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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우리의 사귐/요한 1서 1:1-10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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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상복목사
지난 주간에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복음주의 협의회 이사회를 다녀왔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오후에 뉴델리 대학을 방문해서 우리 교회 청년들이 개척한 캠퍼스 사역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역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저는 그들의 사역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감격스럽고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세 가정, 미혼자 셋, 그리고 아기가 2명 반(임신중), 모두 합해서 우리 교회 식구 11명반이 있는데 모두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인도말도 잘 하더군요. 미국인이 하는 영어는 잘 못 알아들어도 인도인이 하는 영어는 다 알아듣는대요. 인도 영어를 배운 겁니다. 마치 서양 사람이 경상도에서 살아서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것처럼 그들은 인도 악센트로 영어를 참 잘 하더군요. 인도 영얼 찬양을 인도하는데 그렇게 잘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인도 대학생들이 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어요. 두 시간 정도 찬양과 예배를 하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지고 하나님을 손에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갖더군요. 한국의 부모님들이 자녀를 잘 길러 주님께 바쳐서 그 젊은이들이 인도 학생들을 주님께 인도하고 신앙훈련을 시키는 모습을 보고 참 고맙고 기뻤습니다.
한국의 부모님들이 다른 것은 몰라도 자녀들에게 공부는 열심히 시켰잖아요. 그 기초 때문에 영어를 금방 배우고 인도말도 빨리 습득하고 다른 나라 사람들을 잘 도울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국 아이들을 공부 많이 시키신 것 같습니다. 그 젊은이들 중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고등학교 혹은 대학을 마치고 그렇게 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들 얼마나 영어를 잘하는지요. 제가 그 회의를 마치고 점심식사에 우리 젊은이들을 초대해서 아시아의 기독교 리더들에게 소개하고 나서 어떻게 하나 보니까 스스럼없이 아시아의 지도자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무슨 사역을 하는지 설명들을 하는데 제가 감탄했어요. 지난 번 나이지리아에 갔을 때도 4-50대의 한국 선교사님들이 영어로 신학교 교수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이 나이를 불문하고 다른 나라에 가서 복음 사역을 충분히 해내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여러분! 자녀들 키우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자녀들이 세계 어디에 갖다 놓아도 국제적으로 충분히 공헌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교회는 사귐의 공동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귀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제가 어디에 근거합니까? 각자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난 체험에 근거합니다. 사실상 여러분과 저는 이렇게 꾸준하게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는 공통점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것,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있다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 경험이 여러분과 제가 영원히 사귈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종종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향이 다르고, 부모가 다르고, 배경이 다르고, 학교가 다르고, 기질도, 습관도, 가치관도 다릅니다. 여러분과 제가 같이 살 수 있는 공통점이 우리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외에는 별로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종종 교회에서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말할까?’라고 느낀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한 번은 결혼한 지 두세 달 밖에 안 된 신혼부부가 저를 찾아 와서 죽는 소리를 합니다. 한참 재미있을 때인데 못살겠다고 합니다. 서로 너무 다르고 자기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한 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을 다 듣고 제가 그랬습니다. “다르다는 것이 정상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서로 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10년 후에는 정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20년 후에는 확실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30년 후에는 이거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만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을 거예요.”
사실 우리가 결혼한 것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좋아합니까? 나도 나를 좋아할까 말까 한참 고민하는데 나와 똑같은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겠어요? 끌리지가 않아요. 결혼하기 전에 제 아내가 제게 자기 친구를 소개시켜준 적이 있어요.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자기하고 제일 친한 친구인데 사귀어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만나보니까 절대로 안 되겠더군요. 저와 너무 똑같아요. 제 아내는 자기 친구와 제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니까 둘이 만나면 잘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나 혼자도 지금 감당하기 어려운데 비슷한 사람 둘이 만나면 어떻게 되겠어요? 여러분이 아내나 남편을 좋아했습니까? 내게 없는 것이 그 사람에게 있고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이 내게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끌린 것입니다.
