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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장 결말(結末)
"흑흑......."
여인의 흐느낌소리가 진일문의 의식 속으로 깊이 스며 들었다.
그로 인해 혼몽에서 깨어난 그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풀어진 솜처럼 전신이 나른했으나 기분만은 상쾌했다.
낮게 흐느끼는소리는 좀 더 가까이에서 들렸다.
진일문은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 장식도 없이 밋밋한 사각의 천정이었다.
'여기는?'
열심히 기억을더듬어 보았으나 이 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 곳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어나기 위해몸을 움직여 보던 진일문은 깜짝 놀랐다.
곁에서 물컹 하는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엎드려 오열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기다란 머리칼이 매끄러운 등 위로 반쯤 덮혀 있었으나 그 아래로는 놀랍게도 맨 몸이었다.
'이럴 수가!'
진일문은 마치둔중한 물체에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한 듯 심한 충격을 받았다.
비로소 정신을 잃기 전의 정황이 어렴풋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혹시?'
그는 우선 설미령에 의해 환락산을 복용한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내가 설부인을.......'
그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허무영과 마찬가지로 그도 성낙수 같은 부류의 인간을 혐오한다.
그런데 자신도 똑같은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다고 생각되자 그는 거의 미칠 듯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 때였다.
그의 기색을 알아 차렸는지 여인이 오열을 뚝 멈추고는 몸을 옹송거렸다.
겁이라도 집어 먹은 것일까?
여인의 등에서 한 차례 미미한 떨림이 일었다.
진일문의 눈에그런 장면들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설부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예감이었다.
설미령같으면 당연히 그를 성낙수로 알고 있을 것이되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일 리 없었다.
진일문은 묘한안도감을 가지며 비로소 여인의 벗은 몸을 자세히 바라 보았다.
곧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가녀린 처녀의 지체가 그를 격동으로 몰고 갔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나를 위한 희생양인가?'
진일문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여인을 불러 보았다.
"낭자."
여인은 움찔하더니 다시 울음보를 터뜨렸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 어깻죽지를 드러냈다.
새하얗게 빛나는 동그란 그녀의 어깨가 서럽게 들먹이고 있었다.
진일문은 난감하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낭자, 정녕 죽을 죄를 지었소. 비록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낭자에게 차마 못할 짓을 했으니......."
문득 그는 침상 위에 선명하게 피어 있는 핏빛 앵화(櫻花)를 발견했다.
그것은 또 한 번 그를 충격으로 몰고 갔다.
'이것은 처녀의 상징......!'
진일문은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목놓아 우는 여인을 향해 더듬거리며 말을 건넸다.
"낭자, 너무 슬퍼하지 마시오. 어떤 식으로라도 보응을......."
"닥쳐요!"
눈물에 젖은 여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들려졌다.
"누가 보응을 바란다고 했어요?"
그 순간, 진일문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사낭자......!"
여인은 물론 사영화였다.
하지만 그로서는 정녕 꿈에도 생각지 못한 대상이었다.
"설마 당신일 줄이야......."
진일문은 경악으로 인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편. 대해약포의 주인이자 의원인 장만생은 불안한듯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사실 그도 나름대로 일세를 풍미하던 기인으로써 평소 남의 말을 엿듣는 취미 따위는 일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어쩔 수가 없었다.
중매를 해 놓았으니 뺨 석 대를 맞지 않으려면 필히 결과가 좋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영화는 지금극락고의 제어에서 완전히 놓여난 상태였다.
장만생의 약물 비법이 주효해 대부분을 체외로 배출 했으며 그 잔여량은 정사를 통해 체내의 열기로 태워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그녀가 진일문을 맞아들인 것은 여러 모로 복연(福緣)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장만생의 생각으로는..........
그런데 그녀가울면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참! 여인들이란 하나 같이 어리석다더니.......'
장만생은 내심혀를 끌끌 찼다.
그도 사영화의 미모나 신분을 감안해 어느 정도 이해는 하고 있었으나 진일문을 몰아 부치는 그녀가 영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러기를 한참여............
