들은 각자 지역으로 흩어져 봉화에 불을 올렸다. 무장한 400여 명과 협조원 수백 명이 예정대로 행동을 진행하여 한밤 중에 조용조용히 그들 행동의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1. 우익 양민 학살
애월 구엄마을에 100여 명이 들이닥쳐 대한독립촉성회 제주도 책임자 문영백의 집을 덮쳤다. 그러나 문영백은 인기척에 고다로 숨었고 짖에 잠들고 있는 두 딸이칼과 죽창으로 죽었다. 이에 문영백은 바로 경찰에 투신하여 원한의 칼을 갈게 된다.
구엄마을 대동청년단 문기찬을 끌고 가다 칼로 찌르고 죽창으로 찌르고 해서 죽는다. 같은 마을 문용준도 죽고 임신 중이던 부인은 중상을 입었다. 이렇게 해서 구엄마을은 5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하였다.
2. 우익단체 공격
4월 3일 새벽 2시경 한림 서청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여관을 유격대원 30~40여 명이 기습하였다. 여관을 포위하고 사제 폭탄을 던졌다. 또한 시장에 있는 여관 2층에는 경찰과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곳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제도남로당 유격대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죽창. 몽둥이. 낫 등으로 사정없이 공격하였다.10여 명의 서청단원이 부상하고, 경찰 1명이 죽고 12명이 중상을 입었다. 시장의 여관에서는 경찰 1명이 죽었고 이때 마침 여관에 머물고 있던 김익렬 제9연대장 등 일행 9명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피해를 모면했다.
여관을 습격한 유격대는 다시 독촉국민회의 제주도 감찰위원장 현주선의 집을 기습한다. 현주선은 도망치다 붙잡혀 중상을 입게 되고, 습격대가 떠나가는 과정에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죽이고 있던 큰아들 현여경이 격투 끝에 한명을 붙잡고 보니 그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3. 12개 경찰지서 공격
총과 몽둥이, 죽창 등을 들고 일부는 정면으로 공격하고 또 일부는 매복하여 동망치는 경찰을 공격하게 된다. 신엄지서에서는 정문으로 들이닥치다 경찰과 바로 총격전이 벌어져 침투하던 인원이 그자리에서 쓰러지고, 문 순경은 다리에 총을 맞고 부상을 당하지만 침투인원을 물리친다. 지서에 사건이 발생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오던 송원화 순경은 매복중이던 유격대원들에게 중상을 입고도 도망쳐 지서로 들어오게 되지만 일주일 후에 오라리에 살고 계신 아버지가 살해당하게 된다.
남원지서에는 30여 명이 침투하여 여러 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고일수 순경은 두들겨 패서 죽이고 시신을 나무를 깔고 그 위에 올려 불을 지르고 사라진다.
성산포 지서는 40여 명이 침투하였으나 사전에 김양수 순경에 기도가 발각되어 총격전 끝에 물러나고, 주천지서는 4월 4일 새벽 1시에 습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양창국 순경이 미리 기습을 예견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령이 불가함을 알고 침투원들은 철수하고 만다.
화북지서에서는 침투원들이 총이 없어 지서와 숙직실 주변에 나무를 쌓아놓고 석유를 뿌리고 솜뭉치로 불을 붙여 던졌다. 불이 삽시간에 붙어 숙직실도 불길에 휩싸였다. 이때 사환 이시성이 불에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죽게 된다. 여기 경찰들은 불이 붙자 즉시 몸을 숨기고 기다리다 침투한 유격대원에게 총을 쏴서 그들이 도망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육지에서 응원온 김창하 경찰이 사는 집을 기습하여 잠들고 있던 부부를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외도 지서에서도 순경 1명이 절명하고 세화지서는 침투하였으나 총도 없이 죽창과 몽둥이 등을 들고 들어갔다가 경찰의 대항에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특이한 사실은 24개 지서 중에 주민과 경찰의 사이가 좋은 애월.모슬포 지서는 공격을 받지 않았다.
48년 4월 3일 하루만에 경찰 4명이 순직하고 부상 8명. 행방 불명 2명이 발생했다, 우익 단체 8명이 죽고 19명이 부상하게 된다. 좌익 유격대원은 3명이 죽고 1명이 생포되었다.
제주 4.3사간 진상조사보고서에 4.3사건을 무장봉기라 정의한다. 경찰과 서청에 항거한 무장봉기라는 것이다. 그럼 앞에서 언급한 애월 구엄마을의 문영백의 어린 두 딸이 처참하게 죽는 등 우익 민간인 8명이 죽창과 몽둥이로 죽었다. 어떻게 이것이 봉기라 할 수 있을까!
4. 계속하여 잔인한 양민학살
4월 4일 새벽에 유격대원들이 연평리 대청 단원 오승조(36)를 찾아가 대청사무실에서 청년회 문서를 내놓으라 윽박지르다 계속 거부하자 죽창으로 찍어 죽였다.
4월 6일 새벽에는 40여 명이 제주 이호리에 살고 있던 대청 총무부장 이도언(37)과 양남호(32)를 기습하여 죽이고, 제주읍 봉개마을에서는 대청단장 이왕우(초등교장)를 공격하여 중상을 입히고, 4월 11일에는 오라리에 살고 있던 송인규(58)의 집을 기습한다. 송인규는 바로 4월 3일 그들이 기습했으나 죽이지 못한 신엄지서 송인화의 아버지였다. 정말 처참하게 죽인 아버지의 시체를 거둔 송인화는 생존하여 생생하게 이 사실을 증언해 오다 얼마전에 돌아가셨다.
