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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류창원권사
요한 웨슬레의 생애<1703-1791>
제 1 장 웨슬레와 그 시대
웨슬레의 인격과 신앙과 그것을 토대로 한 메도디스트 운동은 직접적으로는 18세기 영국의 부패하고 무력하여진 종교와 도덕을 혁신하여 정신적 파산 상태에서 건져냈으며, 간접적으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막대한 공헌을 끼쳤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다시 오늘날 전 세계 각국에 전파되어 인간 내심의 변혁과 사회 개혁에 위대한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 도덕 상태 - 그 시대는 청교도적 엄격주의의 반동으로 극도로 문란하게 되고 부도덕하였다. 그리고 산업 혁명의 초기시대로 사회의 부도덕한 생활은 가속도로 증대되었다. 파산자와 실직자가 계속하여 생기게 되어 빈민과 걸인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고 있었다.
관극 - 극도로 문란하여 정조 관념이 극도로 약화되어 평화스럽던 가정에는 불화와 이혼 등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었다. 극장은 모든 음란방탕의 소굴이었다.
소설듣기 - 상류가정의 부인들은 '소설읽기' 품팔이를 고용하여 음탕한 소설을 들으며 방탕에 빠졌다.
도박 - 도박으로 말미암아 가지 가지의 비극이 일어났으니 파산은 물론이요 도둑, 자살, 자포자기, 가정 불화, 가정의 이산 등이 끊임 없이 일어났다.
닭싸움과 소싸움 - 이러한 잔인한 경기를 즐기던 당시의 사회는 결투와 폭행이 성행하였다.
종교상태 - 다만 직업적으로 그들의 직무를 행할 뿐이었고, 사람을 회개와 중생의 길로 나오게 하는 아무런 영력도 없었다.
사상의 개관 - 계몽사상, 경험주의 철학, 초월신론, 신비주의 등의 이러한 시대 사조는 죄악과 고통에 얽매인 민중을 건져 내기에는 너무도 무력하였으며 그들의 깊은 종교적 요구에 응해 주지 못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하나님은 성령의 감화와 굳센 신앙과 열렬한 인류애로 가득 찬 요한 웨슬레를 일으켰고, '메도디스트 회'라는 수도관을 통하여 사막 같은 전 영국 방방고곡에 신선한 생명의 물을 대어 주어 죽음에 허덕이는 영들을 구원하였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새로운 신앙 부흥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제 2 장 웨슬레의 계보
웨슬레의 가문은 그의 증조부인 바돌로매 웨슬레로부터 요한 웨슬레(할아버지), 사무엘 웨슬레(아버지), 요한 웨슬레까지 3대를 내리 전도자의 집안이었다.
바돌로매 웨슬레는 웨슬레 가문에서 최초로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자였다. 그리고 그의 증조모로부터 그 어머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다 재덕이 겸비하였으며, 교회에 열심이었으며 청교도였다.
요한 웨슬레의 할아버지도 이름이 요한 웨슬레였는데, 1665년 영국정부가 Five mile act를 선포하여 설교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설교함으로서 4회를 투옥 당하고 고문 끝에 34세에 죽음을 당하며,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증조부 바돌로메오도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부친 사무엘 웨슬레는 학업을 닦는 여가에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는 중에 장차 교역을 하겠다는 충동과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들도 50년 후에 그 아버지를 본받아 옥중에 갇힌 자들을 열심히 찾아 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 주었던 것이다.
웨슬레의 어머니인 수산나 부인은 열 세 살 때에 벌써 당시에 유행되던 교회와 또는 교리적 변론을 탐독하였다. 그녀는 별명이 "A theologian in Short dresses"이었을 만큼 신학적이었다.
요한웨슬레가 초대교부들의 신학을 연구하게 되고, 특히 크리소스톰, 닛사의 그레고리등 동방교부들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그의 부친과 어머니의 권고와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요한웨슬레과 그 형제, 자매들은 중고등학교를 가기 전에 이미 헬라어와 라틴어를 배웠다고 한다.
