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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비유의 효과와 힘
비유는 우리가 외출할 때 아름답게 화장을 하듯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닦아서 인간 자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계 기구의 활용법을 잘 알아야 그것들을 이용하기 쉽듯이
비유의 진정한 힘과 효과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비유는 무엇입니까?
아마 오늘까지 강의를 들으셔서, 쉽게 설명하긴 어렵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이 것이다고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 상황, 세계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
즉 추상적이고 불투명한 관념까지를 가장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지름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학문적으로 다루니까
그렇지 시가 아니고도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도 얼마나 많은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눈이 작은 사람보다 가재미 같은 눈, 단추구멍 같은 눈이라 한다던지, 꾀꼬리 목소리라 하는 것,
바람처럼 사라지다라는 영화제목, 아마 말의 종류만큼 많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성경말씀에도 비유라는 말이 있는데 그 구절 말고도
수많은 비유로 사람들을 알으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뿐 아니고 다른 종교의 경전들도 그렇다하니,
비유는 우리에게 보다 알아먹기 좋게 하는 표현의 방법이라 할 수 있겠 습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 가운데 그 형식의 대부분이 시적 형식을 취한 <숫타니파타>의 한 구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 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 번 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성경도 비유문학이라 할 정도로 비유가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곁에 있어 쉽게 접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 일일이 예를 들지 않으니
여러분께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위의 비유는 무엇일까요?
어떠한 집착이나 망상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창조적인 삶의 모습을 제시하는 불교의 가르침이
비유를 통해 간결하고도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아주 장황스러운 설교조의 말보다 휠씬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 것은 비유를 통해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그 뜻을 함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교회에 가면 목사님들의 설교도 그렇구요.
티비에 나오는 유명 강사들의 강의도 마찬가지인데요.
모두 다 좋은 비유를 통해 청중들이 쉽게 알아먹게 하려고 애 쓰는 것을 역력히 알 수 있지요.
그렇듯 시 역시 시인의 통찰력과 인지력, 그리고 시인의 정신이 생동하는 언어로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비유는 시 세계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면서 독자들을 시인의 세계 속으로 흡인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의 힘
시인이 의도하는대로 비유가 시 속에서 강력히 힘을 발휘하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한 기능과 에너지가 최대한 살아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첫째)
좋은 비유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힘을 가집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비유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드러내줍니다.
비유에 의해 사물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과 세계를 확대 심화시켜 나감으로 우리의 인습과 고정관념의 무지와 타성에서
벗어나게 한다고까지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시가 지니는 리얼리티(사실성)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고 볼 수가 있겠지요.
둘째)
좋은 비유는 시인의 독창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을 쉽게 가시화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권대웅님의 <가을 산>을 한 번 읽어보시지요.
술취한 아버지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어딜 그렇게 올라 가세요.
낙엽 긁어 모으며 바람 불면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계곡
녹슨 세월의 송전탑
숨은 아들 대답하지 않는데
되돌아오는 메아리만 가슴을 태우는 山
자꾸 뭐하러 올라가세요
그게 아니다 애야 그런게 아니라고
붉은 손 흔들어 길 막는 너도밤나무
온통 아픈 울음 가득 토해내도
아버지 넘어지며 자꾸 넘어지며.....
아마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비유이지요.
술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아버지의 얼굴로 가을 산을 비유했습니다.
왜 이 시가 좋은 시가 되냐하면요.
우리는 보통 가을 산이라하는 시를 쓰거나 내용에 가을 산이 들어가게 되면, 불타오르는 산, 불꽃 같은 산,
열정, 열애 등 을 금방 떠 올리거나 그렇게 표현하기 쉽지만은 이 시인의 독창적인 눈으로는 아주 색다른 비유로
아버지의 술 취한 얼굴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것도 술에 취해 대낮에도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 울면서도 자꾸만 넘어지는 아버지의 슬픈 초상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시면서 아들이 아무리 붙잡아도 자꾸만 높은 산으로 올라가시는 세월의 산을
느끼시지 않습니까?
늙어가시는 아버지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습 니까?
셋째)
좋은 비유는 풍부한 시적 의미를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비유는 어떤 모양일까요? 그 것은 하나의 점이나 선일까요?
평면이나 어떤 도면 같은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비유는 입체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읽는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다양해집니다.
우리는 장님과 코끼리에 대한 비유를 잘 아십니다.