4월 7일 유격대들은 다시 한림 저지마을을 공격하여 대청단원 김구원.김태준.고창윤을 죽이고, 4월 17일에는 조천의 선흘리 마을을 기습하여 대청단원들에게 사정없이 죽창과 몽둥이를 휘둘러 부용선.부용하.고평지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4월 18일에는 조천의 신촌에 사는 김문봉(64)의 집을 기습하여 죽창으로 죽인다. 김문봉은 제주감찰청에 근무하는 김성홍 경찰의 아버지였다. 애월읍 곽지리에 사는 박영도(40, 면사무소 직원)를 또 그렇게 죽인 다음 시신을 끌고가서 그의 5촌 당숙인 제주경찰서 사찰주임 박운봉 경위 집 앞에 놓고 갔다. 애월리에서는 청년운동을 하였다고 임신 중인 그의 형수를 참혹하게 죽이고 임신 6개월인 경관관의 부인은 배를 갈라 죽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경찰이나 우익인사들은 "이 놈의 빨갱이들 씨를 말려야 한다"고 분노케 된다.
5.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 재조직
48년 4월 15일 김달삼은 당과 동료들로부터 작전실패에 대한 지적을 받게된다. 점령한 지서가 한 군데도 없고, 그러다 보니 대원들이 무장할 무기를 탈취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많은 지서로 병력을 분산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서 운용해야 되는데 잘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4월 15일부터 남로당 제주도당은 지금까지의 행동을 평가하여, 앞으로는 인민위원회 안의 자위대를 해체하고 면 단위로 30명의 유격대를 조직토록 한다.
투쟁 목표는 반미.반 이승만.구국 투쟁의 일환으로 5.10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3개 연대를 편성하게 된다. 인민군(일명 해방군)의 아지트는 애월의 샛별오름과 조천의 거문오름 등이었다. 5월 10일까지 제주인민군 1,000명이 증원되고 장비는 경기관총을 포함하게 되었다. 3,000명의 사람들이 게릴라를 따라 산에서 내려왔다.
48년 6월에는 남로당 중앙당에서, "제주도 인민 대중에게 드림"이란 제목으로 미제의 분할 침략으로부터 조국의 민족 주권을 방어하기 위하여 싸우는 인민들에게 영광을 드린다 하면서 젊은 영웅들은 육탄으로 원한의 투표소를 쳐부수고 투표함을 재로 만들었다하며, 이승만과 김성수 등 친일파 매국노들이 독재하는 허수아비 단정을 만들려고 날뛰고 있다며 어떠한 희생을 무릎쓰고라도 이 단정을 쳐부수어야 한다고 선동하게 된다.
여기에 남조선 노동당 제주도 위원회는 답신을 통해 이미 원수들의 총칼에 쓰러진 인민 영웅들의 무덤에 이 영광의 꽃다발을 드렸다는 내용과 실로 백만의 원군보다 더욱 힘차게 사기를 고무시켜주었다고 추켜 세운다. 그러면서 단 13명의 소부대로 60명의 기동경관대를 백주에 요격하여 그중 14명을 사살하였다고 자랑하고 제주도의 항쟁이 조선 인민의 모범적 항쟁이며 조국 해방투쟁 사상 불멸의 금자탑을 이룬 것이라는 격려의 말씀을 최고의 영예이며 망국멸족의 단정 본쇄에 죽음으로서 맞서고 통일 독립을 위해 우리의 손으로전취할 때가지 투쟁할 것을 맹세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음에도 진상 조사위는 언급도 없다. 이 내용을 보고 누가 정상적인 투쟁이라 하겠는가. 분명 사상적 오염에 의한 북한 공산당의 강령을 그대로 따르는 행위였고 사실은 반란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이 그 많은 제주도민이 모두 여기에 가담했다는 증거가 미약하고, 설령 많은 인원이 가담했다 하더라도 그 당시의 우리 사정이 바로 해방 직후라 명확한 사상적 구분의 핵심역할을 하는 교육이나 계몽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제 36년, 더 나아가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양반사회의 폐단과 지주문화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반감은 엄청났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북은 나중에는 결국 모든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무산계급으로 만들면서, 초기에는 지주들의 토지를 빼앗아 무산층에 나누어 주고 일제시대 관료나 일부 악덕 지주들을 매국노라며 처단하는 쇼를 감행하여 그들이 말하는 인민들의 환호성을 받는다. 일시적 김일성의 출현을 정당화 하며 민족이란 단어에 매료되어 있던 서러움의 우리 민족정서를 이용하여 통일 조국을 이룩한다는 명분으로 일반 백성을 현혹케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스탈린식 공산독재를 위한 1단계 조치였으며 사실은 이미 북한은 소련의 통제하에 그 꼭두각시인 김일성이 실질적 통제권을 확보, 민족주의자 진영을 분열시켜 초토화 시키고 함흥으로부터 인민주의의 바람인 동풍을 몰고 평양으로 진출하여 전권을 잡고 바로 전쟁준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디 노동자 농민 개인에게 땅을 주고 재산을 분할했던가. 모두 압수하여 공산당 재산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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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오름과 거문오름 탐사 결과
나는 2회에 걸쳐 이 두 곳을 탐사했다. 한번은 여행차 가서 내부를 들어가 보았고, 한번은 실태조사를 가서 들여다 보았다. 모두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탐사했다.
일본군이 얼마나 태평양 전쟁시기에 미군과 최후 결전을 하려 이 곳 제주도에 전쟁준비를 했는지를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제주도 한라산 토벌작전 간에 내부의 주요 군사시설이나 무기류는 모두 처리되어 그 흔적ㄷ마저 사실은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굴의 형태 뿐이다.
그러나 굴 내부에 전투근무지원 시설위치나 그 규모 등을 미루어 보아 얼마나 정교하게 준비되었는가가 느겨지고, 분명 이러한 시설정도라면 아마도 많은 장비 물자가 비축되었을 것이라 믿어졌다. 물론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이런 곳이 한라산에 100여 곳이 되었다니 당시 폭도들이나 산에 오른 일반 민간인이 은거하기에는 좋았을 것이다. 이를 이용하여 폭도들은 토벌군을 유인 격멸하려 했고, 실제 많은 피해가 발생햇다는 것이 공식 기록에 나와 있다.