수산나는 어려서부터 청교도 운동의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남편 사무엘 웨슬레와 함께 청교도에서 영국국교로 개종할 때에도 그녀의 청교도의 정신만큼은 계속 유지되었다. 왜 영국국교로 개종하였는지 그것이 의문이지만, 그의 남편 사무엘 웨슬레가 영국국왕 윌리엄3세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그녀는 결코 아멘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사무엘은 런던에서, 수산나는 웹엣에서 서로 별거를 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녀의 친구의 도움으로 그들이 엡웻에서 화해하고 재결합한 후에 비로서 요한웨슬레가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1697년 초에 사무엘 웨슬레는 링컨 주에 있는 엡웻이란 동네 목사로 임명되어 38년 동안을 하루같이 성실히 받들어 복무하였다. 엡웻 교회 시무 중 1703년 6월 13일 요한 웨슬레를 낳았다.
만일 이들이 계속 별거하였더라면, 요한웨슬레는 태어나지 않았다.
제 3 장 엡웻 목사의 가정 생활
웨슬레 가문은 엡웻 촌에서 처음 12년간은 본토인에게 많은 곤란을 겪었다.
수산나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집안 살림살이는 물론이려니와 자녀 교육에도 힘썼다. 필요한 교수 관목을 제정하였으며, 자녀들의 교육 방침도 친히 결정하였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의 제일의 방침은 규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방종을 제재함으로써 착실한 종교 교육을 주기에 힘썼다. 교육에 능숙한 수산나 부인은 그들의 재질을 보아 그것을 발전시키기에 힘썼으며, 암송하는 힘을 길러 주기에 노력하였다.
1709년 2월 9일 수요일 밤에 그 동리 사람들이 목사에게 대하여 불평을 품고 목사 주택에 불을 놓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이유에 대해서는 아마 요한웨슬레의 아버지인 사무엘이 국교로 개종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엡웻지역은 전통적인 청교도지역이기 때문이다.
미처 탈출하지 못한 다섯 살의 웨슬레는 윗층 창 앞에까지 나와 창 앞에 놓여 있는 상자를 타고 창 문턱에 올라서서 두 손을 벌리고 고함을 쳤다. 이 찰나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목말을 타고 올라가 이 아이를 안아 내렸다. 그러자 곧 그 집의 지붕이 내려앉았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요한 웨슬레를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요한 웨슬레도 역시 80여년 간을 살아 있는 동안, 그 머리 속에는 언제나 이 화재와 그의 구원받은 사실에 대한 추억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의 머리 속에는 어느 구석에도 최고 실재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마음이 털끝 만큼도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애정 깊은 친구와 선생의 모습으로 수산나를 도와 자녀들에게 고전 문학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평판 높은 장서가로서 자신의 서적 사랑하는 마음을 그 자녀에게까지 끼쳐 주었고 그들에게 독서를 장려하였다. 또한 음악을 즐기어 그 자녀들에게도 음악은 사람의 경건심을 돕는 것이라고 하면서 음악공부를 권장하였다. 그 뿐만 아나라 그는 또한 독립교파에 속한 그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함으로써 그 자녀에게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또한 박학자요 사색가였으며 필설이 함께 능하였고 활동적 인물이어서 그 자녀 특히 요한 웨슬레는 그의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성격은 성급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쾌활하였으며 동시에 인정미가 풍부하고 관대하고 진실하였다.
제 4 장 차터하우스의 학창 생활
요한 웨슬레는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고 한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외적 제재가 제거됨에 따라 여러 가지 외적 의식까지도 전보다 경시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범죄까지도 감행하는 지경에 이르렸다. 다른 사람은 그의 범죄 사실을 범죄라고 보지 않았으나 그 자신은 그렇게 인정하였다.
그럴지라도 아침과 저녁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늘 계속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같이 불량한 사람이 되지 아니할 것, 종교에 대하여 호의를 가질 것,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할 것, 이 세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하였다.
웨슬레가 차터하우스에 재학 당시 유명한 음악가 펩쉬와 헨델과 특별한 교분을 가졌었다. 그 중에 헨델은 찰스 웨슬레와도 친교가 깊었다고 한다.
