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씨의 시조 10
연안이씨(延安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시조(始祖) 이 무(李 茂)는 본래 당(唐)나라 출신으로, 고종(高宗 : 당나라 제 3대 왕, 재위기간 : 650~683)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의 부장(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百濟)를 펑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그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고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지 못하여 후손들은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원주(元柱), 통례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지(漬),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핵(核),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 분양(汾陽), 전법판서공파(典法判書公派) 방(昉),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득량(得良),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백연(伯衍),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계연(季衍)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의 현손(玄孫)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던 정공(靖恭)의 아들 원발(元發)이 고려 말(高麗末)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하여 이태조(李太祖)가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상신(相臣)으로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으 충절을 지켰으며, 그의 아들 귀령(貴齡)과 귀산(貴山)이 세종(世宗) 때 좌의정(左議政)과 관찰사(觀察使)를 각각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춘천 도호부사(春川都護府使)를 지낸 속(續 : 관찰사 귀산의 아들)은 조선 초에 맹인(盲人)들의 궁중나들이를 금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맹인의 원한을 샀다. 그후 태종(太宗)이 속(續)의 네째 아들 근수(根粹)를 부마(駙馬)로 삼기위해 맹인 지화(池和)를 중매인으로 보냈는데, 그 원한으로써 무고로 모함을 하여 근수는 죄를 입고 창원(昌原)으로 귀양을 갔었다. 직제학(直提學) 말(土末 : 귀산의 현손, 인문의 아들)의 손자 주(澍)는 명종(明宗)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 : 중종의 계비, 명종의 어머니)가 증(亻曾) 보우(普雨)를 총애하고 불교(佛敎)를 재흥시키자 여러 유생과 함께 보우의 처벌을 상소하여 크게 파문을 일으켰으며,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지냈다. 주의 아들 광정(光庭)은 선조 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가 부원군(府院君)에 진봉,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특히 그는 선조(宣組) 때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그 곳 천주교 선교사가 만든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구해 가지고 들어와 한국사에 있어서 지리관(地理觀)의 대혁명을 일으켰다. 광정의 아들 현(示玄)은 한국 재정사(財政史)에 있어서 정치능력을 가장 높이 평가받은 임물이다.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의 사위로 광해군(光海君) 때 삭직당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전적(典籍)에 등용되어 전조(銓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순천 부사(順天府使)로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으 병참(兵站)과 속환된 피로인(被虜人)들의 구호정책을 비롯하여 관향사(管餉使)로 나갔던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그의 수완을 크게 평가받았었다. 그의 아우 분(示分)도 병자호란 때 병참에 유공하였고, 주(禂)는 오달제(吳達濟)와 함께 척화소(斥和疏)를 올려 이름을 덜쳤다. 인조(仁祖) 때 <구휼칠조(救恤七條)>를 상소하고 옥구 현감(沃溝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완(示完)의 아들 봉징(鳳徵)은 숙종(肅宗)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비(廢妃)를 반대하는 상소(上疏)를 올려 박태보(朴泰輔) 등과 더불어 <삼간신(三諫臣)>으로 불리웠고, 문장(文章)에 뛰어났다. 청백리(淸白吏) 인충(人忠)의 현손(玄孫) 지남(至男)은 효행(孝行)으로 유명했다. 연안(延安)의 읍호(邑號)인 <영응선생(永膺先生)>으로 불리웠던 그는 그의 아버지 언침(彦忱)이 장령(掌令)에 있으면서 조정에 거슬린 바른 말을 하다가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좌천되자 따라가서 그 고을에 있던 하서(何西)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옛날에는 위독한 사람의 똥맛이 쓰면 살수 있고, 달면 죽는다고 하여 효자들은 똥을 핥아 맛을 보는 풍습이 있었다.「명신록(名臣錄)」에 의하면 지남의 어머니 안씨(安氏 : 홍문관 박사 안한영의 딸)가 이질을 앓아 위독하게 되자 지남이 그 똥을 맛본즉 달고 매끄러우므로 목욕을 하고 하늘에 호소하기를, 자기 몸으로 모친의 죽음을 대신할 것을 빌었다. 안씨의 꿈에 신인(神人)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말하기를 “네 아들의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미 그로서 죽음을 대신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오랫동안 어머니 병간호에 몸이 몹시 상했던 지남은 마침내 피를 토하다가 나이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남의 아들 기직(基稷)이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산중에 물과 미음을 입에 대지 못하다가 머리털이 희어지고 눈물에 젖어 눈언저리가 썩기까지 하였다. 다음해 봄에 곡(哭)을 하던 중 숨이 막혀 스러져서 아우 기설(基卨)에게 “나의 불효로 친상을 마치지 못하니 부업(父業)을 계승해 달라”고 유언하고「중용(中庸)」에 있는 선(善)을 택한다(擇善)는 귀절의 뜻으로써 간곡히 부탁하고 죽었다. 기직의 아우 기설도 부친상에 7일 동안 단식을 하였고, 눈물이 다하자 불그스레한 혈루(血淚)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발인(發引)하여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화적(火賊) 떼가 왔다가 영구(靈柩)를 지키고 울부짓는 기설의 모습을 보고 그 효성에 감격하여 돌아갔으며, 적성(積城)에서 상여에 불이 나자 몸으로 관을 가려 머리털이 모두 그슬렸으나 다행이 죽음을 면했다.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와 돈서(惇敍)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저과 대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했다. 이로써 지남과 그의 처 정씨(鄭氏), 지남으 아들 기직과 기설의 형제, 딸 이씨, 지남의 손자 돈오와 돈서, 돈서의 처 김씨 등 8개의 정문(旌門)이 내려져서 <연안 이씨 8홍문>의 영예를 얻었으며, 기설의 손자 후정(後定)은 숙종(肅宗)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격분하여 죽었다.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충신(忠臣) 정려가 내려져서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연안 이씨 또 다른 인맥인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의 후손에서는 9세손 석형(石亨)이 뛰어났다. 일찍이 그의 아버지 회림(懷林)이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삼각산(三角山) 신령에게 빌어서 잉태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마침 금성(禁省)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에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더니 흰 용(龍)이 바위를 조개고 나왔었다. 꿈에서 깨어나 아들을 낳았다는 기별이 왔으므로 아들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하였다고 한다. 나이 26세에 생원․진사와 문과 초시(初試)에 모두 장원하였고, 다음해 잇달아 삼장(三場)에 장원하여 정언(正言)을 지내고,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漢城府尹)․호조 참판(戶曹參判)․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지낸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석형(石亨)의 현손(玄孫) 월사(月沙) 정귀(廷龜)는 6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고, 윤근수(尹根壽)으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90년(선조 23)에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인조(仁祖) 초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던 그는 외교에도 재치와 수완이 뛰어나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使臣)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명(明)나라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 여 장(章)의 기행문을 모은「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글씨에도 뛰어나 신 흠(申 欽)․장 유(張 維)․이 식(李 植) 등과 함께 조선중기의 4대 문장가로 일컬어졌고, 그의 아들 명한(明漢 : 이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냄)과 소한(昭漢 : 이조 참판을 지냄) 현제가 유명했다. 