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과 스웨덴 사이에 벌어진 갈등의 기원은 한 때 연방과 스웨덴의 왕좌를 겸임했으나, 내전(1597 ~ 1599년)을 통해 스웨덴 왕위를 박탈당했던 지그문트 3세 (Zygmunt III Vasa) 축출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방의 몇몇 부대가 이 전쟁에 참전했으나 대부분 이것을 스웨덴내의 내전으로 생각했을 뿐, 폴란드 VS 스웨덴 전쟁의 일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초반에 궁지에 몰린 후 지그문트는 1598년의 스탄게보로 전투에서 패하고 이어서 1599년에도 패하고 말았다. 지그문트는 삼촌인 카를 공작에게 폐위당한 후 연방으로 물러가야만 했다. 또한 이 사건은 폴란드와 스웨덴을 통합했던 단명한 개인적 연합의 종말을 가져왔다.
그러나 지그문트는 스웨덴 왕위를 다시 차지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비록 대부분의 폴란드 연방 귀족들이 그러한 길고도 유혈어린 전쟁에 참가할 의지가 적었으나 이 당시부터 그의 정책 대부분은 스웨덴을 정복하려는 계획과 연관된 것이었다. 지그문트는 그가 폴란드 왕위에 오른 1599년부터 스웨덴이 지배하는 에스토니아 지역을 연방의 일부로 만들겠다는 내용이 적힌 문서화된 서약문에 서명을 했다.
폴란드 귀족들은 오직 에스토니아 지역만 탈환하면 된다는 생각과 새로운 영토에서 수확할 수 있는 많은 곡식과 발틱 해의 에스토니아 항구들을 거쳐서 수출할 곡식량의 증가를 기대하면서 이 개인적인 전쟁을 지원하기로 했다. 게다가 귀족들은 스웨덴의 군사력은 대단치 않으며, 이 전쟁을 오래 끌거나 어려워질 거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거의 100년 가까이 불패의 전적을 가진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어떠한 공격도 쉽게 막아낼 것이라고 적수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폴란드 연방은 거의 1,000만에 가까운 인구를 보유했으며 100만 정도의 스웨덴 인구에 비하면 거의 10배의 우위를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 폴란드 귀족들은 당시 유럽에서 폴란드 연방은 인구 비율에 대비해 가장 적은 숫자의 병력을 보유했다는 사실을 망각했고, 스웨덴 군대가 매우 잘 훈련됐으며, 사기도 충천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두 명의 서유럽 병사(스웨덴 용기병으로 보인다)와 사로잡힌 코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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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쥐시토프 미콜라인 라지비우 (Krzysztof Mikołaj Radziwiłł)
스웨덴은 중앙집권화 된 정부와 자유민 농부의 징병 제도 때문에 폴란드 연방 보다 커다란 규모의 군대를 신속하게 소집할 수 있었다. 서쪽에서는 몰다비아 왕위 전쟁에 군대를 보내야만 했으므로 폴란드 연방은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야만 했다. 스웨덴은 병력 수에서 재빨리 3:1 의 수적 우위를 차지했다. 전쟁 초반기인 1600년에 크쥐시토프 미콜라인 라지비우 (Krzysztof Mikołaj Radziwiłł )가 지휘하는 폴란드 군대는 개방된 평야에서 스웨덴 군대를 여러 번 격퇴했지만, 스웨덴 군대는 에스토니아 뿐만이 아니라 폴란드 연방의 영토인 에스토니아 남부, 즉 리보니아 대부분을 통제하에 넣었다. 폴란드 의회는 군대를 위한 자금이 증가하는 것에 놀라 남쪽 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병력(전쟁 대부분이 폴란드 연방 국경선 밖에서 벌어졌으므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을 소환해 위협받고 있는 북쪽으로 보냈다.
첫댓글 최고의 멋쟁이 훗사르 기병이 졌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