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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살해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한현수씨(35)는 지난해 6월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데 이어, 지난 2월5일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 누명을 완전히 벗었다. 그는 비록 몸의 자유는 찾았지만 정신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다. 극심한 분노와 불안, 대인기피증 때문에 석방된 지 6개월이 지나도록 혼자서는 바깥 출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법적으로는 무죄이되 그를 둘러싼 현실은 좀처럼 무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탓이다. 아직도 동네 사람들은 한씨만 보면 ‘살인범이 왜 돌아다니지?’ 하는 의아한 눈초리를 보내며 피한다. 2년 전 사건 당시 실적에 눈이 어두운 경찰이 기자들을 불러 그가 보험금을 탐내 아내를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브리핑해 졸지에 흉악범으로 널리 보도된 탓이다. 경찰 발표를 그대로 실었던 어떤 언론도 그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는 뉴스는 싣지 않았다. 노모와 아내 그리고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단란하게 살아가던 한씨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난 것은 2000년 8월11일. 인천에서 냉동탑차를 운행하며 우유 배달업을 하던 한씨는 그 날 밤 10시께 아내와 함께 자신의 트럭을 타고 형님 집을 방문하기 위해 경인고속도로를 시속 70km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어를 바꾸는 순간 차가 덜커덩거리더니 조수석 차문이 열리면서 졸고 있던 아내가 차 밖으로 떨어졌다. 당시 한씨는 차를 세우고 쓰러진 아내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아내는 이미 머리에서 피를 흘린 채 의식불명 상태였다. 놀란 한씨는 119에 구조 요청을 한 뒤 차례로 집과 자동차보험회사 그리고 우유 배달회사에 사고 소식을 전했다. 뒤이어 고속도로 순찰대와 구급차가 나타나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한씨를 조사했다. 그런데 경찰 조사 과정에서 교통 사고가 살인 사건으로 돌변했다. 사망자에 대한 부검 소견에 교통 사고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후두부 골절이 일어났다는 표현이 있는 것에 주목해 수사 경찰이 한씨를 아내 살인범으로 결론짓고 막무가내로 자백을 강요한 것이다. 결국 한씨를 살인범으로 체포한 경찰은 며칠간 조사를 벌인 뒤 뚜렷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기자회견을 열어 한씨가 보험금을 타내려고 아내를 살해했다고 공개했다. 범인으로 꿰맞추느라 경찰은 단란했던 한씨의 가정을 졸지에 가정 불화가 잦고 생활고에 찌든 가정으로 둔갑시켰다. 공소장에 한씨가 옆자리에서 조는 아내를 보고 순간적으로 밀어뜨려 살해하면 보험금을 탈 수 있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살해 동기를 기재했다. 물론 이 모든 내용은 전적으로 수사관들의 추론일 뿐이었다. 또 한씨가 쓰러진 아내를 일으켜 세우려던 상황은 길바닥에 머리를 내리쳐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으로 둔갑했다. 이 역시 부검 감정서에 있던 ‘교통 사고시 흔하지 않은 상처’라는 표현을 토대로 수사관들이 쓴 ‘소설’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씨는 시종 아내를 살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지만 소용 없었다. 경찰은 한씨의 형제까지 공범으로 의심하면서 자백하면 형량을 낮게 받도록 돕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아내를 잃은 한씨는 이를 슬퍼할 겨를도 없이 결국 살인범으로 몰려 기소되었고, 1심 재판부는 수사기관이 추론한 간접 정황 증거를 받아들여 한씨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다. 억울한 누명에 무기 징역까지 선고받은 한씨는 교도소에서 분노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70kg이 넘던 그의 몸무게는 50kg 아래로 떨어졌고, 당뇨까지 겹쳤다. 한씨는 무기 징역을 받고 나서 억울하고 절박했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재판 진행 초기에는 당연히 무죄로 나갈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자 나는 진실이 질 수도 있다는 현실을 알고서 무력감과 공포에 떨었다. 2심과 3심이 남아 있다지만 사법 절차 전체가 다 마찬가지일 거라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미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가정은 풍비박산…“미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
한씨는 다행히 지난해 7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 및 1심 재판부가 의심을 할 만한 합리적인 증거도 없이 편향적 추론에 근거해 피고를 유죄로 처벌한 위법을 저질렀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한씨 가족이 가입한 보험은 자동차보험·교육보험·암보험 등으로 지급액이 최대 2천만원 정도에 불과해 그것을 받으려고 살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같은 2심 판결 요지를 대법원도 그대로 받아들여 한씨는 지난 2월5일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판결 후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했던 재판장은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판사는 귀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나는 증거법에 따라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같은 맥락에서 항소심과 대법원이 무죄로 판단했다면 이의를 달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한씨를 처음 살인 혐의로 기소했던 인천 서부경찰서 수사관계자는 “교통 사고와 살인은 종이 한장 차이다”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이어 똑같은 사고가 다시 일어나서 국과수 부검 결과에 의심이 있다면 또다시 운전자를 살인범으로 기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무죄 확정 판결 후 한씨는 취재진과 함께 네 살 난 아들을 안고 자기를 살인자로 기소한 인천 서부경찰서를 찾았다. 