방 안에서 일던 소요는 의외의 국면을 치달렸다.
사영화의 앙칼진 음성이 어느덧 야릇한 비음으로 화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일문의 거친 숨소리도 거기에 일조하고 있었다.
장만생은 무엇을 연상했는지 얼굴을 은은하게 붉혔다.
남과 여, 말을 대신한 육체의 언어를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일까?
그제서야 그는걱정에서 놓여나 돌아섰다.
"허허... 젊음이란 좋은 거야. 나도 한 때는 그랬었으니까."
장만생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뺨을 맞는 것이 아니라 술 석 잔을 대접받을 수 있으리라고.
중추절(中秋節)은 중원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이를 기해 황룡사가보의 정문에는 오색등롱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은단지 외부인으로 하여금 이상한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편일 따름이었다.
사실상 그들로서는 명절이라 해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보내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겁기 그지없었다.
총관 황보인은오늘따라 유난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당가, 팽가, 그리고 악가의 고수들과 잇달아 접촉하고 있었는데, 기이한 것은 그의 행동이 극히 은밀하다는 점이었다.
총관이라는 직책상 황보인에게는 그들을 접대해야 하는 임무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오늘 삼가의 고수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만나고 있는 것은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진일문.
그는 지금 자양각에서 허무영과 함께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성낙수의 모습으로써 온갖 구실을 다 붙여 허무영을 곁에 잡아 두고 있는 것이었다.
"소제는 늘 금검령주를 존경해 왔소이다."
허무영은 무감동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에 반해 진일문은 만면에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실 진즉부터 형님이라 부르고 싶었지요."
그 말에 허무영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성낙수의 기질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말까지 듣게 되니 비위가 상했던 것이다.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따라서 동검령주가 이러는 데는 뭔가 저의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영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동검, 좀 더 솔직해지게.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진일문은 눈을크게 뜨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섭섭하오이다. 소제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소."
허무영의 권태로운 얼굴에 한 가닥 비웃음이 스쳤다.
"나는 감언(甘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네."
진일문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소제는 불순한 뜻이라고는 조금도 없소이다. 형님께서는 뭔가 오해를 하셨소."
진일문의 태도는 누가 보아도 실로 그럴싸 했다.
생전의 성낙수가 그렇게 철저히 내심을 속여왔듯.
허무영은 고소를 지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같은 시각.
내원에서는 두여인이 만나고 있었다.
"어머니......."
"화아야!"
설미령은 떨리는 손으로 사영화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반면에 모친의손에 얼굴을 내맡기고 있는 사영화의 심정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은 태산같이 많았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영화.
그녀는 진일문을 통해 모친과 성낙수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얼마나 충격을 입었는지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결해 버리겠노라며 혀를 깨물려 하기도 했고, 스스로 벽에 머리를 부딪쳐 실신하기도 했다.
한 쪽은 모친이고 다른 한 쪽은 남매나 다름없이 지내오던 사형이다.
그러니 그녀가 느낀 배신감이란 설사 눈앞에서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부친을잃은 마당에 그런 사실까지 접하게 되자 그녀는 잠시 동안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사영화가 곧 자신을 수습하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진일문으로 인해서였다.
애틋한 위로와 더불어 그는 황룡사가보에 대한 그녀의 의무감을 일깨워 놓은 것이었다.
모친을 바라보는 사영화의 눈이 몹시도 흔들렸다.
'지금은 오히려 어머니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그녀는 천천히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담(私談)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모든 일들을 지시한 인물도 역시 진일문이었다.
그가 황보인을 통해 알아 낸 사건의 전모는 이러했다.
천마신궁.
그들은 중원무림을 장악하기 위해 일차적으로 천하 제문파에 세간(世間)들을 심어 놓았다.
아울러 그들은 최근 들어 사대신가가 독립적인 성격을 띄게 되자 이 기회에 사가의 세력을 포섭해 전면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황보인으로부터 황룡사가보에서 비밀회합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극락자웅고를 풀어 각 가주들을 제압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바로 완벽한 꼭두각시였다.
