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의 쌍방울은 참으로 비참한 팀이었다.
선수들과 코칭스탭은 물론 프런트직원까지 모두 월급도 받지 못하는 상태였고
모기업인 쌍방울은 부도가 나서 단한푼의 재정지원도 불가능했다.
98시즌후 간판스타들을 판 돈과 KBO로부터 배분되는 관중수입으로 근근히 운영비를 메꿔나가고 있었다.
2군도 아니고 프로야구 1군 선수들이었지만 원정에 나서면 그 지역 가장 싼 여인숙에 들어가 칼잠을 자야했고 선수단 지정 식당인 전주구장 근처 한 분식집에서 시켜먹을 수 있는 메뉴는 단 두가지,된장찌개백반과 김치찌개백반이었다.
그런데 단체계약을 하면서 단가를 워낙 후려쳐서 분식집 주인은 선수들에게 추가 공기밥을 써비스로 주지 못했다.
쌍방울의 젊은 운동선수들은 상대팀과 싸우기 전에 늘 배고픔과 싸워야했다.
그 분식집 주인의 말을 들어봤다.
98년부터 선수단은 그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자기도 전주사람이고 야구장 앞에서 식당을 한다.팬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단가로 식사를 제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세한 분식집 주인으로서는 더이상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할인을 해줬던 것이다.
뭐 하여튼 이 팀의 궁상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김현욱,박경완,김기태,조규제...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96,97년 시즌 2위와 3위로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기라성 같은 간판선수들은 이미 팔려나갔다.
하지만 모기업의 재정지원이 끊긴 상태에서 그 돈만으로는 1년 운영비를 대기에도 모자란 형편이었다.
선수들은 물론 김성근 감독 역시 월급 형태로 나눠받는 연봉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때 김성근 감독이 주장 김성래를 불러 들였다.
이진영 때문이었다.
이진영은 군산상고를 졸업한 강속구를 자랑하는 파워피처이자 호타준족의 타자로서 초고교급 선수였다.
김감독은 그를 쌍방울의 신인 1차 지명으로 선발해두었었다.
선수를 지명하는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다만 입단을 시키려면 계약을 해야하고 계약을 하려면 계약금이 나가야한다.
그런데 선수단에는 돈이 없다.
그래서 그 해 쌍방울의 지명을 받은 야구선수들은 프로팀의 지명만 받고 결국 프로선수가 되지 못하는 비운을 맛봤다.
그해 13명의 쌍방울 지명선수중 프로의 옷을 입은 선수는 단 세명,한 명은 이진영이고 나머지는
지금 SK의 주축투수중 한명인 이영욱(2라운드 8차)과 작년에 기아로 트레이드된 내야수 김형철(2라운드 4차),이렇게 단 세명뿐이다.
그나마 지명후 바로 입단이 된 선수는 이진영 단 한명이었고 이영욱과 김형철은 대학에서 운동을 계속하여 훗날 SK에 입단할 수 있었다.
프로구단의 신인 드래프트라는 게 참 고약하다.
한번 지명을 하게 되면 그 지명권은 영원불멸이다.
구단이 막상 계약을 하러 오지 않으면 그 선수는 사실상 은퇴하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그렇게 1999년도 쌍방울의 지명을 받은 신인선수들은 비운의 은퇴를 당했다.
이진영도 하마트면 그 때 프로 유니폼 한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은퇴할 뻔 했다.
김성근 감독이 김성래 주장을 불러서 말했다.
"이진영은 팀의 미래고 한국 야구의 희망이다.지금 어렵지만 그렇다고 미래를 포기하지 말자"
김성래는 후배 선수들을 모아놓고 그렇게 해서,이진영이라는 거물신인의 계약금으로는 턱없이 저렴하지만,1억원의 입단 계약금을 갹출하기로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내었다.
1999년 이진영은 외야수와 1루수로 비교적 많은 출장을 햇다.
그 해 김성근 감독은 당시의 전력으로 팀이 플옵진출을 노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팀의 리빌딩을 염두에 둔 운영을 했다.
리빌딩이라면 아무래도 신인선수들을 키워야 하는데 그 해 신인은 이진영이 유일했다.
물론 입단 첫해 별다른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시즌 내내 이진영에게는 기회를 줬다.
이진영이 폭발하기 시작한 건 입단 3년차인 SK때부터다.
그후 2006년 국민우익수의 칭호를 받게 되는 WBC에서의 그림같은 수비로 국민을 열광시키는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당시 이진영의 호수비가 없었다면 일본을 상대로 거둔 두번의 승리는 내용상 모두 불가능했던 것들이었다.
그가 우익수로서 선보이는 레이저빔 송구는 강속구를 자랑하는 투수출신이었던데 힘입은 것이다.
그리고 2008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데도 혁혁한 공헌을 하게된다.
그렇게 돌이켜보며 이진영의 프로데뷔가 없었다면 하는 가정을 해보면 참 아찔하다.
팀은 있지만 구단의 주인은 없는 상태에서 감독과 선수들이 자체적인 결정으로 불러들인 신인....
천재일우의 프로데뷔로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스타가 된 이진영의 얘기였다.
이러한 연고로 인해 김성근감독과 이진영,둘간의 사제의 정은 짐작하기 힘들 미만큼 깊다.
이진영은 "입단 과정을 알고 있었기에 지나친 부담감이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그것을 2년이 지난뒤에야 극복할 수 있었다"라고 자신의 신인 시절을 회고한다.
그런 그가 김성근감독이 이끄는 SK를 떠났다.
입단 당시에는 팔개구단중 최약체의 팀이었지만 지금은 어느 팀도 넘보기 힘든 초강팀이 된 이상 떠나도 마음은 홀가분했을 것이다.
김성근 감독이 남아 달라고 한마디만 던졌다면 이진영은 팀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린데 김성근 감독은 이진영을 잡지 않았다.
아무리 초강팀 SK라지만 이진영은 팀의 절대 필요전력이다.
하지만 그는 아끼는 제자가 좀더 좋은 대우를 받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진영의 FA로 김성근 감독은 또 다른 애제자 한명에게 회생의 기회를 줄 수 있게 되었다.
엘지에서 은퇴의 기로에 내몰리던 이승호다.
지금은 든든한 모기업이 뒷받침하는 팀이지만 김성근감독의 SK와이번스가 지금의 초강팀이 된 바탕에는 김성근 감독 특유의 야구,헝그리정신의 야구가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