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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02 / ‘예수의 흔적’을 갖자 (갈6:14-18)
어느 목사님 아들이 어릴 때 장로님 댁에 갔다가 고양이를 보고는 몹시 가지고 싶어 하자 그걸 본 장로님이 ‘고양이가 새끼 낳으면 한 마리 줄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어느날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며 장로님이 한 마리 가져왔습니다.
또 한번은 장로님이 교회에 차를 타고 왔는데 그 차가 크고 좋아 보였던지 목사님 아들이 ‘장로님, 이 자동차도 새끼 낳으면 우리 아빠한테 먼저 드리세요.’라고 하는 바람에 장로님이 크게 웃더니 ‘그러마!’라고 했습니다.
훗날 이 목사님은 장로님 자동차가 아직 새끼를 못 낳았는지 25년이 지나도록 자동차 새끼를 가져오지 않았다며 모두를 웃게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엔 자동차가 왜 여직 새끼를 못 낳을까요?
‘생명이 없으면 새끼를 낳지 못한다.’
이게 정답입니다. 게다가 생명이 없는 것은 그 자체로 생명 활동도 하지 못합니다. 백화점 의류 코너 앞에 서있는 마네킹을 보면 눈, 코, 입, 손발 다 멀쩡한데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바위틈에 핀 꽃일지라도 저게 어찌 살까 싶어도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열매 맺는 활동을 지속합니다.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은 생명으로만 이어집니다. 계란도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지라도 내면에 수정란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병아리가 태어날 수도 있고 단지 식용으로만 팔리고 말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내면을 모른 채 외형만 보고 판단하다 보면 낭패를 보게도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판단하실 때면 외형이 아닌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겁니다. 내면을 들여다봐야 그 사람의 진몬멱을 알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그리스도인의 내면에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역시나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때 말하는 생명은 단지 목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5:11-12절을 보면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의 중심을 보시겠다 함은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보신다는 뜻이고 이는 곧 우리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겠다는 말씀이신 겁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에서 세상을 향해 말하기를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한 것입니다.
우선 이 부분에 대한 배경을 잠깐 살펴보자면, 초대교회에서 사도라는 호칭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12명의 제자들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성도라 불릴 수 있는 사람도 정통 유대인으로 할례를 받은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할례도 받지 않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엔 존재도 없던 바울이 느닷없이 나타나 자칭 사도라며 활동하자 유대인들은 요즘으로 치면 소위 이단이라 해서 배척하고 핍박을 가했던 겁니다. 그때 바울이 그런 사람들을 향해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선포한 겁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땐 당시 12사도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긴 했어도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땐 그 곁에 아무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랬기에 바울은 자기를 핍박하는 기존 사도들을 향해 사도라는 당신들은 살아 계실 때의 예수님만 만났을 뿐이지만 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증거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이 자기를 더는 괴롭히지 말란 이유로 바울이 주장했던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일까요?
‘흔적’이란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인데 우리말로 번역하면 ‘낙인’이라는 뜻입니다.
낙인이 뭔지는 아시지요? ‘불에 달구어 찍는 쇠붙이로 만든 도장.’을 말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스티그마 즉 낙인을 찍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죄수와 죄인의 얼굴에 낙인을 찍었는데 이는 저주받은 사람처럼 수치를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쟁포로나 노예 그리고 가축에게 낙인을 찍었는데 이는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셋째, 로마 황제의 군인들 중에 스스로 낙인을 찍기도 했는데 이는 황제에 대한 충성 맹세로 그리했던 겁니다.
이처럼 낙인을 찍는 이유나 목적은 각각일지라도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어딘가에 속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표시로 낙인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수의 낙인, 노예의 낙인, 군인의 낙인 등. 그들은 각기 죄인들, 노예와 포로들, 군인들 무리에 속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할 목적으로 낙인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의 흔적’ 곧 ‘예수의 낙인이란 것도 실은 그 사람이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이란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흔적을 보여야 세상으로부터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란 걸 알게 할 수 있을까요?
본문 14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는 고대 로마인들이 범죄자들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도구였는데, 십자가형에 처해질 사람은 자기가 달릴 십자가 중 가로 막대만 지고 형장까지 갑니다. 이후 지고 간 막대에 양손이 못이 박힌 후에 형장에 이미 고정되어 세워져 있던 세로 말뚝에 올려져 발도 묶이거나 못 박아 죽게 하는 사형 도구였습니다.
특히 십자가형이 사형수들조차도 두려워 떨게 했던 이유는 일반 사형과는 달리 처형 후에도 금방 죽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길면 며칠에 걸쳐 서서히 죽게 되며 심지어 고통을 더하려고 더 늦게 죽도록 엉덩이 받침대까지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이 이러하다 보니 3년을 따르던 제자들이 하나같이 십자가를 피해 숨거나 도망간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바울은 당당히 고백합니다. 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이 말인즉 바울이 자기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자기에게도 십자가의 흔적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서도 보면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그가 종교적으로 어떤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의 중심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께 속한 자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십자가의 흔적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데...
뭘까요? 십자가의 흔적이란 게?
