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갯가 스케치
십이월이 중순에 접어든 둘째 월요일이다. 새벽녘 잠을 깨 약차를 달이면서 올가을 김춘복이 펴낸 ‘운심이’를 읽었다. 조선 시대 밀양 검기 운심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이었다. 작가는 미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창작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운심은 밀양부에 소속된 관기로 나중 한양으로 올라가 궁궐 연회에서 칼춤을 추었다는 희미해진 사료들을 발굴 고증해 소설로 그렸다.
날이 밝아온 아침에 갯가로 산책을 나서려고 빈 배낭을 둘러메고 현관을 나섰다. 남들은 직장의 일터로 가는 시간에 나는 자연학교 학생의 등굣길이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외동반림로의 반송 소하천을 따라 걸으니 늦게 물들었던 메타스퀘이아의 낙엽이 길바닥에 흩어졌다. 갈색의 메타스궤이아 단풍은 한꺼번 떨어지지 않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시나브로 졌다.
원이대로를 건너 창원수영장 앞에서 진해 용원으로 가는 757번 좌석버스를 타려니 조금 전 출발해 장천동으로 가는 151번을 탔다. 경화시장을 지날 때 내려 웅동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 대발령을 넘은 K조선소 입구에서 내렸다. 한때 지역 경제를 휘청하게 했던 조선업은 불황에서 기지개를 켜 회사는 이름까지 바꾸어 새롭게 출범해 용접 불꽃이 튀고 쇳덩이 마찰음이 들려왔다.
조선소 앞 거리에서 죽곡동으로 가니 시골 동네는 자동찻길과 공장으로 에워싸여 고립된 섬과 같았다. 조선소 부품 공장을 지난 작은 포구는 명동이었다. 찻길과 접속된 마을 어귀에는 성주 이씨 문중 회관이 덩그렇게 있어 시골다운 보수적 느낌이 들었다. 마을 뒤에서 골목 안길을 거쳐 방파제로 나가니 음지도와 연결된 창원시 랜드마크의 하나인 솔라타워와 짚라인이 우뚝했다.
포구에는 조업을 나가지 않은 여러 척 어선이 닻을 내려 있었다. 방파제에 한 사내가 보여 다가가니 떡밥을 던져가며 물고기를 유인해 뜰채로 뜨고 있었다. 최근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던 마산 연근해 곳곳 포구에서 산소 부족으로 죽어갔던 정어리 치어였다. 사내의 손에서 뜰채로 갓 건져진 새끼 정어리는 아가미를 헐떡이며 꼬리를 치는 은빛 비늘이 번쩍여 선도가 좋은 활어였다.
명동 포구는 물때에 따라 바닷길이 열리는 동섬이 가까웠으나 밀물이 다가온 때라 그곳으로 건너갈 수 없었다. 도선 선착장에는 우도와 소쿠리섬으로 운행하는 도선이 막 뜨려는 즈음이었다. 선착장 곁에는 마리나항만을 개발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요트 게류장은 완성되어 있고 연구나 상업 숙박 시설이 들어서는 듯했다. 해안을 돌아가니 대중가요 노랫말에 나온 삼포 포구였다.
삼포에서 멀지 않은 마천공단 곁의 영길만에는 이미자가 불렀던 ‘황포 돛대’ 노래비가 있었는데 웅동의 대장동 출신 이용일이 작사해 거기에 세워졌다. ‘삼포로 가는 길’의 노랫말은 이혜민이 지었다는데 그는 그곳과 아무 연고가 없는 이였다. 등산화 발바닥으로 노래비의 단추를 눌렀더니 ‘바람 부는 저 들길 끝에는 삼포로 가는 길 있겠지 …’로 시작되는 가요가 흘러나왔다.
해안로 보도를 따라 걸으니 제철을 맞은 애기동백꽃은 흔하게 봤다. 애기동백보다 꽃송이가 굵은 동백꽃은 아직 일렀는데 유독 한 그루가 선홍색 꽃을 피웠다. 신항만에서 시작된 연안 매립은 제덕만까지 이어져 지도를 바꾸어야 할 정도로 아주 광활해 골프장도 들어서고 있었다. 괴정마을을 지나다 한식 뷔페에 드니 아파트 건설 현장 함바식당처럼 인근 공사장 인부들이 북적였다.
제덕고개를 넘다가 길섶에 낡은 기왓장이 덮인 정려문이 있어 다가가 살펴봤다. 자물통이 채워져 내실의 목판에 새겨진 작은 글씨를 확인하지 못했으나 성주 이씨 며느리와 달성 서씨 지순의 효행을 기린 정려로 둘은 부부인 듯했다. 내가 여러 군데 정려각을 살폈으나 부부의 효행을 함께 기린 정려문은 처음이었다. 효행의 구체적 내용을 우리말로 쉽게 풀어 안내했으면 좋을 듯했다. 22.12.12
첫댓글 갯가 그림을 보니
비리한 바닷가 냄새가 느껴지누나...
<삼포로 가는 길> 이야기가 그쪽이었구나.
귀한 정보로구먼
감사하이....^*^
진해 <삼포>는
황석영 소설 ‘삼포 가는 길’과 별개로 그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아닌,
그저 대중가요 작사자가 그곳 포구 이름을 빌린 정도로 보면 된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