기소 당시 직접 한씨에게 무죄 판결이 나면 경찰복을 벗겠다고 장담했다던 수사 경찰관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고 발뺌했다. 그동안 가정이 파괴되고 모든 재산을 구명 비용으로 날린 한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 보상을 청구할 계획이다. 이처럼 수사기관의 잘못된 수사가 허술한 법의학 검시 제도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사람은 비단 한씨만이 아니다. 강원도 원주에서는 최근 중학생 3명이 길가는 행인을 살해한 범인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 사건 역시 수사기관의 무리한 강압 수사와 증거 없이 꿰맞추기식 범인몰이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46쪽 딸린 기사 참조). 사형과 무죄 선고 사이에서 7년째 진실을 다투는 사례도 있다. 1995년 여름 서울 응암동에서 발생한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렸던 남편 이도행씨(41)가 그 주인공이다. 본인의 외과 의원 개업식날 출근했다가 치과의사이던 아내와 한 살배기 딸이 집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이씨는 은평경찰서에서 범인으로 지목되어 살인 및 방화죄로 구속되었다. 아내 살인범으로 몰린 의사 “차라리 죽여 달라”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여진 것은 법의학자들이 감정한 사망 추정 시간이었다. 법의학자들은 검시를 통해 남편 이씨가 출근했던 아침 7시 이전에 두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감정했다. 이에 따라 1심 재판부는 1996년 2월 이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심 사형 선고 후 이씨 가족은 천주교인권위의 문을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했고, 인권위원장인 김형태 변호사가 변론을 맡았다. 2심 변호인단은 국내 법의학자들이 추정한 화재 발견 및 사망 시각이 불확실하다는 점을 증명해 1996년 6월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검찰은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고, 1998년 11월 대법원은 ‘간접 증거라도 종합적인 증명력을 고려할 때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있고, 사건 심리도 불충분하다’는 취지로 2심의 무죄 판결을 파기하고 다시 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다시 열린 고법 재판에서 이씨의 변호인단은 세계적 법의학자 토머스 크롬페처 교수를 불러들여 사망 시각이 이씨가 출근한 뒤인 아침 7시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증언을 이끌어냈다. 또 화재 재현 실험을 통해 과학적 검증을 거쳐 2001년 파기 환송심에서 다시 무죄를 받았다. 현재 이씨 사건은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길고도 지루한 7년여 재판을 끌어온 이도행씨가 취재진을 만나 내뱉은 첫마디는 “너무 지치고 정신이 황폐해져 ‘차라리 나를 데려다 죽여주시오’ 하는 자포자기 심정이 든다”는 것이었다. 종교계와 법조계 등 그동안 그를 도운 이들은 대체적으로 그가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주변에서 다시 외과의사로 일하며 그동안 발달한 의료 기술을 따라잡으라고 충고하기도 하고 병원에 투자할 테니 개업하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다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자포자기 심정이 된다고 한다. 이씨는 대인공포증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전국을 유랑하며 지내고 있다는 그는 “최종 판결이 무죄로 나와도 진짜 범인이 잡힐 때까지는 사람을 피하며 살게 될 것 같다”라고 말한다. 지난 7년간 자기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 사람들, 특히 국내 법의학자들에게 맺힌 한을 삭이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이씨는 요즘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3년 전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이도행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해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있다. 또 지난해 4월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혜화동 성당에서 이도행 무죄판결 감사 미사를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 그는 김추기경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사형폐지운동에 앞장서기도 한다. 또 그동안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행사에도 많이 참석했다. 김 훈 중위 사건 재판과 군대 의문사 가족들의 시위를 근처에서 지켜보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과 나의 공통점은 세상을 향한 한이 너무 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분들도 나처럼 끝까지 싸워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다짐하다가도 여기서 그냥 지쳐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