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 시인 생가를 찾아
십이월 둘째 토요일은 열차를 타고 밀양으로 이동한 산책을 나서려고 이른 아침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퇴촌삼거리로 향했다. 창원대학 앞에서 도청 뒤를 돌아 창원중앙역으로 올라가 마산을 출발해 동대구로 가는 무궁화로를 탔다. 비음산 진례터널을 지난 들녘에서 진영역과 한림정역을 거쳐 삼랑진에서 크게 원호를 그려 밀양강 강변을 따라 올라 밀양역 다음인 상동역에서 내렸다.
상동역은 내가 40년 전 그 인근 초등학교 근무할 적에는 유천역이었는데 역 이름이 바뀌었다. 나는 청년기 이십대 중반 밀양 산내면 얼음골 아래 초등학교가 첫 부임지였는데 야간 강좌 대학을 다니려고 대구로 가는 길목인 유천에서 가까운 시골 학교로 옮겨 근무했다. 나는 농촌에서 초중고를 나와 또래들보다 몇 해 늦게 2년제 교육대학을 마치고 산골의 청년 교사로 부임해 갔었다.
당시 교육대학은 2년제였는데 학부에 편입하려니 군사정권은 대학생 시위를 막을 방편으로 졸업정원제를 시행해 편입생을 받을 여력이 없었다. 대학에서 편입을 받아주지 않아 신입생으로 입학해야 하기에 예비고사 제도에서 학력고사로 바뀐 입시를 거쳐 대구 근교 대학의 야간 강좌로 개설된 국문과를 4년간 다녔다. 그 시절 유천에서 이태 지내다 삼랑진으로 옮겨가 학업을 마쳤다.
40년 전의 아련한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상동역에 내렸다. 그 당시 자주 이용했던 역사는 개보수되어 달라졌고 역 광장 가운데 큰 살구나무도 고사했는지 없었다. 역전 거리와 건물들도 예전 모습과 상당히 달라져 그간 흐른 세월을 실감하게 했다. 역에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예전 근무지는 폐교되어 민간에게 넘겨져 요양원인가 무슨 다른 용도로 쓰인다기에 들릴 일 없었다.
밀양 상동 유천에서 밀양강의 다리를 건너면 경북 청도 유호리다. 상동역에서 25호 국도를 따라 유호리로 향해 걸으니 교량을 다시 놓는 확장공사가 마무리 단계였다. 다리 건너 옥산마을까지가 밀양이고 청도천과 동창천이 합류하면서 밀양강 상류가 되었다. 풍각에서 청도읍을 거쳐온 물길이 청도천이고 운문산에서 발원해 운문댐을 빠져나와 매전에서 흘러오는 냇물이 동창천이다.
청도천 건너 유호리에는 그 시절 내가 근무했던 학교로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던 원로교사가 한 분 있어 지역 사정을 잘 알았다. 그분은 시조 시인 이호우와 이영도 남매의 이웃이고 집안으로 항렬도 같았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적산가옥도 있는 유호리 골목에서 한 노인에게 이호우 남매 생가를 찾는 길을 여쭈니 친절하게 안내받았다. 가까운 곳에는 오누이공원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호우 이영도 시인 남매가 유년기를 보낸 생가는 국가 등록 문화재로 지정받아 청도군청에서 매입 올해 개보수를 마쳐 놓았다. 본채와 사랑채가 기역 자 형태로 된 한옥 기와집이었다; 마당에는 고목 감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이호우 선대가 조선 후기 어느 고을 군수를 지냈다는 분의 집치고는 규모가 소박했다. 관리인도 없는 적막한 집을 둘러보고 툇마루에 앉아 햇살을 받았다.
남매 시인 생가를 나와 길거리에서 만난 노인에게 이호우 집안 원로교사 안부를 여쭈니 오래전 작고하셨다고 했다. 생존해 있다면 나이가 100세가 넘었지 싶다. 월성 이씨 같은 항렬로 신문사에서 필명이 날리던 논설위원도 돌아간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동네 어귀 동창천이 흘러온 천변 오누이 시인 공원의 시비를 둘러보고 시조 공원으로 옮겨가 빗돌에 새겨 놓은 작품을 살펴봤다.
상동역으로 되돌아 와 지난날 밥을 부쳐 먹은 식당을 찾아가니 그 자리 그 모습인데 아들이 모친 가업을 승계받아 운영했다. 나는 그때 경산에서 새벽 열차로 상동으로 내려와 그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도시락까지 싸 근무지로 출근하기도 했다. 유천의 밀양강에는 다슬기가 많이 잡혀 향토 음식으로 알려진 고동국을 시켜 점심으로 먹고 역 광장에서 서성이다가 하행선 열차를 탔다. 22.12.10
첫댓글
40년 전
밥을 먹었던 곳
여러 상념에 잠겼겠구나...
그대도 지난날 나처럼 그런 시절을 거쳐 왔지 않았는가?
산천도 의구(依舊)하지 않고, 인걸도 사라지고 없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