그러니 일본은 우리를 두 번 죽인 것과 같다. 당시의 국토를 유린하고 많은 인원을 끌여들여 전투시설물을 구축하면서 얼마나 많은 제주도민이 피해를 입었겟는가. 다시 그 시설이 해방이후에는 은거지로 사용되면서 같은 동족끼리 총소리를 숨기고 당겨야 했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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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육지경찰 증파와 경찰의 진압 실패
제주도의 상황을 보고받은 경무부장 조병옥은 즉시 미 군정장관의 승인을 받아 4월 5일 8개 중대 1,700명을 차출하여 제주에 증파하였다. 제주도에 제주비상경비사령부를 신설하고 경무부 공안국장 김정호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급파하였다. 그는 또 서청단장에게 요청하여 500명이 제주도에 증원 되었다.
남한 전역에서는 신문, 라디오 등을 통해 제주도에 대한 사건 보도를 접하고 시민들은 깜짝 놀랐다.
경찰의 작전은 남로당 프락치에 의해 김달삼에게 보고되고 경찰이 추격하면 길목에 매복하였다가 기습하여 경찰은 작전에 어려움이 많았다. 경찰이 움직이면 먼저 그들이 알고 도망가거나 은둔해 버리고, 길목을 지키다 기습을 하나 번번이 경찰은 당하기만 했다. 따라서 감찰청장에게 경찰만 가지고는 감당할 수 없다고 호소하여, 경찰은 대정.성산지서를 경찰서로 승격시켜 제주,서귀포,대정,성산의 4개 경찰서로 확대하여 폭동 진압에 나섰다.
7. 제주 제9연대장의 미온적 태도(?)
연대장 김익렬(27)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48년 4월 2일 백선엽 중령 배웅차 제주에 가서 한림여관에 잠을 자다 일행 9명과 용케 피해를 받지않고 살아서(?) 오전 8시경 모슬포 부대로 돌아와 비상을 걸었다. 그리고 제주 출신들로 정보수집을 해 남로당의 무장폭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9연대는 3개대대가 있어야 하나 모병이 되지 않아 1개 대대 900명이었다. 그리고 탄알은 1박스도 없었고, 총은 99식 소총이었으며 차량은 쓰리쿼터 1대 뿐이었다.
따라서 국경사령부에서는 만일을 대비하여 부산 5연대에서 2대대를, 선발대는 4.10일에 항공편으로 본대는, 4월 20일 선편으로 진해에서 제주도로 이동시켰는데 대대장 오일균 소령은 남로당원이었다.
국경사령부는 4월 17일 제9연대에 제주4.3폭동을 진압하라고 명령하였다.
부산의 제2대대가 제주에 증파되자 김달삼은 간부회의를 통해 오일균 소령이 온 것을 크게 환영하고 2대대를 적으로 삼지 말라고 부탁한다. 여기에 9연대의 문상길 중대장도 크게 환영하며 연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오일균 5연대 2대대장은 부대 지휘방침을 통해, 유격전은 적이 보이지 않고 식별이 어렵기 때문에 돌격이 아니라 찾아야 한다며 폭도 한 명을 잡기 위해 중대가 출동해야 함으로 무모하게 덤벼들지 말고 경비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중대장들에게 지시한다.
48년 4월 10일, 김영배 제주 감찰청장이 모슬포 9연대장을 찾아가 경찰이 작전을 할테니 군이 뒤에서 경비를 잘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김익렬은 상부의 지시가 없다며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당시의 경찰과 군의 극한 적인 대립 모습이었다. 이를 본 오일균은 이 때다 싶어 세포조직을 늘리려 온갖 노력을 기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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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경최악의 충돌, 영암경찰서 습격사건]
당시에 경찰과 군의 감정의 골이 패인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극렬한 사태는 영암경찰서 사건이다. 당시만 해도 군은 뿌리가 없었고 경찰은 일제 경찰의 잔제가 묻어 있었다.
당연히 군의 초창기에 계급장을 만들어야 하는데 일단 임시로 경찰모자의 귀단추로 사용하던 무궁화를 경비대 장교 계급장으로 쓰기로 해서 무궁화 하나가 참위(소위), 둘이 부위(중위), 셋이 정위(대위)였다. 이러다 보니 경찰은 초창기부터 군은 경찰의 예비대(미 군정이 창설시 경찰예비대라 함) 성격이었다. 그래서 경찰은 새 제복과 칼빈을 지급 받았는데 경비대는 한참동안 일본군복과 일본제 38식.99식 소총을 써야 했고 특히 이 계급장 때문에 자존심이 많이 상해 있었다. 이러다 보니 일제 경찰에게 가졌던 그 적개심이 불타고 있었다. 따라서 어디서 외출/외박을 나간 군병력을 경찰이 제재하면 군인들이 몰려가 보복하는 식으로 전개 되었다. 그중 가장 격렬하게 전갣된 사건이 바로 영암경찰서 습격사건이다.
46년 6월 1일, 전남 영암 신북면에 이곳출신 국방경비대 4연대 소속 하사 1명이 외박을 나왔다가 신북지서 경찰과 말다툼이 벌어졌다. 하사의 모자에 달린 모표를 보고 경찰이 "일본놈들 사꾸라 꽃같다"고 놀려대자 생긴 밀다툼인데 이게 영암 경찰서 본서에 알려지자 경찰에서 이하사를 구속하여 본서 유치장에 넣어버렸다. 이에 신병을 인수하러 4연대 장교와 헌병이 찾아갔는데 이들에게도 폭행을 가했다.
이 소식이 4연대 광주본부에 전해지자 화가 난 병사 및 하사관 3백여 명이 총과 실탄을 꺼내 트럭 7대에 나눠 타고 영암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경찰은 망대에 기관총까지 설치해 놓고 쏘아대고 있었다. 연대장인 이한림 소령이 사격중지 명령을 내리고 영암군수와 함께 경찰서로 들어가 담판을 벌였다. 당시 피해는 군인 사망 6명에 부상 10여 명이고 경찰은 미미했다고 한다. 경찰전사에는 경비대 2명, 경찰 1명이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더 재미있는 사실은 나중에 국방부 장관까지 하게 되는 정래혁 경감이 당시 전남도경 기동대장으로 근무했으며 경찰을 지원하러 출동했다는 사실이다. 연대장 이한림 소령과 정래혁은 같은 군사영어학교 출신 동창생이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은 모두 경비대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총 170명 졸업생 중 장교로 110명이 가고 나머지는 경찰 등 행정관서에도 일하게 되었다. 정래혁은 처음 임관하여 3연대에서 참위로 근무하다 미고문관과 트러블 때문에 경찰로 옮겨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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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렬 연대장도 폭도들을 진압하러 출동하혀 했지만 어디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오일균과 문상길이 김달삼에게 작전 정보를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군부대를 나온 감찰청장은 경찰 간부들과 자리에 앉아 의견을 듣고자 했다.
