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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양심
롬 2:12-16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2-16 /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죄라도 벌하십니다. 이방인들이 죄를 범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글로 쓰여진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옳고 그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거나 위로를 받는 것은 다 그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죄를 범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 일인 줄을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말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16)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비밀스런 생활과 그들의 가장 깊은 생각과 동기를 심판하실 날이 반드시 옵니다. 이것은 내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행위를 심판하시는 표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12-13) 본문은 각 사람이 그 행한 대로 판단을 받으리라는 앞 단락(6-11절)의 명제를 보다 분명하게 확정 짓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과연 그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데에 관심을 두신다는 점입니다. 비록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일지라도 자연을 통한 계시나 양심의 법대로 온전히 살면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받지 않지만 그러나 유대인일지라도 그들에게 주신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의 이 말이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율법의 행위로 얻는 칭의 사이를 대조하기 위하여 언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3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율법을 통해서 의롭다하심을 받을 육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죄가 있음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롬 3:20). 따라서 이것은 오히려 율법을 듣고 행하는 자들과 율법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을 대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증거가 되어(14-16) 본절과 15절은 13절에서 나오는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는 명제가 이방인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모르고 죄를 범하든 알고 범하든지 간에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은 자칫하면 불공평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바울은 여기서 분명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 비록 율법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마음속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양심’을 주셨는데, 그것이 스스로에게 율법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율법의 기본적 요구 사항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 때문입니다(창 1:22). 따라서 율법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일지라도 그가 범죄했을 때는 변명할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은밀한 것’까지 미치는 완전한 심판입니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뿐 아니라 내면적인 동기와 목적 그리고 비밀리에 행한 것들도 역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적용: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입니다. 당신은 율법주의자입니까? 아니면 은혜로 행하는 복음주의자입니까?
살아가노라면 가슴이 무너지는 괴로움의 때가 많습니다. 두어 시간 전에 사랑하는 아들을 땅에 묻고 와 강의를 해야 하는 교수가 있고, 아무리 몸이 아파도 환자를 돌보아야 하는 의사가 있습니다. 이럴 때 감정의 노예가 되거나 상황에 치우쳐 이성을 잃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없을까? 멋진 대본,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가장 큰 방해거리는 바로 절제하지 못하는 감정입니다(고후 4:8-10). -이준호-
호크마 주석
=====2:12
본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든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든지 누구나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복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 '율법 없이'( , 아노모스)라는 말은 부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었다. '율법 없이'( , 아노모스)의 명사형 '아노미아'( )나 형용사형 '아노모스'( )는 대개 '불법'이나 '범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에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고전 9:21). 즉 '아노모스'는 14절의 '타 메노몬 에콘타'( , '율법을 갖지 아니한')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바, 계약을 맺어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일이 없는 자들, 곧 씌어진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이해되어야 한다(행 2:23).
율법 없이 망하고...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율법 없이 범죄한 자들은 '망한다'( , 아폴룬타이)라고 서술하고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심판을 받으리라'( , 크리데손타이)고 서술한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보응이 있을 것을 시사한다. 율법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우주 만물과 양심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파멸된 것이며(1:20),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규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율법 자체가 멸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이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J.
Murray)
=====2:13
율법을 -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 , 노모스)은 관사가 없이 사용되었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Majority Text)에는 정관사 '투'( )가 '노무'( , '율법의')앞에 있는데, 대부분의 고대 사본( , A. B)에는 이 관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노모스'( , '율법')에 관사가 붙고 안 붙고에 따라 약간의 의미상 차이가 있다. (1) '노모스' 앞에 정관사 '호'( )가 붙으면, 거의 대부분 모세 율법을 의미한다. (2) '노모스'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의 특정한 조문(條文)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추상적인 법 개념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양심 속에 주어진 법이나, 자연적 계시 속에 나타난 법이나 어떤 순종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법을 가리킨다. (3) 특수한 경우로서 관사가 생략되어 있으나 모세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이다. 이는 헬라어 문법상 이미 알려진 어떤 확실한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거나 그 단어의 본래적 개념을 강조하고나 할 때 관사를 생략하는 용법으로서 율법의 특수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경우가 있다. 만약 본절을 관사없는 사본을 따라 해석한다 하더라도 '율법'은 12절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특수한 경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J. Murray).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익히 배우고 들어서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다. 그렇지만 이 지식은 그들을 심판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없다. 율법을 들었으면 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율법이 의의 법칙일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그것으로 인해 살리라고 가르친다(레 18:5;신 4:1). 그러나 본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범죄할 수밖에 없는 죄인(3:23)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본서에서 '의롭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데손타이'( )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롭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달랐다(J. Murray). 글자 그대로 보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과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판단에 의하여 칭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14
이방인이 본성으로 -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본성(nature)을 따라 부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행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방인도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다. 비록 본절이나 앞절(13절)에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계속되는 바울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히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3:9, 19). 무엇보다도 본절은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방인들도 양심의 법칙을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행위를 할 때가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인간은 그 본성에 심어진 양심과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게 된다(J. Murray). 즉 인간들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성향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양심의 소리를 수반한다(Murray).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본래적인 양심의 법을 따라 일반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유비적(類比的)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갖는 양심의 법은 간혹 모세 율법과 비슷한 법과 규례를 가질 수 있으나,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다.
=====2:15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 )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 )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고전 8:7-12). 칼빈(Calvin)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고호 4:2).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간다(갈 6:3;딤전 4:2;딛 1:15).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16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 '내 복음을 따라'( , 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전파한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취했는데, 이것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어 '이신 칭의'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파한 모든 내용을 가리킨다. 초대 교육 교부들은 이것을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Origen, Jerome)여기서는 바울의 전파 내용 중 종말론적인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깊이 연관되는 표현으로 바울 자신이 예수께로부터 사도로 세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며 자기가 그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에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용어가 원문에서는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구절 뒤에 따라 나오지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과 연결지을 핑요는 없다(Calvin). 오히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요 5:27;행 17:31)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성취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졌듯이 그 복음으로 인한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심판날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말슴하셨다(마 16:28).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 심판날에는 감추인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도 어떤면에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외식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심판날에 남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마 12:36, 37).
그날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 )는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티칸 사본(B;codex Vaticanus)에서는 정관사 '헤'( )가 표기되어 있는데 문법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바울의 서술 방법 중 하나이다(12절). 더욱이 5절에서 '그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관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본절에서는 내용 자체가 마지막 심판 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 같다.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2:12-16)
본문에서 바울은 앞 문단에서 논의된 문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앞에
서 하나님의 심판은 이방인뿐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동일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강조하
였거니와,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판단 기준인 율법의 개념을 도입하여 그 정죄
적 측면을 부각시킴으로써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원리로 이
끌어가고 있다. 다음 사항들을 통하여 본문의 내용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유대인의 법. 바울은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심판, 곧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마
찬가지이며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나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나 똑같이 심판을 받
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유애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으므로 그 법이 곧 하
나님의 심판 기준이 될 것이다. 즉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특권을 지녔으므로 율법을 어길 경우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는다. 그리고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범죄하는 유대인
들은 율법 없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범죄하였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이
해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원리를 내세우고 있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율
법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헌신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율
법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6:13, 19;14:18;고전 6:9;히 12:23).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
하다는 사상은 일찍이 예수께서 산상 수훈에서 강조한 바이며(마 7:15-27) 야고보서에
서도 누누이 강조되고 있거니와(약 1:22-24)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율법은 들을 수 있
었지만 그것이 그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의 대상이 되었다.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자 하는 유대인들의 불성실하고 오만한 태도는 하나님 앞에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2) 이방인의 법. 앞 문다에서 바울은 유대이이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원리
를 설명하였거니와(6절), 이방인에게도 그 행위에 따르는 심판이 적용되는가 하는 문
제를 본문에서 다루고 있다. 이방인은 비록 유대인과 같이 율법을 부여받진 않았지만,
이로써 자신으 범죄를 변면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게 양심(良心)의 법이 부여되었기 때
문이다.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일지라도 마음에 새겨진 율법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으니 이미 율
법으 기본적 요구 사항이 인간으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인간의 본성에 도장처럼 찍혀져 있으니 저들은 비록 율법을 듣지 못하였
으나 자신과 타인의 행위를 판단할수 있는 양심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바울은 인간
의 내면 세계를 마치 법정처럼 묘사하고 있는바(15절), 인간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
로 선고되기도 하고 유죄로 선고되기도 한다. 바울이 말하는 이방인에게 있어서의 양
심의 기능은 유대인에게 있어서의 율법의 기능과 거으 유사하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율법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
들이다. 양심이 스스로에게 율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도 유대인과 마찬
가지로 행위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바울은 앞장에서와 마찬가지로(1:18-20) 자연 계시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
고 있거니와 그 의도는 전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과 고로 복음을 필요
로 하는 존재임을 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인류는 하나님의 법에 관하여 핑계할 수
없는 충분한 분량의 지식을 가졌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충분한 분량의 진리의 빛을
받은 것이 분명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빛을 거스리며 계속해서 죄를 반복하며
어두움 속에 거하고 있었으니 이로써 비극적인 종말이 점점 가까이 임박하게 되었다.