특히 그는 효행(孝行)도 뛰어났다. 병자호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들어간 지 수일만에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여, 호군을 피해다니다가 길 곁에 흙 집이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그 속에 모시고 자신은 문 앞에 누워서 몸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청나라 군사가 활줄을 당겨 한참 보더니 흙집 안에 노모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효행에 감동하여 그냥 돌아갔다. 명한(明漢)의 아들 단상(端相)은 인조(仁祖)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효종조(孝宗朝)에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간(臺諫)을 거쳐 청풍 부사(淸風府使)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고, 학문이 뛰어나 「대학집람(大學集覽)」․「사례비요(四禮備要)」․「성현통기(聖賢通紀)」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한국유학사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단상의 아우 가상(嘉相)도 효행이 뛰어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어머니를 찾아 적진 속을 헤매다가 여섯 번이나 적에게 잡혀 끝내 살해당했으며, 조부(祖父) 월사(月沙), 아버지 명한(明漢)과 더불어 <삼대 대제학(三代大提學)>의 전통을 세웠던 일상(一相)은 청(淸)나라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효종)의 북벌계획 수립에 도움을 주었고「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삼도 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류성룡(柳成龍)을 도왔던 귀(貴)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호위대장(扈衛大將)으로 공을 세워 정사1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올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 괄(李 适)의 난과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난세에 살면서 훈공을 세웠던 충신으로 유명했다. 귀의 아들(時白)은 효종(孝宗) 때 좌의정으로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진봉되고 영의정(寧議政)에 올라 명망을 떨쳐 연안 이씨 가문을 중흥시켰다. 그의 아버지 귀의 충정에 보답하는 뜻에서 임금이 내린 집에서 살았던 시백은 마당에 전부터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어느날 시백이 하직(下職)에 있을 때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일꾼을 데리고 와서 왕명이라 하면서 그 꽃나무를 캐어가려 했다. 시백은 아무말 없이 꽃나무 곁으로 달려가 뿌리까지 뽑아 버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아침 저녘으로 험악해져 가는데 임끔께서 어진 인재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 하시려는 건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기개에 느낀 바 있었던 임금은 시백을 중용(重用)하였다고 한다. 시백이 병자호란 직후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는데 평양 대동문을 들어서니 화려한 기생의 무리가 접대를 하였다. 병란 후에 서도(西道)에 탕진이 흑심한데 이 화려한 접대에 놀라 그 사유를 평양 서윤(平壤庶尹)에게 물었다. 그 서윤은 사신행차에 항상 체통을 못이루고 있어 각 고을의 관비(官婢) 중 자색있는 자를 선발하여 모이게 하고, 그 복색과 비용은 그들 친족으로 하여금 부담케 함으로써 관비의 손실을 절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시백은 성내어 “서윤을 설치한 건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하며 호통을 치고는 감사를 불러 시정을 명하고 떠났다. 어느날 시백의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무명방석 하나를 만든 일이 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시백은 퇴청 후 뜰 아래 부들자리(망席)를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우리 선조가 옛날부터 깔던 자리는 바로 이 부들자리요, 내가 풍운을 만나 외람되게 공경(公卿)에 올랐으나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겨지며 실폐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서 망하기를 재촉하단 말이오”하자 부인은 당장에 그 비단실을 뜯어버렸다는 기록이「공사견문(公私見聞)」에 전한다. 만년에 효종(孝宗)이 왕세자와 시백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세자에게 이르기를 “이이를 보기를 너의 팔다리(股肱)처럼 여기고 위하기를 나같이 하라”고 유언하였다. 일찍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시백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를 알면 그를 믿지 않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말 묘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시백의 아우 시방(時昉)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아버지와 함께 공(功)을 세워 정사2등공신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고,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후손 시직(時稷)은 병자 호란 때 강화도에서 국운을 통탄하고 유서를 남긴 후 종으로 하여금 목을 조르게 하여 자결했다. 통레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지(漬)의 후손에서는 그의 현손(玄孫) 보정(補丁 : 예조 참판을 역임)과 말정(末丁 : 예빈지 소윤을 역임) 형제가 뛰어났고, 말정의 아들 숙기(淑琦 : 이조판서)와 숙함(淑瑊) 형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유공했다.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던 후백(後白 : 숙함의 증손, 국형의 아들)은 옳은 일과 결백함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의 중손 호민(好閔)은 선조(宣祖)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니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고, 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특히 그는 검소하기로 유명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비단옷 한 번 입지 않았다. 선조가 어의(御衣)를 하사(下賜)할 때도 호민에게만은 무명옷을 내렸다고 한다. 전란이 끝날 때마다 서로 녹훈(錄勳)을 하려고 위증을 해가며 법석대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후에도 웬일인지 녹권을 받은 자가 조정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에 무관심한 호민에게 이덕형(李德馨)이 희롱하며 “공은 어디 갔다가 정승이 되지 못했소”하였더니, 호민은 “공은 어디 갔다가 공신이 되지 못했소”하였다. 그후 이 아름다운 대화는 전후 때마다 일어나는 시대의 풍조를 익살하는 명귀로 곧잘 인용되었다고 한다. 정조(正朝)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정운(鼎運)의 아들 명적(明迪)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으며, 김해 부사(金海府使) 중길(中吉)의 손자 술원(述源)은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정희량(鄭希亮)에게 죽음을 당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했던 술원은 거창읍의 좌수(座首)로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역장(逆將) 정희량 앞에 나아가 “너의 조상은 그토록 나라에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무엇이 모자라 이런 수작이냐. 너의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호통치다가 무참하게 난도(亂刀)질 당했다. 술원은 아들 우방(遇芳)이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우두령(牛頭嶺)에 올라가 적 틈에 잡혀 있는 거창 시민에게 포고를 하였다. “거창군민은 나의 말을 들어라. 역적 희량에게 붙어 있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을 것이 요, 희량을 잡아 오진(五陳)에 데려오면 조정에 품하여 녹훈을 할 것이다.” 