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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장 황룡사가보(黃龍査家堡)의 변고(變故)
최근 황룡사가보에서는 비밀리에 회합이 이루어진 바 있었다.
보주인 사운악이 명첩을 돌려 삼대신가의 가주들을 초빙했다.
그것은 워낙 은밀히 진행되어 천하에서 오직 그들만이 아는 일이었다.
그들 나름의 중요한 관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건이란 다름이 아니라 천사곡에서의 사건 이후로 고심해왔던 자신들의 입지 문제였다.
사실상 그때부터 그들은 무림 내에서 암암리에 배척을 당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역시 한 때 마교에 협력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마교와 연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비록 당금에 이르러 전락해 버렸다고는 하나 소위 명문정파로써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 온 그들이 아닌가?
결국 그들 중원사대신가는 한 가지로 뜻을 모았다.
그것은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 힘을 모아 무림 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차제에 삼성림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들과 동등한 위치로 나아갈 것이며, 칠대문파와도 본래 가지고 있던 적정선의 교류를 되찾아 보자는 것 등이었다.
특히 악가보의보주인 악군보가 만겁수라동에서 죽은 이후로 그런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악가보에서도 신임 보주인 섬전신검(閃電神劍) 악군혈(岳君頁)이 사대검장(四大劍將)을 대동하고 와 동의를 표했다.
사대신가의 가주들은 이런 취지 아래 한 밀전에 모여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갔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사안은 극비에 붙여졌던 것이다.
그런데 의문의괴사(怪事)가 발생했다.
사흘이 지나도록 그들이 밀전에서 나오지 않자 사가보에서는 이상하게 여기고 총관(總管)인 황보인을 밀전 안으로 들여 보냈다.
황보인이 밀전에서 목도한 것은 실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의당 회의를 진행하고 있어야 할 사대신가의 가주들이 놀랍게도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전신을 살펴 보아도 아무런 상처 하나 없었으며, 이렇다할 싸움의 흔적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절명해 있었다.
황룡사가보는 발칵 뒤집혔다.
졸지에 보주를 잃게 된 것도 그렇지만 이 곳에 와서 다른 삼가의 가주들마저 죽었으니, 장차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총관 황보인은일단 삼가에 비밀서한을 보내 그 사실을 알리는 한편, 식솔들에게는 이 일에 대해 일체 함구하게 했다.
외부로 흘러나가 봐야 좋을 일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건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삼가에서 속속 고수들이 찾아왔는데, 그들 역시 밀전 안으로 들어가 조사를 하다가 그 도중에 시체로 화해 버린 것이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 현상은 시체의 숫자를 점점 불려 놓더니 급기야는 자그마치 사십여구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자 나중에는 아무도 밀전 안으로 들어가려는 인물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사영화가 이가장으로 달려오게 된 경위였다.
그녀는 진일문과는 달리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악독한 행위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
본시 그런 법이다.
죄를 지은 자가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가하는 형벌, 즉 후회와 자책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영화는 이 곳으로 오는 동안 식음(食飮)은 물론 수면도 제대로 취할 수가 없었다.
또한 진일문과 마주 하게 되자 자신이 너무도 저주스러워 가히 죽고 싶은 심경에 이르러 있었다.
진일문.
그 역시도 사영화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자 커다란 의혹에 휩싸였다.
그것은 실상 누가 들어도 전대미문의 괴사건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다만 그는 한 가지 강렬한 예감과 만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반드시 모종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사대신가는 비록 명예를 잃었다고는 하나 그 힘만은 아직도 건재하다. 따라서 그들이 뭉치면 재기할 수도 있었거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진일문은 간단히 대답했다.
"사낭자의 청원은 일단 접수하겠소. 본인은 공적인 입장을 존중하는 편이니까."
"아!"
사영화는 몸을부르르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도 진일문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는 구주동맹의 맹주라는 신분으로써 황룡사가보의 일에 개입할 작정이었다.