제 5 장 옥스포드 대학에서의 위기
1720년 여름 옥스포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취 대학에 입학하였다. 옥스포드 대학은 영국에서 굴지로 꼽히는 최고학부로서 그 명성이 높았지만 교내 풍기는 그리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가 후일 자기의 과거의 학창 생활을 뉘우치는 말을 한 것을 보아 환경의 영향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에 웨슬리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 그리고 로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들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시기는 웨슬레의 생애에 있어서 한 큰 전환기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속을 받았다는 중생의 경험은 이제로부터 13년 후에 얻었으나 하나님과 인류를 위하여 몸을 바쳐 살겠다는 목적을 세우기는 이때였던 것이다.
테일러의 저서에 감명을 받은 웨슬레는 이때부터 그의 유명한 '일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가 그의 일지를 쓰게 된 동기는 그의 시간의 선용과 생활의 반성을 목적함이었다. 그의 일지는 18세기의 영국 문학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웨슬레는 면학가였다. 그리하여 그는 링컨 대학에 있으면서 히브리어, 아랍어, 희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 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히 넓었다. 그가 문학사의 학위를 받은 것은 1727년이었는데 그는 당시 웅변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링컨 대학 재학 중 웨슬레는 조기의 습관을 길렀는데 그는 이 습관을 평생토록 지켜 나가 80의 고령에 이르렀을 때에도 오전 4시에 일어났다.
제 6 장 신성 구락부
요한 웨슬레가 떠난 후 찰스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매주 일차씩 시행하는 성찬식에 참석하기를 시작하고 동지들과 함께 내심의 성결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의 동지들은 서로 뜻을 같이하여 생활의 향상을 목표로 일정한 시간표를 만들어 매일 매일의 학과와 종교적 의무를 규칙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그들은 침식의 시간을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신앙의 향상을 위하여 많은 시간을 썼다. 그륻의 이러한 규칙적 생활은 동창 학우 사이에 조소의 대상이 되어 '방식주의자(Methodist)'라는 별명을 들었다.
후에 요청에 의해서 신성구락부를 지도하게된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신으로 신중히 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히 여겼으며, 일반 회원들에게 항상 겸비한 태도로 임하였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그의 지도에 불평과 불만을 표시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이 처음에는 매 일요일 저녁에만 모였으며 그 다음에는 일주일에 한번씩 모였고, 나중에는 매일 밤마다 6시로 9시까지 모였다.
집회 시의 순서는 이러하였다. 처음에는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는 희랍어 성경과 고전 문학을 연구하고, 그 후에는 그 전날 공부한 것을 복습하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 날의 순서를 정하고 마지막으로는 검소한 식사로써 마쳤다. 그리고 매주 1차의 성찬식을 거행하고, 1주 2회의 금식을 하면서 자신들을 반성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하며 선행을 하기에 열심하는가를 살폈다.
신성구락부에서 웨슬레는 유명한 화이트필드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웨슬레에게 영국의 부흥운동뿐 아니라 미국부흥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준 인물이다.
신성구락부의 회원들의 유일한 목적은 먼저 자신들의 영혼을 구하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건지는 일이었다. 이 작은 단체는 비록 해산되어 그 존재가 사라졌으나 성실과, 높은 이상과, 신의 은총을 겸한 웨슬레 형제과 화이트필드의 신앙과 생활은 처음에는 한 대학을 깨우쳤고, 그 다음에는 영국 전역에 믿음의 불은 일으켰고, 나중에는 바다를 건너 북미 대륙과 전 세계에 거룩한 신의 불꽃이 일게 하였다.
제 7 장 북미 대륙 선교
웨슬레는 외국 선교의 중임을 띠고 만리 이역의 길을 떠나게 되기는 하였으나 그의 동기는 애타적이기 보다는 이기적이었다. 미대륙에 도착하기까지는 8주간이나 걸렸는데 이 항해는 요한 웨슬레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특히 선객들 중에 모라비아 교도들과 친근한 교제를 하는 중에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용감한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항해 중에 배가 심한 풍랑을 맞아 우왕좌왕하였을 때에, 전혀 두려움이 없이 찬송을 부르는 26명의 모라비아 교도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웨슬레는 그곳에서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활동을 하였지만, 그의 엄격한 주의와 주장으로 말미암아 그의 활동과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조지아 선교에 착수한 지 만 2년이 좀 지났을 무렵 불행한 연애 사건으로 조지아 선교 사업은 끝나고 말았다.