그들 앞에는 오로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이 놓여져 있다는 사실이 본장에 계속
되는 바울의 강조점이다.
(3) 행위에 따른 심판. 바울은 행위에 의한 심판 곧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응보(應報)를 전하고 있다. 이 심판에 관한 가르침은 과연 본서의 메시지의 중심인 믿
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원리와 일치하는가? 또는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가?
행위에 의한 심판과 행위 때문에 이루어지는 구원은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이 전파
한 복음에 의하면 행위가 안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고려되어야 한다. 즉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나머
지 구원 받은 자가 취해야 할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구
원의 개념 속에는 우리가 무엇으로 구원을 받았는가는 물론 무엇을 향하여 구원을 받
았는가 하는 사실도 포함되어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이다(엡 2:10).
선행의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이며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다
(고전 9:21).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7:12). 그러나 그리스
도께서 율법의 마지막, 즉 율법의 완성이라는 전제 아래서 그렇다.
바울은 결코 율법을 폐기시키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율법과 복음을 내적으로 통일시
키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실현하기 위하여는 은총이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은총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의가 선행을 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
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목적이다. 모든 것은 믿음과 은총으로부터 오나 동
시에 모든 것은 인간의 행위에 달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사람들의 은
말힌 것까지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
루어 나가야 한다(빌 2:12).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위는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
계에 있다.
* 바울의 '양심'의 개념. '양심'(*쉬네이데시스)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 모두 32회 나타나며 거의가 바울 서신에서만 사용되고 있다(15절;고전 8:7;10:25, 29;딤전 1:5;3:9;4:2). 헬라인들은 양심을 선악에 대한 판단의 자리로 생각하였거니와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여 독특한 기독교적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본문에서도 '양심'은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이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어휘 설명. '양심'이라는 말은 '함께 있다', '함께 본다'는 말로서 하나님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자기 곁에 증인으로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심'아리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으 소리를 의미하는 개념이었다. 이것이 헬라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대인들에게는 심판하고, 고소하는 자를 의미하였다.
(2) 양심의 기능. 양심은 율법과 동일시 될 수는 없으나 율법과 동일한 기능을 하는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이다. 즉 문자화(文字化)되기 이전의 율법이라 할 수 있다. 그것
은 도덕적 결정과 판단의 영역에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인격적인 것이다. 그것은 긍
훌히 여기고 지식을 구하고 명예를 세우려는 마음의 깊은 자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러나 인간은 양심에 대하여 자기 자신이 최고의 법과니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최고 법관이 되신다(고전 4:4).
(3) 양심과 성령. 바울에게 있어서 독특한 것은 양심의 판단이 인간 안에 내재한 능
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양심이 어두워졌으므로 스스로 양심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없다.
인간은 성령의 지시로서만이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진리를 판단할 수 있으며(9:1;고
후 1:12).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양심은 두두러지게 활동할 수 있다. 양심은 반드시
성령과 동행아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인간은 두드러지게 활동할 수 있다. 양심은 반
드시 성령과 동행하는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인간은 그 기능을 온전히 회복하게 될 것
이고 그때에야 비로소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삶을 살게 될 것
이다.
< 설 교 >
인간의 죄
황광민 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익살맞고 장난기 있는 아더 코난 도일경이 친구들을 놀려먹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는 사회에서 명성 있는 12명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곧 비행기를 타라"였습니다. 그런데 24시간 안에 명성도 있고 지위가 있는 유명인사 12명 모두가 출국했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의인으로 분류하고 싶어합니다. 헨리 발레이 목사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정직한 사람과 부정직한 사람 사이에, 건전한 사람과 무절제한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혀 비교할 수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평가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판단기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대전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는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 죄가 판명되고 율법이 없는 자는 양심의 법에 의해 죄가 판명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법에 저촉이 안됐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까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 해서 <인간의 죄>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에 의한 죄
죄를 가리키는 가장 명확하고 일반적인 기준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법만 가지고는 죄를 이해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물론 율법의 유익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만 가지고 죄를 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입장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가능성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치 율법이 있으므로 구원받고 율법 없는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 한마디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 율법만 가지고 있으면 다 된 줄로 생각하는 유대인의 생각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으로 죄를 이해하려는 생각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만 지키면 의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여기서의 죄인은 법적으로 결과가 드러나야 죄인이 됩니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인이 아닙니다. 남의 물건을 들고 가기 전에는 도둑이 아닙니다. 또 심지어는 살인했다고 생각이 들어도 증거를 잡지 못하면 무죄가 됩니다.
이처럼 법은 결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드러난 것을 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범죄의 의도가 아무리 있었다 하더라도 행위로 옮기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한 것만 가지고는 어떤 법도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해한 것" 또는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에 빠져 결과주의로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공격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주의로는 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법은 증거주의를 따르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증거를 없애면 죄를 성립시킬 수 없습니다. 완전 범죄란 없다고 하지만 증거를 없애서 죄를 피해보려고 합니다. 사회의 법이 증거에 의해서만 벌을 주기 때문에 증거를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겠습니까? 여기서 법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으나 예수님과 바울의 눈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의 법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양심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심에 의한 죄
율법보다 더 고상한 법은 양심입니다. 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양심의 법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판단합니다. 14-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동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율법도 소중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지만 한계가 있는데 양심이 그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다.
데오도로 파커는 네 살 때 농장에 놀러갔다가 거북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돌멩이를 집어들고 거북이의 껍질을 깨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그러면 안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돌멩이를 던져 버리고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물었습니다.