군민들이 밤중에 정희량의 거소를 습격하여 희량을 묶어 우방의 진용에 데려오자 난이 평정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시원(始源)의 아들 봉수(鳳秀)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정조(正祖)로부터「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고 권학(勸學)의 격려를 받았으며, 참봉 명원(命源)의 아들 지수(趾秀)는 순조(純祖) 때 서연관(書筵官)으로 세자(世子)에게 학문을 진강했다. 또한「삼조보감(三朝寶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지내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약우(若愚), 석농체(石農體)의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던 종우(鐘愚),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자결한 현섭(鉉燮),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의약 교육기관을 세우게 했던 도재(道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던 설(偰) 등이 명문(名門)의 전통을 이었으며, 동녕(東寧)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페기운동을 전개했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총리가 되어 국무총장을 겸한후 대통령 대리가 되어 의절(義節)의 전통가문인 연안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0,274가구, 126,5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천이씨(漣川李氏) 연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906가구 6,22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영주이씨(榮州李氏) 영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968가구 3,11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동향의 영천이씨(榮川李氏)와의 관계도 상고할 수 없다.
영천이씨(寧川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영천 이씨(寧川李氏)의 시조(始祖) 이능간(李凌幹)은 고려의 이름난 명신(名臣)으로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으로 귀양 가자 역졸을 시켜 금(金)을 바쳐 왕과 소종신(扈從臣)의 옹색을 면하게 했으며, 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두려고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원제(元帝)에게 주청(奏請)하여 이를 중지시켜「토좌당(兎左堂)」이라는 사림(士林)의 액호(額號)를 받았고, 충혜황(忠惠王) 때 조 적(曺 頔)의 난이 일어나자 문하시중(文下侍中)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영천(寧川)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상서(尙書)를 지낸 명(銘)과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일생(一生)을 마친 능간(凌幹)의 손자 상휴(湯休), 그의 아들로 조선조(朝鮮朝)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관직에 나가지 않고 현금(玄琴)을 즐겼던 분(芬)이 유명했다. 그밖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중엽(重燁)․부춘(富春)․재성(在誠) 등과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덕근(德根)․복겸(福謙)이 영천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천 이씨(寧川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3,290가구, 95,4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천이씨(永川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영천(永川)은 경상북도 남동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고대(古代) 골벌국(骨伐國)이었건 것을 신라 초기에 영천군 일원은 절야화군(切也火郡), 신녕(新寧)지방은 사정화군(史丁火郡)이라고 하였다. 경덕왕 이후에는 임고군(臨皐郡)․고울부(高鬱府)․도동현(道同縣)․임천현(臨川縣)․면백현(面白縣)․이지현(梨旨縣)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귀었다. 고려 초에는 도동․임천현을 합하여 영주군(永州郡)이라고 불렀으며 성종(成宗) 때에는 자사(刺史)를 두었다. 현종(顯宗) 때에는 신녕현이 경주(慶州)로 편입되고 명종(明宗)때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그 뒤 지주사(知州使) 소재지로 승격되었다. 1414년(태종 14) 영천군으로 개칭되고 1497년(연산군 3) 신녕현이 폐현(廢縣)되면서 영천군(永川郡)에 귀속되었다. 그후 1937년 영천면이 읍(邑)으로 승격하였고 1981년에는 영천읍(永川邑)이 시(市)로 분리 승격하였다.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이문한(李文漢)이며, 그의 후손으로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내고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진 대영(大榮 : 시호는 문정), 울산 군사(蔚山郡事) 중영(仲榮), 영동정(令同正) 전(磚)을 각각 파조로 하는 3계통이 있다. 역사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고려 때 인(仁)과 당(璫)이 좌우위 상장군(左右衛上將軍)을, 국보(國寶)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종검(宗儉)․보흠(甫欽)․현보(賢輔) 등이 유명하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한 종검(宗儉)은 한림․직제학․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청백리에 올랐으며 보흠(甫欽)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를 지내고 단종 손위 후에는 순흥 부사(順興府使)로 있으면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 당했다. 현보(賢輔)는 연산군 때 문과(文科)에 급제, 교서관(校書館)의 벼슬을 지냈으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천 이씨(永川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134가구, 8,66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寧海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영해 이씨(寧海李氏)의 시조(始祖) 이연동(李延東)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낸 전주 이씨(全州李氏) 한(翰)의 후손으로서, 고려(高麗)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으며, 공(功)이 있어 영해군(寧海君)에 봉해졌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을년(乙年)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내부령(中顯內府令)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성무(成茂)가 이름을 떨쳤고, 언량(彦良)은 임진왜란 때 무장(武將)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해 이씨(寧海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92가구, 2,04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안이씨(禮安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예안 이씨(禮安李氏)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에서 분적(分籍)된 계통(系統)으로 태사공(太師公) 이 도(李 棹)를 시조(始祖)로 삼고 도(棹)의 7세손인 천(仟)의 아들 3형제 중 둘찌인 혼(混)이 고려 원종(元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내고 예안백(禮安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있다. 그후 혼의 혼자 익(翊)이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으로 예안군(禮安君)에 봉해졌으므로, 예안(禮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 때 무관(武官)이며 과학자였던 천(蕆)이 화포(火砲)와 자격루(自擊漏) 등을 제작하였고, 개량활자를 만들어 우리나라 인쇄술으 발달에 공헌을 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된 명(蓂)은 판서(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올라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이 밖에도 무관으로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많은 공(功)을 세운 경룡(慶龍)과 이 괄(李 适)의 난 때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이 된 경정(慶禎)이 유명했고, 간(柬)은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으 한 사람으로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을 학문으 근본으로 하였다. 