이 일에는 황보인보다도 사실상 성낙수의 활약(?)이 더 컸다.
백의유검 성낙수.
황룡사가보의 대제자란 표면상의 신분일 뿐, 입문시부터 그는 천마신궁의 인물이었다.
최근까지 보주인 사해신검 사운악을 위시하여 보내의 인물들을 감쪽같이 속여 온 것이었다.
그 뒤에는 천마신궁의 금검령주, 즉 허무영이 있었다.
그는 천마신궁과 황룡사가보를 오가며 명령을 하달하는 한편 세간들의 모든 활동을 총관하고 있었다.
이들의 음모를분쇄하려는 진일문의 계획은 차곡차곡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결정적인 순간에 대세를 전복시키는 것뿐이었다.
진일문은 마치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그 일을 추진하고 있었다.
만일 일을 그르치게 되면 그의 신분상 구주동맹에까지 영향이 미쳐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역시 고독의 시술자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래야만 해고(解蠱)할 수가 있었으므로.
이와 더불어 허무영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던 진일문은 중대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 그를 제압해 천마신궁의 내막을 파헤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황보인으로 변신한 독고준, 그리고 사영화가 각각 사가의 인물들과 설미령을 만나 일을 꾸미는 동안 그는 그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허무형을 잡아 두고 있었다.
만월(滿月)이 솟아 올랐다.
중추의 만월은마치 대지를 포용하듯 어두운 밤하늘의 한 가운데에서 부드러운 빛을 뿌려냈다.
황룡전(黃龍殿).
이 곳에는 지금 수십 명의 군웅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사가(四家)의 절정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안색은 하나같이 침중했다.
간단한 연석(宴席)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술잔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모이도록 통지한 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을 청한 인물은 다름이 아니라 보주인 사해신검 사운악의 미망인(未亡人) 설미령이었다.
그래서일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는 웬지 비감이 감돌고 있었다.
마침내 내전으로부터 검은 상복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반쯤 가린 중년미부가 걸어 나왔다.
바로 설미령이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은 우선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에 대해 궁금함을 표했다.
설미령의 옆에는 중년의 한 여승이 시립해 있었다.
비취암주인 절정사태였다.
물론 냉혹한 성격을 지닌 이 여승의 얼굴은 습관인양 여전히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설미령은 좌중을 향해 공손히 절을 했다.
육감적인 그녀의 몸매도 검은 상복에 갇히자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원근 각처에서 찾아 주신 여러분들께 그 동안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망부(亡夫)에 대한 슬픔 탓일까? 그녀의 음성이 다소 떨려 나왔다.
그로 인해 좌중의 분위기는 더욱 음울하게 가라앉았다.
"이 기회를 빌어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사가보에서 벌어진 변사를 밝히기 위해 한결같이 헌신해 주셨으니 어찌 보답을 해야할지 난감할 지경입니다."
설미령은 계속하여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불행하게도 아직 이렇다할 원인 규명은 되지 않았으나 이 망녀(亡女)는 그 동안 보여주신 여러분들의 노고를 지켜보며 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애잔한음성은 중인들의 가슴을 축축하게 파고 들었다.
그들은 침음한 채 그녀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설미령은 다소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부군을 위시하여 여러 고인들이 타계하신지도 벌써 삼개월이 지났습니다. 이 상태로 가면 유체가 훼손될까 두렵습니다."
중인들은 저마다 탄식을 불어냈다.
그녀의 말인즉 시신의 부패를 뜻하는 것으로써 이는 그들도 걱정해 오던 바였다.
더위가 한 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낮으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최고급의 유향을 썼다 해도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망녀는 여러분들께서 동의하신다면 그만 장례를 치를까 합니다. 이 점에 대해 여러분들의 고견은 어떠신지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바로 무언의 승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미령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럼... 그리 알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녀는 총관인황보인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부인의 하명에 따르겠습니다."
황보인은 공손하게 대답을 한 뒤, 이내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일각쯤 흘렀을까?