"엄마! 내가 돌멩이로 거북이의 껍질을 깨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돼'라고 하던데 누가 그렇게 말한 거야?" 참으로 대단한 질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아무튼 네가 그 음성을 들으면 더욱 분명히 들릴 것이고 너를 옳은 길로 인도할 꺼야. 만약 네가 그 음성을 듣지 않으면 그 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결국 너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꺼야. 네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이 양심의 소리를 잘 듣느냐 안 듣느냐에 달려 있다."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옳은 길을 찾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양심은 구속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법에 저촉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양심은 구속력이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 이 양심의 가책이 일종이 벌입니다. 양심을 어기면 심령에 자책이 오므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눈 딱 감으면 그만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므로 혼자 괴로워하다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법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깨끗한 양심, 선한 양심, 착한 양심을 버리고 화인 맞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마비되면 법보다도 효력이 없습니다. 또 양심이 자기 판단의 위력에 굴복하고 맙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은 옳다하고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렸다고 판단합니다. 객관성을 상실하고 자기 주관에 끌려 다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양심을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한 판사 부인이 남편을 공개적으로 고발했습니다. 판사인 남편이 불법으로 운영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불법을 없애기 위하여 벌을 주는 판사가 불법적으로 운영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신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양심의 고백입니다. 법적으로는 묵인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판사가 술을 마셨으니 누가 불법을 따지겠습니까? 법적으로는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남편 판사도 옳다고 수긍하고 사표를 썼고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 마비된 양심으로는 진리를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착한 양심,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크게 들으십시오. 양심이 외칠 때 귀를 막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양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율법과 양심의 한계를 말씀드렸습니다. 율법도 귀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양심도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율법도 양심도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죄는 걸려야 죄가 됩니다. 양심에 의한 죄는 눈감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이 한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도 드러납니다. 율법이 정죄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납니다. 눈감고 넘어갔던 양심의 자책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각까지 헤아리십니다. 하나님은 동기도 보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보다도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해야 합니다. 16절을 참조하십시오. 하나님은 은밀한 죄까지 심판하십니다.
중국 후한 때에 동래에서 태수를 지낸 양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대쪽같고 마음이 맑았으므로 후세에 모범적인 관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양진이 동래 태수로 부임할 때의 일입니다. 태수 일행이 동래로 가는 중에 창읍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마침 창읍의 현령은 양진이 천거하여 현령이 된 양밀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양밀 현령은 양진 태수일행이 창읍에서 묵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습니다.
밤이 깊어 양밀이 돌아가려고 일어나다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돈꾸러미를 내밀었습니다. 지난 번 천거해 준 것도 감사할 겸 앞으로도 잘 봐 달라는 인사치레였습니다. 그러나 양진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태수는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양밀도 "많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저 노자에 보태 쓰라고 준비한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사양치 말고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거 왜 이러시오? 내가 당신을 조정에 천거한 것은 당연히 당신이 나라에 필요한 인물이어서 천거한 것인데 내게 돈을 주어 관직이나 팔아먹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겠소?" 그 말에 머쓱해진 양밀은 잠시 주춤했으나 다시 받으라고 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받으신다고 해서 태수께서 나라의 관직을 파셨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수께 돈을 드린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때 양진이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다니?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소. 나를 진실로 위한다면 그냥 돌아가 주시오." 결국 양밀은 양진의 곧은 뜻에 감동을 받고 크게 절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양진이 말한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는 깊이 생각할 것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양사람들은 체면윤리에 젖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는 문화입니다. 이것을 영어에서는 Shame Culture 라고 합니다. 특히 동양의 유교사상에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히 신적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군자 사상이 그렇고 삼강오륜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체면 윤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인 기독교 사상과 너무나 다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아십니다. 우리의 행동의 동기를 헤아리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교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것 밖에 없습니다. 늘 죄스럽게 생각됩니다. 이것이 죄의식 문화 guilt culture 를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법에 걸리지 않았다고, 법에 걸릴 것이 없다고 의롭게 생각하는 한 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양심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양심은 구속력이 없어 눈만 감으면 그만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마비된 화인 맞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나 양심만 가지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분명히 깨달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까지도 드러나게 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인간 실존을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법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우리들은 지금 미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어떤 공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나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들이 이곳에 와서 살도록 문을 열어준 것입니다. 솔직하게 저는 미국에 와서 살도록 허락해준 미국에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 많아 미국에 돈을 많이 가져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학자들과 같이 미국의 번영을 위해 전문 지식을 제공할 아무 것도 없고 또 심지어는 어떤 기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미국에 들어와 살도록 한 것은 순전히 미국이 특혜를 입혀준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노인들을 두고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미국 정부에 세금 한 푼 안 냈는데 매달 750불씩 생활비를 주지요, 또 얼마든지 병원을 무료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은혜일 뿐인 것입니다. 본래 정부로부터 연금을 탈 자격을 얻으려면 최소한 10년을 미국에서 일을 하고 세금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법으로는 미국에서 9년 11개월 만 일한 사람이라면 연금을 받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법대로 한다면 전연 자격이 없는데 이렇게 특혜를 베풀어주고 있으니 이것을 두고 법을 떠나 순전히 은혜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심판 날에 적용할 법에 대해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심판할 것이며 불신자들 즉 이방인들에게는 각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법에 의해 심판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율법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어김없이 다 행해야 하며, 불신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양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양심적으로 살았어야 합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어떤 유대인도 율법을 다 행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이방인도 하나님이 주신 그 양심대로 틀림없이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대로 한다면 하나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법을 떠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이 왜? 필요한지를 증거하기 위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행위로는 하나님의 합격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서는 행위로 구원받을 육체가 하나도 없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 복음을 받아드려 믿음으로 구원받고 또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실천하기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깨닫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율법으로 심판을 받는 유대인(12-13) [2]양심의 법으로 심판을 받는 이방인(14-15) [3]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16)입니다.
[1]맨 먼저 12절부터 13절까지의 율법으로 심판을 받는 유대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경찰로부터 티켓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어떤 경우에 티켓을 받게 됩니까? 교통 법규를 어겼을 경우에 티켓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을 어기면 그에 따른 심판이 내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언약을 맺기를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잘 지키면 복을 내려주고 만일 이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내리는 것으로 언약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무엇을 계약할 때에는 싸인을 하게 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계약을 할 때에 모세는 율법을 읽어주고 유대 백성들은 그 법을 지키겠다고 입으로 서약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만일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을 다 잘 지키면 상관이 없겠지만 법을 하나라도 어길 경우에는 심판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을 어긴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법을 어겼지만 벌을 내리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기 마련이지만 심판자이신 하나님은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벌하고 하지 않고 그가 누구이든 법을 어겼으면 법에 의해서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절에서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는 다고 한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의 모든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킬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율법에는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있지만 또 무엇을 해야 한다는 법도 있는데 비록 해서는 안 된다는 법에는 합격을 했다 하더라도 무엇을 하라고 한 것을 다 행할 수 없는 경우에는 법을 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13절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오 율법을 행한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을 듣고 아는 것으로 합격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아는 것을 실천해야 비로소 합격이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또 율법을 가르치는 자의 경우에도 율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합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남에게 가르쳤다면 그 가르친 율법을 모두 몸소 실천해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에 정통한 율법 선생이 남을 아무리 열심히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 율법을 자기 생활에 적용하지 못할 경우에는 율법을 어긴 자가 되어 벌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 앞에 무죄라고 주장할 수 있는 자가 한 사람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4절부터 15절까지의 양심의 법으로 심판을 받는 이방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유대인은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이 있었기 때문에 율법아래 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에 메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즉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할 의무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어 있지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없으므로 그들은 심판을 받을 근거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한다고 하여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심판을 받는 다른 법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1장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선악을 알만한 마음을 주셨고 또 세상 만물을 보면 만물 안에 하나님을 느끼고 알만하도록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오늘의 본문 14절과 15절에서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양심이 바로 율법이 된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돌 판에 기록해 두었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 기록한 법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모르는 사람도 무엇이 선하고 악하며, 무엇을 해서는 안되고 무엇을 해야 인간의 도리인지를 자기의 양심이 알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남에게 해를 끼쳤다면 이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양심이 아는 일이어서 스스로 판단하여 마음속에서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심판을 내리는 재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남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우리의 양심의 법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심판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양심에 새겨진 율법이 있으므로 이 양심의 법을 범하면 그 양심의 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양심이란 때묻지 않은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양심은 다 더렵혀지고 무뎌져서 큰 죄를 짓고도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지 않는 양심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마지막으로 16절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 재판관은 눈에 보이는 증거에 의해 심판을 합니다. 그러므로 증거가 들어 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살인자라도 살인자로 심판을 받지 않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6절에서 하나님은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고 하는 것은 크고 적은 죄를 그 누구도 감추어 둘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죽을 때까지 죄를 잘 감추어 두어 세상의 심판은 받지 않을 수도 있어도 하나님 앞에 가서는 모든 비밀이 다 들어 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옷을 입어 몸을 가리우고 또 외모를 꾸며 마음을 가리고 살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사람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에는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하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나게 되므로 흠 투성이의 몸과 마음이 다 들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대에서는 은밀한 모든 것을 다 들추시고 심판하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돌 판에 새겨진 모세의 율법이나 양심에 새겨진 율법 앞에서 결백할 수 없다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훈은 이 세상에 존재한 모든 인간은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심판 날에 심판대 앞에 서서 은밀한 것까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자는 그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며 율법을 받지 않은 자들은 양심에 새겨진 양심의 법에 따라 심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세의 율법을 받은 자이든 양심의 법을 받은 자이든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으로 판정될 것이 뻔할 것이므로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대책으로 모세의 율법과 양심의 율법을 범한 모든 죄인들이 심판을 면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책을 내 놓으신 것입니다. 그가 모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는 대책이었습니다.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로 문지방에 발라 유대인들의 장자들이 죽음을 면한 것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밖아 피를 흘리게 하시어 그 피의 진리를 믿고 순종한 자마다 죄에서 구원받도록 대책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대책을 받은 우리들은 진리인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이해하며 이해한 말씀을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 다 서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도 알았지만 알고만 있는 자가 의인이 아니오 아는 것을 행한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얻게 됨을 확인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인지를 말씀을 통해 듣고 배우고 깨달아 알고 그 아는 것을 실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 7:21 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뜻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듣고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바로 이해한 말씀을 일상생활에서 하나하나 실행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분하기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대로 행한 자는 지혜로운 자요 반대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전해들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하는 존재들임을 알고 주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아 알아야 하겠으며 아는 것을 매일 매일의 삶에서 실천해 나가시어 심판대 앞에 설 준비가 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율법과 양심의 요구
유재명 목사
우리는 택한 백성이 아닌가!
