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과
실리.
우리부부는 오래전
중국의 운남성 나평지역의 오지를 여행한
일이있다.
먼지와 매연이 벌어진 바닥 틈새로
사정없이 밀려드는 낡은 중국버스는
형편없는 길을 털털거리며 느리게
달렸다.
그런데
어떤곳에 정차했을 때 밖을 살펴보니
아주 생소한 복장을 한
소수민족의 장이 서고
있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보기드문 소수민족의 장은
옛날
우리나라의 장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가장 큰 이유는
버스가 이곳에 도착하기 직전
돼지새끼의 네발을 묶어
멜빵으로 등에지고 가는
남자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돼지를 등짐으로
지고가는 인간을 그때 처음봤다.
장터 한곳에 가니
그렇게
등짐으로 지고온 돼지새끼들을
거래하는곳이 나타났다.
더 놀랜 것은
우리것과 거의 똑같은
인절미를 파는 노파가 있었고,
우리는 불문곡직 그 좌판앞에 앉아
인절미를 사 먹어봤다.
맛도 거의 같았으며 가루빻기는 거칠었지만
차진맛은 더 있었다.
그리고 값이 아주 쌌다.
정말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찰떡을
맛본셈이다.
또
한곳에서는 애를 업은 젊은아낙이
사탕수수를 짤라서 팔고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 주저앉아
그 아낙이
적당한 크기로 짤라주는 수수토막을
씹었다.
정말
그 단물은 고소하기까지 했다.
다음이
계란을 사고파는 곳이었는데
그 광경은 생소하고 놀라웠다.
그들은
달걀을 저울로 무게를 달아 사고팔았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달걀한줄은 열 개,
지금도 포장방법만 달라졌지
여전히 달걀갯수가 중심이다.
크고 작은건 따지지 않는다.
그들은 갯수가 아니라
실제
무게를
기준으로 거래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중국에 정통한분에게 물어보니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달걀을 무게로 사고판다는 것이다.
사실
그 차이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일 것이다.
우리는 몇 개, 즉 명분이 중요하다.
그들은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가,
실리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 차이는 문화적인 것이며
문화는 그대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익숙한
전통이다.
그만큼
바뀌기가 어려운것도 문화현상이다.
한 민족이
어떤 문화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삶의 방식에 반영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형식이 내용,
즉
삶의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명분(名分)은 신분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할 도의상의 본분이며,
본분은 본래의 직분과
그에 따르는 책임, 의무다.
‘양반은
얼어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 가
하나의 대표적인 예가 되겠는데,
곁불은
상것들이 얻어쬐는 불이기 때문에
사대부가 얼어 죽을지언정
그 불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분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목숨보다 중한게 그것이며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 체면문화다.
무엇을 체면이라고 하는가.
다른이들을 대하는 관계에서
자기의 입장이나 신분, 지위로 보아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생각하는 위신이
그것이다.
따라서
체면문화는
자기의 체면치례를 위한
삶의 모양세-양식이며
표현의 체계라고 할수 있다.
문화를 익숙한
전통이라고 했다.
이 익숙한 전통은
지금도 우리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전통문화에서 자유스러운 사람은
거의없다.
그리고
체면문화는 반드시
외화내빈(外華內貧) 이라는 파상문화를 만들어
낸다.
겉은 화려하고 요란한데
그 속은 속빈강정과 같은게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정서가 그러하다.
명분에 얽매이면
실리를 놓치는 것은 당연하다.
체면문화가 무서운게 그 때문이다.
체면문화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위치와
위신을 확인하려는 하나의 전통문화다.
-남의 눈이 있지않은가.
-남 부끄러워서 못살겠다.
-남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는가.
모두가 남의눈-시선이 기준이다.
내가
나를 내 눈으로보고,
내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눈’
이 ‘나’를
결정하는 문화가 곧
체면문화다.
때문에
자기신념과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것이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굴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끝까지 견디어 내는
강인하고 개성적인 사람들도
많다.
체면문화는
‘현대인의 삶’
과는
상충되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점점 더 개성적 이기를 요구받고 있다.
