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따라 물 따라
스무날 전 본포에서 다리를 건너 비봉재를 넘어 온정리를 거쳐 부곡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왔던 적 있다. 십이월 둘째 화요일은 북면 마금산 온천장을 찾아 새벽에 길을 나섰다. 105번 버스로 동정동으로 나가 북면으로 가는 17번 버스로 갈아탔다. 온천장에 닿아도 날이 덜 밝아와 사방은 어두컴컴했다. 불이 켜진 대중탕을 찾아 따뜻한 온천수에 한동안 몸을 담그고 때를 불려 씻었다.
새벽이라 온천을 찾아온 이가 몇 되지 않았는데 내보다 나이가 더 들어 뵈었다. 1시간 남짓 걸려 목욕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니 북면 들녘 건너편 백월산으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엶은 안개를 뚫고 솟는 해는 초저녁에 뜨는 보름달과 흡사해 보였다. 동읍과 북면을 경계로 들판 가운데 바위 봉우리가 삼국유사에 전하는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도반이 성불한 이야기가 서린 산이다.
전에는 첫새벽 맑은 온천수에 몸을 담근 뒤 백월산 등정도 가뿐하게 했으나 이젠 해발고도를 높여 오르는 산은 부담되어 마음을 거두었다. 대신 평탄한 강가를 트레킹하려고 창원역을 출발해 명촌으로 가는 15번 마을버스를 티고 바깥신천을 거쳐 낙동강 강가에서 내산에 닿았을 때 내렸다. 내산에서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오곡마을에 이르자 강을 가로지른 창녕함안보가 드러났다.
오곡은 행정구역이 창원시고 그 곁의 내봉촌에 딸린 작은 마을은 함안군이었다. 두 마을은 낙동강 산언저리 오지로 논은 한 뙈기 없어 산지를 개간한 단감과수원과 둔치 밭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주민들이었다. 최근에야 제법 떨어진 바깥으로 나가는 차도가 넓혀져 행정력이 미치는 동네였다. 내봉촌 본동은 산 너머 남향에 있고 그에 딸린 북쪽의 작은 동네는 몇 가구 되지 않았다.
강변 내봉촌에는 용성 송씨 문중의 광심정 정자가 강폭이 넓어져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을 굽어봤다. 강 건너편은 창녕 길목으로 둔치 푸성귀 밭은 4대강 사업으로 정리되어 노고지리 생태공원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곳은 강변 둔치는 아주 넓은데 부산에서 취수정을 뚫어 강물을 퍼 올려 이동시켜 상수원으로 삼고자 탐내는데, 지역민이 극렬하게 반대해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광심정으로 가는 외딴집 고샅에 한 그루 치자나무는 열매를 가득 맺어 노랗게 익어 눈길을 끌었다. 창녕함안보 홍보관으로 들어 창밖으로 댐을 조망하고 밀포를 거쳐 밀포교를 건넜다. 창녕함안보는 직전 정부 때 보가 해체 위기를 맞았으나 인근 농민들이 원치 않아 현 정부 들어 헐지 않고 유지하는 상태다. 칠북에서 이령천이 샛강으로 흘러드는 밀포교 가까이는 하중도가 드러났다.
강둑을 따라 덕남마을에 이르러 낮은 산마루로 오르니 전원주택 택지를 조성하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덕남마을에서 광려천이 흘러온 소랑교를 건널 때 샛강 하류에는 차를 몰아와 텐트를 쳐 놓고 낚싯대를 드리운 태공들이 더러 보였다. 소랑교를 건너니 강나루 생태공원이 펼쳐졌다. 데크 전망대 쉼터에서 준비해 간 도시락을 꺼내니 새벽에 챙겨 간 밥은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강나루 생태공원은 밀밭이 조성되어 풋풋하게 겨울을 나고 있었다. 해를 넘겨 초여름에 밀이 익으면 밀사리 이벤트를 열어도 될 듯했다. 강 건너 창녕 도천 우강리 배수장 근처는 임진왜란 의병장 곽재우가 만년에 머문 망우정이 보였다. 강나루 생태공원에서 강심을 가로지른 남해고속도로 교량의 교각 아래를 거치니 남지 철교가 가까웠다. 계내에 이르러 주세붕 묘역을 찾아갔다.
조선 중기 풍기 군수로 재임 중 백운동서원을 세웠던 주세붕이다. 그는 칠원 출신으로 상주가 본관이다. 그곳에서 고려말 이 땅에 성리학을 전래시킨 안향을 향사하면서 후학을 가르친 인물로 고을마다 있던 관립 향교와 다른 사학을 창시했다. 주세붕 묘역은 학이 펼친 날개와 같은 좌우 지맥이 감싼 낮은 구릉의 한복판이었다. 뒤는 부모의 합장 봉분이고 앞은 큰조카 무덤이었다. 2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