하늘에서 내린 효자로 이름난 천본(天本)은「천심효자(天心孝子)」라 칭했고, 식(埴)은 영조(英祖) 때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준영(準永)은 3.1운동 때 왜적과 싸워 예안 이씨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안 이씨(禮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724가구, 11,28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현이씨(오현李氏) 오현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08가구 1,63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옥천이씨(沃川李氏) 옥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0가구 1,09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온양이씨(溫陽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온양 이씨(溫陽李氏)의 시조(始祖)는 조선 선조(宣祖) 때 옥천 군수(沃川君守)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항전(抗戰)하다가 순국(殉國)한 이흥서(李興瑞)이다. 그의 선계(先系)는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미상(未詳)하며, 손자 만립(萬立)이 난중향기(亂中響記)에서 조부의 행적(行蹟)을 알았으나 역시 선대(先代)를 알 수 없어 흥서(興瑞)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온양(溫陽)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온양 이씨(溫陽李氏)는 효자(孝子)의 집안으로 이름났는데 조선 숙종(肅宗) 때 태귀(泰貴)와 헌종(憲宗) 때 흥엽(興爗)은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정려(旌閭)와 삼효문(三孝門)이 세워졌고 의친왕(의친왕: 고정의 셋째아들)의 친필(親筆)로「온양이씨 삼효문(溫陽李氏三孝門)」이라 쓴 비(碑)가 세워졌다. 이외에도 항일(抗日)․구국(救國)운동에 앞장선 응선(應善)과 경선(景善)이 온양 이씨의 자랑스런운 인물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온양 이씨(溫陽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525가구, 2,47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완산이씨(完山李氏) 완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939가구 9,6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향(同鄕)인 전주이씨와의 관계는 상고할 수 없다.
용인이씨(龍仁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용인 이씨(龍仁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에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로 구성백(駒城伯)에 봉해진 이길권(李吉卷)이다. 용인 이씨(龍仁李氏)의 인물을 보면 세백(世白)이 숙종(肅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이르렀으며, 숙종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 영조(英祖) 때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의현(宜顯)은 세백의 아들인데, 이들은 부자 정승(政丞)으로 유명하다. 이밖에 주요인물로는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토평하고 뒤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보혁(菩赫), 정조 때 좌의정(左議政)과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재협(在協), 영조 때 대사성(大司成)․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의철(宜哲), 정조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재학(在學), 철종 때 예조 판서에 이른 삼현(參鉉), 고종 때 이조 판서를 지낸 원명(源命) 등이 유명하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572가구, 27,2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계이씨(羽溪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우계 이씨(羽溪李氏)의 시조(始祖)는 알평(謁平)의 후손으로 고려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좌복야를 지낸 이양식(李陽植)이다. 그의 아들 순우(純祐)는 의종(毅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 상서(禮部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으며, 경주(慶州)에서 우계(羽溪)로 이거(移居)하였다. 그후 양식(陽植)의 5세손으로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구(球)에 이르러 경주 이씨(慶州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본관(本貫)을 우계(羽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구(球)의 현손인 광식(光軾)이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광식(光軾)의 아들 감(戡)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 가문을 중흥시켰다. 전의 손자 복남(福男)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나주 판관(羅州判官)․남원 부사(南原府事) 등을 지내고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러 정유재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戰死) 하였다. 또한 감(戡)의 손자 명남(命男)은 참판(參判)을 역임하였으며, 경항(慶恒)의 아들 서우(瑞雨)는 시문(詩文)에 뛰어났고 명필(名筆)로 이름이 높았다. 이외에도 상우(商雨)가 찰방(察訪)을, 경제(慶薺)가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계 이씨(羽溪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390가구, 14,0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봉이씨(牛峰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우봉 이씨(牛峰李氏)의 시조(始祖)는 고려 때 사람인 이공정(李公靖)이다. 공정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잠성부원군(岑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우봉(牛峰)․잠성(岑城) 등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그 곳에 세거하면서 관향(貫鄕)을 우봉(牛峰)으로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성리학의 대가 재(縡)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조(英祖) 때 노론(老論)의 한 사람으로 대제학(大提學)․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지냈으며, 그의 저서「사례편람(四禮便覽)」은 근세의 대표적인 명저로서 오늘날에도 상사(喪事)나 제례(祭禮)에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재(縡)의 손자 채(采)는 순조(純祖)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있을 때 그 고장에 처음으로 둑을 쌓아 농사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그 둑을 가리켜「이공제(李公堤)」라 불렀다 한다. 이외 휘정(輝正)이 대사헌(大司憲)․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했고, 광문(光文)이 형조․공조․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이르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우봉 이씨(牛峰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278 가구, 17,51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울산이씨(蔚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울산 이씨(蔚山李氏)의 시조(始祖) 이 철(李 哲)은 고려 고종(高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판전리 사사(判典理司事)에 올랐으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울산(蔚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高麗)때 사재주부(司宰主簿)를 지낸 순광(淳匡)과 형부 전서(形部典書)를 지내고 도첨의 평리(都僉議平理)에 추증된 운림(雲林)이 있으며, 조선에 와서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과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의(誼), 그리고 군수(郡守)를 지낸 희신(希信)과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현감(縣監)을 지낸 장은(長誾) 등이 대표적이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울산 이씨(蔚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128가구, 4,43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주이씨2(原州李氏2) 원주이씨2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61가구 3,53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의령이씨(宜寧李氏) 의령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98가구 1,30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의성이씨(義城李氏) 의성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849가구 2,91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이 있는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천이씨1) 이천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260가구 4,26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희소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익산이씨(益山李氏) 익산이씨 시조는 고려 인종조 상서성 우복사(右僕射) 이주연(李周衍)이다. 