청장: 아니 경비대에서 경찰과 합동 근무를 하자해도 출동을 하지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제주경찰서장: 그러면 몇 개 마을에 불을 지르고 "폭도가 습격해 왔으니 경비대는 빨리 출동해 주시오"라고 하면 출동하지 않을까요?
문용채 서장은 간부들의 의견을 수락하여 제주시 주변 마을에 서청과 대청원들을 시켜 불을 지르게 했다, 그리고 부대에 전화를 했다
서장: 폭도들이 제주시 주변 마을을 공격하여 집집마다 불을 질러 주민들의 피해가 엄청납니다. 빨리 진압을 해주십시오
9연대장: 지금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무기도 부족하고 훈련도 제대로 안되어 있습니다.
경찰 증원부대 사령관 김정호: 산악 깊은 데는 경찰이 갈테니 경비대는 제주읍과 서귀포 면 단위 그리고 큰 도로만 차단해서 검문해 주시오
9연대장: 안됩니다. 우리는 창설한지 얼마 되지도 않고 이제 겨우 제식훈련이 끝났고 무기도 미약합니다. 공비의 개념이니 공격과 방어에 대해 전혀 훈련이 없는데 나는 부대 지휘관으로써 그렇게 무책임하게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없으니 훈련이 끝난 다음 출동할 테니 그때가지 기다리시오.
군의 거듭된 반대에 당시만 해도 경비대를 경찰의 수하라 생각하고 있던 경찰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남로당원과 그의 세력은 "경찰이 양민집에 불을 질러 제주도민을 태워 죽이려 한다. 경찰을 타도하자"고 외치며 소문을확산시켜 경찰에 대한 반감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도민들의 마음은 경찰을 떠나 있었다.
1948년 5월 3일까지 피해는 경찰 사망 12명에 부상 21명이고 경찰 가족은 6명 사망에 3명이 부상했다. 공무원은 5명 사망에 부상은 9명이었으며 민간인은 사망 37명 중경상 58명이고 방화 45건, 납치 21건이었다. 여기서 방화는 경찰의 계책이었다고 한다.
제5절 남.북 협상 실패
김삼룡은 남로당원을 정당. 사회단체 450개에 입당시킨 후 그 단체나 당에 충성하는 것처럼 하면서 단독선거를 반대하게 하여 단독선거를 찬성하는 이승만과 우익을 고립시키기로 하였다.
중간세력인 한국 민주당,한국 독립당, 김규식 박사의 민주 동맹, 근민당, 민중 동맹, 청우당 등 다수 정당에 남로당 좌파 프락치가 침투하여 단독선거 반대를 선동하게 된다.
이러한 남로당 프락치들의 공작과 선동에 중간세력 등이 이합집산하여 공동 성명을발표하고, 김규식. 여운형. 안재홍. 안세훈(제주대표). 홍명희 등은 자주 모임을 갖게 된다. 1947년 10월 6일 김규식과 홍명희는 중간세력을 규합하여 민족자주연맹 결성 준비위원회를 조직한다.
1947년 12월 19일~20일 안재홍의 신한국당, 홍명희의 민주 통일당, 민중 동맹, 신진당, 건민회 등이 중심이 되어 민족자주연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민족주의를 자처하며 남북통일 민주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왔다. 이것은 거의 각 정당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남로당은 남한 단독선거 저지와 남북 협상을 목표로 투쟁하고 있었다.
1947년 9월 26일 소련 대표 스티코프가 "외국군 주둔 하에 탁치없는 조선 독립은 기만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만일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 소련도 철수하겠다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미국에 의한 남한 단독선거를 거부하기 위한 소련의 대응책이었다. 이 성명에 대해 우익 진영에서는 통일정부 수립 전의 양군철수는 한반도에 혼란을 초래함으로 반대한다고 하고, 좌익진영에서는 환영한다고 하였다.
좌익 진영은 "도대체 우익진영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탁치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도 반대하고 양군철수도 반대하고 오직 분단을 시켜 남과북으로 두 개의 정부를 세워 끊임없이 대결하자는 것인가"라고 규탄을 하자, 우익 진영은 "유엔 감시 하에 남북 총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세운 후 미.소 양군은 철수한다는데 왜 북한과 좌익은 반대를 하는거야? 남북 총선거를 하여 김일성이나 박헌영이 대통령이 되면 통일정부가 되어 소원대로 될 것인데 왜 반대해? 이유를 모르겠다"고 반박하였다
1947년 10월 18일, 여운형의 사회민주당, 홍명희의 민주통일당 등 5개 정당은 "소련에 의한 양군 철수안이 미국측의 동의로 더이상 연기되지 말아야 한다라고 공동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이에 우익 진영은 그동안 신탁통치 반대와 양군 철수를 외쳐 와서 소원대로 되어가고 있으나 양군 철수에 대해서는 불안하게 생각하고 미군의 철수 문제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만약 남한에서 미군이 지금 떠나간다면 폭동과 내전이 끝이 없이 발생할 것으로 판단, 찬성도 반대도 못하고 있었다.
이에 남로당은 김구선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였고, 경기중 미술 교사인 박선생을 김구생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명분으로 경교장을 매일 드나들게 하여 김구선생의 생활을 매일 남로당에 보고하게 한다.