남의 눈이 기준이 아니라
내 눈이
기준이 되는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다.
체면문화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바뀔 수밖에 없는 소이다.
이제 명분에 살고죽는
체면문화의 덫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 하나가
모든인생의 중대사인 결혼문제다.
통계에 의하면
결혼적령기에 있는 남녀의 40%정도가
막대한 결혼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
결혼을 미루거나 안 한다는 것이다.
결혼정보회사인
‘듀오 휴먼라이프 연구소’ 는,
최근 2년안에 결혼한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결혼비용실태’를 조사발표했다.
이들 신혼부부가
결혼할 때 치른 총 비용은
평균 2억5천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그 내역을 크게 나누어 살펴보면,
주택마련(거주)에 1억 8천만원,
예물장만에 1,670만원,
예식장 관련비용이 1.594만원,
예단마련에 1,555만원이 들었다.
남녀간 분담비율은 평균 6대4로
신랑쪽이 62%인 1억5,598만원,
신부쪽이 38%인 9천398만원을
부담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초혼 결혼연령은
남자 32.1세, 여자29.4세였으며,
이런 젊은이들이
2억5천만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부모가 부담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돈 없이는 결혼을 못하는가.
나는 미국인들이
결혼하는 케이스를 여러번 목격했으며
초대받아 참석한 일도있다.
그들은 둘이서
시청에 가서 결혼신고를 하는 것으로
결혼절차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고,
둘이서
시장이나, 목사, 신부앞에서
결혼서약을 하는 것으로 끝낼수도
있으며,
가족만으로,
또는 약간의 친구들을 초대하는
아주 간략한 결혼식도 올리고 있다.
물론 재벌이
엄청난 결혼파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들은
이미 월세집에 살고있거나
보편화된 임대주택에 살고있기 때문에
주거비용이 따로
필요없으며,
예물, 예식장비용, 예단마련같은 비용은
개념자체가 없다.
말하자면
돈이없어 결혼못하는 일은 전혀없는
것이다.
그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결혼조건은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이다.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장만한다.
집도, 살림살이도, 자동차도 전부
할부다.
할부금 갚다 인생 끝내는게
미국인들이다.
그만큼
온갖 할부제도가 최고로 발달해 있다.
결혼적령기에 있는 멀쩡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 결혼못하는 일은
아시아 여러나라에 해당 되는데
특히 우리가 심한편이다.
돈이 있어야 결혼할수 있다는 것은
결국
체면문화의 대표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거액을 마련해서
결혼식을 제대로 치르려고 하는 것은
‘남의 눈’
때문이다.
내 눈으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으로 내가 살기 때문에 생기는
변고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눈 딱 감고 실속있는 결혼식을 올릴
‘용기있는
이단자’ 가 없기 때문이다.
결혼식을 못하고
동거하는 케이스의 대부분이
용단을 내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이제는 결혼문화도 바뀔때가 됐다.
예식장을 운영하는 장사꾼들의 부추김과
사치, 허영 때문에
얼마나 많은돈이 낭비되었으며
돈이 없어서 결혼못하는
젊은이들이 양산된 것이 아닌가.
2억5천만원이 아니라
2천5백만원으로도 결혼할수 있어야
한다.
돈 안받는 공공시설에서
가족, 친구들이 조촐히 모여 예식을 치르고
잔치국수와 떡잔치로 끝내면 기백만원도
안든다.
내 친구하나는
실제로 아들 결혼식을 그렇게 치렀고
모두가
진심으로 그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다른 사람이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체면문화의 두 번째 슬픈희생자가
100만이 넘는 백수들이다.
대학을 나왔지만
수백통을 쓴 이력서는 대답없는 메아리가
됐다.
더 이상 집에앉아 손을 벌릴수도 없어
건설현장, 막 노동판으로 나서는
젊은이들이 늘어 나고
있다.
일당은 6-7만원선,
잔업을 하는 경우 10만원까지 받지만
체력이 달리고 몸에 탈이날 수 있다.