인물로 5세손 이행검(李行儉)은 제주(祭酒)였다. 이행검의 손자(孫子) 이공수(李公遂)는 문과출신으로 시중(侍中)이었으며 익산부원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이종직(李宗直)은 사직(司直)으로 한파를 이룬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92가구 2,2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장흥이씨(長興李氏) 장흥이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성종조에 이원성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25가구 2,12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원이씨 전원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95가구 3,361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은이씨 전은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81가구 3,816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 이 한(李 翰)은 신라(新羅) 때 사공(司空)을 지냈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 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최대의 벌족(閥族)인 대성(大姓)의 연원(淵源)을 이루었다. 그후 시조의 아들 자연(自延)이 시중(侍中)을 역임했고 손자 천상(天祥)은 복야(僕射)를 지냈으며, 증손 광희(光禧)는 아간(阿干)을, 현손(玄孫) 입전(立全)은 사도(司徒)를 역임하는 등 신라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 세손 용부(勇夫)에 이르러 고려조(高麗朝)에서 흥무위 대장군(興武衛大將軍)을 역임하였다. 그후 그의 아들 린(璘)이 내시집주(內侍執奏)로 시중(侍中) 문극겸(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17세에 양무(陽茂 : 좌우위 중랑장을 역임)를 낳았으며, 상장군(上將軍) 이강제(李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양무는 18세에 안사(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李太祖)의 고조부(高祖父)인 목조(穆祖)였다. 호방(豪放)한 성품으로 신망을 받았던 목조는 처음에 전주(全州)에 살다가 산성별감(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강릉도 삼척현(江陵道三陟縣)으로 이거(移居)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강릉도의 안렴사(安廉使)로 임명된 자가 바로 그 산성별감이어서 목조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삼척을 떠나 함길도 덕원(咸吉道德源)에 정착하였다가 원(元)나라에 귀화하여 알동(斡東 : 경흥부의 동쪽 30 리에 있었다) 땅으로 이주(移住)하여 원주민 5천 호(五千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 : 원나라 벼슬 제도)가 되니 이때가 고려 고종(高宗 : 제 23 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조(朝)였고,「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동북 방면 사람들이 모두 목조에게 쏠려 좇으니 이씨 조선 왕업(李氏朝鮮王業)의 시초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목조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세습한 익조(翼祖 : 이행리)는 원나라 세조(世祖)를 도와 왜인정벌에 참전했고, 원나라에 귀화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본국에 있었다. 그가 충렬왕(忠烈王)을 공손히 뵈오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는 본국에서 벼슬하던 집안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것인가. 지금 그대의 거동을 보니, 마음이 본국에 있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다. 익조가 보인 최비(崔妃)와 더불어 낙산 관음사(洛山觀音寺)에서 기도하여 낳았다는 탁조(度祖)의 장자 완창대군(完昌大君) 자흥(子興)은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고, 차자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원나라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완원대군(完原大君) 자선(子宣)은 완산백(完山伯)에 봉해졌다. 1315년(고려 충숙왕 2)에 출생했던 환조(桓祖) 자춘(子春)은 공민왕(恭愍王)의 북강(北疆) 회수정책에 내응하여 쌍성을 함락시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대중대부 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았으며,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서강병마사(西江兵馬使)를 겸하여 왜구(倭寇) 침입을 토벌하고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에 임명되어 함경도 지방을 다스렸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던 환조의 장남 원계(元桂)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박주(博州)에서 승전하고 개경(開京)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었고 우와(禑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왜구를 토벌했으며, 요동(遼東) 정벌 때는 팔도도통사 조전원소로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서 공을 세웠다. 환조의 둘째 아들 화(和)는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일등공신으로 의안백(義安伯)에 봉해 졌으며, 두차례 왕자의 난을 �정하여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대군(大君)에 진봉되었다. 1392년(태조 1) 7월 16일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한 태조(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27명의 왕(王)이 승계하면서 519년간 지속한 조선 왕조(朝鮮王朝)의 기초를 세웠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환조(丸彫) 자춘(子春)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사공(司空) 이 한(李 翰)의 22세손이다. 외교정책으로서 사대교린주의(事大交鄰主義)를 채택하고, 문화정책으로서 숭유배불주의(崇儒排佛主義)를, 경제정책으로서 농본민생주의(農本民生主義)를 건국(建國) 이념으로 내세워 왕권 중심의 권력구주를 확립하여 한국(韓國) 최대의 벌족(閥族)으로 발전해온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대소 120 여 파(派)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이를 시대(時代)에 따라 세 갈래로 구분하면, 첫째 이태조의 고조부(高祖父)임 목조(穆祖) 안사(安社)의 상대(上代)에서 갈려진 파로는 시조 한(翰)의 14세손 궁진(宮進)의 둘째 아들 단신(端信)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시중공파(侍中公派)와 15 세손 용부(勇夫)의 둘째 아들 거(琚)를 파조로 하는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17세손 양무(陽茂)의 셋째 아들 영습(英襲)을 파조로 하는 주부공파(主簿公派)가 있으며, 둘째 안사 이후 이태조 이전에서 갈려진 파로는 안사의 아들 안천(安川)․안원(安原)․안풍(安豊)․안창(安昌)․안흥대군(安興大君) 파와 익조(翼祖) 행리(行里)의 아들 함녕(咸寧)․함창(咸昌)․함원(咸原)․함천(咸川)․함릉(咸陵)․함양(咸陽)․함성대군(咸城大君) 등 12파가 있으며 탁조(度祖) 춘(椿)의 아들 완풍대군(完豊大君)과 의안대군(義安大君) 등을 포함하여 총 18개 파가 있다. 