어느 당, 기관 할 것 없이 남로당의 프락치가 깊숙히 침투되어 남로당의 지령에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신탁통치 문제는 부결되고 47년 유엔총회에 넘겨져 48년 1월 남북한 총선거를 위해 유엔 한국선거 감시단이 내한 하였다.하지만 소련은 끝내 감시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하여 남한 만의 선거를 우선 실시하기로 한다. 이와 같은 미군정의 발표에 김일성은 '남한만의 총선거는 분단을 가져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사 반대 한다"고 하였고 당연히 남로당도 그 뒤를 따랐다. 여기에 김구.김규식 등도 남한만의 총선거는 분단이라며 총선거를 반대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찬성하였다.
한독당 위원장 김구는 미.소 양군은 동시 철병할 것, 그 후 남북 정부요인이 협의할 것, 남.북 협상 후에 선거를 실시할 것 등을 발표하고 단선을 절대 반대 하자, 이승만계의 독립촉성회는 이에 대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규탄하게 되고, 한민당의 김준연은 "김구는 크렘린의 신자다"라고 강도 높게 규탄하였다.
이에 김구는 48년 2월 10일 성명을 내고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일부 몰지각한 도배들은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평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한민당과 둑립촉성회를 맹 규탄한다
1. 김구. 김규식의 남북지도자 회담 제의
1948년 2월10일 위와같이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 명의로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서신을 보냈다.
남북협상이란 것은 김구.김규식 등 남쪽 인사들과 북한이 조선의 통일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의논해 보자는 제의였다. 남북 협상 대상자는 이승만.김구.조만식.김규식. 김성수. 박헌영. 김잏ㄹ성. 허헌. 김두봉 등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당과 협상을 거부하고 나왔다. 이 당시에 김구와 김일성은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조국통일을 위해 협의를 갖도록 하자는 서신이 오고갔다.
김일성은 남한 내 단선반대 세력과 합작하기 위해 정당협의회와 민족자주연맹과 중도파와 제휴하기 위해 대남 사업을 강화하면서 이를 위해 대남연락부장 임해 등을 남파시켰다. 이때 김일성은 자기 직계인 성시백도 남파시켜 적극적인 공작에 들어갔다.
간첩 성시백은 홍명희. 안우생. 김구식 비서 권태양. 민주자주동맹의 박건운. 임정계의 김찬, 김구 측근 엄항섭, 조소앙의 비서 김흥권 등을 접선하여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성시백은 김일성의 특사로 김구 선생을 만나 남.북회담 초청장을 김구에게 직접 전달하였고, 남북회담을 주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한의 중도파와 민족자주동맹 등을 선동하여 5.10선거 반대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48년 3월 25일, 평양 방송은 김구. 김규식 양씨가 북한에 서한을 보내어 남.북 협상을 요청하였다고 방송하였다.
48년 3월 26일, 김구 선생은 경교장에서 기자회견을 하여 "나는 남.북 협상을 제의 하였다" 고 하여 이 소식에 남한의 많은 국민들이 깜짝 놀랐다.
48년 3월 26일, 평양 방송은 "북조선 민주주의 통일전선이 전 조선 정당.사회 단체 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할 것을 결정하여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조선의 제 정당 사회단체를 초청한다"고 보도 하였다.
48년 3월 29일 김구선생은 성시백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았다. 이 초청장을 받은 사람은 김구.김규식.조소앙.김봉준.백남운.홍명희.김일청.이극로.박헌영.허헌.유영준.허성백.김원봉.송을수.김창준 등이었으며 우익은 모두 배제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남한의 많은 국민들이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김구가 미국의 하는 일마다 목숨걸고 반대하니 참으로 골치 아프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남조선 안에서도 좌우가 협상이 안되고 김구와 이승만도 협상이 안 되는데 미.소가 철수한 다음 남한의 450개 단체와 북한이 협상이 되어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세울 수 있ㅎ겠는가? 꿈같은 이야기다"하며 탄식하였다.
48년 4월 19일에는 제주도에서 한참 폭동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데 서울 경교장 앞에서는 60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 김구선생의 북행을 취소하라고 간절히 요구하였다. 이에 김구선생은 "나는 가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야 합니다. 남.북 통일을 위해서는 모든 고난을 무릎쓰고라도 가야 하는 것이요, 만약 나의 목적이 성취되지 않으면 나는 38선을 베개 삼고 자결할 것이요. 어서들 비키시오!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문제가 좌우의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다.과연 무엇을 가리켜 좌라 하며 우라 하는가? 또 누구를 가리켜 애국자라 하고 반역자라 하는가... . 그러나 나의 흉중에는 좌니 우니 하는 개념이 없다" 라고 하며 권유를 뿌리쳤다.
이에 월북을 반대하는 인원들은 "김구 선생님, 독립운동을 하니까 김구 선생이지 공산주의와 타협하면 김구가 아닙니다"라고 권유했지만 김구는 단호하였다.
48년 4월 19일 김구선생은 아들 김신, 비서 선우진과 같이 경교장 뒷문을 통해 출발하여 6시 45분 38선을 넘었다. 좌익세력은 먼저 4월 10일 38선을 넘었고, 홍명희는 4월 19일, 김규식은 4월 21일 38선을 넘었다.
2.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실상
48년 4월 14일, 평양에서 김일성에 의해 건축된 모란봉극장에서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남한의 남로당 등 28개 단체 395명, 북한 로동당 등 15개 단체 300명, 계 695명이 참석한 가운데 말이 회의이지 실상은 김일성 주관하 궐기대회가 열렸다.
김일성은 남에서 온 김구와 김규식을 남한 대표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695명 중의 한사람으로 희의에 참석케 하였다. 남북협상이 아니라 김일성 자신을 지지하는 궐기대회에 박수를 치도록 이용하였다.
김규식 박사는 남.북 협상의 조건으로 프로레타리아 독재를 포함한 어떠한 독재정치도 반대하며 국민을 대표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해야한다. 독점 자본주의 반대함과 동시에 사유재산을 인정한다. 전국적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를 수립한다. 우리나라 영역 안에 외국군의 군사기지 설치에 반대한다. 미.소 양군의 철병을 주장한다. 등의 조건을 내세웠고 여기에 김일성은 모두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하여 승낙하여 평양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평양에 도착하여 보니 전혀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고, 협상은 그만두고 박수만 치는 꼴이 되어버렸다. 김일성.박헌영 등 북한측 28명은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은 주석단에 끼지 못하다가 4월 22일 김구.김규식.조오나구 등이 평양에 도착하자 김구.조소앙. 조완구 등은 주석단에 끼게 되었으나 김규식 박사는 고약하다고 주석단에 끼지도 못했다.
