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는 아프리카 중앙부에 있는 공화국으로 정식 명칭은 르완다공화국(Rpublique Rwandaise)이다. 면적은 2만 6338㎢로 우리나라의 약 1/4 정도 되는 크기이고 인구는 739만 8000(2002)명, 국내총생산은 72억 달러이다.(2001)
이 자그마하고 살기좋은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영화는 1994년 르완다 집단학살을 배경으로 투치족 1,000여명을 자신의 호텔에 피신시켜 목숨을 구한 한 호텔 지배인의 실화를 담았다.
영화의 초반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잠깐 언급되는데 그 배경은 이렇다.
몇 차례의 변동이 있기는 했지만 르완다는 제2차세계대전 후 국제연합신탁통치령으로 콩고민주공화국과 함께 벨기에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르완다의 종족구성은 다수족인 후투족(90%)과 소수족인 투치족(10%)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벨기에 식민지배자들은 오로지 조금 더 고상하게 생기고 콧구명이 좁다는 이유로 소수인 투치족을 우대하고 그들을 통해 식민지배를 강화해 나갔다.(영화속 설명에 의한 것임) 투치족은 식민지배자들로부터 갖은 특혜를 누리며 권력을 장악하고 교육을 독점해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 나갔다.
문제는 그 이후이다. 후투족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벨기에가 식민지배를 포기하고 퇴각하면서 권력은 후투족에게로 넘겨졌고 그들에 의해 르완다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에 반발하는 투치족의 반정부 게릴라 조직 르완다애국전선(FPR;우간다에 피신해 있던 소수부족 투치족 난민이 주체)이 국경을 넘어와 북부지역을 공격하고 지배하였다. 내란상태에 접어든 것이다.
이 분쟁은 1993년 정부군과 반란군 간의 아루샤(Arusha) 평화협정체결로 종식되고 과도거국내각을 수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94년 4월 대통령 하뱌리마나의 비행기를 대통령 친위대가 격추시킨 것이 발단이 되어 내전이 거듭되는 대학살의 참사를 맞는다. 안팎의 개혁압력에 많은 것을 양보한 대통령에 대해 불만을 가진 보수파의 정치적 목적에, 인종갈등이 더하여 참사가 시작되었는데 50∼100만 명에 이르는 투치족과 후투족 융화파 시민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영화는 정치정세가 격변하던 바로 이 시기, 1994년도의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권력을 가지려는 정치적 야심가들을 제외하더라도 국가원수의 유고라는 공백 상황이 발생하자 불안해진 후투족은 투치족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드러내며 그들은 모두 죽여 없애려 한다. 이른바 '인종청소'이다. 그것도 칼로 난자해 죽이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말이다. 르완다는 오로지 투치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바퀴벌레'로 불리우며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공포시대'가 된 것이다.
정치와는 다소 거리를 두고 오로지 자신과 가족들의 안락한 삶을 꿈꾸며 살아가던 한 외국계 호텔의 지배인 '폴 루세사바지나'는 자신의 아내가 투치족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모든 혼돈의 한 가운데에 있어야 했다. 끝까지 양심적이고자 했던 그는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도 결국 1,268명 난민의 생명을 구하게 된다.
영화는 처음 시작이 다소 복잡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차츰 연출자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종족과 정치이념에 의해 희생당하는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그를 방관할 수 밖에 없는 국제기구(UN)와 강대국들의 무관심에 대단히 비판적이며 냉소적이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진지한 의지와 노력이 없이 오로지 명분만 챙기려 하는 모습은 싸움붙여 놓고 구경하겠다는 심보와 다를 바 없다. 그 속에서 희생되고 파괴되어 가는 이들은 다름아닌 '르완다' 자신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참혹한 종족간의 갈등을 이념으로 대치하면 곧바로 그것은 얼마 전 우리의 모습이 된다. 사상과 이념에 의해 동족끼리 죽이고 죽던 불과 몇 십년 전의 모습 말이다.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던 그 광란의 실상을 영화는 간접적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감독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 처럼 후투족은 나쁘고 투치족은 피해자라는 것을 알리고자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르완다의 역사를 그들의 입장에서 한 번 더 고찰해 보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식민지배자들에 빌붙어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꾀했던 자들에 대한 단죄는 정당한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저항을 통해 억압을 뚫고 독립국가를 건설한 후투족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들의 적개심은 결코 공연한 것이나 막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 지라도 그 방법과 대상을 정함에 있어서 냉정함을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양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로 표출하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뿐이다.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 그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용서와 화해 그리고 화합을 통해 양자가 두루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비단 두 종족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전세계인들이 모두 지역과 인종, 종교와 사상에 의해 차별받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하며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영화는 그걸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독도와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독일과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전혀 다른 모습속에서 일본에 대해 여전히 우려를 금할 수가 없는 것은, 분쟁을 피하고 모두가 화합하며 잘 살 수 있는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 중대한 시점에서 출발점이 되는 진실한 사과를 그들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는 피와 살륙의 악순환이 되풀이 될 뿐이라는 걸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