셋째 태조의 후대에서 갈려진 파로는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를 포함하여 99개파(대군 : 25, 군 : 74)로 알려졌으나, 미취졸(未娶卒 : 결혼전에 죽음)이거나 후사(後嗣)가 없는 대군(大君)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전주 이씨의 인맥(人脈)으로는 세종(世宗)의 아들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계통에서 6명의 정승(政丞)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하여 주목을 끌었고, 정종(定宗)의 아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계통에서는 영의정(領議政) 1명과 대제학 3명을 배출시켜, 정승 3명을 배출시킨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 세종의 아들 여), 정승 2명의 선성군파(宣城君派 : 정종의 아들 무생), 정승 1명과 많은 문무관(文武官)을 배출해 낸 효령대군파(孝令大君派 : 태종의 둘째아들 보)와 함께 화려한 명맥(名脈)을 이루었으며 정종의 막내아들인 무림군(武林君) 선생(善生)과 중종(中宗)의 7남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의 계통은 무관(武官)의 집안으로 유명하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태조(太祖)가〈우리 가문의 백이숙제(伯夷叔齊)〉라 칭했던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가 고려 말 우왕(禑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을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명(明)나라에 그 정변을 설명하러 갔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海州)에 은거(隱居)하였다.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의 후는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가 양자(養子)로 들어가 후계를 이었는데, 그의 아들 부(溥)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공을 세워〈종실(宗實)의 현자(賢者)〉로 불리웠고, 20세에 요절했으나 그 이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급제하여 계감(戒鑑)을 편수했으며, 효경(孝經)․소학(小學)․사서삼경(四書三經)․음율(音律)․산수(算數) 등에 모두 뛰어났었다. 부(溥)의 증손으로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역임했던 수한(守漢)의 아들 의건(義健)은 명종(明宗) 때 당시의 명현(名賢)들과 교유하며 시명(詩名)을 떨쳤고, 절(節)과 학(學)으로 선비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았다. 군수(郡守) 욱(郁)의 아들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했던 후원(厚源)은 평생을 외롭게 생활하여 인간저울이란 뜻인〈의형(義衡)〉으로 불리웠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남한산성에서 굴욕적인 강화(講和)가 진행되고 세자(世子)의 인질문제로 침통해 있는 인조(仁祖) 임금에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임금은 오직 나라를 위해 죽고, 신하들은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대담한 발언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악신 김자점(金自點)의 축출을 강력하게 주장�던 후원은 만년에 광주(廣州) 선형곁에 집을 짓고 그 집이름을〈오재(五齋)〉라 했다. 정종(定宗)의 인맥으로는 선성군(宣城君) 무생(茂生)․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무림군(茂林君) 선생(善生)․의 후손들이 명맥(命脈)을 끈다. 선성군 무생의 증손 학정(鶴丁)의 아들 양원(陽元)은 명종(明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서정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광국 3등공신(光國三等功臣)으로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특히 그는 성품이 충후(忠厚)하고 박학하였으며, 당쟁이나 흑백의 논쟁에 편당되지 않았다. 어느날 야대(夜對)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임금이 술을 건하고〈아로가(雅鷺歌)〉를 지어 양원에게 화답(和答)을 청했다. 〈까마귀야 검지 말라, 백노야 희지 말라.(鴉兮 莫黑 鷺兮 莫白) 흑백이 어지럽다. 수리야 너는 어찌 홀로 검지도 희지도 않느냐(黑白之紛如兮 鵰獨胡爲平 不黔不白)〉하니 양원이 화답하기를, 〈주(朱)라 해도 내 아니요, 녹(綠)이라 하여도 내 아니라(謂朱非我兮 謂綠非我) 주록(朱綠)이 현란함도 내 고움이 아니어늘(朱綠之眩晃兮 又非我之娜也) 님은 어찌하여 날 몰라 보시고 물들었다 하시오(君胡爲平不我知 謂我兮染夏)〉하니 임금이 좌요에 편당됨이 없음을 알고 더욱 어질게 여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한강(漢江)을 지키다가 해유치에서 적군을 크게 대파한 후 영의정에 올랐던 양언은 의주(義州)에 피란 중이던 선조 임금이 요동(遼東)으로 건너가 내부(內附)했다는 와전된 소식을 듣고 “국사를 가히 어찌 할 도리가 없다”하며 나라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삼겠다면서 절곡(絶穀) 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절하였다. 그의 아들 시경(蓍慶)은 임진왜란에 순절한 아버지의 3년상을 치루고 있는 동안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수르 갚는다고 아버지 영전에 맹세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진주성(晋州城) 전투에 참천하여 육신으로 적을 격살하고 물에 빠져 죽으니 시체도 못거두고 의관(衣冠)으로 장사를 지냈다. 군수(郡守) 극인(克仁)의 아들 홍주(弘冑)는 40년간 벼슬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 초막뿐이었고 한 뙈기 공원에는 대(竹)와 화초가 조촐하게 피어있었다고 하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문묘(文廟)의 중수비문을 남겼다. 진남군(鎭南君) 종생(終生)의 후손에서는 수창부정(壽昌副正) 칭(稱)의 아들 헌국(憲國)의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는데 공을 세워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선조 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호성3등공신(扈聖三等功臣)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덕천군(德泉君)후생(厚生)의 아들 효백(孝伯)은 이 복(李 復)․이 형(李 衡)과 더불어 당대에 활 잘 쏘는〈칠사종(七射宗)〉으로 불리웠으며, 뛰어난 지감(知鑑)으로도 유명했다.「원교집(圓嶠集)」에 의하면, 그의 무덤이 광주(廣州) 도논리(道論里)에 있는데 그 터는 효백이 평소에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이다. 그는 항상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반드시이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어느날 활줄이 갓끈에 퉁겨져서 갓끈에 달렸던 큰 구슬을 잃었는데 장사할 때 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 제는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으나 세종(世宗)의 현명함을 위해서〈창광자자(猖狂自恣)〉하여 세자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여생을 방랑하였었다.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 보(補)는 불교를 깊이 믿었다. 그의 형인 양녕대군이 사냥개를 끌고 어깨에는 사냥매를 얹고서 그가 있는 절에 와서 마당에 사냥한 짐승을 늘어 놓고 자주 놀다가 갔는데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효령대군이 “형님은 지옥이 두렵지 않습니까” 하니, “이승에서는 임금의 형이요, 저승에서는 보살의 형이니 지옥에 갈 리가 있겠는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효령대군의 현손 중호(仲虎)는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때의 이름난 학자로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대쪽으로 만든 계명(계명)에〈안색은 온화하게 가질 것을 생각하며 이득을 보면 의리를 생각하라〉는 등의 구사(九思)와〈머리 모양은 곧게 하고 손가짐은 온순하게 하라〉는 등의 구용(九容)을 빽빽하게 새겨서 허리띠에 차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함께 묻어 달라고 하였다.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했던 직언(直彦 : 효령대군의 5대손, 형의 아들)은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 양(樣)의 손자 명(溟)은 인조(仁祖) 때 병자호란 후 고갈된 재정을 맡아 국고(國庫)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물가를 안정시켜 한국 재정(財政) 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활을 잘 쏘아 장거리 사수로 이름을 떨쳤던 성녕대군(誠寧大君) 종(種)의 후손에서는「지봉유설(芝峰類說)」․「찬록군서(纂錄群書)」 등 수십종의 명저(名著)를 저술하여 명망을 떨쳤던 수광(晬光)과 억울한 사람을 너무 많이 구해주어서 지옥에서도 계속 영의정을 지내고 있으리라는 성구(聖求 : 지봉 수광의 아들)의 부자(父子)가 유명했다. 특히 성구는 인조 때 기생(妓生) 제도를 폐하여 모두 고향에 돌려 보냈던 일로 이름을 떨쳤고, 이 계(李 烓)의 온 가족이 처형되는 것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탄핵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나 양화강(楊花江)위에 집을 짓고 살다가 집에 불이 났었다. 그는 밭뚝에 나와 태연히 앉아 있다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도 않고 “술독은 탈이 없느냐. 술을 딸아 이웃 사람들에게 사죄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익녕군(益寧君) 치(移)의 후손에서는 정은(貞恩)의 증손 원익(元翼 : 합천 군수 억재의 아들)이 서민적(庶民的)인 인품으로서〈오리정승(梧里政丞)〉이란 이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원익이 연로(年老)해서 퇴임을 청하니 인조(仁祖)는 술을 하사하여 전송하였고 해사(該司)로 하여금 흰 이불과 흰 요를 주게하여 그의 검소한 덕을 표하며, “평생의 검소는 가히 경의를 표할 만하다.”