김구선생은 우리는 같은 핏줄, 같은 민족이니 나이가 많은 선생이 가면 젊은 김일성이 잘 모시고 통일협상을 진지하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회의는 이미4월 14일부터 시작되었고 주석단 명단에도 빠져 있었다. 김일성의 일방적인 회의 진행에 박수만 치게 하는 것을 알고 분통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김일성은 소학생들을 동원하여 김구선생을 따라 다니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김구선생을 욕보이기 위하여 따라 다니면서 김구선생 귀에 들리도록 "반동분자 김구가 왔다. 김구는 반동분자였으나 오늘은 우리 김일성 수령님의 부름을 받고 왔으니까 오늘부터는 애국자야"하고 떠들어 대는 것이다. 김구선생은 "김일성이 이럴 수가"하며 평양에 온 것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김구 선생 일행이 "야 저리 가라"하면 그들은 저만큼 갔다가 다시 따라붙어 떠들어대니 옆 사람 보기에 민망하여 안절부절 하였다. 이미 업질러진 상황이었다. 시내 벽보에도 "우익 반동분자 김구. 이승만을 타도 하자!"라고 되어 있는데 김구라는 글자를 살짝 지운 시늉을 해 놓아 누가 보더라도 김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탄식은 이미 허사였다.
김구 선생은 모란봉 회의에 참석하여 연단에 올라가 "우리는 같은 파를 나눈 한겨레이므로 나누어 질 수 없다"라고 간단한 인사 말을 했고, 조소앙도 간단한 인사말을 하였으나 김규식 박사는 아프다는 핑계로 아예 회의장에 나가질 않았고 이후에 김구도 회의장에 나가지 않았다.
김구 일행이 회의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김일성이 찾아왔다.
김일성: 어디 편찮으신가요?
김구: 조만식 선생을 석방해 주시요
김일성:예,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이건 뭡니까? 김일성이 호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김구에게 내밀었다.
김구선생이 얼굴색이 변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러자 김일성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던지고 호텔방을 나가 버렸다. 김구 선생이 조만식 선생에게 보낸 편지였다.
김일성: 왜 그리 당황하십니까? 앞으로는 이런 장난하지 마십시오!
김일성은 김구선생의 안색을 살피다 일굴을 찡그리고 비웃듯 한마디 던지고 나가 버린 것이다.
김구선생의 생애에 이런 모욕은 없던 일이다. 선생 나이 73세, 김일성은 34살로 39년의 차이였다. 김규식 박사가 김구선생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선생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등이 4월 26일 회담을 하였으나 김일성의 일방적 연설로 끝났고, 이어서 남.북 요인 15명이 연석회의를 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김일성과 김구, 김규식,홍명희 등이 개별회담도 하였으나 마찬가지였다.
1948년 4월 23일,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남.북 연석회의에서 김일성에 의해 미리 작성된 것을 박수로 가결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가. 조선의 정치혼란을 야기시킨 책임은 38선을 고정화 하여 남북 분단을 영속화하는 단독선거를 실시 하려는 미군정 당국에 있다
나. 어떠한 조건, 어떠한 환경, 어떠한 경우에도 남조선 단독 선거는 절대로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3천만 동포의 이름으로 단호히 반대한다.
다. 조선 분단에 이용당하고 있는 UN 조선위원단은 철수하라
라. 미.소 양군의 즉시 동시 철퇴를 요구한다.
이상의 내용을 가결하고 미.소에 보내기로 하고 4월 28일 폐회, 30일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가. 조선에서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 철병시키는 것이 현 정세에 있어서 조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옳은 유일한 방법이다.
나.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조선에서 외국 군대를 철퇴시킨 후 내전이 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 인민의 희망에 배치하는 어떠한 무질서의 말썽도 허용하지 않는다.
다. 외국 군대의 철퇴 후 전조선 정치회의를소집하여 최초의 사업으로 통일조선의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하여 그에 의하여 조선 헌법의 제정,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이 서명에 남측의 남로당.한독당.인민공화당.근로인민당.민족자유연맹 등 28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와, 북측의 북로당.북조선 민주당 등 15개 정당 사회단체가 서명하였다.
이 내용의 면면을 살펴보면 사실 북한은 이미 소련의 사주에 김일성 일당 지배체제가 굳혀지고, 벌써 내부적으로는 무력 남침을 위한 군사력 확충에 들어간 시기였다. 그러니 소련은 무기와 군사고문관이 대대.중대까지 배치되어 실질적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는 상태니 미.소가 한반도에서 동시에 물러나면 그들은 결정적 시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미군측도 그러한 소련과 김일성의 간계를 꽤뚫어 보고 있었으며, 남한의 우익 들도 우려를 나타내고 무모한 월북을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위의 성명서 내용은 사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이고 나머지는 들러리였다고 한다. 참 기막막힐 노릇이었다.
[서울에 돌아온 임정 지도자]
1948년 5월 9일 김구 선생과 김규식 박사는 서울로 돌아와 김규식 박사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경교장에 도착한 김구선생은 기자들의 협상에 관해 질문을 받았다.
기자들: 김일성과 회담은 잘 되었습니까?
김구: 실패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다.
기자들: 협상내용은 무엇입니까?
김구: 남한에 송전 계속, 연백 저수지 개방, 조만식 선생의 월남 허용 등이오.
김구선생은 남북 통일선거를 하면 남북한이 하나가 되는 통일정부가 수립되고 그를 따르는 임정세력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본 것같다. 하지만 북에 가서 눈으로 확인한 결과 이미 북한은 김구가 생각하고 있던 그런 조직이 아닌 김일성이 실권을 쥐고 소련의 통제에 따라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대의 명분인 조선이 하나가 되는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버릴 수도 없었다. 이렇게 되니 남한은 더욱 더 좌.우익의 갈등이 첨예화 되고 바로 5.10선거가 실시 되었다.