우리에게는 절대로 지옥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어!
이런 그릇된 선민의식에 대해 사도바울은 분명히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관용과 사랑과 인내하심은 너희가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락이 아니라 회개케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율법이 있다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자만심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 거룩한 율법을 알고 그것을 믿는 것이 저들 유대인들만의 특권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지없어 바울은 정면으로 공격하니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신분과 학식의 차이나 그리고 인종의 차이, 지역 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특권을 가지라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살라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과 그리고 분명한 요구가 있습니다.
첫째: 율법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요구가 있습니다.
2: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절대 의식이 있습니다.
신6:6,7절에 오늘 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이든지 길에 행할 때이든지 누웠을 때이든지 일어날 때이든지 이 말씀을 강론 할 것이며 8,9절에 너는 도 그것을 네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했습니다. 과연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곧 생활이었습니다. 저들에게는 율법에 대해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큰 특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랍비 교훈에서도 율법을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의라 했습니다. 저들의 실수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고 율법을 듣고 배워 하는 지식 자체를 의로 인정하는 것을 당연시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착각을 알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자랑인 율법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율법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사도바울은 공격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2:13절에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위대한 원리하나를 발견합니다. 율법이든 말씀이든 듣는데 신앙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말씀을 아멘하고 순종할 때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듣는 것이 목적이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님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의 홍수 속에 살듯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 가슴속에 하나님의 말씀은 메말라 간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데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매력은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려주는 데 매력이 있다면 세상 강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앉아서 믿는 믿음이 아니라 경험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둘째: 율법 이전의 사람이나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요구가 있습니다.
14,15절을 보면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게는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게 되지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양심이 율법의 행위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율법이 없다 했습니다. 율법의 정의는 십계명입니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모세오경이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는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먼저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주어진 것입니다. 롬1:1-19절에 이는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이를 보이셨느니라 했습니다.
동물하고 다르게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가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을 죄라 여기지 않습니다. 본능으로 행할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양심의 소리에 자신을 속이지 못합니다. 율법을 몰랐을 때도 내안에 있는 양심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송사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법을 기록되지 않은 율법이라 했습니다. 양심을 마음에 새긴 율법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양심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기준에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더러워진 양심, 화인 맞은 양심들이 되었습니다. 원래 양심은 하나님을 보는 거울이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수단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변질 된 것입니다. 정욕으로 더러운 욕심으로 말입니다. 이는 마치 깨진 거울과 같습니다. 동물들이 행하듯 아무 생각 없이 정욕에 던져진 인생들의 모습을 보면 깨진 양심이 어느 정도인지 갸름할 수 있습니다.
본래 율법이란 기록된 율법이 아니고 마음에 새겨 주신 것이 진짜 율법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도 깨끗한 양심 이것이 본래의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하는데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 기록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니 보이는 기준을 주신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경이 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법을 만들고 지켜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시대에는 십계명이 없었습니다. 기록된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제사하였고 하나님을 구하는 자였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어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문제가 되었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법이 생기지 않았어도 야곱이 아버지를 속인 것과 라반이 야곱을 속인 것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기록된 율법이 없어도 원래는 아무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께 익숙한 자들이었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주신 원리에 따라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깨어진 것입니다.
율법은 원래가 축복입니다.
주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하셨습니다. 단순히 기록된 율법이 아닙니다. 원래의 마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셋째: 율법과 양심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결국이 있습니다.
12절에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 있을까요? 지킬 수 없습니다. 양심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은 있을 까요? 이미 깨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인간은 죄 아래 있습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다 하는 선포 앞에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심판에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에게는 율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율법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은 더러워진 양심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한가지의 심판의 기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내 복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복음을 영접한 사람에게는 이 심판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6절에 보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날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복음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무서운 율법과 양심의 심판에서 자유하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깨끗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양심이 깨어져 버렸을 때 하나님은 기록된 율법을 주셨습니다. 기록된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율법이 깨어진 마음들을 회복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친히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안에 담아봅니다. 내주하신 성령하나님을 우리 안에서 우리의 양심과 생각 그리고 모든 것이 지켜가고 계십니다.
이젠 양심과 율법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나를 향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원리가 됩니다. - 아멘 -
드러나느니라!
롬 2장 12~16절 / 김병삼목사(만나교회)
아덴(Athens, 아테네)은 헬라(그리스)국의 수도요, 서양문명의 모태지인 고도(古都)이다. 2,000여 년 전 사도 바울은 그리스 북부 지역인 마게도냐의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지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배를 타고 이곳 아덴으로 왔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이곳에 도시가 처음 세워졌을 때 아테나(Athena) 여신과 포세이돈(Poseidon) 사이에 이 도시에 대한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누가 이 도시에 더 유용한 선물을 가져오느냐로 승부를 결판 짓게 되었다. 지혜의 여신 아테네는 올리브기름을 내는 감람나무를 가져왔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바닷물처럼 짠물을 가져왔다. 승부는 쉽게 아테네 여신의 승리로 끝났고, 그래서 도시의 이름은 아테네가 되었다.
아테네는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탄생했던 학문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덴 거리에서는 사람 찾기보다 신을 찾기가 쉬웠다는 말처럼 아덴 광장에 서 있던 공중 우상만도 300개가 넘었으며 기타 신상을 모두 합하면 3만을 헤아리는 종교의 도시이기도 했다. 이런 도시를 바울은 두 번이나(2, 3차 전도여행 때) 들러 복음을 전했다. 특히 2차 전도여행 때에는 아레오바고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서 우상에 대하여 철학자인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등과 쟁론을 벌였다(행17:18).