대학까지 나온사람이 ‘직장’ 이 없으면
그 끝은 폐인이 되는 것이다.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낙오자가 되어
힘이 없으며 어느축에도 끼지 못한다.
애인도, 결혼도 생각할수 없고
도시 내일을 예측할수 없어
집구석에 처 박히는 수가있다.
이제 극단적인 대비를 해 보자.
나는 이발관에 간지가 아주 옛날이다.
계속 목옥탕이나
동네 사우나에 달려있는
이발실에서 머리를 커트하기 때문이다.
지금 내 머리를 커트해 주는
이발사와는 14년째 단골이다.
오래 사귀면서 알아낸 정보로는,
그는 하루에 적게는 20명,
많게는 35명의 손님을 받는다.
평균 하루에 27.8명이다.
1인당 커트비용이 1만원이니
하루평균 27만원을 버는 셈이다.
일주일에 화요일만 쉬고있으니
평균 한달에 26일을 일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월 평균수입은 702만원이
된다.
연봉으로 환산하면 8천424만원,
그는 중졸학력이고 집이 가난해서
그때부터
이발소에서 물긷고 청소하는 일부터
배웠다.
아무리 불경기라 해도
이발은 불경기가 없다고 한다.
투자라고 해 봐야
사우나 주인에게 내는 월세와 가위와 빗 몇 개,
드라이어와 염색도구 몇가지가
전부다.
안전성, 투자대 회수율, 평균수입에서
그는
우리사회에서는 상위권에 들어가는
계층이다.
대학을 나와
일당 6,7만원의 막노동판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다.
현대사회는 결국 ‘학벌’ 이 아니라
‘기능’ 이 기준이 되는
경제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다.
백수는
경쟁에서 탈락한 낙오자들이며
내일을 기약할수 없는 방랑자들이다.
무엇이,
이 멀쩡한 젊은이들을
이 어두움의 계곡으로 몰아 넣었는가.
‘체면문화' 가 그 주범이다.
‘남의눈’ 으로 내가 살다가 만난
재앙이다.
이제는 이 ‘명분’을 버려야 한다.
실속을 차리지 않으면 살아 남을수가
없다.
곁불은 안쬐겠다는 고집으로 죽는것보다
명분을 내려놓고
곁불을 쪼이면서 살아남는게 더
중요하다.
그걸 실리(實利)라고 부른다.
우리말에 이런게 있다.
‘체면이 밥
먹여주냐’
맞는 말이다.
언제나 밥을 먹여주는 것은
‘실리’ 이며 ‘실속’ 이다.
실속은
실제의 속 내용이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알짜이익 이라는
말이다.
체면은
남의눈으로 나를 사는 어리석음이며
실속은 내눈으로 내가 사는 지혜다.
앞으로 전개되는 ‘현대사회’ 는
명분으로는 살 수 없는 실리의 사회,
실속의 사회로 계속
진화한다.
때문에
명분에 집착하는 사람은 밥을 얻어먹지
못한다.
대신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 밥을 굶는일은
없다.
기능이 무엇인가, 타고난 재간,
재주다.
그걸 천부(天賦)라고 부른다.
천부를 살리는 것, 그게 진짜교육이다.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할때가 가장 행복하다.
돈도 따라오고
모든 경쟁에서 성공할 수 있다.
이제 대단히 시사적인 통계하나를 보자.
1993년 한해 40만쌍이 결혼했다.
그런데 2013년엔,
인구는 늘어 났는데도 32만쌍이 결혼,
20여년 전보다 크게 줄었다.
결혼은 안 하거나 못하고있는 젊은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이유는
체면을 지킬수 있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하면
해결못할 일도 아니다.
따라서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남의눈이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어 내 삶을 살아야
한다.
수분(守分)하는 정신으로
익숙하지만 잘못된 전통을 깨야한다.
대가를 치러야 결과를 얻을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에는 정원사가 심은 나무만 자라는 것은
아니다.
-
스페인속담.
by/yorowon |
첫댓글 체면문화...
생각을 바꿔야 하는데 어렵지요..
펜 보다는 드라이브를 들어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