평양 모란봉 극장의 남.북 연석회의는 결국 김일성의 정통성을 인정해 주는 들러리만 썼다면 과한 표현일까~?
제주도 4.3폭동과 5.10선거 반대 폭동,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1월 3일 제14연대의 여순반란사건의 연속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심히 위기에 처해 있었다.
김구선생은 하지만 미.소 양군을 철수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면서 미군철수를 계속하여 주장했다.1949년 1월 8일 또 다시 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남북협상을 다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다 49년 6월 26일 극우익 안두희에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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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희
대한민국 포병장교이며, 1917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했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 다니면서 기생과 결혼하는 등 방탕생활을 했다고 한다. 1947년 서북청년회에 가입후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육사 8기로 포병소위가 되었다. (추정:포병사령관 장은산과 김지웅, 홍종만의 사주). 사실 그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백범과 인연을 맺었다. 그런 그가 어떤 배후로 1949년 6월 26일 백범을 알현 한다며 서울 경교장에서 백범을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그는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3개월도 안돠어 15년으로 감형되었고, 6.25전쟁이 나서 군인으로 복무했다.1953년에 복권되었고,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에 군납업으로 큰 돈을 벌었으나, 4.19혁명 후 청년들에게 쫒겨 다니다 1965년에는 칼을 맞고, 1987년에는 갈비뼈와 머리가 부상당하였다. 1992년 다시 갈비뼈를 부러뜨린 권중희에게 납치되어 가평에서, 이승만이 사주했다고 했으나 이는 납치에 의한 고문으로 그랬지 허위자백이라 했다.
그는 배후와 관련하여 단독범행이라 했다가 김창룡의 명령을 받았다고 하기도 하고, 미국이 시킨 일이라고 하기도 한다. 결국 1996년 80세의 나이로 인천 자택애서 버스운전기사 박기서에게 참혹하게 몽둥이로 얻어맞아 죽었다. 박기서는 각계각층의 탄원으로 최종 3년 형을 받고 1998년 사면되어 1년 5개월 만에 출옥했다.
안두희 가족은 모두 이민하여 살았지만 안두희만 국내에서 살았다. 그의 죽음에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으며 시신은 화장되어 한강물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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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공산화 준비]
이미 김일성은 미군정의 5.10선거를 결사반대 하면서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아 착착 진행하였다. 46년 1월 15일 평양에 북조선 중앙은행을 설립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독립정권 즉 국가가 설립된 것이다. 통화를 발행하는 것은 국가기관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46년 2월 8일 북조선은 임시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일성이 위원장이 되었고, 3월 5일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공산주의 기틀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48년 4월 25일에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특별회의에서 헌법 초안을 채택한다
제6장 김달삼(제주남로당 대표)과 김익렬(9연대장)의 평화협상
제1절 개요
사실 이부분은 지금도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론부터 말하면 일부 우익 인사들이나, 보수성향의 논객들은 당시 9연대장 김익렬 소령의 행적을 정상적으로 보지않고 적어도 빨갱이급은 아닐지라도 어느정도 중도 좌파적인 인물이 아닌가 하는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김익렬은 그후에 여러 우여곡절을 격으면서도 승승장구하여 중장으로 예편하여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9연대장 보직해임 이후에는 다시 여수 제14연대장으로 갔다가 48년 10월의 제14연대 반란사건이 터지기 전 다시 해임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군 내부 세포조직 척결과정에 연루되어 조사받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전방 제1사단 제13연대장으로 부임하여 6.25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여기서는 그런 김익렬 연대장과 남로당 유격대장 김달삼의 협상과정을 통하여 그 실체를 부분적이나마 알아보고자 한다
제2절 제9연대장의 평화협상 제의
미군정장관 딘소장은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에게 유격대와 접촉하여 항복할 기회를 주라고 지시한다. 이에 맨스필드는 제9연대장 김익렬에게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저자 당연히 올 것이 왔다는 것처럼 오일균 제5연대 재2대대장이 연대장을 만나 협상을 건의하였다.
[*1연대:46.1.15 태릉 정위 채병덕, 2연대:46.2.28 대전 정위 이형근, 3연대:46.2.26 이리 부위 김백일,
4연대:46.2.15 광산 부위 김홍준, 5연대 46.1.19 부산 참위 박병권, 6연대:46.2.18 대구 참위 김영환
7연대:46.2.7 청주 참위 민기식, 8연대:46.4.1 춘천 부위 김종갑, 9연대:46.11.16 모슬포 부위 장창국
10연대:48.5.1 강릉 소령 백남권, 11연대:48.5.4 수원 중령 박진경, 12연대:48.5.4 군산 중령 백인기
13연대:48.5.4 온양 중령 이치업, 14연대:48.5.4 여수 소령 이영순, 15연대:48.5.4 마산 중령 조암
16연대:48.10.28 마산 중령 박시창, 17연대:48.11.20 시흥 중령 백인엽, 18연대:48.11.20 포항 중령 최석
19연대:48.11.20 광주 소령 민병권, 20연대:48.11.20 광주 중령 이성가, 21연대:49.2.1 광주 중령 박기병
22연대:49.4.15 대구 중령 오덕준, 23연대:49.4.20 마산 대령 김종평, 25연대:49.6.20 대전 중령 유해준,
기갑연대:48.1.1 수색 소령 이용문
제20연대는 여순반란사건의 제4연대를, 제22연대는 대구반란사건의 제6연대를 개편 창설함]
당시 김달삼은 경비대가 중립을 지켜주고, 이러한 경비대를 침투한 세포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합동만 된다면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싸움은 경찰하고만 하고 경비대와는 협상하는 것이 전력이어서 문상갈 중위가 전한 9연대장의 소식은 반가운 일이었다.
김익렬은 김달삼과의 대표 회담을 위해 루트로 전 제주지사 박경훈을 이용하여 협조 요청을 하였고 자문도 받았다. 문상길과 오일균은 김달삼 만나는루트를 알면섣도 모르는척 한다.