그곳은 아크로 아덴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바로 왼쪽에 있다. 이곳에서 재판을 받은 최초의 사람은 할리트 호티우스를 죽인 제우스신의 아들인 아레스(Ares)였다. 그는 자기 딸을 겁탈한 사촌 형제를 살해한 일로 다른 신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결과, 아레스는 정당한 복수 살인이었기 때문에 무죄로 판정되었고, 그 후 아레스가 재판받은 곳을 아레스의 언덕, 곧 그리스어로 아레오바고(Areopagus)라 불리게 되었다. 이런 유래에서 아레오바고는 원래 살인죄를 범한 사람을 재판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테네 시의회 의원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따라서 아레오바고는 바위 언덕을 지칭하는 지명과 함께 아테네 시의회를 뜻하는 의미를 두게 되었다.
바울은 바로 그 아레오바고(Areopagus, 행17:22) 언덕에서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모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금이나 은, 돌로 만든 신상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도 외치자 청중들로부터 조롱과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아레오바고 관원이었던 디오누시오 같은 유명명사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행17:22~34). 지금도 그 언덕에 오르는 계단 오른쪽 바위에는 바울의 설교문이 조각되어 있다. 언덕을 내려와 다시 왼쪽 길로 내려가면 아덴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디오누시오(해17:34) 기념교회가 아고라 터 옆에 세워져 있다. 훗날 이곳에 교회가 크게 왕성하여 바울의 전도로 믿은 아레오바고 두 관원 디오누시오가 제1대 감독이 되었다.
사도 바울의 변증 : 아레오바고에서
사도행전 17장 22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여는 의미일지 모르죠. 이들이 얼마나 종교심이 많은지,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해서도 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종교심”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리”와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열심히 절에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교회에도 열심히 다닙니다.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자녀를 위해 기도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역시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종교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교성과 우리가 믿는 신앙은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을 가진 자나 율법을 가지지 않은 자나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종교성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율법을 가지고 있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고, 인간들이 지키려고 하는 그 어떤 것도 완전한 것이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주로 위안을 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하다!”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선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에 나오라는 말에 발끈하는 사람 중에는, “교회에, 교인들에게 상처를 입고 손해를 봤다!”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악한 인간의 본성 때문에, 사람을 의지하다 받은 상처들이지 하나님의 본성에 상처를 받거나, 하나님께 대하여 실망한 사람들이 아니죠. 오히려 하나님께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회의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기도는 다 들어주시면서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나요? 다른 사람들을 보면 만사가 형통하는 것 같은데 저는 왜 만사가 캄캄한가요? 하나님 저만 외로운 것 같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기도를 한 사람들이 있지요. 이사야 40장 27절에 “어찌하여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라고 하소연하는 이 소리 앞에는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길은 보시고, 다른 사람의 억울함은 풀어 주시면서'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죠. 하나님을 향한 불평은 오히려 하나님을 열심히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어떤 책을 읽다 보니까 흥미롭게 이 부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할 때, 하나님께서도 불평하신다는 것이죠.
이사야 40장 28절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여기에도 역시 생략된 문장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의 뜻에 귀를 기울이다. 최소한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한다.”
무슨 말인가요? 너는 왜 문제만 바라보고 불평하고 힘들어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문제를 비집고 사단이 들어옵니다. 결국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직면한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속삭입니다. “종교를 바꿔봐! 신을 바꿔보는 게 어때?”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종교성”입니다. 무언가를 의지해보고, 아니면 바꿔보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고, 선하게 살려는 목적이 무어냐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이런 종교성에 붙여진 신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편 20편 7절에서는,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사도행전 17장 24-25절입니다.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그런데 이런 사도 바울의 지적이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크리스천들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왜 아덴의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었나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어떻게 만족하게 해야 할지 모르기에 자신의 방법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족하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만족함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부족해서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가장 큰 만족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찬양을 받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오류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문제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동일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우리가 잘못 믿을 수 있는지를 아주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믿으며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오류, 둘째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은 율법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죠. 일종의 잘못된 자부심이었습니다.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13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
율법으로 죄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니 기독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을 자주 봅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이 말은 법적으로 보면 분명히 하자가 없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보면 뛰어난 사람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기준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도적질하지 않으면 도둑이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탐심을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증거가 없으면 죄가 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양심을 보십니다.
과연 여기에서 벗어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부분을 메시지 성경으로 번역해서 다시 보겠습니다.
“죄인 줄 모르고 죄를 짓는 경우라면, 하나님은 정상을 참작해 주십니다. 그러나 죄인 줄 잘 알면서도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듣기만 하고 그 명령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듣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곰곰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듣기만 하고” 라는 말 속에는 율법을 어려서부터 배워온 교인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다음, “명령을 행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면,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보편적인 도덕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렇습니다.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옳은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 양심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주어져 있으나, 그 양심에 따라 살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약한 인간에게 양심이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지 않기에, 율법을 가진 사람보다 더 위험할 수 있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씀과 율법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양심이 무뎌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고,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지만, 무신론적인 모습이 오늘 우리 신앙인 가운데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 가운데 하늘나라에 가보았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보니 천사가 큰 책을 그의 앞에 갖다 놓습니다.
“이것이 무슨 책이냐?”고 물어보니까 “그 책 가운데는 당신이 세상에 있을 때 행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첫 장을 들추니까 글자로 가득 쓰여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당신이 세상에 살 때 행동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다음 둘째 장을 들춰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는 첫 장보다 더 잔글씨로 가득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어보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당신이 세상에 살 때 말로 지은 죄들입니다.”라고 합니다. 말로 지은 죄는 행동으로 지은 죄보다 더 많은 모양입니다.
그 다음에 셋째 장을 들여다보니 둘째 장보다 더 잔글씨로 더 많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기록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천사의 대답이 “이것은 당신의 마음 가운데서 생각으로 지은 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는 더 큽니다.
그리고 한 장을 또 들추어보니 이것은 글자가 전혀 보이지 않고 새까맣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까 “이것은 당신의 마음입니다.”하고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무엇이라고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5장 19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마음이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성이 부패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성이 부패함으로 인간의 지성이 어두워졌습니다. 인간의 정서와 감정, 생활도 더러워졌습니다. 인간의 의지도 부패하고 약하여졌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가끔 목사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신비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분들을 봅니다. 그래서 교인들과 가급적, 목욕을 한다든지 함께 운동을 한다든지 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목회자의 ‘권위’를 위해 필요한 일일지 모르지만, 저는 가능하면 다 드러내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무언가를 감춘다든지, 나 아닌 다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너무 솔직합니다. 아니 너무 순진합니다. 꼭 그런 말까지 해야 합니까?”
그런데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도 기쁘고 두려움이 없어야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참 자의적입니다. 즉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경향입니다.
허태균 씨가 쓴 [가끔은 제정신]이라는 책에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했습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모든 왕은 왜 그렇게 잘 생겼나요? 하다못해 한의사도 멋지게 생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책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일 사극에서 위대한 왕이나 역사적 영웅으로 심형래, 만사마, 정준하처럼 생긴 배우들이 나온다면 그 드라마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을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멋진 왕들과 영웅들의 모습은 실제 그들의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우리의 바람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부 전해지는 ‘어진’에 그렇게 그려져 있다고? 그럼 당신이라면 왕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리겠는가?”
율법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나와 지키지 않는 내가 있고, 내가 드러내도 되는 나가 있고, 드러내서는 안 되는 내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편안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편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지적하는 신앙, 율법적인 신앙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모든 것이 드러난다.
율법의 이중성과 양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오늘 사도 바울 자신이 믿는 복음에 의하면, 16절을 보세요.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아도, 인간의 얄팍한 술수들이 얼마나 많이 드러납니까?