그는 항상 어머니와 같은 여성을 못만날 것 같아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고, 독신론을 갖고 있었기에 결혼을 망설이기도 하였다. 웨슬레는 한 여인을 만났는데, 독신과 결혼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다가 제비를 뽑은 결정으로 결혼을 포기하였다. 결국 그 여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되고, 그 남편은 부인을 웨슬레의 집회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웨스레는 이것에 대항하여 그 여인에게 성찬을 금하는 일이 생겼다. 그 사건으로 웨슬레는 옹졸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게되어 결국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웨슬레는 4명의 자녀를 둔, 전 남편의 상속재산이 많은 Molly Vazeille 이라는 과부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웨슬레가 다쳤을 때에 그 집에서 치료를 받은 것이 그 동기가 되었다.
웨슬레가 결코 그녀의 재산이 탐이 나서 한 결혼은 아니었다. 웨슬레는 그당시 이미 48세의 노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였고 심한 의부증을 갖고 있어 이미 오랫동안 별거 중이었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지 못하였다. 그후에 그녀는 먼저 죽게된다.
그러나 그의 조지아 선교는 반드시 실패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으며, 여러 면에 있어서 많은 유익을 끼쳤다. 뒤에 오는 선교사들에게 겸비한 마음과 굳건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한 점이라든지, 휫필드로 하여금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유력히 일할 수 있는 충동을 준 것이라든지, 뒤어 오는 카톨릭 선교사를 선도하여 북미 대륙에 동 교회를 설립함에 실패가 없게 한 점 등은 웨슬레의 선교가 끼쳐준 공헌이다. 이 밖에도 새로운 영적 경험을 토대로 한 깊고 넓은 신학이 나타날 준비가 또한 이 때에 예비되었던 것이다.
제 8 장 웨슬레 형제의 회심
웨슬레 형제가 조지아에서 돌아온 후에, 동생 찰스 웨슬레는 그 형제 중에서 먼저 중생의 기쁨과 내심의 평화도 먼저 경험하게 된다.
요한 웨슬레는 1738년 5월 24일에 올더스게이트 가에서 열린 작은 영국교회의 집회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는 중에 회심의 경험을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엄격한 의식주의자였던 요한 웨슬레는 복음주의의 구원과 생명을 체험하고 그 체험한 바를 원근 각처에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웨슬리 회심일 날의 일기> - 1738년 5월 24일 (수) -
그 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 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제 9 장 전도의 시작과 교회 설립
웨슬레가 회심을 체험한 후, 헤른후트 공동체를 방문하러 독일로 가서 유명한 친첸도르프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친첸도르프는 루터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복음주의자로 불리운다.
그는 순결한 교회와 경건주의라고 불리는 이상, 세계선교를 갖고 있었으며, 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온 보헤미야와 모라비안에서 온 피난민에게 자신의 소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여주고, 그곳을 헤른후트라고 불렀다. 친첸도르프는 그들에게 헌신적이었지만, 그들과 어느 정도의 거리는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로 남고 싶어했다.
친첸도르프는 "자기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파악하기 원하는 자는 무신론자가 된다"고 말하였다.
웨슬레는 회심 후 18일 후에는 옥스포드 대학 앞 뜰에서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설교의 제목은 그의 평생 동안의 복음 전도의 기초였으며, 그 설교의 내용은 감리회 신앙 개조의 표준이 되었다. 휫필드는 그의 가슴 속에는 전도의 열정이 불붙었으나 당시의 영국 교회의 교회당 문은 그들에게 굳게 닫고 그들의 전도 장소로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화이트필드는 옥외 전도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당시 영국 교회의 규칙과 의식에 대하여 용감하게 도전하였다. 웨슬레는 처음에는 이러한 방법에 찬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여기에 찬성하였다.
예배당 건축의 필요를 느낀 웨슬레는 1739년 5월 12일에 브리스톨 시에 감리교회 최초의 예배당의 정초식을 거행했다. 이 철공장에서 처음으로 예배한 것은 그해 11월 11일이었다. 이 때부터 38년 동안 이 철공장 예배당은 메도디스트 운동의 총본부였으며, 빈민학교와 사료사업과 그밖에 일반 자선 사업의 중심 기관이 되었다. 그 후 백 수십 년을 지난 오늘날에는 이건물이 웨슬레 기념관으로 결정되어 감리교회에서의 전도 사업과 그밖에 일반 종사적 사업에 헌신 봉사하는 사역자들의 숙소로 쓰이고 있다.