'사대신가는 마교와의 싸움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들이다. 아니, 필요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무림의 동도라는 점만으로도 이 일에는 필히 나서 주어야 한다.'
진일문은 어차피 이가장을 떠나 강호로 나갈 참이었다.
그 동안 개방의 정보망을 통해 강호정세를 파악해 두었다면 이제는 직접적으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황룡사가보의 일도 그 중 하나가 되었다.
이가장의 본전(本殿).
그 곳에는 지금 진일문을 비롯하여 구주동맹의 주요 인물들이 배석하고 있었다.
소림의 원광선사와 개방의 방주인 주서혜, 그리고 각 파에서 파견된 정예고수들 등이었다.
먼저 이 회의의 주재자인 진일문이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여러분의 적극적인 후원과 협조로 본맹의 기반은 거의 완성되었소이다. 강호정세가 나날이 어지러워지고 있다고는 하나 이대로 나가면 그다지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특히 주방주께서 개방의 조직을 유효적절히 움직이고 있으므로 당분간은 별 변화가 없을 것으로 사료되오."
누구라서 이의가 있겠는가?
중인들은 모두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임으로써 그의 말에 수긍의 뜻을 표했다.
구주신협 진일문의 한 마디는 그들에게 있어서 거의 좌우명에 가까왔다.
그의 통솔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으되, 그만치 세인들을 감복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사실 그들도 처음에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었다.
아직 약관의 청년인데다가 내놓을 만한 경력도 없는 진일문에게 대임(大任)을 맡기자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한낱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은 이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진일문은 지난반 년 사이에 가히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일월맹과 삼성림의 대립이 극을 치닫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일
체 동요하지 않고 매사를 주관적으로 처리해 나갔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칠파일방은 그야말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필경 삼성령에 의해 좋던 싫던 그 싸움에 말려들었을 테고, 지금쯤은 엄청난 희생을 치루었을 것이 분명했다.
진일문은 우선적으로 구주동맹의 조직적인 힘을 강화함으로써 바로 그런 상황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그로 인해 삼성림과의 반목은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도 진일문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칠대문파에게 자신감을 고취시켜 그들의 내면에 끈끈하게 남아 있던 삼성림에 대한 두려움을 일소시켜 버렸다.
늘상 주지시켰던 바를 진일문은 새삼 더욱 강조했다.
"일월맹과 삼성림의 싸움은 마치 정과 사가 양분되어 격돌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소. 애당초 삼성림의 탄생은 여러분들이 서로 반목하여 힘이 미약해졌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오. 삼천공(三天公)이 구대성군을 길러낸 이유도 마찬가지, 여러분들이 강대해지면 그들의 존재는 필요가 없소이다. 진정한 정도의 주인이 여러분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되오."
중인들은 하나같이 숙연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진일문의 뜻은지난날 무림 삼천공의 훈계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 한 가지, 삼천공이 마교의 준동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면 진일문은 그것을 당면과제로 끌어안은 채 그들을 고무시키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물론 방식의 차이는 컸다.
삼천공은 칠대문파를 향해 경종을 울리고자 구대성군을 길러 냈지만 진일문은 직접 그들의 영수가 되어 일심동체를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 효력은 당년 삼천공의 성가를 능가했다.
즉 칠파일방은 외세로부터 중원무림을 지키겠다는 각오와 더불어 정통의 무맥(武脈)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덕분에 그들이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나름대로 자파의 무학을 발전시키며 건곤일척의 대회전에 대비하게 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진일문은 이어각 파의 수뇌인물에게 여러 가지 일을 당부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이가장을 떠났다.
황룡사가보(黃龍査家堡).
이 곳은 지금 철통 같은 수비 속에 살벌한 분위기였다.
드나드는 자는누구고 명패를 내보여야 했으며, 그나마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으면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보(堡) 내에서의 일이 외부로 발설되는 것을 막고자해서였다.
정문에는 호보무사들이 도검을 착용한 채 늘어서 있었다.