태국 방콕의 잠롱 시장이 청렴하다고 얼마나 자랑을 했고, 우리나라의 어떤 시장도 “태국의 잠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틀림없이 모든 사람의 행위가 다 드러나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가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들키지 않으면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때는, 인간의 기준에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뀔 때입니다.
얼마 전에 윤복희 권사님이 보내준 책을 읽었습니다. [저예요, 주님]이라는 자전적인 책이지요. 그 책을 읽고 제가 바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새벽에 저예요, 주님을 보았습니다. 권사님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서 제가 알던 믿음 좋은 사람, 늘 찬양하는 사람 윤복희 권사가 아니라, 그의 삶에 직접 간섭하셨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연예인들이 모이는 집회에 갔을 때, 설교 중 계속 큰 소리로 “아멘!”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시골 교회 권사님 같은.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인사하는데 바로 윤복희 권사님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때 그 권사님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어느 기자가 “이번 뮤지컬에 주역을 맡으셨다고요.”
권사님의 대답은 “내 뮤지컬의 주역은 늘 주님이었습니다.”
그녀는 노래할 때마다 “저예요 주님”이라고 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세대가 틀려서 그런지, 저는 윤복희 권사님이 70년대 그렇게 유명한 가수인 줄 몰랐습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을 하고, 유럽과 동남아시아를 누비며 잘 나가던 때가 있었고, 윤복희 귀국 공연이라는 것만으로도 연예계를 들썩이게 했던.
그런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남편과의 이혼 때문에 술로 세월을 보내고, 후두암 판정으로 가수 생활을 접어야 할 위기 가운데서, 그리고 공연장으로 가던 차가 전복되는 고속도로에서의 사고까지.
그런데 차가 뒤집히는 그 순간 그녀는 무섭지 않았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비로소 인생에 개입하심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차 사고를 당하고 젖은 몸으로 대구 공연장에 도착했을 때, 공연장은 천둥소리와 함께 정전이 되었고,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누군가 무대에 촛불을 켰다고 하죠. 책 내용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나는 그날 오프닝 곡으로 ‘깜깜한 이 거리 왜 여기 왔나, 반겨 줄 사람 없는데.’라는 노래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열여섯 살 때부터 부르던 내 레퍼토리입니다. 마침 정전으로 온통 깜깜해서 이 노래가 안성맞춤이었지만, 나는 왠지 그날 그 노래가 부르기 싫었습니다. 전기가 나간 탓에 밴드도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나는 이미 노래를 부를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노래할 힘이 생겼습니다. 무반주로 부르는 나의 라이브 무대는 어두운 극장 안에 메아리쳤습니다. 나는 내가 부르는 노래에 스스로 감동되었습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공연을 마치고 혼자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기차 차창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웠고 세상이 그리웠습니다. 나는 다시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혼자 훔쳤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세상이었습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내 인생의 모든 장면이 필름처럼 돌아갔습니다. 그때까지의 내 삶이 차례차례 내 마음과 영혼 속에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기뻐서 울었는데 무슨 눈물이 아직 남아 또 흐르는지."
그 후에 윤복희 권사님이 가장 즐겨 부르던 찬송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 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신학적인 견해가 아니기에 논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때, 어쩌면 우리의 더럽고 추한 것들이 드러나도록 하시는 때는, 마지막 심판을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전하고 싶은 것이 어떤 “심판”이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율법을 가졌든 양심을 가졌든 모든 것이 드러나는 때 인간은 “절망이다!”라고 선포하고 싶었을까요?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사람들에게 설교하며 결론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17장 31절입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믿는 자들에게 심판의 날을 주심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가졌던 율법과 양심의 법을 가지고는 결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기에 복음입니다.
남아프리카 미개 부족 중에 바벰바 족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광장 한복판에 데려다가 세웁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죄인을 중심으로 원을 그려 섭니다. 그리고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모두가 듣게 말해야 합니다.
과거에 어떤 좋은 일을 앞에 있는 죄인이 하였는지 말해야 합니다. 좋은 점만 말해야 합니다. 장점, 선행 그리고 좋은 점을 말합니다. 비난, 욕, 책망하는 말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 마디씩 하고 나서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아간 것이 많으면 모두가 용서하여 줍니다.
어쩌면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추적하시며 심판으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최후의 심판을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심판의 날이 옵니다. 아니 저에게도 말입니다. 감사한 것은 마지막 심판의 날을 준비하도록 예비 심판의 날들을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윤복희 권사님에게는 교통사고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보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무지한 아덴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서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예비 심판이 아니었겠습니까? 로마의 교인들을 향해 율법적 삶을 돌아보게 하심도 또 하나의 심판의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저와 함께 이 말씀을 나누는 것도 또 하나의 심판의 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 심판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의 책임을 물으시는 마지막 심판의 시간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영광스런 그날을 위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때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찬양을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
롬 2장 12~29절 / 유기성목사
롬 2:12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입니다. 15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16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17 그런데, 그대가 유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대는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19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며, 20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 아이의 교사로 확신한다고 합시다.
:21 그런 여러분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여러분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여러분이 도둑질하고 :22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여러분이 간음하며 우상을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여러분이 신전의 물건을 훔치고 :23 율법을 자랑하는 여러분이 율법을 어겨 하나님을 욕되게 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24 그것은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한다라고 기록된 말씀과 같습니다.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그 사람은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27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사람인 그대를 정죄할 것입니다. 28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오늘 설교하는 마음은, 몸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고 의사로부터 안 좋은 결과를 들을 때, 심정 같습니다. 마치 암입니다. 하는 진단을 받는 심정이었습니다. 저와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고통스런 일이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검진 받는다면 어떻겠습니까? 좋은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상태에 대한 진단 중 가장 안 좋은 결과는 ‘율법주의에 빠졌다’는 진단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심판받는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복음은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며 그 후 성령께서 임하셔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비슷해 보입니다만 차이가 큽니다. 율법주의는 계속 열심과 충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감사와 사랑을 강조합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 것 같습니까?
사도 바울은 롬 1-3장에서 복음을 떠나서는 누구나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충격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유대인들의 문제가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17에서 사도 바울이 “그대가 유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고 합시다” 이란 표현을 썼는데. 상당히 선동적인 표현입니다. “당신이 그 대단한 유대인이라구요. 그러면 한번 따져 봅시다” 그런 의미입니다. ‘유대인’ 대신 ‘그리스도인’을 넣어 읽어 보면 이 구절이 좀 더 실감나게 느껴질 것입니다. “당신이 그 잘난 그리스도인이라구요?” “당신이 그 유명한(?) 선한목자교회 교인이라구요?” 하는 약간 빈정거리는 말입니다.
:17-20에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율법을 받았다는 사실을 큰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을 열거하면서 :21부터 사도 바울은 도전적으로 질문합니다.
:21 그런 여러분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여러분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그러면서 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면서 당신들도 도둑질하고 간음하며 신전의 물건을 훔치고 율법을 어겨 하나님을 욕되게 하다니 말이나 됩니까?” 한마디로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새긴 우상에 절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상 안에 숨어 있는 권력욕, 소유욕, 명예욕, 쾌락과 지배욕이 마음에 가득합니다. 마음으로는 우상숭배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율법주의 신앙인데,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왔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종교가 율법주의입니다.