대전의 앞마당으로 사가보의 식솔들이 무엇인가를 어깨에 메고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장례를 치르기 위한 관(棺)들이었다.
마당에는 곧 사십오 개의 관이 열을 지어 즐비하게 놓였다.
이렇게 되자 황룡전의 분위기는 더욱 더 침통해지고 말았다.
왜 안그렇겠는가?
중인들은 누구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망자(亡者)들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결국 설미령은더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그녀는 오열과더불어 이렇게 말했다.
"이 망녀, 고인들을 떠나 보내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과 이별주를 나누고 싶습니다."
설미령은 술잔에 스스로 술을 따랐다.
누구라서 이를거절할 수 있겠는가?
중인들도 모두 그녀와 같은 심정이 되어 말없이 자신들의 잔에 술을 따라 부었다.
술잔이 전부 채워지자 설미령은 잔을 치켜 들었다.
"그럼 망녀가 먼저......."
서서히 그녀의입술로 잔이 기울어졌다.
그 광경에 중인들도 하나 둘 술잔을 비워 갔다.
술은 마치 폐부를 도려낼듯 쓰디 썼다.
그것은 하례주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중인들이 모두 술잔을 내렸을 때였다.
"호호호홋......!"
느닷없이 설미령이 고개를 젖히더니 날카로운 교소를 발했다.
영문을 모르는 중인들은 그녀가 미쳤나 싶어 아연해 했다.
그 사이, 설미령은 소매 속에서 요령( 鈴)을 꺼내더니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딸랑딸랑......!
이른바 구혼령음(九魂靈音), 즉 지옥의 유부에서 혼을 부르는듯한 방울 소리가 중인들의 고막을 때렸다.
그 소리에 그들은 멍한 표정이었으나 곧 하나, 둘씩 연회석 위로 엎어졌다.
"이, 이럴 수가! 우리가 속았소이다."
"이건... 사기극이었......."
장내에는 바야흐로 엄청난 소요가 일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었다.
구혼(九魂)의 요령소리가 반복되는 가운데 그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무력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황룡전에는 괴괴한 침묵만이 남게 되었다.
그 속에서 마녀의 부르짖음과도 같은 설미령의 음성이 울렸다.
"호호호호... 어리석은 자들이여! 고수를 자처하는 너희들도 극락고에는 당해 내지 못하는구나. 호호호호......."
그녀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덕분에 면사 위로 드러난 그녀의 눈에 기광이 스치는 것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문득 장내를 울리는 또 하나의 음성이 있었다.
"좋아! 아주....... 나무관세음... 나무랄 데 없는 성공이야."
만족한 웃음과함께 불호를 외운 사람은 바로 절정사태였다.
설미령이 교소를 거두고 고개를 홱 돌렸다.
부릅떠진 그녀의 눈에는 회의와 불신이 교차 되고 있었다.
"사태께서 그럼, 고주(蠱主)였나요......?"
절정사태의 얼굴에 얼음장같이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는 더 이상 감출 필요도 없어졌군. 그래요, 설부인. 빈니는 고주이자 천마신궁의 삼봉령(三奉令) 중 하나인 구혼봉령주(九魂奉令主)이지."
"맙소사! 상상도 못했거늘......."
설미령은 두려운듯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흥! 머리가 잘 돌아갔으면 진즉에 알 수도 있었어. 하기는 애송이와 놀아 나느라 자신의 주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겠지."
절정사태는 냉소하며 소매 속에서 괴이한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구리로 만들어진 세 개의 핏빛 방울이었다.
"이것은 심고(心蠱)를 조종하는 영령이야."
딸랑딸랑......!
섬찍한 음향이허공에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 묵강노(默 奴)들이여."
펑!
퍼펑--!
폭음과 함께 네 개의 관뚜껑이 깨어지며 시신들이 벌떡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사운악, 당평, 팽전위, 악군협 등 중원사대신가의 가주들이었다.
절정사태는 설미령을 힐끗 돌아다보았다.
"뭐 해요? 설부인도 어서 나머지 극락노(極樂奴)들을 깨워요."