이는 평소에는 없었던 일로써 보내의 긴장도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팔월 열이틀.
미시(未時) 무렵, 두 기의 인마가 정문 앞에 멈추어 섰다.
마상에는 일남일녀가 앉아 있었다.
그 중 여인은 녹의를 입었으며 한창 발랄하게 피어날 나이였으나 안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바로 사가보의 무남독녀인 사영화였다.
남자는 안색이거무틱틱한 중년인이었는데, 말 옆구리에 약상자를 매달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의원인 모양이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셨다."
호보무사 한 사람이 사영화를 알아 보고 대문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안에서 두 명의 청년이 나왔다.
그들은 모두 준수한 청년으로 사가보의 대제자인 백의유검(白衣儒劍) 성낙수, 이제자인 옥수미랑(玉樹美郞) 독고준이었다.
성낙수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사매, 이제 돌아왔소?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시오?"
사영화는 눈인사로 답한 후, 마상의 중년인을 소개했다.
"이 분은 만통신의(萬通神醫) 귀불여(歸不如)라는 분이에요. 제가 직접 가서 초빙해 왔지요."
성낙수는 눈을가늘게 뜨고 귀불여를 바라보았다.
강호견식에 무척 밝은 그였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만통신의라는 별호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영화가 곁에서 보충적으로 설명을 했다.
"이 분은 그 괴사의 원인을 반드시 밝혀내실 거예요. 강호에 그다지 이름은 나 있지 않으나 그 방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니까요."
잠자코 있던 독고준이 한 마디 했다.
"지금껏 의원이라는 작자들은 큰 소리만 쳤지, 아무런 성과도 얻어내지 못했소. 귀하는 정말 자신이 있소?"
귀불여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것은 이 자리에서 언급할 바가 아니외다. 천하의 어떤 의원이라도 환자를 보지 않고서야 무슨 말을 하겠소이까?"
그 말 속에는 성급함에 대한 가벼운 힐난이 깃들어 있었다. 독고준이 얼른 이를 알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옳소. 하지만 우리들은 그런 의원 나부랑이로 인해 몹시도 지쳐있는 상태요. 만일 당신이 그들과 똑같이 떠벌였더라면 벌써 내 금검에 의해 혓바닥이 날아갔을 것이오."
그는 어지간히도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는 것 같았다.
사영화가 그를 바라보며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형, 이 분은 먼 길을 마다 않고 오셨어요. 무례를 범해서는 안돼요. 또 설사 병명을 밝혀내지 못한다고 한들 탓할 수는 없어요. 어쨌든 이 분은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래도 안된다면 천운으로 돌릴 수밖에 없지요."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에는 한 가닥 비감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자 독고준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성낙수가 대제자답게 그들 사이에 나섰다.
"자, 자! 결과도 나오기 전에 마음부터 상해서야 쓰겠소? 우리는 그간에도 충분히 고통을 겪었소. 그러니 환자는 이 분 의원께 맡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다려야 도리일 것이오."
확실히 그의 언행에서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품위가 엿보였다.
이윽고 네 사람은 나란히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보내의 경비는더욱 삼엄했다.
매 삼보마다 일정하게 보초가 서 있었으며, 칠보 마다에는 매복자들이 숨어 있기도 했다.
황룡사가보는 사대신가 중 가장 역사가 짧은 편이다.
하지만 세력에있어서는 단연 우위를 점해 왔고, 그것은 지금의 경비상태만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은 이번 사건이 이 곳에서 일어났다 하여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실 이 곳에는 삼가의 고수들도 대거 몰려와 있었으나 모두 함부로 나다지니 못하고 관례에 따르는 터였다.
성낙수를 비롯한 네 사람은 곧 대청으로 올랐다.
그러자 미리 연락을 받았던 듯 총관인 황보인이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황보인은 귀불여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선생께서 도움이 되어 주신다면 우리 사가보는 최선의 예우를 다 할 것입니다. 우선 먼길을 오셨으니 잠시 쉴 곳을 마련해 드리겠소이다."