이미 배우셨다시피 십자가의 흔적이란 ‘당하는 믿음’ 즉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받게 되는 불이익 등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당하는 믿음이 뭔지를 알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중 두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씀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려고 하면 우선은 열심히 살고 믿고 기도했음에도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생각되는 상황들에 맞닥뜨리게 될 경우도 있게 됩니다. 그럴 때면 순간적으로나마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편에서도 우린 예수님이 하신 다음 말씀 즉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사가 내 뜻대로만 되지는 않기에 살다 보면 고통을 당할 수도 있고, 실패와 시련을 당할 수도 있으며, 가난과 질병을 당할 수도 있게 됩니다. 때론 이유 없이 손해와 미움을 당할 때가 있고, 아닌 말로 요즘 문제가 되는 왕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뭐가 됐든 ‘당했다.’는 말 자체가 이미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졌다는 말인데, 그런 순간을 만났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생각이 든다 할지라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나를 버린 건 과연 누구일까요? 하나님이실까요?
아닙니다. 이젠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세상일로만 놓고 볼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게 누굽니까?
예수님과 3년이나 동고동락했던 열두 제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다들 도망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라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으며, 베드로조차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욕하고 침 뱉고 고함치던 군중들은 예수님이 병 고쳐주고 축복해 주고 사랑하셨던 자들이 아니었는지요.
결과적으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은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
똑같습니다. 세상을 살며 우리가 힘들어하는 이유도 힘든 상황도 상황이지만 한편으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느끼셨던 것처럼 세상엔 ‘나를 도울 이가 아무도 없다.’는 처지 때문은 아닐는지요?
예수님의 버림받음은 하나님이 버리셔서가 아니라 세상이 예수를 버린 것이고 유대인이 메시야를 버렸기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당하신 겁니다. 그리고 이런 극한의 상황이 참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한계였기에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대변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겁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음직한 당연한 생각일 뿐이고 중요한 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그다음에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는 세상에서 버림받았다 여겨질 때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몸소 가르쳐 주신 교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는 중에 원치 않는 일들을 당했다 했을 때 당한 것으로만 끝내는 건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동입니다. 세상에선 당했지만 ‘그다음’ 우린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들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해선 안 되고, 남을 미워하거나 남들에게 괴롬을 주어도 안되지만 그러나 그런 일들을 내가 한 게 아니라 내가 당했다고 한다면 우린 그 해결을 하나님 손에 부탁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 ‘당하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요한복음 16:33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
이게 우리가 우리 안에 예수의 흔적 즉 당하는 십자가의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구약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눈물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아주 오래전에 유행했던 노래 중에 ‘울고 싶어라.’라는 게 있었습니다.
노래는 예전 노랫말이지만 지금인들 그런 때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라면 ‘울고 싶어라’할 그때가 바로 기도할 때라는 것을 빨리 깨닫고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눈물을 보시는 하나님께 나가 ‘내 모든 형편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당하는 믿음’이란 게 이런 겁니다. 현실에선 ‘당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 뒤에 이어지는 게 있어야 합니다.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당하는 믿음’이라 했을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린 무얼 중점적으로 봐야 할 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당했다’에만 빠져 사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이겨 내시겠습니까?
이 두 개의 선택 사이에서 늘 우왕좌왕하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 사도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있게 되면 우리가 세상일에 당하는 중에라도 믿음이 있게 될 것이고, 믿음이 있으면 당한 일들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는 기도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여러분의 심령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리 말씀드리면 나에겐 은혜가 없기에 늘 당하기만 하는 것 아니냐며 바울이 했던 권면을 ‘왜 내겐 은혜를 안 주시느냐’는 불만과 서운함으로 연결시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을 그런 뜻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됩니다.
해석상 바울이 예수님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기를 바란다’고 기원한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문맥상으로 보면 바울은 예수님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게 하라’는 강한 권면인 것입니다.
있기를 바란다‘와 ’있게 하라‘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예전에 ’생각이 믿음이 된다‘고 했던 말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 본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는 말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는 늘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라는 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치 않는 일을 당했든 아직은 아니든 언제나 우리 생각 속에는 ‘내겐 예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다.’를 한시라도 잊거나 깜빡하고 살지 말라는 겁니다.
생각 속에 근심만 있으니 염려하게 되는 겁니다. 생각 속에 걱정만 있으니 불안해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한계가 이러하기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우리를 향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권면하시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을 ‘예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만 산다면 세상에서 어떤 일을 당하든 우린 그 일 또한 ‘아버지 손에 부탁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런 믿음으로 그 일들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드릴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만 하면 내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주실 것이고, 내가 바라고 원하던 것들의 실상은 하나님이 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린 ‘예수의 흔적’을 갖자는 결단과 함께 ‘십자가의 흔적’으로 세상을 이겨보자는 믿음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당하는 믿음’을 가지세요. 이 말씀에서의 핵심은 ‘당하는’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러니 어떤 형편에서든 지금 당하는 일들에 집착하지 말고 그걸 이기게 하는 믿음에 집중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찬송가 357장에서도 보면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주 예수를 믿는 힘.’
이게 예수의 흔적이며, 이 흔적을 가지려면 우린 우리의 생각 속에 예수님만 있게 하면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 속에서 다른 잡념들은 다 떨쳐 내시고 오직 하나, ‘예수님의 은혜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만 하며 사셔서 세상에서 당했다 싶어도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