제 10 장 신도회와 속회의 조직
메도디스트 운동이 점차로 확장되고 신도가 증가됨에 따라 웨슬레는 영국 교회에서 사용하던 신도회 제도와 모라비아 교도들이 사용하던 간친회 제도의 채택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739년 말에 설립된 '신도회'의 조직은 감리회 운동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다시 작을 단위로 갈라 그들을 보살피게 하였는데 이것이 '속회'이다.
또 철야성회를 만들어 금요일 저녁 8,9시경에 신도들을 모아 자정이 지나기까지 함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들려 주었다.
그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반 신도들의 신앙과 생활을 지도하고 격려하여 주었으며, 1743년 2월에는 일반 신도들의 신앙과 생활의 준칙이 될 만한 '총칙'을 초안하여 친히 서명하고 각 신도회에 배부하였다. 이 회에 들어오는 조건은 '장래의 노하심을 피하고 자기들이 죄에서 구원함을 얻고자 하는 소원'이었다.
영국 교계에서는 웨슬레 운동과 그 회원을 비난 공격하는 소책자가 무수히 나왔다. 어떤 목사는 웨슬레가 자기 교구에서 전도함을 금하였다. 그러나 웨슬레는 사람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의무가 있다며 "온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는 말을 하며, 어디서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말하였다.
제 11 장 평신도 전도자
도마 맥스필드의 공식적인 설교를 웨슬레는 찬성치 않아 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로부터 그의 설교 내용을 잘 알아 보고 신중히 처리하라는 권고를 받고 그의 설교를 들어본 후에 "그는 주의 말씀을 한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역사를 막겠느냐?"하여 그의 설교를 허용하였다. 이것을 찰스 웨슬레는 "그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른다", "말 못하는 나귀가 선지자를 책망한다"라는 말로 변론하였다.
또한 웨슬레는 이 평신도 전도운동에 남자 뿐 아니라 여자도 채용하였다. 이것은 그의 모친을 통해서 여성의 재능과 자유를 충분히 인정하게 되어 여자들로 전도와 자선사업에 적극 참가 활동케 하였던 것이다. 바울이 "여인이 회중에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통상규칙'이었다는 것을 말하여 그들이 설교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다.
제 12 장 웨슬레와 화이트필드
화이트필드는 칼빈주의자들과 사귀면서 그들의 감화를 받아 웨슬레 형제가 주장하는 '보편적 구원'의 교의를 반대하게 되어 자기가 믿는 '예정의 교리'를 가지고 웨슬레와 변론하기 위하여 1741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화이트필드와 웨슬레는 교리상 차이로 서로 갈리게 되었다. 이러한 논전으로 메도디스트 회원은 자연히 두 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웨슬레는 메도디스트 회에 '특별한 구원을 받은 자'와 '일반적 구원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이 두 전도자는 다시 화합하였다. 그 후 화이트필드는 여러차레 북미로 건너가 일을 하다가 1770년 9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제 13 장 박해 받은 웨슬레
웨슬레는 전도 후기에 폭도들에 의해 많은 핍박을 받았다. 웨슬레도 여러번을 죽을 고비를 넘겼고, 동생 챨스는 폭도들에게 매를 맞아 거의 죽을뻔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인격과 영력으로 폭도들을 감화시켜 성도를 만든 사건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웨슬레가 이러한 빈번한 박해를 참고 나간 결과, 1757년 이후로는 모든 박해도 그치고 그들의 앞에는 자유로운 전도의 문이 열렸다. 달래스톤의 신부는 메도디스트 회원들이 박해 중에도 굳건히 선 성도답게 처신하는 것은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아 웨슬레를 보호하고 복행자들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제 14 장 연회의 시작
웨슬레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조직체를 만듬으로 각 신도와 또는 신도회가 각각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락 관계를 맺게 하는 동시에 그들의 신앙을 북돋아 주게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조직된 집단은 영국교회를 떠나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독립 교파가 된다.