귀불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외다. 명색이 의원이니 먼저 환자를 보게 해 주시오. 그것이 순서가 아니겠소이까?"
황보인의 허리가 깊숙이 꺾였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정녕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그가 앞장을 서자 귀불여는 물론 사영화와 성낙수, 독고준 등도 함께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후원(後園)이었다.
긴 회랑을 거쳐 다시 두 개의 화원을 지나자 별채로 꾸며진 아늑한 정사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 곳에는 독립된 담장이 둘러져 있었고, 담장의 높이도 여타의 별원과는 달리 이장여나 되었다.
작은 문 또한 동(銅)으로 주조되어 있어 특이한 느낌을 가지게 했다.
만통신의 귀불여는 이 별원에 당도하자마자 사방으로부터 찌르는 듯한 살기를 느꼈다.
'이 곳에는 적어도 백 명 이상의 고수들이 매복되어 있다.'
그는 다름 아닌 진일문이었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의원으로 그럴듯하게 변장을 하고 온 것이었다.
본래 중원사대신가라면 무림에서 독특한 세력권을 형성했던 명가들이었다.
그들은 정도를 고수하니만치 칠파일방과 친교를 맺고 있었으나 그 반면에 흑도와도 나름의 교류를 유지했다.
게다가 막후에존재하는 삼성림은 그들의 배수진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정사인을 막론하고 전 무림인들이 그들 사대신가에는 한 수 접어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작금의사대신가 가주들은 이런 입장에서 밀려나 참담한 처지에 이르러 있었고, 그 때문에 회동했었다.
아울러 그들은 새로운 입지를 세우려다 도중하차하게 된 것이다.
진일문의 분석과 추리는 계속 이어졌다.
'현재의 사가는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단절된 상태다. 이 시기를 노려 역으로 이들을 포섭한다면 세력확장의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을 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존(自存)의 의지를 가진 사대신가의 가주들이 눈의 가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은.......'
그러는 사이에그는 어느덧 하나의 별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 었다.
그는 그 곳에 있는 화청(花廳)으로 안내되었다.
화청의 분위기는 아늑하면서도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상복을 입은 중년의 여인과 한 여승이 앉아 있다가 일행을 맞이했다.
"어머니......."
사영화는 중년여인에게 달려가 안겼다.
진일문도 그 여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보주인 설미령(薛美鈴)이었다.
"화아(華兒)야."
중년미부는 가만히 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기품이 느껴지는 그녀의 얼굴에도 비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사영화는 모친의 품에서 나와 여승에게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오열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는듯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 반해 여승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못난 것, 아직도 슬픔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니. 어디 괴로운 것이 너 혼자 뿐이더냐?"
말인즉은 지당한 소리였다.
하지만 생김새만큼이나 차가운 그녀의 음성에는 정감이라고는 한 올도 배어 있지 않았다.
그 여승을 보는 순간,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사영화의 사부인 그 여승은 바로 비취암의 암주인 절정사태(絶情師太)였다.
그녀는 과거의모습 그대로였다.
약간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귀밑머리가 전보다 희어지고 얼굴색이 누렇다는 정도였다.
진일문은 그녀의 누런 안색을 보자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과거 나로 인해 주화입마한 것이 원인이리라.'
그는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녀와는 은(恩)과 원(怨)이 묘하게 겹쳐 있는 것이다.
자신을 해하고자 한 일이나 백하련의 죽음을 떠올리면 여전히 혐오감이 일었으나 그녀로 인해 금정홍의 기연을 취할 수 있었던 사실만은 어떻게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본의 아니게 그녀에게 입힌 피해를 감안한다면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상념에 잠겨 있는 그의 귀로 한 가닥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시주께서 의원이오?"
절정사태였다.
진일문은 내심을 감추고 태연하게 응수했다.
"그렇소이다. 여니께서는......?"
"빈니는 절정(絶情)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소."