하고 승지를 보냈다. 승지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그 거처의 현황을 물었다. “초가집이 쓸쓸하였고, 비바람도 못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은 “정슨 40 년에 초가 두어칸 뿐이더냐”하면서 본도 감사로 하여금 정침(正寢)을 지어 주도록 하였다. 세종(世宗)의 아들 18형제중 가장 명맥(命脈)을 이룬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5대손 수록(綏祿)은 광해군(光海君) 때 원익(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하였고,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양근(楊根)에 물러가 살았으며, 그의 아들 경여(敬與)가 다난한 일생을 살면서 기국(器局)으로 영의정에 올랐다. 경여의 손자 관명(觀命 : 대제학 민서의 아들)은 아우 건명(健命)의 죄목에 연좌, 덕천(德川)에 유배되어 관노(官奴)살이를 하면서 패랭이(平涼子)를 쓰고, 새벽 일찍 관가의 마당을 쓸어놓고 군수가 드는 것을 기다렸다가 대령(待令)하는 일을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고 소임을 다했다. 관명의 아우 건명은 경종(景宗)이 병석에 누워 후사(後嗣)를 정하는데, 아우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자 세자(世子)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무고를 받아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당했다. 건명의 사촌이 속종조(肅宗朝)의 상신 이명(頤命)이다. 그는 당대의 이름난 석학(碩學)으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했으며, 특히 청(淸) 나라의 실학사조(實學思潮)에 관심이 깊었고,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깊이 연구하였다.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으로 영조(英祖)의 대리청정을 실현케 했으나 소론(少論)의 반대로 결정이 철회되자 파직, 남해(南海)에 유배되었다고 무고로 사사당했다. 임영대군(臨瀛大君) 구(璆)의 아들로 귀성군(龜城君)에 봉해졌단 준(浚)은 문무 겸비의 명신(名臣)으로 이름났으며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1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병권(兵權)을 쥐자, 종실(宗室)에게 병권이 쥐이면 혁명이 있다는 한계희(韓繼禧)의 논척으로 파직당했다. 중 보우(普雨)를 논척하다가 유배당했던 충작(忠綽)은 효행(孝行)이 뛰어났다. 부모의 복상(服喪) 중에 너무 울어 멀었는데도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먼거리의 묘소(墓所) 참배를 하루도 빠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임금이 그의 효행을 높이 치하하여 승지(承旨)로 임명하자 조정에서는 장님승지는 있을 수 없다는 반론이 일어났다. 이에 왕이 교지를 내리기를〈신들은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미워하지만 나는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을 사랑한다. 보고서 못된 일을 하는 눈보다 아예 못보는 눈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정치는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외 전주 이씨를 빛낸 인물로는 완원군(完原君) 수(성종의 다섯째 아들)의 증손 몽설(夢說)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보령(保寧)에 은거하여 향풍(鄕風)을 세웠고, 그의 아들 성(城)과 원(琬)은 학명을 떨쳤다. 진(瑱)의 아들 상질(尙質)은 학문이 현달하여〈삼유신(三儒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그의 아들 훤(藼)은 언간(言諫)으로 절의(節義)를 세워, 대제학(大提學)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손자 조(肇)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순조(純祖) 때 우의정을 지내고 명문장가로 시명(詩名)이 높았던 서구(書九)는 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류득공(柳得恭) 등과 함께 〈한시(漢詩)의 4대가〉로 손꼽혔으며, 승지 득일(得一)의 아들 상황(相璜)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러, 헌종(憲宗) 때 우의정(右議政)으로「순조실록(純祖實錄)」을 편찬했던 지연(止淵), 철종(哲宗) 때 좌의정을 지내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던 헌구(憲球),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철종 때 영의정 재원(載元),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大統領)을 지낸 승만(承晩)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남한에 총 558,019 가구 2,379,5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선이씨(旌善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정선 이씨(旌善李氏)의 시조(始祖) 이양혼(李陽焜)은 송(宋)나라 안남국(安南國) 남평왕(南平王) 건덕(乾德)의 세째 아들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시원(始原)은 그가 북송(北宋) 휘종(徽宗)때 국난(國亂)을 피하여 우리나라의 경주(慶州)에 정착(定着)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9세손 우원(遇元)이 국자생원(國子生員)으로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봉되어, 정선(旌善)으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정선(旌善)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우원의 아들 형규(亨奎)가 18세에 등과하여 고려 충렬왕(忠烈王)때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에 올랐으며, 후손 자생(自生)이 군기시윤(軍器시尹)을 지냈다. 그외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희성(希聖)과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한 의(誼)가 뛰어났고, 득량(得良)은 부사(府使)를 역임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정선 이씨(旌善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809가구, 3,1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주이씨(貞州李氏) 정주는 풍덕의 별칭이다. 정주이씨 시조는 고려 고종조에 간의대부(諫議大夫)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한 이세화(李世華)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10가구 3,3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의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제주이씨(濟州李氏) 제주이씨 시조는 원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416가구 1,57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진성․진보이씨(眞城․眞寶李氏)
시조및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진성 이씨(眞成李氏)의 시조(始祖) 이 석(李 碩)은 누대로 진보현(眞寶縣)에 토착(土着)해 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진보현의 아전(衙前)으로 있다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그의 맏아자수(子修)가 충숙왕(忠肅王)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362년(공민왕 11)에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난(亂)때 전공(戰功)을 크게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귀(貴)로 인하여 시조 석(碩)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밀직사(密直使)에 증직(贈職)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 석(李 碩)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선조(先祖)의 본향지(本鄕地)인 진성(眞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켜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傳統家門)으로 명망을 떨쳤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풍산현(豐山縣) 망천(輞川)에 터를 잡았던 송안군(松安君) 자수(子修)의 아들 운구(云具)와 운후(云候) 대(代)에서 중흥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조선(朝鮮) 초기에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던 운구(云具)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군수(郡守)를 역임했던 차남 양검(養儉)과 주부(主簿)를 지낸 막내 양호(養浩)가 유명했다. 