신도회가 조직된 지 5년 후 1744년에 제 1회의 교역자 회의가 런던 파운드리 예배당에서 열리었다. 그 후 2백여 년을 내려오면서 감리교회가 설립된 지역에는 이 연회 제도가 실시되고 있다. 여기서는 신도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어떻게 가르칠까? 교리 장정의 제정 및 그 실행 문제를 토의하였다.
감리교에는 다른 교단이 가지지 못한 민주적 정신이 있다. 무슨 일이나 독단적으로 처결하지 않고 회의 시에도 누구나 자유로 의견을 발표할 것을 장려하였다. 또한 웨슬레는 각 전도인으로 하여금 서로 감시하는 제도를 세워 시행하여 내려왔는데, 1767년 연회 시부터 매회의 시에 각 전도인을 한 사람씩 불러 그가 전도인 됨에 부족함이 없는가는 회중에게 물어 보았다.
제 15 장 애란, 스코틀런드, 웨일스 전도
웨슬레는 애란에서도 영국에서 당하였던 바와 같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운동이 애란 땅에 들어가 무기력한 교계에 영의 뜨거운 불꽃을 불어 넣어 주었다. 웨슬레가 애란을 떠난 후에는 찰스 웨슬레가 남아서 교회를 치리하였다. 그리고 스코틀런드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변론을 피하며 합퍼와 같이 방문하여 복음을 선포했으며, 웨일즈에서도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1743년 5월 6일에는 웨일즈에 최초의 메도디스트 교회가 창설되었다.
제 16 장 북아메리카의 메도디스트회
뉴욕과 매릴런드에 처음으로 창설된 메도디스트 교회는 애란에서 신도가 된 후 미주로 건너간 이민들에 의하여 된 것이었다. 이 새로이 창설된 교회는 웨슬레에게 서신을 보내 연회에서 정식으로 전도인을 파송하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선교사 지원자를 모집하여 선교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후 미국 감리회에서는 안수 받은 목사로서 성례를 집행할 자격자가 없었으므로 미주의 감리회 회원들이 웨슬레에게 글을 보내어 그 사정을 알렸다. 그래서 웨슬레는 토마스 콕에게 안수를 받고 미주에 있는 감리회의 감독직을 맡게 하였다. 웨슬레의 감독에 대한 관념을 영국교회의 그것과 다르다. 즉 영국 교회의 감독은 계극주의적이고, 교권적이었으나, 웨슬레의 생각하는 감독직은 장로직이며 복음주의적이며 사무적인 것이었다.
제 17 장 여행가, 전도자, 교육자 웨슬레
당시의 영국 내의 도로는 말할 수 없이 험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슬레는 매일 평균 25마일 이상을 손에 책을 들고 독서하면서 걸었다. 그는 시간의 낭비를 막기 위하여 모든 일을 주밀하게 순서를 만들어 그대로 꼭 실시하여 나갔다.
웨슬레는 휫필드처럼 열정적이며 연극적 설교가도 아니었고, 찰스와 같이 감정에 호소한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죄와 의와 심판의 도리를 논리적으로 강해하였을 뿐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설교는 듣는 자로 하여금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하였다.
그는 유년과 청소년들을 존중히 여겨 그들에게 기독교 교육을 중요시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 교육사업은 후일에 가장 큰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것은 전도와 함께 교회의 가장 큰 사업이 되고 있다.
제 18 장 사회사업가, 저술가 웨슬레
웨슬레는 오늘날의 사회사업의 선구자였다. 그는 빈민들을 돌보는 자에게 사람을 접촉함에 있어서 차별을 하지 말 것, 온유하고 인내할 것, 병자를 위해 무엇을 하든지 청결 제일주의로 할 것, 변덕스럽지 말 것의 네 가지를 주의시켰다. 또한 그는 가난한 병자를 볼 때 연민의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의학을 연구하여 그들을 도우리라는 결심을 하고 26,7년 간을 틈 있는 대로 의학을 연구하였다. 또한 열렬한 금주주의자였고, 빈민은행의 창시자였으며, 수감자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노예 제도를 반대했다.
그는 남는 시간을 독서와 저술에 썼다. 그리하여 매년 4,5천 마일의 여행을 하면서도 일생 동안 4만여 회의 설교를 하였으며, 총 25만 마일의 거리를 여행하였고 18마리의 말을 갈았다고 한다.
