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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장 구천의 와신상담 (1)
회계산에서 오왕 부차에게 무릎 꿇고 항복한 월왕 구천(句踐)은 도읍인 제기(諸曁)로 돌아왔다. 시가(市街)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어둡고 백성들은 활기를 잃었다.
구천(句踐)은 왕궁 앞에 이르자마자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다.
"나는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월(越)나라의 번영을 도모하고자 했건만, 오히려 주초산에서 패하고 회계산에서 치욕을 당했도다. 이 어찌 통탄할 비극이 아닌가."
구천(句踐)의 주변으로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모든 신료가 함께 앉아 눈물을 쏟아댔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망국의 왕과 망국민의 비통함이었다.
"아아, 이 몸은 천 리 먼 곳으로 볼모가 되어 떠나게 되었도다. 이제 떠나면 과연 언제 돌아올 것인가."
구천(句踐)의 애절한 하소연은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어느 순간 한 신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구천 앞에 가서 섰다. 대부 문종(文種)이었다. 그는 눈물을 훔치고 비장한 어조로 간했다.
"왕이시여. 신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옛날 은나라 시조 탕왕(湯王)은 하대(夏臺)에 수금되었고 주나라 문왕(文王)은 유리에 사로잡힌 바 있으나, 그들은 후에 다시 일어나 천자가 되었습니다."
"또 제환공(齊桓公)은 거나라로 달아났고, 진문공(晉文公)은 백적으로 망명했습니다만, 그 후에 다시 일어나 천하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처럼 역대의 위대한 왕과 패자(覇者)는 한결같이 괴롭고 어려운 역경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왕께서 부초산에서 패배를 당하고 회계산에서 굴욕적인 맹세를 하셨다고는 하지만, 이는 모두가 하늘의 뜻입니다. 남은 것은 지나간 간난(艱難)을 딛고 우뚝 서시어 대업을 이루는 일뿐입니다. 바라건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스스로 굳은 뜻을 세우십시오."
문종의 이같은 말에 구천(句踐)은 문득 생각을 바꾸었다.
흔연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외쳤다.
"그대 말이 옳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결코 이 나라 사직을 포기하지 않겠소."
그 날부터 구천(句踐)은 나라일을 정리하여 오나라로 출발할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부고에 있는 보물을 내어 수레에 실었다. 또 여자 330명을 뽑아 그 중 3백 명을 오왕 부차(夫差)에게 보내고, 나머지 30명은 태재 백비에게 보냈다.
그러는 사이 한 달이 후딱 지나갔다.
이제 며칠 후면 5월이다. 구천(句踐)이 인질이 되어 오나라로 떠나야 할 날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때맞추어 회계산에 주둔하고 있던 오나라 장수 왕손웅(王孫雄)으로부터 독촉장이 날아왔다.
- 빨리 출발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데리러 가겠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
월왕 구천(句踐)은 종묘로 들어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선왕들의 무덤을 찾아 일일이 참배했다.
이윽고 구천과 그 부인이 오나라를 향해 떠나는 날이 되었다.
구천(句踐)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왕궁을 나와 절강(浙江) 나루터로 향했다.
범려와 문종 등 모든 신료들이 인질이 되어 떠나는 왕을 전송하기 위해 그 뒤를 따랐다. 절강 나루에 당도했다. 구천(句踐)이 배에 올라타려고 할 때였다.
대부 문종(文種)이 술잔에 술을 채워 높이 쳐들며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 하늘이시여. 우리 왕을 도우소서. 처음에는 괴로울지라도 후일엔 반드시 영광이 있게 하소서. 불행한 자로 하여금 덕(德)을 기르게 하시고, 근심 걱정을 복으로 변하게 하소서. 위세를 자랑하는 자를 망하게 하시고, 하늘의 뜻에 복종하는 자를 번영케 하소서.
- 한 번 불행한 자에겐 다시 불행이 없게 하시고, 한 번 눈물을 흘린 자에겐 두 번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마소서.
이어 그는 술잔을 구천에게 바치며 말했다.
"왕이시여, 부디 이 간난(艱難)을 헤치고 꿋꿋하게 서십시오. 오늘의 이 애간장 끊어지는 고통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그런 뜻에서 이 술잔을 바칩니다."
월왕 구천(句踐)은 문종이 바치는 고별 술잔을 받아들었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다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들 눈이 붉어지며 고개를 외면했다.
문종이 물러나오자 이번에는 범려(范蠡)가 앞으로 나섰다.