한편 송안군 자수의 둘째 아들로 부정(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된 운후(云候)의 아들 정(禎)은 선산도호부사(善山都護府使)를 역임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슬하에 아들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이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노송정(老松亭) 계양(繼陽)의 둘째 아들 우(堣)는 연산 군(燕山君)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이조 및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한 후 승지(承旨)로 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으로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으며, 1508년(중종 3) 진주 목사(晋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下賜)받았다. 진사(進士) 식(埴)의 아들 6형제 중 넷째인 해(瀣)는 중종(中宗)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간(司諫)과 정언(正言)을 거쳐 직제학(直提學)․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예조 참판(禮曹參判)등을 역임했고, 예서(隸書)에 뛰어나 필명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황(滉)이 가문을 명문(名門)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특히 퇴계(退溪) 황(滉)은 주자학(朱子學)을 집대성한 대 유학자(大儒學者)로 율곡(栗谷) 이 이(李 珥)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으며, 시문(詩文)과 글씨에도 뛰어났고 겸허(謙虛)한 성격의 대학자로 중종(中宗)․명종(明宗)․선조(宣祖)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명종(明宗) 때 대사성(大司成) 민 기(閔 箕)가 명(明)나라로 가게 되어 체임되자 당하관(堂下官)으로서 글에 능하고 재행(才行)이 있는 자를 선택할 때 부응교(副應敎)로 있던 퇴계가 천거되었으나 얼마 안되어 병을 빙자하여 사직하고 돌아가니, 임금은 친필로 쓴 수찰(手札)을 내렸는데 그 내용에 <너는 탁월(卓越)하며 청간하고 세상에 드문 문장으로 공명을 탐하지 않고 촌(忖)으로 돌아가 한가로이 살고 있으니 염퇴(恬退)한 뜻은 가상하나 항상 서울로 돌아오는 날을 기다렸다. 내가 어진이를 구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어진이가 조정에 벼슬하지 않으니, 내 마음이 결연(缺然)하여 마음속에 잊지 못하노라. 내 비록 주문왕(周文王)의 덕(德)은 없으나 네 어찌 부춘산(富春山 : 한나라 엄자릉이 벼슬을 마다하고 숨어 살던 산)에 은거하기를 좋아하느냐. 속히 올라와서 간절히 구하는 뜻에 응하여다오>하였다. 「석담일기(石潭日記)」에 의하면 퇴계의 학문은 문장(文章)으로 말미암아 도학(道學)에 들어갔는데 의리(義理)가 정밀하여 주자(朱子)의 학설을 좇았으며, 여러 학자 학설의 동이(同異)점에도 통하였으되 옆으로 주자의 학설에 절충(折衷)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한가로이 혼자 거처하면서 전분(典墳)서적 이외에는 마음에 두는 것이 없었고, 때로는 수석(水石)을 찾아 소요하면서 시(詩)를 읊어 소산(蕭散)한 흥취를 붙이기도 하였다. 학자들의 물음이 있으면 언제나 자기의 얻은 바를 모두 기울여 수응할 뿐 학도를 모아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담박(淡泊)함을 좋아하여 부귀영화를 뜬 구름같이 보았고 의식(衣食)을 겨우 자급하면서도 그의 개결함은 남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한양에 우거하고 있을 때 이웃 집 밤나무 두어 가지가 담너머로 뻗어 나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면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염려되어 담밖으로 던져 버렸다. 선조가 처음 즉위하자 모든 조사(朝士)들의 공론이 “이 황이 아니면 임금의 덕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임금의 뜻도 황에게 기대하고 있었는데, 황은 자기의 재능과 지혜가 대사를 감당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또 말세(末世)가 되어 도학자(道學者)로서 정치를 할수 없고, 임금의 좋은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이 성실치 못하고, 대신들 또한 학식이 없어 하나도 믿을 수 없으므로 벼슬을 간절히 사양하고 기어코 물러났다. 만년에 도산(陶山)에 집을 짓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진력하면서 아들 준(寯)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후 비(碑)를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도만은 진성 이공의 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표시하라고 했으며, 병이 위독하게 되자 문인들을 불러 더불어 영결(永訣)하려 하므로 자제들이 권고하여 말리니, 황은 “죽어가는데 그들을 보지않을 수 없다”하고 명하여 옷을 몸에 걸치게 하고 여러 문생에게 이르기를 “평일에 나의 그릇된 견해로서 제국과 더불어 강론하였으니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하였다. 임종하던 날 아침에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이르고, 저녁에 눕는 자리를 정제(整齊)하게 하고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아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생전에 자기의 묘명(墓銘)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나면서부터 치(癡)였고, 커서는 다병(多病)하였다.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으며, 늦게는 어찌하여 벼슬을 하였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도리어 얽혀왔다. 출세에는 서툴렀고 퇴장(退藏)할 뜻 굳혔다. 속 깊이 국은(國恩)에 부끄러워 했고, 진실로 성인의 말씀이 두려워 높고 높은 산이 있고 졸졸 흐르는 물 있는 데서 초복(初服:벼슬하기 전의 한가한 생활)으로 돌아가 한가히 즐겨 뭇 비방을 생각해 보니, 고인이 이미 내 마음을 먼저 얻었거니, 어찌 오는 세상에서 오늘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리. 근심 속에도 낙(樂)이 있고 즐거움 속에 근심이 있다. 조화(造化)를 따라 사라짐(盡)이여, 다시 무엇을 구하리오> 그의 아들 준(寯)은 아버지의 유언으 그가 한양에 우거하고 있을 때 이웃 집 밤나무 두어 가지가 담너머로 뻗어 나와 밤이 익어 뜰에 떨어지면 아이들이 주워 먹을까 염려하여 담밖으로 던져 버로 예장(禮장)을 사양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하고 1품(一品)의 예(禮)로써 장사지냈다. 퇴계 황의 손자 안도(安道:준의 맏아들)는 선조(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목청전 참봉(穆淸殿參奉)에 천거되어 직장(直長)에 이르렀고, 그의 아우 영도(詠道)는 군기시 부정(軍器시副正)과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거쳐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역임한 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낙향했던 돈(潡 : 참봉 원회의 아들)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직강(直講)에 등용되어 부모 봉양을 위해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자청하여 효행(孝行)을 떨쳤으며, 지형(之馨)의 아들 명익(溟翼)은 숙종(肅宗)때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나가 세곡(稅穀)의 수송을 쉽게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구한말에 와서는 퇴계 황(滉)의 10대손 휘령(彙寧)이 철종(哲宗) 때 동부승지(同副承旨)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부총관(副摠管)에 올랐으며, 가학(家學)을 계송하여 성리학(性理學)에 전심했고「십도고증(十圖考證)」과 국문 시가(詩歌)인 「방경무도사(邦慶舞蹈辭)」를 지어 학문의 가통(家統)을 이었다. 고종(高宗)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했던 만도(晩도)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안동(安東)으로 내겨가 의병(義兵)을 모집하여(日本)의 침략에 항거했으며,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다, 한일합방의 비분으로 자결하여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한일합방을 개탄하여 단식 끝에 순사한 중언(中彦)과 애국지사(愛國志士) 명우(命羽)가 유명했으며, 육사(陸史) 활(㓉)은 북경대학(北京大學)을 졸업하고 사회운동가로 활약하다가 1937년 서울에서 신석초(申石艸)․윤곤강(尹崑崗)등과 함께 동인지인「자오선(子午線)」을 발행하면서 <청포도(靑葡萄)> <교목(喬木)>등 목가풍(牧歌風)의 시(詩)를 발표했다. 특히 그의 시(詩)는 당시 피압박 민족으로서의 정치적 울분을 상징주의의 수법으로 나타내어 민족정신운동에 공헌했으며, 그의 작품이 담긴 「육사시집(陸史詩集)」을 발간하여 학문(學問)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인 진성 이씨의 가맥(家脈)을 이었다. 1985년 경제기회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성․진보 이씨(眞城․眞寶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4,428가구, 58,877명 [출처] 각성씨의 시조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