절정사태는 한동안 날카로운 시선으로 진일문을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영화, 너는 이 분을 어찌 알게 되었느냐?"
사영화는 늘상사부에 대해서는 일말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음성이 다소 떨려 나왔다.
"어떤 의원에게 소개를 받았어요. 신묘하기가 화타를 능가한다고 하도 칭찬을 하기에......."
"그래?"
다행히 누구에게서 소개를 받았느냐는 질문은 없었다.
절정사태는 무덤덤하게 음성을 흘려 내고는 시선을 돌려 버렸다.
"빈니가 안내할테니 그대들은 돌아가도록 하시오."
총관 황보인과사운악의 두 제자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보인이 대표로 나서서 그녀에게 포권을 했다.
"그럼 사태께 맡기고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성낙수, 독고준 등과 더불어 화청을 빠져 나갔다.
독고준이 잠시 고개를 돌려 사영화를 바라 보았으나 사영화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주검이 들어있는 관(棺).
밀전에는 옻칠을 한 마흔다섯 개의 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한 광경은 결코 유쾌한 것이 못되었다.
사방의 창문은밀폐되어 있었고, 향로에서는 향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관은 꽤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관 머리에 각기 하나씩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아버님......."
사영화는 하나의 관을 붙들고 소리 죽여 오열했다.
그것은 바로 부친인 사운악의 시신이 누워있는 관이었다.
생전의 그가 무남독녀인 그녀를 얼마나 총애했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곁에 있던 사(査)부인도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
절정사태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뭐라 탓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진일문을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이 곳에는 마흔다섯 구의 시체가 있소. 선생께서는 사인(死因)을 조사해 주셔야겠소."
그녀의 냉정함은 예전과 다름없이 진일문을 감탄(?)하게 했다.
그는 내심 고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 많은 분들이 전부 같은 병으로 타계하셨단 말씀이오이까?"
절정사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러나 정말로 병사(病死)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죽은 것인지는 바로 선생이 알아내야 할 문제요."
"흐음!"
진일문은 가벼운 탄식을 흘리며 하나의 관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는 사천당가(四川唐家) 당이고(唐二姑)라는 이름이 씌여져 있었다.
당이고라면 현 당가의 가주인 당평의 친누이다.
비록 여인이나 무공이 높고 암기수법이 뛰어나 당가에서 서열 이위로 꼽히던 절정의 고수였다.
진일문은 관에손을 대려다 말고 갑자기 뚝 멈추었다.
그러자 곁에서 절정사태가 추궁하듯 물었다.
"왜, 조사하고 싶지 않소?"
진일문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무리 의원이라지만 감히 신니의 면전에서 여인의 옷을 벗길 수가 없어서......."
맞는 말이었다.
검시(檢屍)를 하려면 일단 옷을 벗겨야 한다.
진일문은 절정사태의 안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이번에는 도방(刀幇) 팽전수(彭全修)라고 적힌 위패 앞에 가 섰다.
팽전수는 팽가도방의 방주인 팽전위의 셋째 아우다.
마침내 진일문은 관 뚜껑을 열었다.
끼이익!
괴이한 마찰음과 함께 유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마도 복중(伏中)이라 시신이 썩지 않도록 잔뜩 뿌려둔 모양이었다.
관 속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는 얼굴에 각이 진 인물로 수염이 짧게 나 있었다.
그의 옆에는 긴 장도(長刀)가 놓여 있었는데, 생전의 그가 사용하던 병기인듯 했다.
진일문은 그 시신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말이시신이지, 죽은 것이 아니라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호흡만 멎어있을 뿐 혈색도 정상이었고, 반점 같은 것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는 절정사태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분들은 죽은지 얼마나 되었소이까?"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사영화였다.
"한달 쯤 되었어요."
"이 유향은 색목국(色目國)에서 온 것이군요. 과연 효력이 탁월합니다. 아직도 시신이 이렇듯 건재하니 말이외다."
절정사태가 그제서야 냉랭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사인이나 조사하시오."