보이지는 않고 코끼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코를 만진 사람, 다리를 만진 사람, 꼬리나 배를 만진 사람의
코끼리에 대한 설명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듯이 독자들이 그 시를 읽는 상황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다양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시가 일단 발표되면 이젠 독자의 몫이 된다고 늘 강조하는 것은
나의 해석과 다른 사람의 해석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성복님의 <당신은 짐승, 별>을 읽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짐승, 별, 내 손가락 끝
뜨겁게 타오르는 정적 외로운 사람들이 따 모으는 꽃씨
외로운 사람들의 죽음
순간과 머나먼 곳,
異邦(이방)의 말이 고요하게 시작됩니다
당신의 살같 밑으로 大地(대지)는 흐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한 개의 물고기 비늘처럼
무지개 그으며 내가 떨어질 테지만.
좀 어려운 시이네요.그러나 분석해보지요.
여기서 원관념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입니다.
그 원관념에 대한 보조 관념이 '짐승', '별', '정적'.'꽃씨', '정적', '죽음','순간','머나먼 곳','내 손가락 끝' 등
여러가지이지요.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우리가 짐작해 볼 수 밖에 없지만
이 시에서는 당신이란 원관념에 대해 다양한 보조관념으로 전이시키면서 '당신'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거기에 결합하는 보조관념의 대상들까 지도 하나의 의미로만 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넷째)
좋은 비유는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정서적 충격을 주지 않는 시는 좋은 시가 아니지요.
시를 읽어서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는 시라면 그 것은 죽은 시 아니겠어요?
요즘은 젊은 시인들 사이에서 실험적인 경향이 있어 현재의 시경향을 해체시켜버리려는 의도도 있고요.
감동보다는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효용론에 입각한 주장도 있지만
저는 일단 시는 감동을 주어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좋은 비유로 쓴 시는 마치 수문을 열면 물이 쏟아져 나오듯 우리의 감동이, 정서가 밀려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대흠의 <봄은>이라는 시의 전문을 읽겠습니다.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 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상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 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곳곳에서 탕,탕,탕,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저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한 시인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각인이 될까.
보통 사람들과의 인연은 만남에서부터 비롯되지만 시인들은 시를 통해서 알게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감동을 주거나 색다른 시 한 편이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해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에 이 시를 첫대면을 해서인지 상당히 색다른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꽃은 여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전쟁은 남성놀이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여자이면서 시적 화자를 남자로 내 세운 노천명의 '남사당' 이나 고정희의 <지리산의 봄3 - 연하천 가는 길>도
있지만 소월이나 영랑 같은 시인은 남성이면서 시의 어조가 여성적인데 비해 이 이대흠 시인은 이육사나
유치환처럼 남성적인 시를 쓴다고 한다.
이 시도 꽃이 피는 과정을 전쟁의 도구인 총에 비유를 하였는데 정말 봄날에 여기저기 빠르게 마구 피는
꽃들을 보노라면 전쟁이 다름 아니다.
이제 곧 꽃들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언 영혼을 향해/언제 방아쇠가 당겨질 지 알 수 없으니" 그대, 결코 긴장을 풀지 말라. 탕,탕,탕...
다섯째)
좋은 비유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힘이 있습니다.
성원근님의 <이슬>전문을 읽어 보겠습니다.
밤에
눈물이 많았던 누군가
목선을 타고
바다로 간 것일까?
풀잎마다 가득
바람을 먹고 있는
돛자락들.
이 시에 대한 조태일님의 해설을 옮겨봅니다
"우리가 '이슬'이라는 대상을 생각할 때 맑고 투명한 것,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떠올린다.
그런데 위 시에서는 이 '이슬' 에서 '돛자락'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돛'은 바람을 받아 배를 가게하기 위하여 돛대에 높게 펼쳐 매단 넓은 천인데,
이슬을 돛자락에 비유함으로 예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광활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이슬에서 발견하게 된다.
마치 푸른 바다의 한 가운데서 펄럭이는 흰 돛자락인 양 '이슬'이 한없이 크고 넓게 느껴지기 조차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좋은 비유는 시적 대상을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해내는 힘이 있습니다.
역시 시를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이동주님의 <강강술래> 전문입니다.
고정희, 김남주 시인의 고향인 해남이 고향이신 이동주님의 시로 해남 대흥사 입구에 시비로 서있습니다.