여기에 연대 정보장교의 건의에 따라 제주 전역에 평화협상을 하자고 전단지를 전 지역에 살포 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군은 동족투쟁을 원치 않는다.
나. 불만을 무력수단으로 호소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 즉시 무기를 버리고 회담을 하자. 연락을 바란다.
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철저한 무력 응징을 할 것이다.
이 전단지가 살포된 지 오래지 않아 유격대의 회담 조건이 연락 되었다.
가. 회담은 양쪽 결정자 이어야 한다.
나. 장소는 산 쪽으로 해야 한다. 회담 장소는 2시간 전에 알려주겠다.
이상의 내용은 즉시 제주 미군정관에게 보고 되었고, 협상을 위해 미 군정관은 모든 것을 9연대장에게 위임하였다
제3절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
48년 4월 28일 오전 11시, 유격대로부터 1시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김익렬은 간부들을 모아 놓고 마치 유언장을 읽는듯이 "나는 유언장을 서놓고 간다. 5시까지 오지 않으면 죽은 줄 알고 무력 진압하라" 그리고 출발하여 구억초등학교 교장실로 정보장교 이윤락과 같이 갔다. 운동장에는 500여 명이 훈련을 받고 있는데 반정도는 여자였고, 200여 며은 무기를 가진 것이 목격되었다
유격대장 김달삼 25세. 연대장 김익렬 27세, 김익렬은 김달심이 권하는의자에 앉으며 질문을 하였다.
김익렬: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요? 이 질문에 김달삼은 껄껄 웃으며
김달삼: 그렇게 묻는 의도를 알겠습니다.
김익렬: 하도 젋고 잘생겨서 살인할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 물어본 것입니다.
김익렬: 산에서 살면 통신과 의.식.주가 불편하겠습니다.
김달삼: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런 대로 지낼 만합니다.
김익렬: 부상자도 많을 텐데 의료품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당신네들은 병원도 없으니 치료가 어려울 것이 아닙니까?
김달삼: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김익렬: 왜 우리는 동족끼리 피를 흘려야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김달삼은 김익렬의 한숨 쉬듯 하는 말에 김달심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연대장은 다시 말을 이어 김달삼을 억압하게 된다
김익렬: 군대는 개인의 뜻과 관계없이 명령이 내리면 복종행야 합니다.만일 오늘 회담이 결렬되면 다음에는 당신과 나는 전투장에서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경찰과 교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돌담을 끼고 소총으로 싸워서는 효과가 없어 우리는 박격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격포가 곧 연대에 도착할 겁니다. 군대는 명령에 삽니다. 아무리 내가 당신들의 궐기를 이해해도 그것은 한계가 있어요. 명령이 내려지면 나는 박격포를 쏠 수 밖에 없소
김달삼은 박격포 이야기에 얼굴이 창백하여졌다. 회담 시간이 1시간이 지나면서 김달삼은 지금 왜 무기를 들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을 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이 이념싸움은 그만하고 자수하라고 하자 김달삼은 화를 내었다. 이에 연대장 김익렬이 먼저 합의를 제시힌다
김익렬: 그렇다면 좋습니다. 우리 합의를 합시다. 내가 먼저 제시할 테니 들어 보시오. 첫째, 즉시 전투행위 중지. 둘째, 무장해제. 셋째, 범법자 명단 제출과 즉각 자수 어떻습니까?
김달삼: 좋습니다. 그럼 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미군 철수. 돌째, 경찰 무장 해제와 악질 경찰과 서청을 제주도에서 추방. 셋째, 제주도민으로 경찰이 편성될 때가지 진압 업무를 경비대가 수행할 것. 넷째, 의거 참여자에 전원 불문에 부칠 것 등입니다.
김익렬: 첫째는 우리가 다룰 성격이 아니요, 둘째는 약탈이나 범법을 하면 즉시 처벌하겠소, 셋째는 앞으로 제주도 경비는경찰에서 경비대로 옮겨질 것이요. 그렇게 되면 경찰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요. 넷째는 교전중이 아닌데 범한 살인 방화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그 외에는 모두 불문에 붙이고 군에 귀순하면 생명과 재산 안전 자유를 보장하겠소. 살인 방화 범인이라도 귀순하면 극형은 면해 주겠소. 마지막으로 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 한계를 명확하게 래 주시오. 기재된 사람들이 자수를 하든지 도망을 가든 그것은 자유스럽게 하겠습니다. 당신과 지도급들은 중벌을 면키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입산자들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시켜 준다면 당신들과 지도급에 대해서 도피할 수 있도록 배를 마련하여 해외(일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소
김달삼:(느낌상 김달삼은 김익렬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판단한다) 귀순과 무장해제가 끝나고 모든 약속이 준수 이행되면 나는 당당히 자수하여 이번 의거의 모든 책임을 질 것입니다
제4절 평화협상 합의
김달삼과 김익렬은 회담한지 4시간 30분 만에 합의를 보았다.
1. 72시간 내에 완전 전투중지. 대정면과 중문면은 즉시 전투 중지할 것이며, 72시간이 지나 전투를 하면 배신 행위로 간주하여 합의를 무효로 한다.
2. 유격대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시 전투를 재개한다.
3.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이와같은 합의 이행 약속으로 김익렬은 본인의 가족을 인질로 맡기겠다고 하여 김달삼에게 믿음을 주었다. 김익렬은 연대로 복귀하여 서귀포 성산포에 수용소를 건립케하여 산에서 하산하는 인원을 받도록 조치하고 미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에게 보고 하여 승인을 받아냈다.
이에 맨스필드는 보고 받음 즉시 경찰에 "경찰은 경찰관서만 경계하고 외부에서의 행동은 일체 중지한다"고 명령하여 경찰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전단지로 알리면서 조천면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전투가 중지되고, 29일 12시부터 귀순자가 증가하여 천막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전단지를 보고야 경비대와 폭도들과의 회담을 알게 되면서 분노하기 시작한다. 김정호 사령관은 제주경찰서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즉시 보고하고 "경비대가 폭도들과 한통속이다"고 하면서 경비대 안의 남로당 프락치를 즉시 파악하라고 지시하게 된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찰과 형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