그녀의 음성에는 다분히 위협이 깃들어 있었다.
"안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소이다. 세 분께서는 잠시 밖으로 나가 주십시오."
"무엇 때문에?"
절정사태의 물음에 진일문이 오히려 반박하고 나섰다.
"아니 그럼 불가의 스님께서, 그것도 여니께서 남자의 벗은 몸을 보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경우에 따라 험한 방도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거늘......."
그 말에 절정사태의 얼굴에는 일순 모욕감이 스쳤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역시 남자의 알몸을 지켜 보고 있을 용기(?)까지는 없었으므로.......
"그럼 나가 있겠소."
절정사태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홱 틀더니 승포를 펄럭이며 밖으로 나갔다.
사영화와 사부인도 이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진일문은 씩 웃고는 정말로 시신의 옷을 벗겼다.
시신은 차가웠다.
그는 그 느낌이 손끝에 닿아 오자 가볍게 전율했다.
팽전수의 체격은 몹시 우람한 편이었다.
곳곳에 근육이 불거져 있고 가슴에서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시커먼 털이 덮혀 있었다.
진일문은 그의시신을 면밀히 검사해 보았다.
구석구석을 두루 살폈으며 심지어는 터럭 사이까지도 헤쳐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예상 밖이었다.
아무런 상처나 병, 혹은 독의 흔적도 없었다.
다른 시신도 검사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진일문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미간을 모았다.
'이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자연사(自然死)는 물론 아니겠고....... 대체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는 시신에서눈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최초로 죽은 인물은 사가의 가주들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 사인을 조사하던 고수들도 연달아 죽음을 당했다고 했었지.......'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진일문은 무슨생각에서인지 사운악의 시신을 꺼냈다.
역시 그 시신에서도 단서라고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진일문은 침착하게 추리해 나갔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무래도 독살(毒殺)이다. 하지만 나중에 죽은 인물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소리다. 그들은 이 곳에서
조사를 하다가 하나 둘 쓰러졌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의 눈이 일순 기광을 뿜어냈다.
'바로 여기에 맹점이 있었군. 이 곳에서 사인을 조사하다가 숨진 사람들은 모두 무공이 강한 고수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평범한 인물들인 의원들은 그들과 똑같은 이유로 이 곳에 머물렀어도 모두 멀쩡했다. 과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은 새로운발견이었다.
실상 의원들은 수 차례에 걸쳐 시신들의 곁을 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누가 죽었다는 얘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점은 무엇인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진일문은 바로 거기서부터 파고 들어가 보고자 마음을 정한 것이었다.
'이 곳에서 시신들만 뒤적이고 있을 일이 아니다. 이 문제는 이것저것 알아본 후에 차분하게 풀어나가야 한다.'
그는 관 뚜껑을 모두 닫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화청 밖.
절정사태를 비롯하여 세 여인이 진일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사영화가 달려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되었나요? 뭘 좀 알아 내셨나요?"
진일문은 그녀의 표정에서 한 가닥 신뢰감을 읽어내고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다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겠소이다. 일단 시간이 필요하오. 다만 몇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어 나왔을 뿐이오."
"으음......."
사영화는 맥이풀린듯 가느다란 신음성을 발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진일문은 이를 애써 모른 척 하며 사부인과 절정사태를 향해 말했다.
"앞으로 여러분께서는 소생이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셔야겠소이다."
이경(二更) 무렵이었다.
사위는 괴괴한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굳게 닫혔던 사가보의 대문이 열리더니 두 필의 말이 빠져 나왔다.
마상에는 각기 일남일녀가 타고 있었다.
그들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렸다.
의원인 귀불여, 즉 진일문과 황룡사가보의 천금인 사영화였다.
야심한 시각에 그 두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사가보를 나서기 직전, 이런 일은 있었다.
"이 밤중에 웬 행차이십니까?"
황보인의 물음에 사영화는 간단히 답했다.