"왕이시여, 불행이 없으면 그 뜻을 넓힐 수가 없고 근심이 없으면 앞날을 멀리 내다볼 수 없습니다. 자고로 모든 성현이 이런 고생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왕께서는 부디 이를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구천(句踐)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하들이여, 나는 오늘의 일을 결코 피하지 않겠소. 다만 걱정되는 것은 내가 떠나고 없는 이 나라 사직이오. 옛날 요임금은 순(舜)과 우(禹)에게 나라일을 맡겼는데, 가뭄이 일어도 큰 피해가 없었고 황하가 범람해도 풍년이 일었다 하오."
"나는 이제 고국을 떠나며 이 나라 사직을 그대들에게 맡기는 바이오. 특히 범려(范蠡) 그대는 이 나라 사직을 지켜나갈 중추요. 부디 나를 대신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키워 오늘의 이 치욕을 설치(楔齒)해 주시오."
이를테면 범려를 섭정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범려(范蠡)는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었다.
그는 앙연히 고개를 쳐들고 아뢰었다.
"모름지기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이는 신하 된 사람의 치욕이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제 왕께선 적국으로 볼모가 되어 가시니 이는 바로 우리 신하들의 치욕입니다."
"어찌 월(越)나라에 왕의 근심을 함께 나눌 신하가 없겠습니까. 신은 일월(日月)에 맹세하오니, 왕을 따라 오(吳)나라로 가 우리 왕께서 겪는 치욕과 근심과 걱정을 함께 할까 합니다."
순간 나루터는 무거운 정적에 빠졌다.
'아!'
어느 누구도 범려(范蠡)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구천(句踐)은 놀라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나와 함께 오(吳)나라로 가면 누가 이 곳에 남아 월(越)나라를 다스린단 말이오?"
범려(范蠡)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왕께서는 문종에게 나라일을 맡기십시오. 임금을 모시고 임기응변 하는 일은 신이 문종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위무하는 일은 문종(文種)이 신보다 잘 압니다."
"그는 왕께서 오나라로 가 계시는 동안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 백성들을 단결시킬 것입니다. 신은 왕을 모시고 오(吳)나라로 가 함께 간난을 이겨낸 후 다시 돌아와 문종(文種)이 비축해놓은 군량을 바탕으로 오나라에 원수를 갚을까 합니다."
구천(句踐)은 자신을 따라 오나라로 가겠다는 범려의 각오에 다시 한 번 감격했다. 눈에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한참 동안 범려를 바라보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문종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그대는 과인이 돌아올 것을 확신하는가?"
"왕께서는 반드시 돌아오십니다. 그 동안 신은 범려(范蠡)가 말한 대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비축하고 백성들을 하나로 모아놓겠습니다. 왕께서는 부디 오늘을 잊지 마십시오."
문종(文種)의 이러한 충성 맹세에 다른 대부들도 각기 앞으로 나서며 구천에게 맹세했다. 태재 고성(苦成)이 술잔을 들었다.
- 신은 임금의 명령을 백성에게 펴고, 임금의 덕(德)을 밝히고, 복잡한 것을 통합하고, 어려운 일을 다스리어 백성들로 하여금 본분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행인(行人) 벼슬에 있는 예용(曳庸)이 나섰다.
- 모든 나라 제후에게 사자를 보내어 여러 가지 분규를 해결하고, 서로의 의혹을 풀되 다른 나라에 가서는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할 것을 맹세합니다.
사직(司直) 호진(皓進)이 나서서 아뢰었다.
- 신의 직분은 바른말을 하는 것입니다. 문종(文種)이 왕을 대신하여 잘못 행하는 일이 있으면 신은 직언으로써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의심나는 점을 판단케 하겠습니다.
사마 제계영(諸稽郢)이 맹세한다.
- 신은 1년을 하루같이 군사들과 함께하며 진법을 훈련하고, 활 쏘는 것과 칼 쓰는 법을 익혀놓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농(司農) 고여(皐如)가 나섰다.
- 항상 백성을 위로하고 죽은 자를 조상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낭비하지 않고 절약하여 곡식을 창고에 저축하는 것이 신의 직분입니다. 왕께서 돌아오시는 날 가득 찬 창고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모든 신료들의 각오와 맹세를 들은 구천(句踐)은 목이 메었다.
"오늘 우리 나라가 이런 비통함에 젖은 것은 모두 나의 죄인데, 그대들이 이렇듯 자신의 본분에 충실할 것을 맹세하니 내 어찌 오(吳)나라에 가서도 귀국할 날만을 기다리지 않으리오."
마침내 월왕 구천(句踐)은 배 위에 올랐다.
그 뒤를 대부 범려(范蠡)가 따랐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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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