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안희연 <몽유 산책>
글 : 장석주 / 사진 : 김선아
몽유 산책 / 안희연
두 발은 서랍에 넣어두고 멀고 먼 담장 위를 걷고 있어
손을 뻗으면 구름이 만져지고 운이 좋으면
날아가던 새의 목을 쥐어볼 수도 있지
귀퉁이가 찢긴 아침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고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를 생각해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
불현 듯 돌아보면
흩어지는 것이 있다
거의 사라진 사람이 있다
땅속에 박힌 기차들
시간의 벽 너머로 달려가는
귀는 흘러내릴 때 얼마나 투명한 소리를 내는 것일까
나는 물고기들로 가득한
어항을 뒤집어쓴 채
안희연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2015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오래된 실패, 내정된 실패의 세계다. 그 세계는 살아 있는 존재들에게 퉁명한데, 우리에게 “가만히 잠들라는 명령을” 내린다(〈상상 밖의 모자들로 가득한〉). 그것은 기대가 무너지고 꿈이 좌절되는 세계지만, 그래서 날마다 하루치의 슬픔이 배달되는 나날이지만, 우리가 살아낼 수 있는 것은 “그러나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 / 부끄러움을 만드는 길을 따라 / 서로를 물들이며 갈 수 있”(〈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먹고 자고 일하며 산다. 빵 굽는 사람은 빵을 굽고, 구두 수선공은 닳은 구두 굽을 갈며, 지하철 운전자는 지하철을 운행하고, 우체부는 우편물들을 배달하며, 염색공은 염색을 하고, 도배공은 벽에 벽지를 바른다. 우리는 저마다 일에 골몰하며 세상을 지탱한다. 생명의 경이로움은 이 세계 안에서 스스로 번져가고 흘러갈 때 발현한다. 번진 것은 무늬가 되고, 흘러간 것은 살아낸 삶의 내용을 이룬다. 우리의 삶은 무늬라는 과거 화석과 살아낸 오늘의 생생한 현재성을 통합하면서 만들어진다.
삶이 살아낸 것과 살아낼 것들뿐이라면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고, 희망들을 발명해낸다. 꿈과 희망은 메마른 삶을 적시고, 공기가 빠져나가 쭈글쭈글한 공에 바람을 집어넣듯 삶을 기대로 가득 채우며 팽팽하게 만든다. 〈몽유 산책〉은 꿈속의 일을 적어 내려간 시다. 두 발 없이 담장 위를 걷는 일, 손을 뻗어 구름을 만지는 일, 날아가는 새의 목을 쥐어보는 일, 이 모든 것들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먹고사는 일과 무관하다는 점일 테다. 이것들은 잉여적인 것, 제가 처한 현실의 문제들을 개선하는 데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짓이다. 공리주의자들이라면 이런 목가적 상상들을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질책하겠지!
사람은 꿈꾸며 슬픔을 견디고, 이 불균형한 세상이 만들어내는 압력들을 이겨내는 법이다. 꿈꾸기는 소극적으로는 기분 전환이자 제 안의 부정성을 씻어내는 자기 정화에 속한다. 더 적극적으로는 현실이 빚은 절망들을 부정하고 그것을 깨고 바꾸는 동력의 원천이고, 결국은 국면 전환을 이룰 계기적 시간의 도래에 대한 희망이다.
꿈꾸지 않는 자들은 소진한 자들이다. 질 들뢰즈는 《소진된 인간》에서 피로한 인간과 소진한 인간을 다른 존재로 분류한다. “피로한 인간은 단지 실현을 소진했을 뿐이다. 반면 소진된 인간은 모든 가능한 것을 소진하는 자이다.” 소진은 가능성 전체를 부정하며 존재의 영도(零度)에 이른다. 소진된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빠진다. 그런 맥락에서 주검은 이 소진된 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테다.
“귀퉁이가 찢긴 아침 / 죽은 척하던 아이들”은 세상과의 싸움에서 제 힘을 다 소진한 존재들이 아니다. 다만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그들이 깨어난다. 이 어린아이들은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서 여전히 발랄하다.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불이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고 / 절벽 위에서 동전 같은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때”와 같이 세계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일 때다. 새들은 날아오르고, 아이들은 쏟아져 내려온다. 새들은 “불이 되어” 날아오를 때 불의 늠름한 활기를 전유하고, 아이들은 쏟아져 내려올 때 “동전 같은” 시끄러움을 동반하면서 그들의 활력을 과시한다. ‘날아오르다’ ‘쏟아져나오다’ 따위 연이은 동사 활용이 빚어내는 능동성 덕택에 세상은 활동운화(活動運化)하는 것들로 가득 차 보인다. 이 활기는 “사라진 사람” “땅속에 박힌 기차들” 등등 실패의 정태성을 환기하는 이미지들과 대조되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생동성을 더욱 확실하게 드러낸다. 이 활기와 생동성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 한 사라진 사람은 다시 돌아오고, 땅속의 기차는 다시 달릴 것이다.
시인은 커다란 나무를 생각하고, “여름에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뮤트〉), 그리고 “짐승이라는 말을” “마음껏 타오르는 색들, 오로라, 죽은 개”가 잠긴 “물속 수도원”을 생각한다(〈물속 수도원〉). 시인은 꿈꾸고 상상하는 사람인데, 그것은 “언덕 너머에 진짜 언덕이 있다고 믿는”(〈접어놓은 페이지〉) 사람이고,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의 세계를 꿈꾼다는 뜻이다. 시인은 커다란 나무를 상상하고, 그 가지 위에 앉았던 수천 마리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상상을 한다. 상상은 움직이지 않는 것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냥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무섭게 상승하는 불의 비상한 활력을 전유하는 새들의 세상을 불러온다. 그렇게 시인은 소멸하고 사라지며 소실되고 굳어가는 세상에 생명의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다.
안희연(1986~ )은 경기 성남에서 태어났다.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은 세상에 궁금한 것도 많은 법이다. 천진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만이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백색 공간〉)라고 쓸 수 있다. 세계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은 가시권 밖의 안부에 대해 궁금해한다. 또한 대인관계에서 수줍음이 많다.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이 악수를 청할 때 손을 내밀고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런 까닭에 “손목에서 손을 꺼내는 일이 /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일이 /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액자의 주인〉)라고 쓰는 것이다. 천진함이 무욕의 발랄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부끄러움은 소극적 염결성에서 나온다. 아마 그런 천진함과 부끄러움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2015년에 나온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가 첫 시집이다.
topclass
2016년 3월호
출처 http://topclass.chosun.com/board/view.asp?catecode=J&tnu=20160310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