"귀선생께서 밤에만 발견할 수 있는 희귀한 약초를 구하러 가신다고 했어요. 귀빈이시니 당연히 동행을 해 드려야죠."
"밤길이 위험하거늘, 다른 사람을 시키십시오."
"아니에요.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도 그렇고, 귀선생은 제가 모셔 왔으니 안내도 제가 해 드려야죠."
황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 오십시오."
그러나 두 남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기이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귀불여, 어찌 보면 무공이 측량할 길 없이 높은 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자 같기도 하니......."
그도 곧 몸을 돌렸다.
옥수미랑 독고준.
화원에서 홀로서성이고 있는 그는 별호답게 여전히 준수했다.
미풍에 금삼자락을 휘날리고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어떤 여인일지라도 한 눈에 반해 버릴 정도로 뛰어난 미남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최근 들어 생긴 현상으로써 그 이유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정녕 믿지 못할 일이었다.
언제고 손만 뻗으면 어떤 여인이라도 취할 수 있었던 그가 아닌가?
실제로 여인에 관한 한 그는 항상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런데 이번의경우만은 예외였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이 평범한 여인이었던들 이런 일은 결코 없었으리라.
그 여인이란 바로 황룡사가보의 금지옥엽인 사영화였다.
독고준이 사영화를 소유하고자 한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다.
사영화는 절세적인 미색을 지니고 있기도 했지만 그녀를 얻는 것은 곧 차기의 사가보주가 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의 최대 경쟁자는 아무래도 사형인 백의유검 성낙수였다.
성낙수는 서열상으로 그렇거니와 나이가 위인지라 혼처가 달리 정해지지 않은 이상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독고준은 그 경쟁에서 꽤 낙관적인 기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성낙수가 다른 면이라면 몰라도 최소한 여인의 마음을 끄는데 있어서 만큼은 자신의 적수가 못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인품, 언행 등의 감탄할 요소들을 갖춘 성낙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솔직히 매력과는 별개였다.
사영화도 그를 어려워 하기는 했지만 이렇다 하게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다.
독고준.
그는 음울한 얼굴로 사영화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불안해하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었다.
사영화는 마교에 인질로 잡혀갔다 돌아온 후로는 그를 대하는 태도가 싹 바뀌어 있었다.
물론 성격적으로도 많이 달라져 있었으나 유독 그에 대한 감정에서 큰 변화를 보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무례하게 군 적은 없었다.
아니, 전보다 오히려 깍듯하게 사형으로써 예우를 하고 있었다.
독고준은 바로이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거리감이 생겼다는 뜻이 된다.
또한 이는 그녀의 마음이 혹 다른 곳에 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파앗!
어둠 속에서 검광이 섬전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금검이 탄지지간에 발검된 것이다.
그의 눈은 한 곳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백일홍(百日紅)이 어둠이 무색할 정도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스스스.......
백일홍이 갈라졌다. 한 조각, 두 조각.......
꽃잎은 마침내정확히 열두 개로 갈라져 떨어져 내렸다.
피처럼 붉은 백일홍의 조각들이 그의 가죽신에 고스란히 얹히는 찰나였다.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그의 고막을 울렸다.
"축하하네, 사제. 자네의 구천십지독존(九天十之獨尊) 검법이 십성의 경지에 이르렀다니. 생전의 사부께서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는가?"
독고준의 몸이한 차례 가벼운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의 면전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성낙수가 미소띤 얼굴로 서 있었다.
"사형께서는 전에 하지 않던 짓을 하는구려. 언제부터 남의 무공시전이나 훔쳐보는 버릇이 생겼소?"
존대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그의 말투는 다분히 시비조였다.
그에 반해 성낙수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고의는 아니었네. 그저 우연히 보게 된 것 뿐이지."
독고준은 상대의 이런 면을 지극히 혐오했다.
그 자신도 어느 정도까지의 위선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성낙수를 보면 대개 구역질이 치밀곤 했다.