4백여 책에 달하는 저서를 하여 가치 있는 책을 싼 값으로 보급하는 일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의 글은 언제나 평이하고 간명하였다. 그의 저서로서 첫 손가락에 꼽을 것은 그의 일지이다. 또한 음악을 즐겨하여 많은 성가들을 번역하여 썼다. 그리고 찰스와 협력하여 성가를 쓰고 출판하기 시작하여 그의 임종시까지 평균 연1회 도합54편을 발표하였다.
제 19 장 웨슬레 말년의 메도디스트회
그는 만일에 자신이 별세한 후에 적당한 후계자가 없으면 그 사업이 계속될 수 없을 염려하였었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자기의 후계자를 물색하던 중 요한 풀레처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플레처는 웨슬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며 또한 웨슬레보다 먼저 고인이 되었다. 그런데 웨슬레는 플레처의 광범한 개혁안 중에 일부를 받아들여 영국 교회의 39신앙 개조를 25로 줄이었고, 아다아시우스 신조를 삭제하였고, 그 밖의 모든 예문을 새로이 일어나는 가정적인 향촌 교회에 적당하도록 간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감리교회가 독립적으로 집사나 장로에게 안수하는 예문과 감독 안수 예문도 여기에 포함시켰다.
웨슬레가 죽은 후 감리회를 인솔해 나갈 만한 역량을 가진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웨슬레는 1784년에 감리교회를 한 독립된 조직체로 만들 계획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포고문'이다. 이포고문을 통하여 그는 이른바 '감리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회의'에 대하여 법적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3년 후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전도단의 명목으로 법적 승인을 국가에서 받을 것을 결정하는 동시에 그의 전도인들에게 안수를하여 영국 교회의 법식대로 성례를 집행할 권한을 주었다. 이로써 웨슬레와 감리회는 영국 국교와 영영 관계를 끊게 되었다. 그러나 웨슬레는 끝내 자기는 국교에서 분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제 20 장 웨슬레의 임종
웨슬레는 80여 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전심 전령을 하나님에게 바치기로 결심한 그는 생명의 최후 일각까지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웨일스와 브리스톨과 그밖에 영국 각지로 순행 전도하였으며 와잇 도까지 갔었다. 그리고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에 88세의 보람 있는 생을 일기로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장례식이 지난 지 26일 후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요한 웨슬레와 찰스 웨슬레의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기념비에는 요한 웨슬레가 전성기에 외친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와 임종시에 남긴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다."라는 말과 찰스 웨슬레의 "하나님은 그 일군은 장사하시나 그 사업은 계속하신다."하는 말을 새겼다.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I, the chief of Sinner, om, But Jesus died for me. I'll praise! My creator.이었다(죄인 중에 괴수인 나, 나를 위하여 예수가 죽으셨다. 나는 나의 창조자를 찬양하리라)
제 21 장 웨슬레의 인격
그는 철두철미 규칙적 인물이었다. 그의 일상 생활, 전도 여행, 그밖에 모든 활동은 반드시 일정한 계획과 순서에 의하여 진행하였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민속히 하기를 힘썼으나 조급히 하려 하지는 않았으며, 언제나 침착한 태도로 실행하여 나갔다.
또한 그는 조직적인 인물이었으며 통솔력이 풍부하였다. 감리회가 오늘날 전 세계적인 큰 세력을 가지고 선포된 것은 그의 조직력과 통솔력의 결과라고 말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는 낙관주의자였고 쾌활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평민의 친구요 민중의 벗이었으며, 관용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사상상 다소의 차이로 서로 나누이는 것을 불가하다고 말하여 다른 사람의 사상과 의견을 종중히 여겼다.
그 밖에도 분투적 정신, 근면한 생활, 꾸준한 노력, 자중하는 정신, 대담무쌍한 기상 등도 지나칠 수 없으며 특히 그의 신앙 생활은 무시할 수가 없다. 웨슬레가 이 신앙의 힘을 얻었을 때 먼저 그 자신의 개인생활에 큰 변혁이 생겼으며, 나아가 감리교, 영국 전역, 그리고 전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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