이를 악무는 설미령의 눈에 한 가닥 비애가 스쳤다.
상대는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내놓고 비난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설미령은 무슨생각을 했는지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리고는 절정사태의 지시대로 태연하게 예의 구혼령을 흔들었다.
"일어나라, 극락의 노예들이여......."
역시 관뚜껑들이 일제히 날아가며 앞서의 네 구를 제외한 사십일구의 시신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모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안색이 푸르스름한 청동빛이었으며 몸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시신이라고 감안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형상이었다.
절정사태가 다시 말했다.
"이젠 이 노예들을 신궁으로 데려가는 일만 남았다. 금검령주, 나서도 될 것 같네."
스슷--!
천정에서 하나의 묵영(墨影)이 떨어져 내렸다.
일신에 흑의를 걸친 인물, 그는 바로 허무영이었다.
절정사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금검, 자네의 공이 컸네. 그런데 동검은......?"
그때였다.
스팟--!
빨라도 이렇게빠를 수가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은 아마도 번개이리라.
하지만 허무영이 허리춤의 묵봉을 뻗어낸 속도는 적어도 그것을 백 개로 쪼갠 듯 했다.
절정사태가 놀라 몸을 날리려 했을 때는 이미 묵봉이 그녀의 목을 꿰뚫고 뒷덜미까지 관통된 후였다.
"크윽! 네, 네가......."
믿어지지 않는다는듯 절정사태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런 그녀의 얼굴.......
놀랍게도 그 얼굴은 더 이상 불문에 몸을 담은 비구니의 그것이 아니었다.
흡사 지옥의 야차가 현신한듯 끔찍하게 변해 버린 그 얼굴은 마(魔), 바로 그 자체였다.
딸랑!
절정사태의 손에서 영령이 떨어졌다.
불도를 닦는 대신 죄업(罪業)만을 일삼던 그녀의 육신은 무너지듯 뒤로 쓰러졌다.
츳!
뻗어나갈 때 만큼이나 빠르게 묵봉이 회수되었다.
허무영은 담담한 시선으로 묵봉을 타고 흘러 내리는 선혈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정녕 뜻밖이었소. 사태가 고주였을 줄은......."
문득 창백한 얼굴로 서 있던 설미령이 맥없이 푹 쓰러졌다.
"설부인!"
놀란 그에게 밖으로부터 의원 차림의 한 중년인이 걸어 들어오며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설부인은 고주가 죽음으로써 체내의 고독이 자멸하게 되자 탈진했을 뿐입니다."
허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저들은......?"
말하다 말고 그는 흠칫 굳어졌다.
사십오구의 시신들이 마치 썩은 짚단처럼 속속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중년인, 즉 장만생은 빙긋 웃었다.
"저들도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다 같이 앞으로 사십구일간만 자고 나면 모두 원상태로 회복될 것입니다."
허무영은 묵봉을 허리춤에 꽂으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흠! 이제 남은 것은 금검령주인 허무영을 문초하는 일 뿐이군. 정말 이번 음모는 가공스러운 것이었소."
어이없게도 허무영이 그 자신을 문초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알고 보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의 허무영은 진일문이기 때문이었다.
장만생은 곧 능숙한 솜씨로 삼가의 고수들에게 환약을 복용시켰다.
그들을 다 돌아 보고 난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혹여 이 분 고인들께서 실수라도 하실까 봐 소생이 미리 손을 썼습니다. 특수한 독(毒)을 술에 탔지요."
진일문은 고소를 지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바로 장약사의 묘계였구려. 정말 훌륭했소. 나조차 일이 잘못된 줄 알았으니 말이오."
장만생은 다시빙그레 웃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장만생은 평생에 걸쳐 약을 잘못 쓴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하하하......."
진일문은 비로소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웃어보는 것은 황룡사가보에 온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리라.
중추야의 만월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첫댓글 ``@-@``
즐독 하구갑니다
즐감요!!!!
반전~~~~~
즐감~~!!
즐감했습니다.
굿,,,즐감,,,,
늘 감사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즐감요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