“종교, 아, 종교가 문제야” 라는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율법주의 종교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타락하면 율법적인 종교가 되어 버립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대표적인 예 가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개로 여겼던 무할례자가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그 사람은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충격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자가 하나님의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 해도 화가 날 정도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 받은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며 자랑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뭐 대단하다고?”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받은 것을 그처럼 중요하게 여깁니다. “너, 세례 받았어? 나 세례 받았어. 난 세례 신자라구”
세례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결코 뒤로 미룰 일이 아니고 받을 수 있을 때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는 자랑하고 남을 판단하라고 받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나 세례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감사할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고 남을 판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4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세례받지는 않았지만 세례받은 사람 보다 감사와 사랑으로 더 성숙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람이 타락한 이후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고 고집하니,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좌절이 커지고 두려움이 더 많아지고 위선적이게 되고 얼굴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안식년 중 이스라엘에 가서 40일을 지내는 동안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기로 소문난 종교인들이 사는 지역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받은 느낌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는 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질서하고 지저분하고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이렇게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 하시던 남병희 목사님의 말씀에 어느 교회를 찾아가서 교회 중직들과 인사를 나눌 때, 엄숙하고 권위 있는 교인들이 많이 보이면 '이 교회도 골치께나 아프겠구나'하고 생각한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기쁠 때나 사랑할 때는 엄숙한 표정을 짓지 않거든요.
율법주의와 정반대인 십자가 복음은 우리를 감사와 사랑으로 살게 합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에 들어오심으로 마음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29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할례 받은 마음이란 성령님이 임하여서 부드러워진 마음입니다. 늘 성령님을 의식하니 기쁨과 감사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 할지라:
그러므로 자신이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는지 아닌지 진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마음에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느끼는가, 마음이 부드러워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간증입니다
“15년 전...제 안에 주님 이 들어오셔서 변화되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윤선아,, 주님이 분명 살아계시는구나!! 너. 같.은. 사.람.이. 변화가 되다니,,," ^^;; 부끄럽지만,, 아.멘.입니다!!
할례란 남자 성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한 사람,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으로 마음에 임하십니다. 그것이 마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골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정말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열심 으로 신앙생활을 진단하면 안 됩니다. 유대인은 할례뿐 아니라 월삭, 각종 절기, 대회, 성회 등 온갖 종교 의식을 동원했고 의식은 점점 더 화려하고 장엄해졌습니다. 이유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을 화려한 외적 의식으로 포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이들이 겉만 포장합니다. 교단을 자랑하고 정통 신앙을 자랑하고 은사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기적이 많이 일어난다고 자랑하고 담임목사를 자랑하고 예배당이 크고 웅장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정말 자랑해야 할 것, 진정 중요한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하나님이 좋은 분인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예외 없이 혐오스럽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이 더욱 싫어지게 됩니다.
:24 그것은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한다라고 기록된 말씀과 같습니다.
이 말씀대로 전 세계 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들이 율법주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들도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한국갤럽이 2014년 4월 17일부터 5월 2일까지 한국인의 종교 실태 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했는데, 결과 가장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는 종교가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호감을 갖는 종교는 불교 25%, 천주교18%, 기독교 10% 순으로 나타나 기독교가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10명중 1명만 기독교에 호감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한국교회가 전형적인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을 보는 주위 사람들의 평가는 어떻습니까?
본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행 2-4장에 보면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 중에 책 한권을 인용하겠다고 영성일기 컬럼과 페이스북에 미리 알렸습니다. 박혜란목사님이 쓴 [목사의 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게 참으로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 책은 한국 교회가 자랑하는 신학자 중 한 분에 대한 책입니다. 그 분의 제자는 참으로 많습니다. 지금 훌륭하게 목회하는 분과 신학교 교수님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저 보다 여러 면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뛰어난 주의 종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설교에서 그 분의 실명을 거론하지는 않으려 합니다.
마음이 아픈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존경받았던 목사님이지만 딸이 본 아버지 목사님은 충격적이게도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율법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매정했고 자녀들에게도 전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보여 주지 않고, 오직 연구하고 책을 쓰는 일과 교회의 일을 하는 일에만 매어 달렸던 분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영향 때문에 박혜란목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늘 하나님께 범죄를 저지를까 봐 부들부들 떨었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에게서도 장점을 먼저 보기보다 단점과 죄를 먼저 보는 데 예리한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박혜란목사님이 나이가 들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녀들과 진정으로 화해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버지가 잘못 이해한 것과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에 대하여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통하여 솔직히 이야기했을 때, 딸을 찾아와 한 말은 성경구절을 보여주면서 회개하라는 한마디였다고 했습니다.
출 21:17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 부분을 읽고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분 나름대로 딸을 사랑했고 딸을 위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했다 너희들을 사랑한다’ 그 한마디만 할 수 없을까 너무나 아쉽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내가 잘못 했습니다” 하는 고백을 잘 못합니다. 고백을 해도 꼭 토를 답니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이렇게 함으로 더 상처를 줍니다.
분명히 이 책은 논란거리가 될 만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딸이 아버지에 대하여 그런 책을 쓸 수 있느냐?’ 할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픈 가족사를 들추어내면서까지 75세된 박혜란목사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율법주의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깊이 알고 하나님과 긴밀하게 동행하도록 해주는 복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중에 이 목사님과 비슷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많았던 것이 현실입니다. 그 자녀들은 박혜란목사님이 겪었던 고통을 겪었습니다.
제가 두 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직 한국교회가 명확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한국교회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여전히 율법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마음에 임재하신 증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사랑으로 소문났나?’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옳고 그른 것을 바라 잡아야 하니 사랑으로 소문날 수가 없었다!’ 핑계대면 안됩니다. 사랑으로 소문나면서도 얼마든지 옳고 그른 것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 증거입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심판과 정죄만이 죄를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만이 죄를 그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님께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존 비비어 목사의 [임재]에 보면 사모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혼 초에 남편 존 비비어 목사님 때문에 너무나 힘들었답니다. 목사님이 실수를 너무 자주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목사님이 사과는 했지만 사모님의 마음은 닫혀버리고 말았답니다.‘당신이 정말 변화되면, 그때 사과하세요. 그러면 당신을 믿겠어요I" 그 후에 남편이 실수를 할 때마다 사모님은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당신이 미안한 건 당연하지! 또 일을 저질렀잖아요! 이젠 사과하는 모습도 꼴 보기 싫어요"
어느 날 하나님께도 분노가 치밀어 남편 좀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남편을 엄히 다루시거나 꿈이나 환상을 통해 그에게 깨달음을 주시리라 기대했는데, 전혀 의외의 대답을 하셨답니다.‘네가 남편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남편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사모님은 항변하였답니다. “왜 항상 내가 먼저 변화되어야 하는 건가요? 매번 억울한 사람은 저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였답니다. “존에게 가서 그가 변화될 걸 네가 믿는다고 말하고, 그동안의 잘못을 모두 용서한다고도 말하라" 사모님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남편을 용서하고 놓아줄 것인 가? 아니면 그의 잘못을 꽉 붙잡고 있을 것인가? 하나님은 너무나 분명하였기에 결국 남편을 찾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나누었고 그 동안 그를 용서하지 않았던 것을 사과했습니다. 이렇게 사모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 즉시 하나님의 능력이 터져 나와 불편했던 상황이 해결되고, 목사님과 사모님 안에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번 두바이 여행 중에 아부다비에도 들러 [아부다비 한인교회 예배당]을 건축하는 강희진목사님의 안내로 건축현장도 보았습니다.
아부다비에 들어서니 사막의 도시인데도 도로 변에 나무가 많았는데, 국왕이 나무 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강희진목사님이 한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나무는 꼭 버드나무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니 가지마다 잎이 무성하여 버드나무처럼 늘어져 내려온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나무를 만져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줄기마다 가시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보기만 버드나무 같지 사실은 가시 많은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곳이 사막 기후라 잎이 무성한 나무라도 가시가 많은 모양입니다.”
나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여도 말과 행동에 가시가 돋혀 있습니다.
그 가시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압니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이 압니다.
우리에게서 가시를 제거해 주시려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가시 없는 사람이 됩니다. 감사와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 은혜의 삶을 사기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감사하고, 사랑만 합시다”
그러나 감사와 사랑도 노력으로 하려는 함정에 빠지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거나 “이것이 사랑이냐?” 하며 비난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주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왕이신 주 예수님이 마음에 계심을 명심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감사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번 명절에 성령님을 오직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감사만 하며 사랑만 하며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족 친척들이 “예수 믿는 것이 좋구나.”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좋은 분이구나” 하는 말을 듣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받은 자의 새 삶입니다.
