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도 익혀야 할 활쏘기 [삼국지] 〈부여(夫餘)〉에는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활, 화살, 칼, 창의 무기를 보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부여에서는 전쟁을 하게 되면 제가(諸加- 부여의 관직명인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豬加)·구가(狗加)의 구성원)들이 몸소 전투에 참여하고, 하호(下戶- 일반백성)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날라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 시대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자는 특권층이었다. 부족의 지도자인 제가와 상층부 백성인 호민(豪民) 정도만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하층민인 하호는 식량 공급만을 했다는 사실을 미루어보았을 때, 하호들에게는 활쏘기 등을 가르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도 초기에는 1만 여명의 좌식자(坐食者)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호들이 공급해주는 식량을 먹으면서 노는 상층민으로, 평상시에 농사를 짓지 않는 대신 활쏘기 등을 익혀 전쟁에 참여하는 전문 전투 집단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 제가나 호민, 좌식자에서 배출되는 군사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전쟁의 규모가 커지게 되자, 일반 백성들도 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고구려의 경당(扃堂), 신라의 화랑도(花郎徒)와 같은 청소년 교육기관이 등장했다. 고구려 경당에서는 활쏘기와 말 타기를 주로 가르쳤고, 글공부도 가르쳤다. 경당 교육은 귀족에서부터 미천한 신분의 자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받을 수 있었으며,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이처럼 전쟁이 빈번했던 삼국시대의 남자들은 활쏘기를 어려서부터 익혀야만 했다.
인재 선발은 활쏘기로
788년 신라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은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처음 정하여 학문에 익숙한 자들을 관리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전일엔 궁술(弓術)로서 인물을 선발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개혁하였다.”라고 하였다.
활쏘기를 통해 인재 선발을 하였음은 고구려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는 매년 봄, 가을로 사냥대회를 열었다. 3월 3일 낙랑 언덕에서 열리는 사냥대회에는 귀족의 자제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참여할 수 있었다. 평원왕(平原王, 재위:559~590) 시기에 왕이 직접 참여한 사냥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었다. 평강공주(平岡公主)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온달(溫達)이었다. 온달은 이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장군으로 선발되었다.
활쏘기가 인재 선발의 기준이 되었던 것은, 활쏘기를 잘하려면 올바른 자세, 맑은 정신, 뛰어난 체력,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순발력과 판단력 등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에는 활쏘기를 잘하면 장군으로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은 주몽(朱蒙)을 닮고자 열심히 활시위를 당기며 연습에 매진하였다. |
첫댓글 일태칸의 자손으로써 활한면 당겨보고 싶군요.
한국인이 중국인 후손이라는데 10명이 넘는 서울대 한국사 교수중에 반박하는 놈 하나없으니깨지방국 교수가 아니면 뭐란말인지...ㅉ...ㅉ... 활도 개가 만들고, 비파형 최초의 검도 개가 만들었다고 할껀데...아무 준비도 없이 깨글만 암송하지 ㅉ..ㅉ..
이래서 역사공부 안한 정치인은 낙선시켜야 하는데, 예비위원이나 국민들이나 레벨이 같으니 원..
고려를 명에 팔아먹고, 500년동안 쇄국정치에 잘 해처먹다가 또 일본에게 팔아먹은 후손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강단중에 강단교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이 국민과 리더그룹을 완전 낫놓고 기억자도 모르게 반병신 만들어 놓았으니 우리가 어찌 5천년의 역사를 기억하겠습니까!
지금도 활 제일 잘쏘는 민족이잖아요. 피속에 숨겨진 유전은 절대 못속입니다
그렇습니다. DNA 는 흐르고 있죠