그는 더 보고 싶지 않다는듯 수중의 금검을 거두며 홱 돌아섰다.
"잠깐만! 사제."
"무슨 일이오?"
독고준이 돌아서지도 않고 물었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말하시오."
성낙수는 역시그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를 잃지 않았다.
"자네, 혹 요즘 사매의 거동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나?"
"무슨 뜻이오?"
"후후... 내 진즉부터 알고 있었네. 자네가 사매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굳이 나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네."
독고준은 그제서야 몸을 돌려 그와 마주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안심하게. 나는 사매를 사이에 두고 자네와 경쟁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이 사형은 적어도 스스로의 주제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그 말을 하려고 나를 불렀소?"
"하하하... 그건 아닐세. 그저 말이 나온 김에 확실히 입장을 밝히려 했을 뿐이네. 나는 다만 사제가 염려되어서......."
독고준은 실소했다.
"염려? 사형께서 나를 말이오?"
"글쎄, 과장되이 들렸다면 미안하네. 하지만 나는 정녕 한 가지만은 심히 걱정이 되네. 사매의 관심이 자네가 아닌 외부인에게로 쏠리고 있으니 말일세."
독고준의 안면근육이 비정상적인 꿈틀거림을 보였다.
"외부인......?"
"그렇네. 아무래도 그 귀불여란 위인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독고준은 파안대소했다.
"하하하핫......!"
그는 만면에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듯 말했다.
"아무리 본보의 명예가 추락해 있다고는 하나 사매가 어찌 그런 의원 나부랑이에게 관심을 가진단 말이오? 그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오."
성낙수는 웃음기를 거두며 정색을 지었다.
"사제는 의외로 단순하군. 강호에는 예로부터 숱한 기인이사들이 존재해 왔거늘......."
독고준의 검미가 불쑥 치켜 올라갔다.
"그럼 그 자가 변장이라도 하고 있단 말이오?"
성낙수는 묘한어투로 응수했다.
"황보총관이 과거 녹림에서 어떤 별호로 통했는지 아는가?"
"흐음?"
"백변환요(百變幻妖)! 이 정도면 되었나? 황보총관은 한 눈에 그 자가 변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네."
"그렇다면!"
독고준은 흡사벼락이라도 맞은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성낙수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내게 본시 야심이 없었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걸세. 그러나 이 사형은 사부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많은 것을 생각했네. 나는 앞으로 사제가 사매와 잘 되어 본보를 일으켜 주기를 희망하고 있네. 나도 곁에서 돕겠네. 그래야만 억울하게 눈을 감으신 사부의 영
령께서도 한을 푸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성낙수의 음성은 어느덧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독고준은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는 태도를 가다듬어 성낙수에게 정중히 포권을 했다.
"소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사형께서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신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성낙수의 눈이따스한 감정을 담은 채 그를 응시했다.
"자네는 반드시 사매를 얻어야 하네. 그래야만 우리 사형제가 서로 뜻을 합칠 수 있네. 그렇지 않은가?"
"사형......."
독고준은 감격한 나머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성낙수가 빙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럼, 나는 이만 들어가 보겠네."
독고준은 출렁이는 시선으로 멀어져가는 성낙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입술을 기이하게 움직였다.
"죽인다! 사매에게 접근하는 놈은 모두......!"
스파앗!
검광이 작렬했다. 놀랍게도 백일홍은 삼십육 조각으로 흩어져 그의 발치에 떨어지고 있었다.
첫댓글 ``@-@``
항상 다음이 궁금~
오늘도
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고갑니다
즐감요!!!!!
또 하나의 연적이 생기네.. 진일분 어딜 가나 ...
ㅋㅋㅋ 남자와 여자가 살아가는 세상에 어디 이뿐이겠는가??
사랑은 쟁취하는 것 아닌가?
실력이 없으면 헛공상, 짝사랑일 뿐이지~~
그래도 열심히 사랑하면 그 사람은 성숙하겠지요???
굿,,,즐감,,,,
늘 감사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