인간의 죄
롬 2장 12~16절 / 황광민목사
들어가는 이야기
익살맞고 장난기 있는 아더 코난 도일경이 친구들을 놀려먹은 이야기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는 사회에서 명성 있는 12명에게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모든 것이 드러났다. 곧 비행기를 타라"였습니다. 그런데 24시간 안에 명성도 있고 지위가 있는 유명인사 12명 모두가 출국했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의인으로 분류하고 싶어합니다. 헨리 발레이 목사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죄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정직한 사람과 부정직한 사람 사이에, 건전한 사람과 무절제한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까?"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혀 비교할 수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평가는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판단기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대전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는 사람들은 율법에 의해 죄가 판명되고 율법이 없는 자는 양심의 법에 의해 죄가 판명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법에 저촉이 안됐더라도,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것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까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봉독한 본문을 중심 해서 <인간의 죄>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에 의한 죄
죄를 가리키는 가장 명확하고 일반적인 기준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법만 가지고는 죄를 이해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이 바울의 입장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물론 율법의 유익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하였습니다. 이것은 율법만 가지고 죄를 이해하려는 유대인들의 입장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구원받을 가능성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치 율법이 있으므로 구원받고 율법 없는 백성들은 구원받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인 율법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이 한마디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 율법만 가지고 있으면 다 된 줄로 생각하는 유대인의 생각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으로 죄를 이해하려는 생각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법만 지키면 의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저 사람은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여기서의 죄인은 법적으로 결과가 드러나야 죄인이 됩니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인이 아닙니다. 남의 물건을 들고 가기 전에는 도둑이 아닙니다. 또 심지어는 살인했다고 생각이 들어도 증거를 잡지 못하면 무죄가 됩니다.
이처럼 법은 결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드러난 것을 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범죄의 의도가 아무리 있었다 하더라도 행위로 옮기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한 것만 가지고는 어떤 법도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해한 것" 또는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것과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에 빠져 결과주의로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공격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주의로는 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또 법은 증거주의를 따르고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증거를 없애면 죄를 성립시킬 수 없습니다. 완전 범죄란 없다고 하지만 증거를 없애서 죄를 피해보려고 합니다. 사회의 법이 증거에 의해서만 벌을 주기 때문에 증거를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겠습니까? 여기서 법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했으나 예수님과 바울의 눈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의 법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 양심이 율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양심에 의한 죄
율법보다 더 고상한 법은 양심입니다. 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양심의 법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판단합니다. 14-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동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율법도 소중한 것이고 유익한 것이지만 한계가 있는데 양심이 그 한계를 극복하게 합니다.
데오도로 파커는 네 살 때 농장에 놀러갔다가 거북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돌멩이를 집어들고 거북이의 껍질을 깨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그러면 안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돌멩이를 던져 버리고 울면서 엄마에게 달려가 물었습니다.
"엄마! 내가 돌멩이로 거북이의 껍질을 깨려고 하는데 '그러면 안돼'라고 하던데 누가 그렇게 말한 거야?" 참으로 대단한 질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양심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아무튼 네가 그 음성을 들으면 더욱 분명히 들릴 것이고 너를 옳은 길로 인도할 꺼야. 만약 네가 그 음성을 듣지 않으면 그 소리는 점점 작아져서 결국 너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꺼야. 네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이 양심의 소리를 잘 듣느냐 안 듣느냐에 달려 있다."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옳은 길을 찾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 양심은 구속력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법에 저촉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양심은 구속력이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도 있기는 합니다. 이 양심의 가책이 일종이 벌입니다. 양심을 어기면 심령에 자책이 오므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눈 딱 감으면 그만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므로 혼자 괴로워하다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양심의 법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한 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깨끗한 양심, 선한 양심, 착한 양심을 버리고 화인 맞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마비되면 법보다도 효력이 없습니다. 또 양심이 자기 판단의 위력에 굴복하고 맙니다. 자기 생각에 옳은 것은 옳다하고 자기 생각과 다르면 틀렸다고 판단합니다. 객관성을 상실하고 자기 주관에 끌려 다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양심을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양심이 정상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한 판사 부인이 남편을 공개적으로 고발했습니다. 판사인 남편이 불법으로 운영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입니다. 불법을 없애기 위하여 벌을 주는 판사가 불법적으로 운영하는 술집에서 술을 마신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양심의 고백입니다. 법적으로는 묵인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판사가 술을 마셨으니 누가 불법을 따지겠습니까? 법적으로는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남편 판사도 옳다고 수긍하고 사표를 썼고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법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화인 맞은 양심, 마비된 양심으로는 진리를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착한 양심, 선한 양심,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크게 들으십시오. 양심이 외칠 때 귀를 막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율법과 양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율법과 양심의 한계를 말씀드렸습니다. 율법도 귀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양심도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율법도 양심도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에 의한 죄는 걸려야 죄가 됩니다. 양심에 의한 죄는 눈감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이 한계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도 드러납니다. 율법이 정죄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납니다. 눈감고 넘어갔던 양심의 자책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각까지 헤아리십니다. 하나님은 동기도 보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십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눈보다도 하나님의 눈을 더 의식해야 합니다. 16절을 참조하십시오. 하나님은 은밀한 죄까지 심판하십니다.
중국 후한 때에 동래에서 태수를 지낸 양진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대쪽같고 마음이 맑았으므로 후세에 모범적인 관리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양진이 동래 태수로 부임할 때의 일입니다. 태수 일행이 동래로 가는 중에 창읍이라는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마침 창읍의 현령은 양진이 천거하여 현령이 된 양밀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양밀 현령은 양진 태수일행이 창읍에서 묵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었습니다.
밤이 깊어 양밀이 돌아가려고 일어나다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돈꾸러미를 내밀었습니다. 지난 번 천거해 준 것도 감사할 겸 앞으로도 잘 봐 달라는 인사치레였습니다. 그러나 양진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태수는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나 양밀도 "많은 금액이 아닙니다. 그저 노자에 보태 쓰라고 준비한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사양치 말고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거 왜 이러시오? 내가 당신을 조정에 천거한 것은 당연히 당신이 나라에 필요한 인물이어서 천거한 것인데 내게 돈을 주어 관직이나 팔아먹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겠소?" 그 말에 머쓱해진 양밀은 잠시 주춤했으나 다시 받으라고 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받으신다고 해서 태수께서 나라의 관직을 파셨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수께 돈을 드린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때 양진이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다니? 내가 알고 당신이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소. 나를 진실로 위한다면 그냥 돌아가 주시오." 결국 양밀은 양진의 곧은 뜻에 감동을 받고 크게 절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양진이 말한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는 깊이 생각할 것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양사람들은 체면윤리에 젖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는 문화입니다. 이것을 영어에서는 Shame Culture 라고 합니다. 특히 동양의 유교사상에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히 신적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군자 사상이 그렇고 삼강오륜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체면 윤리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인 기독교 사상과 너무나 다릅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아십니다. 우리의 행동의 동기를 헤아리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교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낍니다. 최선을 다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부족한 것 밖에 없습니다. 늘 죄스럽게 생각됩니다. 이것이 죄의식 문화 guilt culture 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죄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법에 걸리지 않았다고, 법에 걸릴 것이 없다고 의롭게 생각하는 한 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양심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양심은 구속력이 없어 눈만 감으면 그만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마비된 화인 맞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나 양심만 가지고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분명히 깨달으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죄까지도 드러나게 됩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알아야 인간 실존을 바로 이해하게 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깨달아야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