다음에 해남 대흥사에 가시는 분들은 주차장 앞에 이 시 비를 보시면 강의를 받던 기억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여울에 몰린 은어떼.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레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백장미 밭에
공작이 취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두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강강술래를 돌고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떠오르지요?
그들을 여울에 몰린 은어떼로 비유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발상입니까?
달빛에 비추인 가녀린 팔목들을 여린 삐비꽃의 하얀 속살로 비유한 것이라던지,
강강술래의 원을 하늘에 떠 있는 달무리로 비유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비유들은
훨씬 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특질을 선명하게 드러내줍니다.
또한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나 '열두발 상모가 돈다'나 '기폭이 찢어진다', '갈대가 스러진다' 등의 비유는
춤을 추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할 뿐만 아니라 그 춤의 역동성을 잘 나타내주어 독자로 하여금
절정감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좋은 비유가 얼마나 시를 살려주는가 위의 여러 예들로 잘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쓸 때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대로 옮겨 표현할 것이 아니라
이런 비유를 독창적인 것으로 창조해 표현한다면 여러분들도 분명 좋은 시를 쓰시게 될 것입니다.
좋은 비유와 죽은 비유에 대해서는 대충 이해하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시가 아니고도 우리가 보통 잘 쓰는 죽은 비유를 몇 개 더 들어볼테니 여러분도 더 찾아보시고,
이런류의 죽은 비유를 시에 사용하시면 안되겠습니다.
-사랑의 불꽃, 교통 전쟁, 입시 지옥, 증권 파동, 무거운 침묵, 달콤한 말, 자연의 숨결 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습니다.
이런 은유도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고 처음엔 아주 멋진 표현이며 살아있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듯 은유는 언어를 새로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언어의 창조자가 되겠지요.
죽은 비유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지요.
우리는 이 죽은 비유를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안개와 같은 인생", "세월은 유수와 같다"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네", " 쏜살 같은 세월",
" 샛별 같은 "눈동자". "앵두 같은 입술", "백옥 같은 살결". "목석 같은 사내", "여자는 여우",남자는 늑대",
"여자는 갈대""쟁반 같은 달", "사랑은 불꽃" "토끼 같은 아이들", 등은 이미 죽은 비유입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이미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습관화되고 상투화되었기 때문에
사물과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보여주지 못합니다.
시에서는 이런 자동화된 비유, 죽은 비유를 멀리하고 배척하는 것이 좋습니다.
박두진의 <꽃>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靜寂(정적)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湖心(호심)아
조태일님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위 시에 나타나 있는 '꽃'의 모습을 보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아름다움, 정열, 사랑, 황홀 등 자동적, 관습적으로 받아들였던 꽃의 모습이 아니다.
시인의 눈에 의하여 발견된 '속삭임', '울음', '핏방울', '정적', '호심' 등의 비유는 우리가 예전에 체험하지 못했던
꽃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들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 때 솟아나는 정서적 충격과 황홀한 경이감이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확대 시키고
타성에 빠진 우리들의 시각을 깨뜨리게 한다."
그러면 이런 결과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 것은 당연히 시인이 관습적이고 자동화된 죽은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살아 있는 비유를 사용하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박인환님의 <얼굴>을 싣습니다. 좋은 시 올리는 것들은 모두 전문(全文)입니다.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길을 걷고 살면 무엇하랴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눈매를 닮은
한 마리의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에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른다
가슴에 돌담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잊혀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홍윤숙님의 <눈 내리는 길로 오라>를 읽겠습니다.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서 눈처럼 하얗게 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쯤 눈 쌓이고, 쌓인 눈 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운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늙어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밭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이미경님의 <바람 속에 보낸 노래>
유달산 외곽도로 따라 갔더니
잎 지는 나무들 서 있었네
아침 안개 속에 서 있었네
나 상수리 나무 옆에 섰네
딸이여 안녕
당신도 안녕
깃털처럼 드디어 무게도 버리고
상수리 나무 한 잎으로
바스러지고 싶었네
유달산 외곽도로
외길 따라 갔더니
바다 있었네
비단 치마폭 바람에 살랑이듯
그렇게 있었네
나 목선 옆에 누웠네
효부도
현모양처도
그리고 매력을 꿈꾸던
내 여성도
신발 옆에 나란히 나란히
벗어놓고 가라앉고 싶었네
머리도 가지런히 눕고 싶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