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만에 임대료 70프로를 올렸던 신동아그룹의 재단과 법정소송을 벌이던 시절,
고위급 공무원이 임대료를 너무 많이 올린 것 때문에 사직서를 쓰고서 ‘국민 여러분께 미안합니다.“ 라고 사과를 하는 방송을 보는 그 순간, 오래 전 이 나라에서 대단한 재벌이었던 신동아그룹의 재단과 소송을 벌였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 싸움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았다고 할까?
나에게 일생을 통해서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중 몇 사람을 꼽으라면 그 중 첫 번째가 도스토예프스키일 것이고, 두 번째가 프란츠 카프카, 세 번째가 괴테, 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그런 순서로 나갈 것이다. 아직 철이 들기는커녕 인생을 제대로 알지도 못할 그 청소년 시절에 호롱불을 켜고 머리를 그을려가며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전집은 내 가슴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한 세상을 견디어 내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중에서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드미트리의 죄를 놓고 유죄냐? 무죄냐를 놓고 벌이는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를 읽으며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던가.“ 검사의 논고를 읽을 때는 검사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 것 같았지만 변호사가 변론을 하는 부분을 읽다가 보면 변호사의 논리가 더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의 법정 논쟁 속에는 러시아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때의 감동을 가지고 법원의 신성함, 법관들에 대한 신성불가침을 항상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송두리째 깨지는 사건이 생겼다.
부안생활을 접고 다시 전주로 돌아온 것은 동생이 맡았던 카페를 나에게 양도한 것이었다. 덕진동 지하도 옆집에 세 들어 살다가 집을 옮겨야 할 형편이 되어 알아보던 중에 신동아 그룹의 소유인 단독주택이 나왔다. 방이 다섯 개나 되었는데, 방 값은 천오백만원이었다. 우리 형편에 가장 알맞은 집이었다.
하지만 집이 너무 낡고 보일러도 오래 되어서 ‘고쳐 달라’고 했더니 신동아 그룹의 과장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재단의 소유라서 고쳐 줄 수는 없다. 고쳐서 나중에 집 사서 나가는 때까지 오래 오래 살면 되지 않느냐”
그의 이야기를 듣고서 5백 만 원을 들여서 집을 다 수리했다. 그런 내용을 집들이 할 때 과장을 통해 황토현문화연구소 회원들도 여러 명이 들었다.
그리고 일 년이 훌쩍 지났다. 여름문화마당을 준비하는 중에 집세를 올려 달라는 통지를 받았다. 백만 원을 올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내도 그 통지를 보고 한쪽에 두었다가 지정된 날에 백만 원을 찾아가지고 신동아 그룹 사무실을 찾아가 내밀었다. 백만 원을 받지도 않고서 하는 말이 “선생님 숫자도 잘 모르세요. 백만 원이 아니고 천만 원이거든요?” “그래서 다시 그 통지서를 보니 천만 원이었다. 너무 순진해서 설마 천오백만원에서 백만 원으로 올린 것이라고 착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너무 부당하다고 항변했다.
“현재 법정 전세금 상한가가 5프로였는데, 70퍼센트를 올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 더구나 집을 고쳐서 오래 오래 살라고 해 놓고 , 그것도 학교법인에서” 나의 말에는 묵묵부답이더니 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려주기가 어려우면 집을 비우라“
나는 못 올려주겠다고 나왔고, 그 뒤로 여러 번 내용통지를 보낸 신동아 그룹에선 어느 날 최후통첩을 했다. 우리 집의 책장에서부터 모든 가구에 차압 딱지를 붙인 것이었다.
그때부터 3년여에 걸친 지루한 법정공방이 벌어졌다. 잘 아는 변호사를 찾아가 변호사 수임료를 물었다. 약 3백 만 원이 들것이라고 했다. 고민하다가 아내는 학교에 나가서 안 되니까 별 다른 일도 없는 내가 직접 재판을 해보기로 했다,
전주지방법원은 가련산 중턱에 있어서 차가 없는 나는 올라가면서부터 고달팠다. 더구나 힘이 빠지는 것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탓에 모든 재판이 끝나갈 무렵, 우리 집의 재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런 관계로 모든 재판을 속속들이 참관하는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어떤 피고가 판사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길게 호소하면 판사는 “묻는 말만 대답하시오.” 하면서 말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어떤 변호사는 피고에게 “이봐? 당신이 잘 못 했잖아?” 하면서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오랫동안 재판을 받는 중에 대한민국의 법과 법관, 그리고 변호사에 대한 나의 환상은 하나둘씩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신동아 학원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담당변호사가 나와서 나하고 논쟁을 벌였다. 매달 한 번꼴로 법원에 가서 재판을 받았고, 매달 한 번씩,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5만원 주고 무엇을 작성해 법원에 제출했다, 두어 달 그렇게 하다가 보니 그 돈도 아까웠을 뿐만이 아니라 내가 써도 될 것 같았다. 서점에 가서 법률 책을 두 권 사서 그 내용에 맞게 써서 법정에 제출했다.
법원을 다니던 어느 날 문득 신동아 재단의 최순영회장을 만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내에게 학교에 휴가를 내게 하고 63.빌딩을 찾아가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외국에 가셨다고 했다. 횃불 선교원 원장 을 하고 있던 최순영 회장의 부인을 만나고자 했지만 그것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여러 통로로 면담을 요청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도 성사가 안 되었다. 나중에서야 재벌 그룹 총수를 만나는 것은 대통령을 만나는 것 보다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 내 사정을 알고 재벌의 재단법인이 세입자에게 부당한 전세금을 요구해서 법정소송중이라고 전국 판으로 보도한 기자가 한겨레신문의 장세환 기자였다. 장세환씨는 그 뒤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그때의 인연으로 이렇게 저렇게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다.
3년여의 지루한 법정 소송 끝에, 마지막 판결이 났다. 그때까지의 소송비용을 반반씩 나누어 지급하라는 판결이었다. 그 뒤 신동아 재단에서 자기들이 소송비용은 다 지불하는 것으로 하고 집만 비워 달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전해들은 법조인들은 나에게 ‘그 소송은 선생님이 이긴 소송이다.‘고 말하며, 그때 법률 책을 보던 시절에 사법고시 한 번 보시지 그랬느냐, 선생님은 머리가 좋으니까 합격했을 것인데,’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때까지 내 인생에 있어 전무후무한 법정다툼이 막을 내렸다.
그 뒤 몇 년이 지나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생겨나 재벌에서조차 집 없는 세입자들에게 일 년에 70퍼센트를 올리는 부조리한 일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던 그 소송 덕분에 대한민국의 법조계의 실태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반면교사라 할까?
언젠가 변호사들의 모임에 답사를 진행했던 적이 있다. 그 때 모 변호사가 내게 건넸던 말이 잊혀 지지를 않는다.‘ “선생님 우리들은 매일 거짓말을 하는데, 돈을 주거든요.” 정의의 사도라는 것이 법조인이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자기 조직원들의 이익과 기득권 수호를 위해서 법 앞에 서는 것이 법조인인 것을,
2021년 3월 29일 월요일
첫댓글 윗글은 누가 쓴 글일까? 누가 썼다는게 안보이네~? 얼마나 심적 부담이 컸을까~?
신정일선셍님 본인 경험담.
@햇살편지 그렇쿠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