저도 제 아내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다른 것이 없었어요. 저와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저를 잘 아는데 그 여자는 나와 너무 달라요. 나에게 없는 것이 있으니까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것이 좋아서 결혼을 했는데 결혼해서 보니까 그 차이가 점점 늘어나더군요. 10년 20년이 지나니까 ‘이 여자는 정말 나하고 다르구나’라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냥 두기로 작정했어요. 바꾸려고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결혼해서 낳아놓은 자식들도 왜 그렇게 다른지... 저도 아이가 셋인데 하나도 저를 닮은 아이가 없어요. 큰 아이가 저를 좀 닮았는데 손이 닮았을 뿐이에요. 우리는 다 다른 사람들이에요.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매주 모여서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제가 예수를 만났고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만져 보았어요. 영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다 보니 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혹시 여러분과 전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놀라지 마십시오. 정상적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말도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다 다르면 그저 다른 줄로 아십시오.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입니다. 한 번 저를 따라해 주십시오. “다르면 다른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보통 나와 다르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함께 사귀고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공통점이 생겨서 교회가 된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봅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예수님에 관한 말씀인데 예수님은 태초부터, 영원 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을 로고스(logos) 즉 말씀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즉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경험을 우리는 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예수에 대한 그림을 보고, 예수에 대한 설명을 듣고,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나 마음속에 모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때문에 함께 살며 서로 돌보고 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4월 말이 되면 홍콩에서 ‘Global Christian Forum'이라는 회의가 열립니다. 이 회의에는 카톨릭교회, 그리스정교회, WCC, 그리고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합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 네 그룹은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실상 교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임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힌두교 국가든, 불교 국가든, 모슬렘 국가든, 기본적으로 이 네 그룹의 교회가 있는데 점점 핍박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국가들이 법을 만들어 기독교를 탄압합니다. 인도는 절대다수인 힌두교가 기독교를 핍박하고 전도를 금하는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스리랑카는 이미 입법화했지요. 모슬렘국가는 말할 것도 없지요. 그래서 지난해에만 20여개의 교회에 불을 질렀고, 목사님들을 죽이고 감옥에 넣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카톨릭이든, 그리스정교이든, 개신교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네 그룹이 구체적인 신앙방법에 차이가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으로 대처해서 신앙의 자유를 지키자는 것입니다. 작년에 모여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이야기를 사흘 동안 나누었습니다. 신학에서는 갈등이 생겼지만 예수에 오니까 하나가 되더군요.
예수님은 만유를 통일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유대인과 헬라인,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가 차별 없이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교회 공동체에서 사귈 때 상대방의 성품과 자질과 가치관을 보지 마시고 여러분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제가 예수께 와서 여러분을 만났고 여러분이 예수께 와서 서로를 만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영원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예수님 중심적 교제에 대한 분명한 전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이에 다른 점들을 발견할 때 너무 개의치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을 여러분이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한 자를 네가 어찌하여 멸시하느냐?”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좋아하셔서 그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신 아주 존귀한 존재인데 말입니다. 내게는 작아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소중한 사람을 여러분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귐에는 우리들 간의 사귐, 우리와 하나님 간의 사귐, 우리와 예수님 간의 사귐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 하였습니다. 즉, 예수를 만난 경험을 한 성도들 간에 반드시 사귐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가족이니까 사귐은 당연한 것이지요. 가족을 보면 서로 다르지요. 생각도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버리지는 않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용납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공통점이 있으므로 서로 사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사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하고 찬양하며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주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있습니다. 우리들끼리의 사귐은 어디에 근거합니까? 하나님과의 사귐, 예수님과의 사귐에 근거합니다.
‘행복한 부부생활 가꾸기’라는 책에 보니 삼각형 그림이 있더군요. 아래 왼쪽은 남편이요 오른쪽은 아내이고 위쪽은 하나님이지요. 아내와 남편이 가까워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로 가야지요. 각자가 하나님께 가까워질수록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질수록 하나님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부들을 많이 만나 대화하며 관찰합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경건의 시간을 가진 때가 언제입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두 달 전인데요”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멀어진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으니 하나님과 친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지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빛 안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빛 안에 거하면 우리의 사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멀어지면 분명히 우리끼리도 멀어집니다. 종종 저는 이런 제안을 합니다. “아내나 남편은 그냥 두고 앞으로 한 달 동안 매일 시간을 내어 성경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나 자신을 살펴서 나 자신을 정결케 하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것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십시다.” 제 말대로 하는 분들은 두 주가 안 되어 부부관계가 좋아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까, 예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까, 성령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니까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나 자신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변해 있습니다. 서로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달라진 것입니다. 나 자신이 성삼위 하나님과 가깝게 사귀니까 자연히 우리들 사이도 가까워집니다.
집안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면 대개 우리는 식구들을 비판하고 야단칩니다. 한 두 번은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우선적으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중단하시고 조용히 앉아서 자신을 살펴보세요. 왜?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끊어놓기 때문입니다. 빛 안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어두움이 생겼다는 것은 이미 빛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빛을 멀리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졌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친하다고 하면서 어두움 가운데 계속 사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하면 마음이 어두워지거나 분노, 질투, 걱정이 생길 수 없습니다. 자신을 살펴서 만약 그런 어둠이 있다면 7절을 보세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이신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면 우리 속의 먼지가 보입니다. 거울인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추면 어디가 검은지 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9절). 죄 사함의 은혜를 체험하고 확신해야 먼저 하나님과 친해지고, 가족을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사이가 멀어졌다고 느껴진다면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돌이켜서 ‘내가 어디서 하나님과 멀어졌나?’ 살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여 죄 사함의 은총을 체험하시고 회복되어 여러분의 사귐이 강화되길 바랍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4절에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밝은 빛 가운데 살면 우리의 삶이 즐겁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인생을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지금 삶의 기쁨이 없다면 이번 주 동안, 아니 이 예배가 끝나기 전에라도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엇이 걸려있는지 보시고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시고 해결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즐거운 삶, 행복한 삶, 기쁨이 충만한 인생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